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군벌 도시, 로키 4
#125화.
기이한 마력이 일렁이는 눈동자.
“······.”
그 여인은 넋을 잃고 창밖의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인의 애달픈 시선은 신동경 길거리를 걷는 한 남자를 놓치지 않았다.
후후—
“많이 바뀌었네.”
분명 처음보지만, 외형이 바뀐 정도로는 감히 여인의 눈을 속일 수 없다. 자신의 마력으로 저주를 걸어 속을 헤집어 놓았던 적이 있었으니까.
그때는 한낱 장난감, 생의 여흥을 돋구어줄 잠시간의 대체품 따위로 여겼거늘······.
“쓸만해졌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나름 큰 키에, 옷 위로도 드러나는 단단한 체격. 누구 앞에서도 절대 숙이지 않을 듯 꼿꼿하게 편 목. 야인처럼 길게 기른 머리칼에 무얼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무심한 눈매.
그리고 전신으로 은은하게 풍겨대는 기개.
약을 꽂아 빚어낸 몸으로, 반쯤 벌거벗은 채 육체미를 과시하며 신동경 길거리를 지나는 남자들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이. 단연 독보적인 존재감이다. 여인이 눈으로 직접 바라보는 남자의 평가는 어느 때보다도 후했다.
뭐라 정확히 집어 설명할 수 없는, 여인이 이토록 관심을 보이게 만들 만큼 특이한 남자.
여인은 왜인지 각별한 느낌이 들어 길거리의 남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꽤 오랜 시간 눈을 떼지 못했을 것이다.
감히 신동경에 당당히 칼을 차고 들어와 피를 묻힌 남자. 신동경이 어떻게 돌아가는 도시인지 조금이라도 아는 주민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었다. 신동경의 입장에서는 불청객임이 확실하다.
하지만 여인이 너무도 애타게 기다린 불청객이었다.
곧, 그 남자는 다시 허리춤의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 저 이유모를 당당함. 여인은 갑자기 몸이 달아 더욱 붉어진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목에는 잘렸다 꿰맨 듯, 길게 그어진 흉터가 있었다.
몇 달 전의 상처가 욱신거려 몸이 달아오른 걸까.
······아니면.
“너무 괜찮네. 진심으로 기대돼.”
혀로 입술을 훑은 여인이 붉고 얇은 가운을 꺼냈다.
적어도 이 플라자에 있을 때는, 아직까지 여인의 앞까지 제 발로 걸어온 남자가 몇 없었다.
연방에서도 이름난 몇을 제외하고는 죄다 약해 빠져서 쓸모없는 남자들뿐. 몇 번 가지고 놀면 곧장 질리는 물건들 뿐이었다.
여인은 고혹적으로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런데.
목욕을 하기 위해 몸을 돌리던 그 짧은 사이, 길바닥에 서있던 남자는 무정하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서걱.
저 길바닥에서, 기척을 완벽히 숨기고 있던 누군가의 목이 달아난다. 깔끔하던 신동경의 도로가 여인이 만든 ‘폐기물’ 들의 피로 물들어가는 것도 금방이었다.
그것을 돌아본 여인의 입에서 달뜬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아아.”
몸이 달은 여인은 저 남자가 과연 어디까지 올라오나 구경해보기로 했다. 여인은 소중히 들었던 목욕가운을 잠시 접어두고는, 유리창과 가까운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한 편의 영화라도 보는 듯, 시선을 떼지 못했다.
* * *
레반은 인파를 헤치며 길가를 걸었다.
신동경 어디에서든 보이는 황금빛의 플라자 빌딩.
아마 레반처럼 눈이 좋다면, 로키 시티로 대상을 넓혀도 어디서든 보이는 건축물일 것이다. 600미터쯤 되는 높이를 가지고 있는데도, 옆으로도 워낙 뚱뚱한 탓에 주변의 풍경을 다 내리눌러 버리니까.
저 황금빛 플라자는 로키 시티의 등대와도 같다.
저벅.
방금 사람 한 명을 도축해버린 사내는, 무심한 모습으로 신동경의 본 길거리에 진입했다.
그런 레반을 붉은빛의 카펫이 맞이했다. 사람이 다니는 길 양쪽에 장식해놓은 네온 라인이 간접 조명을 비춘다.
신동경의 길은 마치 실내처럼, 굉장히 깨끗하게 관리되고 있다. 다른 세계에 발을 들인 듯했다. 사방으로 눈이 즐거운 외관 조명들이 즐비하다. 중원무림, 수려한 한 폭의 그림같았던 항주의 밤거리를 연상케한다.
신동경은 발두르 시티의 중심업무지구보다도 깨끗했다. 군벌들의 전쟁 지역이라는 말이 정말로 무색하게, 상점 주인들의 얼굴에서도 즐거운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레반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거리를 걸었다.
이리도 큰 도박과 유흥의 도시라면, 인생을 포기한 채 말썽을 피우는 미친놈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고 총성이 나는게 일상일 터인데, 그런 일은 없었고 길거리에 멈춰있는 흔한 마약중독자도 없다.
“깨끗하네.”
“그렇다. 마피아들의 근거지인 신동경이니까.”
그것은 역설적으로, 악명높은 마피아의 관리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헛짓거리를 함부로 했다간 조용히 끌려가 무슨짓을 당할지 모르니 아무도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 쥐도새도 모르게 카지노의 지하 VIP실같은 곳에서 끔찍한 고문을 죽기 전까지 당하다가, 결국에는 분쇄기에 들어가는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말인즉 이 신동경이란 곳은, 마피아와 척을 지지만 않는다면 생각보다 꽤 살아가기 좋은 도시인 것이다.
가끔 군벌간의 전투가 벌어진다고 해도, 군벌들이 미치지 않는 이상에야 제 돈줄이자 전리품이 될 주민들을 마구 죽여댈 리는 없으니.
그러나 신동경에 처음 발을 들인 레반은 시초부터 척을 졌다. 그렇기에 이런 풍경을 오래 즐기지 못함이 아쉬웠다.
곧, 레반은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뷔에탕이 지칭했던 황금빛의 플라자 빌딩이 들어와 눈에 박혔다.
“멋지군.”
황금빛의 플라자는 신동경에서도 중심이다. 저런 거대한 건축물은 한 도시의 랜드마크이자 선망의 대상이 된다.
저 플라자 빌딩을 쟁탈한 자가 신동경의 진정한 지배자. 신동경을 노리는 군벌들은 저 건물을 정복하기 위해서 각자의 구역에서 힘을 키운다. 최근의 패자는 계속 카스트라 뷔에탕이었고, 앞으로도 카스트라 뷔에탕일 것이다.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 꼭 살아서 올라오렴. ]
꼭 살아서 올라와라. 부디 사지 멀쩡한 채로 편히 올라와달라는 얘기였다. 그 말은 어디 한군데를 잘라버리겠다는 말이다.
어쨌거나 카스트라 뷔에탕이 살아서 올라오라 했으니, 신동경의 손님인 레반은 뷔에탕의 말대로 사지 멀쩡히 올라가줄 작정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많은 피를 봐야할 것 같다. 이 신동경을 지배하는 대가리인 뷔에탕을 만나야 살생을 멈출 수 있으리라.
뭐, 레반은 이미 뷔에탕의 꼭두각시를 썰어버렸으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플라자 앞까지 오백 미터쯤 남았군.’
사람이라면 한 번쯤 궁금할 만한 도박장이나 고급 콜걸들이 즐비한 주점등, 온갖 유흥거리가 널려있는데도 레반은 눈길조차 주지 않고 직진했다. 어떤 흥미로운 유흥거리도 레반의 발걸음을 돌려세우지 못했다.
그렇게 레반은 평화로운 길거리를 걷기 시작했고.
불현듯, 광선을 길게 뽑아 순식간에 발검했다.
서거걱—
— ······커헉!
나아간 광선의 검날은 인파 속에 숨어있던 자를 단칼에 베었다.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하던 신동경 거리에 찰나간 혈선이 생기며 사람의 머리와 몸이 분리됐다.
7레벨급은 될 법한 실력자. 7레벨부터는 어느 조직이든 대우가 훌륭해서, 마피아의 핵심간부급은 아니라도 꽤 쓸만했던 인력일 것이다.
은신해있던 자는 머리가 바닥에 떨어져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화등잔만하게 떴다.
— 어, 어떻게······.
은신자는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았다.
광학미채 기술이 탑재된 로브같은 거라도 두르고 있었나? 은폐 기술이 상당히 감쪽같아 놀라우면서도, 레반은 마피아들이 저런 값비싼 장비를 쓰고 있다는 것이 신기해 고개를 주억였다.
다만, 레반은 이미 그들의 마력을 특정해둔 상태라 걱정은 없었다. 주변의 마나와 동화되는 마법사의 체질은 많은 이점을 가져다준다. 구태여 신경을 기울이지 않아도, 미세한 마력의 파동이 더욱 생생히 피부로 느껴진다.
헌데 그 은신한 놈의 죽음보다도 레반에게 인상을 준 것은, 사람을 죽였는데도 행인들은 인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레반이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단칼에 베어버린 이유도 있겠으나, 본질은 뷔에탕의 마력 때문인 듯했다. 하기야 뷔에탕이 오래 지배해온 도시이니 무엇인들 못하리.
그때, 상황을 보던 종후표가 느닷없이 한 마디를 보탰다.
“좋은 움직임이었다.”
“어, 고맙다.”
둘이나 죽여 이제는 기수를 돌릴 가능성이 없으니, 칭찬이라도 해서 고래를 춤추게 하려는 셈이다.
레반은 대강 대답을 던지고는 다시 걸었다.
길바닥에 피가 튀니 주변 공기의 흐름이 변했다. 신동경의 풍경은 아직도 평화롭고 여유롭기만 하건만, 틀린그림 찾기의 퍼즐처럼 조금 다르게 행동하는 인간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제정신인 놈은 몇 없겠군.”
대부분이 뷔에탕의 저주 마법에 걸려있는 상태. 레반보다 격이 높은 뷔에탕의 마력이므로 해주하려면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했다. 허나 그럴 여유는 없다.
쾅!
도약 한 번에 수십 미터의 공간을 좁혀버린 레반이 길게 뽑혀나온 검기를 휘둘렀다. 길가에 위치한 고급 위스키바의 기둥과 벽면이 절반으로 나뉘었고, 그 안에서 암기를 쥐고 숨어있던 꼭두각시가 잘려 쓰러졌다.
서거걱—
그리고, 그것이 신호탄이었다.
뷔에탕의 마력을 지닌 꼭두각시들이 일시에 쏟아져나온 시점이.
레반은 내공 분배하기 위해 검기만을 써가며 썰어갔다. 광선의 날도 오늘따라 섬뜩한 것이, 이렇게 백여 명을 베어도 이후 전투에 지장이 가지는 않을 듯했다.
덤벼드는 놈을 베고, 숨어있는 놈을 찾아 찌르고, 저격병을 쏴 죽였다. 수많은 꼭두각시들이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냈다. 어쩌면 마피아라는 조직 전체가 뷔에탕의 직접적인 수하가 아닐까 하는 잡생각이 들었다.
빙글—
레반은 잡념들을 떨치기 위해, 뒤에서 조용히 덤벼들던 인형에 장력을 때려부었다. 이번에는 꽤 잘생긴 사내였다.
콰과광!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신동경을 울렸다. 피분수와 함께 폭사한 꼭두각시 사내는 형체조차 없이 지워졌다. 그러나 죽는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죽은 사체에서는 반드시 기이한 마력의 덩어리가 솟구쳐 레반의 정신에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하지만 들러붙은 마력까지 손수 떼어버릴 시간이 없다.
레반은 그저 꼭두각시들의 명복을 빌며 우직하게 전진했다.
이윽고.
화려한 신동경의 거리에서 한바탕 살계(殺戒)가 벌어졌다.
*
콰지지지직-!!
8레벨급 꼭두각시의 목이 부러지는 소리.
“······.”
조금 전까지 살아서 개구리처럼 펄떡대던 꼭두각시의 부러진 목을 붙잡아 내던진 레반이 고개를 들었다. 위를 올려다보자 황금빛 플라자가 보였다.
그는 이제서야 빌딩의 ‘입구’ 앞에 선 것이다.
이 플라자 빌딩 앞에 서기까지 적어도 백 기가 넘는 꼭두각시를 베었다. 뷔에탕의 마력은 꼭두각시가 죽자마자 빠져나와 레반의 몸을 파고들어왔다. 저번과도 같이, 정신을 침식하기 위해 악다구니를 쓰는 마력의 조각들.
레반은 고스란히 그것을 버텨내야 했다. 게다가 내공을 최대한 분배하며 싸우다보니 조금씩 공격을 허용하여, 전신은 피투성이였다.
내공과 마력을 적절히 분배하며 싸웠다고 생각했는데도, 진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리라.
또한 지금도, 뷔에탕의 기이한 마력은 레반의 정신을 잡아먹어 강탈하려 하고 있다.
“역시 마피아로군. 입구에 서는 것도 쉽지 않다.”
레반이 그리 말했고, 종후표가 답했다.
“이 정도면 쉽게 통과한 것 같은데. 어떤 로키의 군벌도 이렇게 무식하게 쳐들어와 살계를 펼치지는 않을 거다.”
“그런가.”
대충 긍정한 레반이 하늘 위를 보았다.
금빛이다.
어디서 폭탄이라도 구해와서 건물 자체를 무너뜨리고 싶으나, 워낙에 거대하니 구조가 보통 단단할 것이 아닌 데다가 마법적인 방비 역시 단단하게 되어있을 것이라 깔끔히 포기했다.
후읍.
그리고는, 진각을 밟아 제자리에서 발을 크게 굴렀고.
쾅!
그대로 공중으로 솟구친 레반이, 플라자의 벽을 수직으로 달려 올라갔다.
두두두—
레반이 밟으면 밟는대로 황금빛의 외벽 유리창이 우르르 깨져나갔다. 그 안에 있던 이들이 크게 당황했으나 레반은 신경쓰지 않았다.
최상층에 당도하는 데에는 정말 순식간이었다.
철컥.
레반은 플라자의 최상층 부근에 이르러 광선을 납검하고는 두 팔과 손바닥을 곧게 폈다. 마법으로 체공을 보조한다. 단전부터 타고오른 기운이 그의 손바닥에 모여 폭사했다.
—!
마법적인 처리를 해놓았던 플라자 최상층의 보호막마저, 레반의 경력이 가득담긴 쌍장에 거세게 터져나갔다.
저벅.
레반은, 예리한 유리조각을 털며 창가에 내려섰다.
그리고.
“······.”
얇고 붉은 가운을 입은 한 여인이, 바로 앞 소파에 편히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가운 안으로 언뜻 비치는 여인의 풍만한 나신.
“안녕.”
그 여인은 구하기도 힘든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레반에게 환영 인사를 건넸고.
다음 순간, 레반이 허탈한 목소리로 말문을 뗐다.
“······이런, 아줌마는 아니잖아.”
레반은 이딴 아줌마를 보기 위해 큰 위험을 무릅쓰고 올라왔는가! 라며 한탄할 준비까지 다 마쳐놓았으나, 최상층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놀랍게도 고혹적이면서 수려한 외모를 가진 젊은 여인이었다. 눈을 사로잡는 마력이 상당했다.
그래서 일단은 대화를 시도해보기로 했다.
푹!
레반은 눈앞의 바닥에 광선을 검집째로 꽂고는 털썩 앉았다. 참을 수 없는 노곤함이 밀려왔다. 억지로 눈을 떠 돌렸다. 플라자 최상층에서는 수족관과도 같은 창으로 로키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었다.
어지간한 저격총따위는 코웃음 칠 정도로 두꺼운 유리창을 깨버렸으니, 언제 머리가 뚫려도 이상치 않겠군. 좋다.
잠시 뒤, 레반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여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누가봐도 뇌쇄적인 표정을 하고서는.
후후-
카스트라 뷔에탕은 조심성이 많은 성격이라 들었다. 인형사라는 이명조차 조심성이 많을 것만 같다. 그런 여인일진대, 곧바로 앞에 나타나줄 리는 없으리라 생각한 레반이 문득 물었다.
“뷔에탕, 내가 왜 로키 시티까지 기어온 것 같나.”
스윽-
여인이 다리를 꼬더니, 와인잔을 돌리며 답했다.
“이대로는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워서가 아닐까?”
“뷔에탕 네년이 두려워하는 건 하오문주겠지. 숭무교주이고. 내가 그 사내와 생각보다 친하다.”
“······풋.”
느닷없는 친분 과시에, 여인은 달뜬 한숨을 쉬더니 와인을 몇 번 홀짝였다.
“······.”
레반은 그런 여인을 보며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아직도 뷔에탕의 마력은 거대히 뭉쳐 정신을 침범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피도 몸 바깥으로 흥건히 흘러나왔다. 외적인 상태는 그다지 좋지 못하다.
바로 그때.
여인이 요염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우리, 첫 만남 기억하니?”
그야 당연했다.
레반은 지금까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인상적인 일이었으니 기억에 남을 수 밖에.
[ 내가 죽은 저놈보다 더 튼실할거다. 바지라도 까서 보여주면 믿겠나? ]
[ 로키 시티에 와서 나를 찾아. 직접 몸으로 확인해보고 마음에 들면 살려줄게. ]
발두르 시티의 시체공장에서, 분명 대화가 저렇게 흘러갔었다. 저주를 걸어놓고는, 같이 밤을 보낸 뒤 마음에 들면 살려주겠다는 식의.
헌데 저 얘기를 가장 먼저 꺼내놓는 걸 보아하니···.
아줌마같은 힐난을 듣고서도 밤일이 궁금한 건가.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이나 신념이 있다. 그에 따라 살아간다. 물론 그딴 거 없이 대충 살다 죽는놈도 많지만. 보통은 삶의 목적이 있는 법이다.
“······.”
그리고 레반이 듣고 보기에 카스트라 뷔에탕이라는 여자는, 섹스에 미친 요녀가 분명했다. 어떤 곤충은 교미가 끝나면 수컷을 잡아먹는다던가. 그것도 본능이라 그런 것인데, 놀랍게도 저 뷔에탕이 해왔던 행동거지와 비슷하지 않은가. 정사를 나누고, 질리면 잡아먹고.
그러므로 뷔에탕은 본능대로만 사는 년이다. 뷔에탕의 뜻대로 정사를 나누다 확 칼로 찔러버릴까?
하지만 그러려면 하나의 문제를 풀어내야했다.
‘저 여인이 정말 뷔에탕의 본신인가?’
아니면 뷔에탕이 그저 공들여 만든 수많은 인형중 하나일 뿐인가. 대단한 강자들도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힘들어 놓친 전력이 몇 번이던가. 여인의 몸에 안력에 집중해도 희뿌연 안개만이 보이는 듯하다. 사람인듯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묘한 기운이.
‘진짜 복잡한 년이군.’
아무튼, 그렇다면 좋다.
털썩!
검집을 끌러놓고 앉아있던 레반은 뷔에탕의 질문을 듣자마자, 돌연 대(大)자로 드러누워버렸다.
“?”
의아한 여인의 시선이 레반을 훑었고.
바닥에 편히 누워버린 레반이 말했다.
“지금은 힘들어서, 손가락 하나도 까딱 못하겠다.”
그 말에.
여인의 얼굴이 살짝 구겨지며 인상이 변했다. 아름답고 고혹적인 미소가 잠깐 흔들렸다. 하지만 잠시였다. 여인의 얼굴은 금세 다시 제 모습을 되찾았다.
“전혀 안 그래 보이는데?”
“첫 만남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다. 직접 확인한다는 핑계로 욕정을 풀고 싶은가? 그럼 죽이든 살리든 네 마음 가는대로 해봐라.”
“······?”
“자고로 나는 다 포기했으니 누워 있겠다. 안 그래도 지쳤는데, 한낱 인형 따위와 밤일을 하는 게 무슨 재미냐?”
“······.”
그렇게, 느닷없이 뻗어버린 레반은 눈을 감았다.
여인을 앞에 둔 채로, 그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중원무림에는 시대마다 정신나간 색마가 하나둘씩 있었다.
비단 색마뿐 아니라, 흡정공같은 정신나간 사술을 익힌 요녀도 있었고 말이지. 사실 색을 유독 밝히는 자들은 동네마다 한 명씩 있기 마련이다.
다만 무공의 고하에 따라 불리는 이름이나 별호가 다르다. 색(色)을 심히 밝히는 것으로 마(魔)까지 붙을 정도의 고수라면, 못해도 초절정 이상의 무위를 지닌 놈이었다.
우스운 것은, 그 색의 화신들은 가진 무위가 강해질수록 색을 탐하는 것이 점점 심해지고, 변태스러워진다는 사실이었다. 독특한 본능이 이성을 누르고 거리낄것 없이 스며들어서 그렇다.
원래 본능과 이성은 사이좋게 반반나눠 공존하기가 힘들다. 무림에서 이름을 날린 색마들은 지닌 무공의 경지가 깊어질수록, 더욱 변태적인 욕구를 거세게 분출하며 무림을 혼란에 빠뜨리기 일쑤였다.
그런데, 카스트라 뷔에탕은 그 색마들보다도 더 높은 경지를 이룩한 여인.
더해서 뷔에탕은 이미, 남자 없이는 하루도 못사는 색욕의 화신으로 잘 알려져있다. 남자와의 잠자리를 극히 밝힌다는 소문이 세간에 파다하게 퍼진지 오래.
······욕정에 잡아먹힌 자들은 행동 하나하나가 유별나서, 이따금 괴상한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그리도 밤을 보내보고 싶다면······.”
그렇기에 일단 대자로 누워버린 레반은, 소파에 떨떠름하게 앉아있는 여인 앞에서 입을 열었다.
“그런 인형 말고, 네 본신으로 와라.”
“······.”
“그럼 나도 기쁘게 받아주마.”
레반은 여인의 묘한 시선에도, 요지부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