#131화. 아포칼립스의 고인물 3
#131화.
거북이 등껍질처럼 쩍쩍 갈라진 손톱.
뼈대의 모양과 관절, 살색의 주름 하나까지.
분명 그 생김새는 부패한 인간의 손가락이나, 크기가 수십 미터가 족히 되는 괴이한 모습.
콰아아아—
총 여덟 개의 손가락이 허공을 유유히 가로질러 온다.
마치 비행선의 편대 비행처럼, 하나의 대형을 이루어 육중하게 상공을 가르는 손가락 군집의 존재감은 실로 압도적이었다.
조금 전, 고강한 경지를 지닌 9레벨의 마법사가 격렬한 전투 끝에 자폭하며 네 개의 손가락과 동귀어진했다.
그런데도 저 거대한 손가락은 아직 여덟 개나 남아있는 것이다.
발에 채이는 시체들과는 차원이 다른, 상식을 벗어나는 규모의 요기가 로키의 대기를 장악하며 뻗어온다.
아직은 형체만이 어렴풋이 보일 뿐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음에도, 드넓은 손가락들의 그림자는 서서히 지상을 집어삼키고 있다.
“저것들이 모두 하나의 개체인가?”
그림자가 지는 하늘을 지긋이 바라보던 일레힌 포이체카의 혼잣말에, 갑자기 뒤에 있던 아힘사가 입을 열었다.
“네임드 ‘파루무치’ 의 손가락으로 보입니다.”
느닷없는 대답에 일레힌 포이체카의 고개가 돌아갔다.
“파루무치?”
“약 9년 전, 장벽 바깥의 세상을 방랑할 때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파루무치는 장벽보다도 높고 산처럼 거대하며, 12개의 굵은 나무기둥 같은 손가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 부패한 손가락의 생김새와 규모가 일치합니다.”
“파루무치, 연방이 공인한 9레벨 이상의 네임드로군.”
“맞습니다.”
“확실히, 저런 황당한 크기의 신체 말단은 흔치 않지. 그런데 어째서 파루무치의 손가락들만 잘려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도 알고있나?”
그 물음에 아힘사가 그건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
“아쉽군.”
이윽고, 일레힌 포이체카는 로브를 뒤져 에센스 병을 꺼냈다.
하필 장벽이 무너지기 직전에 마력을 원격으로 레반에게 건네준 탓에 만전의 상태가 아니었다.
그는 최상급의 진득한 에센스를 목구멍 안으로 거세게 밀어넣으며 앞으로 벌어질 전투를 준비했다.
그리고.
“······뭐야 저거. 대왕 소세지랑 비슷하게 생겼네.”
샷건을 연신 슬라이드하며 시체들의 진군을 갈아버리던 슬레모킨은 멀리 보이는 손가락 군집의 존재감에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
대검으로 시체들의 행렬을 종횡무진 휘젓던 루베르겐 집행관도 전투를 멈추고는 그 손가락들을 우묵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콰아앙!
마탑의 정예, 팔찌 네 개의 8레벨 마법사 둘이 전방에서 개미 떼처럼 몰려드는 시체들을 죽여 살덩이의 성벽을 쌓는 사이, 루베르겐 집행관은 자신의 두 팔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전신에서는 마탑주의 청록색 마력이 밝게 빛나고 있다. 로키 외곽 구역의 조명과 불빛들은 꺼진지 오래. 마력이 환히도 빛나니 멀리서도 눈에 띌 테고, 저 정체불명의 괴물이 노리는 목표도 마탑일 듯했다.
툭!
루베르겐은 집행관은 불현듯 전투 내내 물고있던 궐련, 마나 중화제를 멀리 던져버렸다.
“······어? 씨벌 저게 다 뭐여.”
그리고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손가락들이 시시각각 가까워지자 당황한 것은, 마탑의 마법사들과 함께 고립되었던 밴스 역시도 마찬가지.
웩!
거대한 손가락들을 눈으로 보자마자, 밴스는 왜인지 다급히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뱃속부터 괴상한 구토감이 몰려와 바닥을 붙잡고 엎어져서는 속을 게워냈다.
우웨엑!
밴스의 뱃속에서 아직 소화되지 못한 시체의 잔해들이 쏟아진다. 근처에서 그 꼴을 다 보고있던 아힘사는 심히 더러운 광경에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 그에엑!
그러면서도, 빌딩으로 기어 올라오던 시체의 목을 초진동 테크블레이드로 썰어버린 아힘사의 안광이 손가락의 군집을 응시했다.
리얼스킨 밑에 자리한 여러 파츠들이 철걱댄다.
구토를 하던 밴스는 입을 슥 닦으며 힘겹게 물었다.
“뭐, 뭐하게. 설마 나한테 쏘는거냐? 아 이제부터 토 안하면 되잖아.”
“······.”
밴스를 한심하게 바라본 아힘사는 몸을 돌렸다.
상공을 유영하는 거대한 손가락들은, 이제 누구라도 쉽게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진 상태.
지금 하려는 행동은, 오로지 아힘사의 자의였다.
드워프 다르간트가 생의 지독한 미련을 갈아넣어 마개조를 거친 전쟁병기. 아힘사는 어떤 마법사보다도 전쟁 경험이 풍부했다. 그렇기에 지금, 자신이 무슨 판단을 내려야 할지 정확히 이해한 뒤 실행하고 있었다.
걸어 다니는 전쟁터의 화약고. 학살병기 앙굴리마라.
지잉···
아힘사의 안광이 쏘아낸 홍색의 레이저 포인트가 공간을 가로질렀다. 가장 선두에서 빙글빙글 돌며 비행하던 손가락의 끝에 붉은 점이 나타났다. 주위를 둘러보자 마법사중 누구도 아힘사를 말리지 않았다.
이윽고.
아힘사의 리얼 스킨이 분리된다. 동시에 프레임이 각 파츠의 결을 따라 활짝 열리며, 그 안쪽을 가득히 채우고 있던 포신들이 지체없이 불을 뿜었다.
수십 종의 유탄과 추진체들의 살기짙은 향연.
목표물은 선두에 있는 손가락이었고······
꽈과과광—!!!
적의 접근을 불허하는 막대한 화력.
출사된 아힘사의 포격은 성공적으로 손가락에 적중해 자욱한 포연을 빚어냈다. 뒤이어 포연을 뚫고 부채꼴로 방사된 집속 탄환들이 한순간에 폭발하며 장장 백 미터에 이르는 하얀 연막 지대를 만들어냈다.
하얀 연막 지대에 있는 모든것에 불똥이 붙어 타올랐고, 작은 해가 천공에 생겨났다고 여길 정도로 세상이 환히 밝아졌다. 저 불똥은 한번 옮겨 붙으면 더 태울것이 없을 때까지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야말로 일정 지역을 통째로 구워버린 폭발. 수억 개의 작은 알갱이가 터지는 듯 타닥-타닥대는 소리가 로키 시티를 울렸다.
그러나.
“······.”
자욱하게 퍼진 연막을 뚫고 손가락의 군집이 다시 나타났다. 선두의 손가락은 꺼지지 않는 화염에 타오르며 근육과 힘줄등 속이 다 드러났는데도, 보란듯이 유유히 허공을 유영했다. 이제 손가락들이 이곳에 당도하기까지 삼백 미터 정도의 거리조차 남지 않았다.
그때.
구우우우웅······.
“?!”
슬레모킨은 육신이 하늘로 딸려 올라가는 것만 느낌에 주변의 기둥을 붙잡았다. 아니,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도 딸려 올라가고 있었다.
전투의 여파로 폐허가 된 외곽 도심 부근.
시체들의 피와 분비물들로 생겨난 강과 웅덩이가 공중으로 천천히 떠오른다. 한 점의 바람도 불지 않는데 둥둥 떠오른 그것들은 순식간에 불타는 손가락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촤르르륵!
상공에 떠있는 손가락에 자석처럼 빨려가 스며든 그 혈액들은, 아힘사의 집중 포격이 낸 상처를 단숨에 무위로 돌려버렸다. 거의 뼈까지 드러났던 상처에 살이 차오르고 피부가 재생된다.
그러자.
“흐음.”
아힘사의 공격부터 지금까지의 장면을 눈여겨본 일레힌 포이체카가 작은 지팡이를 꺼내며 읊조렸다.
“자가 재생을 못 하는 것을 보면 그냥 조종체일 수도 있겠군.”
말을 끝낸 일레힌 포이체카가 손과 지팡이를 가볍게 마주 붙였다 떼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가는 실 수천 가닥이 느릿하게 늘어났다.
그는 수천 가닥의 실을 조작하며 팔을 넓게 벌렸다. 근방의 마나를 일레힌 포이체카의 회로가 집어삼켰고, 청록빛의 마력이 실에 서서히 녹아들어 무엇보다도 날카롭고 질긴 수천 가닥의 마력사로 변했다.
스아아악!
곧 그의 두 손에서 탄력있게 뽑혀나온 청록빛 마력사 가닥들은, 눈 깜빡할 사이 손가락 군집의 지척에 당도하여 드넓은 허공을 통째로 칭칭 감기 시작했다.
거미가 줄에 걸린 사냥감을 실로 둘둘 감아버리듯.
그렇게 희미한 수천 가닥의 실이 로키 상공의 온사방을 점하자, 마치 청록빛의 장막이 세상을 그대로 덮어씌운 것만 같았다.
“멈춰라.”
뚝!
다음 순간 주먹을 말아쥔 일레힌 포이체카가 나풀대던 마력의 실을 당기자, 거짓말처럼 손가락들의 편대 비행이 정지했다.
이어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던진 궐련을 밟으며 튀어나온 루베르겐 집행관의 신형이 청록빛의 마력사 줄기를 강하게 딛고는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사라진 루베르겐 집행관은 손가락 군집보다 위쪽의 허공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일레힌 포이체카가 손가락 군집의 움직임을 봉해두는 동안, 거력이 담긴 집행관의 대검이 공간을 가르며 손가락 한 기를 절삭했다.
콰지직!
살점과 근육, 힘줄을 파고 들어간 집행관의 수 미터짜리 대검이 단숨에 뼈까지 닿았다. 비린내나는 골수가 퍽! 하고 튀며 거대한 손가락의 한 면이 꺾여 덜렁거렸다.
“지금!”
슬레모킨을 위시한 8레벨의 마법사 둘도 한시에 마력을 끌어올렸다. 중얼대던 그들의 앞으로 기하학적인 문양이 거대하게 만들어지더니, 녹색으로 타오르는 마화를 전방 수백 미터에 걸쳐 분사했다.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인듯, 마력사를 타고 순식간에 번진 마화가 거대한 손가락들을 통째로 불살랐다. 잘린 손가락에서 흘러나오던 핏줄기와 골수마저 타 눌어붙을 정도의 강력한 마법이 연신 쏘아졌다.
그러나.
툭! 투두두둑!
“······.”
얼마 가지 않아 일레힌 포이체카의 마력사가 하나 둘 부질없이 끊어지더니, 그의 몸이 지팡이부터 공중으로 끌려 올라간다. 집중하며 마력을 더 쏟아부어봐도 압도적인 요기 앞에서는 약간의 경직 말고는 얻어낼 것이 없었다.
투두두둑!
결국 일레힌 포이체카는 마력의 실을 끊어버렸다. 그가 실을 끊어내자마자 손가락의 군집은 아무일 없었다는 듯, 다시 유유히 움직였다.
그때, 반쯤 잘려 덜렁대던 손가락이 돌연 기수를 지면쪽으로 틀었다. 그 육중하고 거대한 살색의 기둥이 상공에서 수직으로 낙하하기 시작한 것이다.
누구도 건드려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넓은 지면에 운석처럼 틀어박힌 손가락은 조각조각 터져나갔고, 동시에 팽창된 요기가 지면으로 방사되어 강대한 파동이 불어닥쳤다.
쿠르르르릉—
끔찍한 폭음과 충격파가 천지를 잡아먹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이 요새처럼 쓰고있던 빌딩은 무너질듯 흔들리더니, 외장 벽재들이 거대한 파장에 깡그리 쓸려나갔다.
그 충격파를 방어하던 도중 결국 회로가 과열된 8레벨 마법사 한 명이 풀썩 쓰러져 호흡을 골라야만 했다.
명확한 힘의 격차.
“······.”
일레힌 포이체카는 순식간에 골조만 남은 이 외곽의 빌딩에서, 이제 일곱 개가 남은 거대 손가락을 조용히 바라봤다.
"저 정체불명의 괴물은 9레벨의 수준마저 한참 상회하는 듯하다. 아무래도 여기서 멸절시키기는 힘들겠어. 나로서는 시간을 끌어보는 것이 최대인가.”
“······네?”
그러자 듣던 슬레모킨이 무슨 소리냐는 듯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뾰족히 서있던 귀가 조금씩 밑으로 늘어지려 했다.
“우선, 너희끼리 떠나라.”
쿠르르르륵—
대답할 새도 없이, 일레힌 포이체카 주변의 대기가 뜨거운 열기로 달아올랐다. 마나를 회로가 허용하는 한계까지 빨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더해서 사방에 있던 마법사들의 팔과 심장에서 청록빛이 환히 빛나더니, 그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정순한 마력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렇게, 마력까지 분배해준 일레힌 포이체카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전투를 준비하고 있던 때였다.
부유하던 손가락의 군집체가 순간 상공에 우뚝 멈춰섰다.
“······?”
조금만 더 유영하면 마법사들의 지척에 닿는데도, 손가락들은 시간이 멈춘듯 요지부동이었다. 갑작스레 잠잠해진 분위기가 음산하기만 했다.
지지지지직—
그러다 한순간, 일레힌 포이체카와 가장 가까이 있던 손가락의 갈라진 손톱 밑이 작게 찢어진다. 이윽고 찢어진 부위에서 무시무시한 요기가 스멀대며 흘러나오더니, 찢은 살로 인간의 입 모양을 조형해갔다.
곧, 조악하게 조형한 입이 찌걱거리며 움직이자, 어떠한 의지가 장내에 있는 모두의 머릿속으로 직접 전달되었다.
[ 나의 피를 받아라. ]
“······.”
[ 우리는 너처럼 강력한 마법사를 원한다. ]
그것은 놀랍게도, 마탑주 일레힌 포이체카를 향한 구애였다.
무표정히 대검을 휘두르려던 루베르겐 집행관 역시 터져나오려는 마력을 누르며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 피를 받는다면······나머지는 곱게 죽여주마. ]
손가락은 충격적인 거래와 함께 변절을 종용했다.
그러자, 일레힌 포이체카는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묻고자 하는 게 있다. 당신이 파루무치인가.”
[ 파루무치······이것은 그 덩치 산만한 놈의 손가락이 맞지. 여흥으로 잘라왔다. 나는 그놈을 싫어하거든. ]
“왜 내게 피를 주어 변절시키고 싶어하는 거지?”
[ ······. ]
“또, 무슨 이유로 로키 시티를 노리고 쳐들어온 것인가. 라그나로크 시티를 얼마전 인류가 수복했기 때문인가.”
[ 던져주는 피를 마시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
“······.”
단호한 감정이 머릿속으로 울려퍼졌다.
더 이상의 질의응답은 바랄 수 없을 듯했다.
주르륵-
잠시 뒤, 손가락의 찢어진 입에서 일렁이는 요기와 함께 몇 방울의 진득한 혈액이 흘러나왔다. 혈액은 천천히 흘러 손가락 끝에 방울져 맺혔다. 질식할 듯한 요기가 풀풀 풍기는 게, 누가봐도 평범한 피가 아니었다.
일레힌 포이체카의 고요한 침묵을 따라, 짙은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콰과과광—!
거대한 손가락 군집이 유영해온 상공 밑 지상, 또 하나의 길이 막 생겨나고 있었다. 놀란 슬레모킨이 눈에 마력을 집중해 그쪽을 바라보자.
“······레반?”
그것은, 이미 시체들로 틀어막힌 길을 쾌속하게 달려오는 레반이었다. 제멋대로 캐리어에서 뛰어내려 사라졌던 그가 이제야 돌아왔다.
총탄처럼 질주하는 레반의 주위로 이따금씩 오색의 검광이 마구 번뜩인다. 그의 이동 경로에 있던 시체들의 머리와 몸뚱이가 순식간에 동강나며 길이 뚫린다.
강제로 시체들을 박살내며 이쪽으로 전진하는 사내.
모두의 관심이 그곳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고.
[ ······. ]
일레힌 포이체카의 눈앞에 피를 던져주던 손가락도 마찬가지였다.
도무지 그칠 기미 없는 레반의 질주를 보며, 거대한 손가락 두 개가 군집의 대열에서 이탈해 허공을 날았다.
그 육중한 거체는 곧장 레반의 머리 위에 당도해 강대한 요기를 내뿜었다. 숨이 멎어버릴 듯, 격이 다른 요기가 분사되었다. 뱀 앞의 쥐처럼 본능적으로 온몸이 굳어 멎게 해버리는 기운.
수많은 시체를 베어가며 호기롭게 길을 뚫던 레반은 그 요기를 정통으로 뒤집어쓰자, 잠시 당황한 얼굴로 우두커니 멈춰섰고.
“어.”
쿠궁—
즉시 거대한 손가락 두 개가 레반의 머리 위로 떨어져 사방을 짓뭉갰다. 주위 시체들과 함께 일정 구역이 통째로 짓뭉개지며 크레이터가 생겨났고, 육중한 손가락의 밑으로 붉은 피가 줄줄 새어나왔다.
반색하던 슬레모킨은 눈을 의심했다.
“······어?”
······너무도 허탈할 정도로 끝나버렸다. 마탑주와 밴스, 아힘사를 제외한 모두의 눈이 황망한 경악을 머금었다.
다음 순간.
가장 먼저, 자홍빛 안광이 흉흉하게 움직였다. 살기를 풀풀 풍기는 아힘사가 테크블레이드를 작동시키며 손가락을 향해 무모하게 달려들었다. 뒤이어 움직인 사람은 아주 옅은 미소를 띤 일레힌 포이체카였다.
한계까지 마력을 뽑아낸 그의 전신에서 수만 가닥의 마력사가 일렁이며 솟구쳐 근방을 돔처럼 뒤덮어 버렸다. 발할라의 자존심인 마탑의 주인. 변절의 제안은 당연하게도 거절이었다.
[ 이런 벌레같은 것이······. ]
쿠구구구궁—
그 선택에 크게 분노한 손가락의 군집은 요기를 끄집어내 도전해오는 일레힌 포이체카를 내리눌렀다.
“아아.”
그렇게 전투가 시작된 와중에도, 슬레모킨은 실어증에라도 걸린 엘프마냥 발을 떼지 못했다.
그에에에엑—
헌데, 그 다음의 일이었다.
저쪽에서 분명 레반을 짓눌러 죽였던 손가락 하나가 끔찍한 괴성을 지른다. 귀청이 찢어질 듯한 괴성에 슬레모킨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기괴한 울음을 토하며 미친듯이 경련하는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
거기에는, 빌딩처럼 거대했던 손가락이 어느덧 절반도 안 되는 크기가 되어 피를 줄줄 뱉어내고 있는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흘러나온 손가락의 피와 유형화된 요기가 둥실둥실 뜬 채 어딘가로 빨려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슬레모킨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거대했던 손가락의 규모는 점점 쪼그라들어 결국에는 퍼석해진 피부 밖에 남지 않자.
퍽!
누군가, 퍼석해진 피부를 칼로 가르고는 유유히 걸어나왔다.
웬,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나무총 하나를 쥐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