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퓨전펑크의 전생자-127화 (127/157)

#127화. 군벌 도시, 로키 6

#127화.

우우우웅—

언기원보(言紀元寶).

자그마치 상계 법부적보다 더 품과 값이 많이 들어간다는, 진주언가의 고대로부터 내려온 진법부적. 기운을 주입하면 즉시 진법이 생겨나, 외부로부터 몸을 숨기고 보호할 수 있는 귀물이다.

언기원보는 원영경에 오른 언평 선생과 신선 수염의 수도자가 함께 법력을 불어넣어 레반에게 넘긴 물건. 공격의 수단은 이미 충분하니, 특별한 변수를 만들 부적이나 방어등에 효과적인 법부적을 요청하자 내어준 것이다.

다른 언가의 수도자들은, 이 법부적에 들어간 재료가 진주언가의 기둥뿌리 하나를 뽑을 정도라며 크게 생색을 냈었지.

실제로도 귀한 물건인 것이 사실이었다. 8레벨급으로 보이던 뷔에탕의 인형들도 한꺼번에 진법 바깥으로 밀어내버릴 정도이니.

레반은 로키 시티에 오기 전, 이 언기원보를 품이 아닌 몸속에 넣어 숨겼다. 살을 째고 안쪽에 넣어 말끔히 봉해버렸으며, 의료용 나노로봇 덕에 상처와 흉은 금세 사라졌다.

예상치 못하게 무언가를 숨기는 데에는 몸뚱이 안쪽만한 곳이 없다. 고통과 불편함, 비위생적인 면 정도만 감내한다면 말이다.

그렇게, 피에 진득하게 절여진 언기원보가 이제야 세상 빛을 본 것이다.

헌데, 진법의 중심축이 레반이 있는 침대였던지라—

현재 침대 위.

두 남녀는, 서로의 손을 꽈악 붙잡고 있었다.

“···.”

【 ···. 】

그리고 목덜미가 달아올라 붉어진 뷔에탕을 코앞에서 바라본 레반은, 지금 꽤나 놀라고 있었다.

레반은 지금까지 뷔에탕의 행동거지로 보아, 카스트라 뷔에탕의 외모가 분명 추하리라 추측했다.

그런데 막상 보니, 레반의 그런 예상과는 괴리감이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한 뷔에탕은 놀랍게도 한 미모 하는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저 성욕을 도무지 주체하지 못하는 변태라서. 여인을 낮잡아 보는듯한 호칭에 괜히 민감했던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뷔에탕을 유심히 훑어보다 보니······.

‘아름답더라도, 아줌마는 맞군. 양심에 찔릴 일은 없겠어.’

아무리 9레벨 상위권의 대단한 마법사라도, 거기다 짙은 화장까지 하더라도, 병원에서 리얼스킨으로 갈아엎지 않는 이상 세월이 훑고 지나간 흔적을 감쪽같이 숨길 수는 없는 모양이다.

분명 예쁘장하고 매력이 있기는 한데, 막상 아가씨라고 불러주기에는 확실히 무리가 있는 연배로 보이니.

설령 반로환동(返老還童)으로 시간의 역행을 한 번 겪었더라도, 세월은 쉬지 않고 흐른다. 그러니 어떤 방식으로 30년이 젊어져도, 다시 30년이 흘러버리면 말짱 도루묵 아니겠는가.

카스트라 뷔에탕은 레반이 이 세계에 태어나기 전부터 악명을 떨친 거물이다. 지금까지 백 년 이상을 넘겨 살아왔대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 아······. 】

레반이 그리 생각하는 사이, 카스트라 뷔에탕은 느릿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무림계에서 쓰는 진법이라는 것 정도만 알아챘을 뿐, 뷔에탕은 진법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진법가와 마법사는 명백히 다르니.

하지만 위험하지는 않으리라 금세 판단을 내렸다.

직접 들고 다닐 정도의 소규모 진법. 시간이 지나 가진 기운이 다하면 자연스럽게 풀릴 것이고, 진법 바깥에는 아끼는 자신의 인형들이 기다리고 있기에.

···귀여운 잔재주를 쓰는구나.

적막한 진법 안을 둘러보던 뷔에탕의 눈은 밤알처럼 커다랗게 치떠졌으며, 눈동자는 핏줄이 터져 굳은듯 칙칙한 빛의 적안을 뽐냈다. 적안의 초점은 흐릿했다.

이윽고, 뷔에탕이 다시 고개를 돌려 레반을 바라봤다.

카스트라 뷔에탕은 마치 짐승처럼 침대 위로 달려들 때와는 달리, 상당히 나긋나긋해진 목소리로 뇌까렸다.

【 ······우리가 밤을 보내는 걸, 다른 이들이 보는 게 부끄러워서 이래? 진법도 굳이 쳐주고. 】

그러면서도 레반에게 틀어잡히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레반의 목덜미와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스윽- 스윽-

독사가 피부 위를 기어가는 것만 같은 뷔에탕의 손길. 이런 진법 속이라도 뷔에탕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기다렸던 정사를 당장 이어가는 것을 원했다.

둘은 아직도 침대 위에서 손을 맞잡은 채로 엉켜있다. 배가 찢어져 피를 흘리면서 밤을 나누더라도 색다른 기분에 좋을 듯했으며, 뷔에탕은 그저 이 남자가 울부짖는 꼴을 보고 싶어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노출은 영 내 취향이 아니긴 하지.”

그러나 레반은 머리를 격하게 저었다.

뷔에탕의 손길을 털어낸 레반이 말했다.

“뭐, 아줌마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군.”

【 삐딱하게 굴지마. 이러다가 너 죽는다? 】

뷔에탕은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레반에게 애원했다.

허나, 그 나긋한 음성속에 담긴 살심만은 진짜였다. 터질듯이 차오른 색욕이 가라앉은 자리에는, 분노와 화가 차오를 게 당연지사였다.

뷔에탕은 그토록 고대한 정사를 시작부터 망쳐놓으려 하는 레반의 행동에 실망하면서도, 기대감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죽으러 들어온 게 아니라, 죽을 생각이 없다.”

레반은 들끓는 욕정에 초점이 흔들리는 뷔에탕의 눈을 직시하며 답했다. 그는 이미 단전에서 공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뷔에탕은 레반의 기운이 격렬히 요동치는 것을 느끼고는,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비웃었다.

뒤늦게서야 이러는 게 너무나 우스웠기 때문이다.

【 바보 같구나. 이럴 거면 칼이라도 계속 들고 있었어야지? 솔직히 그 검법, 나도 많이 놀랐는데. 】

“걱정마라. 맨주먹으로도 싸울 줄 안다.”

【 내 뜻에 따라 움직이면, 분명 기분이 좋아질 거야. 】

“싫다고.”

【 넌···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

뒤엉킨 상태로 연신 대화를 나누는 둘.

그들은 얽히고설킨 매듭과도 같은 모습으로, 뷔에탕은 여태 레반의 목을 붙잡고 있었고 레반도 질세라 뷔에탕의 팔을 꽉 붙들고 있었다.

하나, 승기는 뷔에탕쪽이 완전히 잡고 있었다.

완력에 더해진 뷔에탕의 기이한 마력에 레반의 팔목 힘줄이 끊어질 정도였고, 목에서는 피와 진물이 줄줄 새어나온다. 조금만 더 파고들면 뼈까지 상할 것이다.

곧이어.

뷔에탕은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듯, 절박하면서도 나직하게 말했다. 야릇한 분 냄새와 함께 따뜻한 숨결이 훅 불어왔다.

【 레나도 생각해야지. 슬슬 버티는 것도 힘들지 않아? 】

꽈아악-

그러면서 더 강하게 목을 조르는 뷔에탕의 손길.

뷔에탕 본신의 마력과 레반의 육신에 침투한 마력이 공명을 일으킨다. 소름 끼치도록 강대한 마력이 그의 전신을 헤집었다.

그럼에도 레반은 실없는 웃음을 내보였다.

“이부터 깨끗히 닦고 오면 생각해 보겠다.”

【 ······아아. 】

그 도발적인 거절에, 뷔에탕의 안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더 구겨질 수 없을 만큼 구겨진 뷔에탕이 불현듯 피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끔찍하리만치 불어난 욕정과 답답한 감정을 뒤섞어 입 밖으로 노성을 토해냈다.

【 인형들이 없다고 혼자서 나를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이명이 인형사니까. 인형만 없으면 본신은 하잘 것 없다 생각했구나,나,나,나,나나나나나나······ 】

실로 기괴하게 메아리치는 뷔에탕의 음성.

순간, 칙칙했던 뷔에탕의 눈동자가 안광을 찾았다.

걷잡을 수 없이 터져나온 색욕에 잠식당했던 뷔에탕의 이성이 잠시간 돌아온 것이다.

【 아무리 그래도, 8레벨급 정도는 혼자서도 충분하단다? 】

곧, 마력의 폭풍이 뷔에탕의 전신에서 일어난다. 수십 갈래로 갈라진 마력줄기가 만개한 꽃잎처럼 피어나 입을 벌렸다.

쩌저저적—!

가장 먼저, 그들을 받치고 있던 침대가 갈가리 찢어져 가루가 되었다.

색욕을 풀지 못해 분노한 뷔에탕이 작정하고 마력을 해방하자, 실로 막강한 존재감이 진법 안을 장악해나간다.

이전 세대의 십이제. 9레벨 상위권에 위치한 마법사.

하오문주와의 전투에서 내상을 입었다 해도, 또한 본 전력인 인형들이 없다고 해도, 뷔에탕의 거대한 마력 앞에서 8레벨인 레반의 기운 따위는 하찮은 발악으로 보였다.

쭈우우욱—

“흡!”

더해서, 레반의 정신을 공격하던 기이한 마력들이 영혼처럼 쑤욱 빠져나와 뷔에탕의 몸에 흡수되었다. 그녀는 인형들에 흩어뒀던 마력을 뽑아내 본신의 기력을 더 보충했다.

【 하아······좋아. 】

목을 조르는 뷔에탕의 존재감이 점점 거대해진다. 그녀가 뜨겁게 달아오른 얼굴을 레반의 눈앞에 들이밀어 비벼댔다. 욕정을 참는 게 너무도 고통스러워 이를 악물었기에, 뷔에탕의 잇몸과 입술에서는 선혈이 주륵- 새어나왔다.

【 ······죽일 수 있는데, 죽이지 않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아까의 그 남자로 돌아와. 그 기개 가득했던 남자로 돌아와서 나를 즐겁게 해줘. 어서. 착하지? 어서! 】

뷔에탕은 본능과 이성의 충돌로 뜨거워진 육신의 부하를 감당하지 못하는 듯, 사지를 벌벌 떨며 뇌까렸다.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가 금세 또 사라졌다.

꽈아아악—!

심지어 손아귀에 실린 힘은 어찌나 대단한지, 버티고 있던 레반의 숨구멍이 드디어 막혀오기 시작했다.

“큽.”

헌데.

레반은 압박감에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와중에도, 아까 전처럼 실실대며 입을 열었다.

“······이봐. 카스트라 뷔에탕.”

【 또, 날 자극해 주려고? 이제 그만— 】

“아쉽게도 이 진법 안에서는 너만 혼자다.”

— 에라이!

휙!

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음성에, 뷔에탕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장 두 눈을 의심했다.

웬 앵무새 모양의 물건이 심후한 법력을 풍기며 진법 안쪽으로 쏙! 들어오는 게 아닌가.

【 무슨? 】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치뜬 뷔에탕은 차마 아무런 말도 뱉지 못했다.

당장, 강력한 인형들도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여길 어떻게?

설상가상으로······

앵무새의 부리에는 뭔가가 또 물려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선처럼 곧고 기다란 홍색의 검집.

바로 레반이 플라자 창 바깥으로 던져버렸던 애병, 백 기의 인형을 썰어버린 광선을 저 앵무새가 다시금 물고 들어온 것이었다.

* * *

— 에라이!

앵무새 법기에 담긴 종후표가 날개를 파닥였다.

언기원보로 만든 이 진주언가의 진법은, 언평 선생이 불어넣은 법력으로 구동된다.

그러니, 똑같이 언평 선생의 법력을 불어넣은 법기인 종후표는 진법 속으로 무탈히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뷔에탕과 레반이 얽혀있는 것을 한심하게 바라본 종후표가 날개를 파닥이며 외쳤다.

“미친 자식 같으니라고, 이 백리뇌부 종후표가 네 검을 가지고 왔다! 이 정도 선행이면 살려줄 만도 하잖아!”

종후표는 살기등등한 뷔에탕의 눈빛에 흠칫 놀랐다. 비록 두려움에 가까이는 가지 못했으나, 광선의 검집을 최대한 멀리 던졌다.

쿵.

광선이 든 검집은 그 둘의 도처에 떨어져 굴렀고, 레반과 뷔에탕 둘 사이에 즉각 묘한 시선이 오갔다.

아직도 뷔에탕과 레반은 서로 물고 물리는 뱀처럼 팔목을 잡고 있었다. 사실 이제는 잡고만 있는게 아니었다, 서로의 팔목을 통해 흉악하고 강대한 기운을 흘려넣어가며 소리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다.

그 상황에서, 바닥에 떨어진 검을 본 뷔에탕의 안면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듯, 뻗치던 열이 확 가라앉았다.

뷔에탕은 갑자기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저건 안 돼.’

저 검은 절대로 잡지 못하게 해야 한다.

만약, 아까 교접 인형을 죽였을 때의 그 고절한 검법을 쓴다면 지금 뷔에탕의 힘으로는 완벽히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뷔에탕의 전투는 죽음의 공포를 모르는 인형을 앞세우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조종할 인형들은 진법에 막혀 들어오지 못한다. 본신 혼자 하는 전투는 뷔에탕에겐 익숙치 않았다.

게다가 이곳은 진법에 대한 조예가 없는 한, 쉽사리 나갈 수 없는 공간. 물론 마력을 한껏 때려 붓는다면 부술 수 있겠지만, 이 남자가 그걸 가만히 두고볼 리 없다.

【 ······. 】

새삼 무언가를 깨달은 뷔에탕이 눈을 찢어질 듯 치떴다.

욕정이 주체 못할만큼 터져나오는데 풀 수가 없는 상황이 반복되자, 이성의 끈을 아예 놓아버린 게 원인인 듯했다.

이건 무언가 잘못됐다.

앵무새가 물어온 칼을 보자, 어떤 구렁텅이에 빠진 것만 같았다. 시기각각 변화하는 위험을 느끼고는 이성을 되찾은 뷔에탕. 그녀는 말까지 더듬기 시작했다.

【 ······잠깐만. 왜? 】

“여태까지 잘 때려놓고 왜.”

더해서, 레반의 깃털같이 가벼운 그 말투와 함께······

마음만 먹으면 목을 부러뜨릴 수 있던 레반의 목에서 갑자기 극히 강한 반탄력이 느껴졌다.

뷔에탕은 문득, 레반의 나신을 확인하다 소리없는 경악을 질렀다.

【 !? 】

어느새, 강대하고 짙은 기운이 스멀스멀 일어나 레반의 전신을 갑옷처럼 감싸고 있었던 것이다. 급히 마력을 끌어올려 손에 힘을 더해도, 손가락이 밀려난다.

‘······호신강기(護身罡氣).’

무림계에서도 위명을 떨치는 9레벨의 무인들이나 쓰는 기술. 게다가 강기의 농도가 극히 짙다. 이 정도의 기운은 몇 번 보지도 못했는데.

화르륵—

호신강기를 일으켜 뷔에탕의 외력을 밀어낸 레반은 즉시 마법으로 불길을 일으켜 복부의 상처를 지혈했다. 그 과정은 물 흐르듯 단번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레반은 지금껏 길러왔던 긴 머리칼까지 썩둑 잘라버렸다. 호신강기를 보고 입술을 강하게 짓씹은 뷔에탕이 꿈틀대는 레반을 공격하기 위해 마력을 더 증폭시키는 사이, 레반은 자른 머리칼을 허공에 뿌렸다.

화악—

자그마치 9레벨의 마법사 앞에서도 레반은 주변 마나의 통제력을 잃지 않았다. 일단 뷔에탕의 손을 떨치려 전력을 끄집어낼 생각이었다. 다섯 개의 회로를 한계까지 가열시켜, 동화되는 마나를 허공에 뿌린 머리칼 쪽으로 이동시킨다.

스아악—

곧이어 잘린 머리칼을 매개로 레반의 마력이 듬뿍 깃든다, 잘린 머리칼 한올 한올이 레반의 마력에 의해 바늘같은 무기로 벼려졌다.

그는 내공으로 뷔에탕의 침투하는 기운을 막아내면서, 마나 회로를 가동해 마법을 허공에 뿌려내는 기예를 펼친 것이다.

쐐애액!

마력 암기로 변한 수천 개의 머리칼은 뷔에탕을 노리고 소리없이 쏘아졌다. 섬뜩한 마력의 파동을 느낀 뷔에탕은 내키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뒤로 물러서야 했다.

【 ······이익. 】

뷔에탕은 물러서면서 마나를 빨아들였다.

레반이 당연히 떨어진 검을 줍기 위해 뛰쳐갈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쪽으로 포화를 집중시킬 준비를 했다. 그녀는 비단 인형술이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마법들도 수준급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레반은 검집을 주우러 가지 않았다.

레반은 오히려 물러선 뷔에탕을 사냥하려는 듯 땅을 박차고는 포탄처럼 쇄도했다. 막을 새도 없이, 뷔에탕의 전면을 거대한 경력이 서린 권격이 메운다.

주먹의 표적은 뷔에탕의 훤히 보이는 복부였다.

뻐어억!

순간, 뷔에탕은 복부에 마력을 응집했다. 그러나 워낙에 강력한 레반의 권격을 완벽히 버텨낼 수는 없었다. 단신으로 겪는 근접전투. 뷔에탕은 이런 경험이 부족했고, 수많은 전장을 겪었던 레반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 허윽! 】

뷔에탕이 숨을 힘겹게 몰아쉬며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몸은 새우처럼 굽어졌고, 그녀의 얼굴이 고통을 참느라 검붉어졌다.

불현듯 하오문주와 싸웠던 기억이 떠올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본신이 외따로 떨어졌다는 공포감이 이제야 일었다.

원래라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뺐을 것이다. 그나저나 이 진법은 언제 사라지는 거지? 사라지는 건 맞아?

그리고, 내가 아까 그 검법을 버텨낼 수 있을까?

그르르르륵—

스르릉.

이제 바닥에 떨어진 검을 마법으로 끌고와 뽑는 레반을 보며, 뷔에탕의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마침내 질려 새하얗게 변했다.

잠깐의 잡념이 지나간 사이, 어느덧 레반의 손에는 광선의 검병이 단단히 붙잡혀 있었다.

뷔에탕은 결국 허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 왜······이렇게 까지 해?”

“그걸 알아야 하나?”

실실 웃던 레반의 신형이 찰나간 사라졌고.

콰아아아아—!

귀청을 찢어버릴 듯한 굉음과 함께 광풍이 면전으로 불었다.

그러자 진법 안 전체가 천둥치듯 흔들림과 동시에···

서걱.

뷔에탕의 왼팔이 순식간에 잘려 허공을 날았다.

너무나도 간단하고 쉽게. 허탈한 기분이 들 정도로.

이유는 그녀가 목과 머리등 급소에 마력을 집중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실제로 옳은 판단이었다. 레반의 검날은 처음에 뷔에탕의 목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으니까.

‘궤적이······바뀌었어?’

표표히 날아간 뷔에탕의 왼팔은 철썩대며 레반의 발치에 떨어졌다.

【 ···. 】

그녀는 잘려서 꿈틀대는 팔을 가만히 바라보며 무표정을 유지했다. 이번에는 경계조차 하지 않고 분명 가만히 있는데도, 이어지는 레반의 검격은 없었다.

퐁.

왜냐하면, 뷔에탕이 남은 팔로 누군가의 혈액이 담긴 유리병을 꺼내더니 뚜껑까지 따버렸기 때문이었다.

진법 안을 스멀스멀 파고드는 요사스런 기운.

“변절하려고?”

레반도 그것의 정체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남궁천도 가지고 있던 네임드 시체, 가륵의 혈액.

카스트라 뷔에탕은 십이제들을 협박할 때 써먹었던 가륵의 혈액을 조용히 들어올렸다.

“······.”

자리에 우뚝 선 레반은 잠자코 다음 행동을 기다렸다.

그렇게 진법 안에서, 억겁같은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고.

뷔에탕은 돌연 한숨을 푹 내쉬더니, 가륵의 혈액이 담긴 병을 던져 깨뜨려버렸다.

산산이 깨져버린 유리병을 보며, 레반이 말했다.

“그냥 들이키지, 왜.”

“됐어. 괴물이 될 생각은 없거든.”

“아줌마, 그러면 피차 여기까지만 합시다.”

“······뭐?”

뷔에탕의 입장에서는 또, 뜻밖의 전개가 이뤄졌다.

그녀가 휙휙 변하는 상황에 쉽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동안, 레반은 오도커니 서있는 뷔에탕을 보며 생각했다.

이전에 했던 다짐대로 뷔에탕의 팔을 잘라버렸다.

하지만 팔을 자르는 것과, 죽여버리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카스트라 뷔에탕을 여기서 진짜로 죽여버리려면, 못해도 동귀어진할 각오는 다져야했다.

약해졌다 해도 명색이 전 십이제였고, 이곳은 마피아가 다스리는 권역인 로키 시티 신동경 한복판. 뷔에탕이 당명 원로처럼 죽음을 각오하는 순간, 레반도 목을 깨끗이 씻어 내놓아야 한다.

뷔에탕이 죽어 변고가 생기면, 기회를 노리던 군벌들이 죄다 이곳으로 몰려올 가능성도 크다.

마지막으로.

‘진법이 열려도, 뷔에탕의 인형들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사실, 레반 역시도 몸 성히 살아나갈 길은 하나였다. 그는 여기에 온 목적을 상기했다. 뷔에탕을 죽이거나 죽이지 못하게 되면 팔이라도 자르고, 레나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그렇기에 레반은 왼팔이 잘린 뷔에탕을 향해, 사내답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화해하자. 그런데 나한테 건 저주, 기억하나?”

방금까지 서로 죽일듯 전투를 벌여놓고 돌변해 손을 내민다.

그리고 그런 레반의 정신이 나간 듯한 행동에······

뷔에탕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문을 열었다.

“왜, 나한테 저주 마법이라도 걸어보게?”

“아무래도 뜨거운 밤을 보내는 건 힘들겠고, 각자 조건을 걸고 마나의 맹약을 맺자.”

마나의 맹약?

뷔에탕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레반을 한심하게 깔아보며 입을 열었다.

“웃기지 마. 맹약이 어떤 내용인지 관심도 없어. 내가 힘을 잃었다고 해도, 네 허접한 마력으로 맹약을 멀쩡히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일레힌 꼬맹이 놈보다도 내가 더 강해.”

* * *

한편, 같은 시각.

로키 시티의 다른 지역.

연방 정부의 두 번째 천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 로키에 뿌리내리고 민도를 어지럽히는 군벌세력을 시급히 토벌하고 하나로 규합시킬······정부는 연방의 분열과 반목은 절대 허용하지 않음을 널리 공표하고, 불법적인 군벌의 총칼에 죽어가는 주민들을 더 이상 눈뜨고 두고만 볼 수 없······그에 분연히 맞서 연방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새로운 개혁의 흐름과 인류의 번영에 방해가 되는 자들······로키 시티에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하겠······이를 인류 도약의 발판이자 변환점으로 삼아······. ]

아힘사, 밴스, 슬레모킨과 마법사들을 포함한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의 모든 인원은, 그 연방의 지루한 공표에 억지로 집중하고 있었다.

실상은, 네임드 가륵 토벌이 목적인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겉으로만 비장한 연방의 군벌 토벌 천명에는 흥미가 없었다. 조용한 적막이 감돈다.

으하암-

슬레모킨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기지개를 켰다.

그러던 그 시점.

“흐음.”

“?”

옆에 있던 일레힌 포이체카가 무언가를 느꼈는지 한숨 아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침음성에 슬레모킨의 고개가 모로 돌아갔고.

“대체, 말릴 수가 없는 놈이로다.”

스아아아아——

갑작스럽게, 마탑주의 전신에서 마력이 들끓더니 머리 위로 청록빛의 마력이 미친듯 빨려 올라간다.

저 높은 허공에, 일레힌 포이체카 고유의 청록빛의 마력이 덩이지며 운하 줄기를 만들어낸다.

로키 시티의 중심지쪽을 향해 쏘아지는 그 청록빛의 운하를, 마탑 소속의 마법사들은 그저 넋을 잃고 바라보았고.

하품을 집어넣은 슬레모킨은 조용히 읊조렸다.

“저기, 신동경 쪽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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