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앙굴리마라는 어떤 꿈을 꾸는가 1
#119화.
발할라 상공으로 캐리어가 들어선다.
어두운 천공을 떠받치고 있는 저 거대한 산맥.
어쩐지 든든하군.
후웁-
나는 발할라 시티의 저 장엄한 정경이 그리웠는지, 땅을 딛자마자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물론 산맥 밑둥이라 공기가 딱히 좋지는 않다. 발할라 스테이션의 상공은 수많은 캐리어들로 인해 활기를 띠었다.
구우우우웅—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 이후, 알 헤임달의 메카 세계수와 흡혈귀들이 주교로 있는 혈교의 금지, 남경의 남궁세가와 화산의 본문. 그리고 북경의 진주언가까지 돌고 돌아 이제야 발할라에 돌아왔나.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수복전 이후로 나는 확실히 성장했다. 남궁세가에서 전대가주 남궁천을 죽인 뒤 헤어진 슬레모킨, 그녀의 격앙된 반응에서 얻은 성취가 피부로 와닿았다.
“진짜 5위계라고?”
“그래.”
“······와, 이렇게 빨리 성장하는 건 반칙일 정도인데. 하긴 십이제가 괜히 셋이나 찾아왔나 싶더라. 정말 기겁하는 줄 알았다니까.”
나는 무공으로만 따져도 어지간한 8레벨을 지났고, 하오문주 독고웅백과 499번의 생사결과도 같은 비무를 거친 덕에, 이미 완숙한 화경의 수준에 발을 밀어넣었다. 가장 문제였던 정기신의 균형도 점점 잡혀가고 있었다.
게다가 주춤하던 마법 방면의 성과 역시도 컸다. 로라 마르티네즈가 나의 육신을 공들여 재구축 해준 덕에 세상의 마나와 동화되는 체질로 바뀌었으며, 마나회로를 늘려 진정한 마법사를 가르는 경계선인 5위계까지 달성했다.
목숨을 걸고 싸운다면, 같은 8레벨 수준에서는 적수가 거의 없으리라.
다만 언평 선생같이 특이한 경우도 있어서, 제멋대로 설치고 다니다간 목이 달아나기 좋겠지. 나는 인류 연방을 구해볼 생각이므로, 언제나 겸손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십이제가 셋이나 다녀갔으면, 마탑주께서 곤란했겠군.”
“아냐. 그래도 마탑 내에서는 마탑주의 권위가 절대적이라서 다들 말썽없이 조용히 독대만 하고 사라졌어. 그런데 일단 너한테 관심을 보인건 맞으니까, 바깥에서도 가만히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을걸.”
스윽. 스윽.
뾰족한 귀를 쫑긋 세우며 그리 말한 슬레모킨은, 앵무새 모양의 법기를 신기하다는 듯 만지며 구경했다.
“종후표 그 인간이 여기 담겨있는 거야? 뇌만 빼서 담았나?”
“육신은 수르트 시티에 생강시들과 함께 봉인되어 있고, 법기에 담아둔 법력을 통해 음성만을 전달받는 형식이라더군.”
“오~그런 것도 가능해? 수도자도 장난 아니네.”
슬레모킨도 놀랄 만큼, 언평 선생은 고절한 경지의 수도자가 맞다. 생각해보면 종후표가 좋아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이 앵무새 모양의 법기가 박살나도 본신은 진주언가에 꽁꽁싸매져 봉인되어 있으니 당장은 안전할 것 아니던가.
“그렇지! 언평 선생께서는 신이다!!!”
종후표가 불쑥 입을 열어 소리를 지르자, 인상을 찌푸린 슬레모킨이 귀를 축 늘어뜨리며 떨어졌다.
“아, 깜짝이야.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얘 왜 이래?”
“더 이상 대가리를 먹히지 않아서 신이 났나보군.”
“······?”
그러는 사이, 우리는 마탑에 도착했다.
스아악—
그런데 외부와 단절된 공간인 마탑주의 서재에 이르자.
“이번 연방의 두 번째 계획은, 로키 시티의 군벌 숙청과 세력 통합인가?”
종후표는 느닷없이, 자기가 나서서 저런 말을 했다.
‘로키 시티의 군벌 숙청?’
계획이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를 데려온 마탑주보다 한발 빠르게 연방의 계획을 추측해 뱉은 것이다. 종후표는 마탑에 올라오는 동안 죽을 위기를 완전히 벗어났다 생각했는지, 내내 기분이 괜찮아 보였다.
일단 머리가 영리한 놈이긴 해서, 입을 이상하게 놀렸다간 언가에 있는 육신이 박살날 것을 알고 있을 터. 들어보기로 했다.
“맞다.”
놀랍게도 종후표의 질문이 맞다는 듯, 서재에 들어선 일레힌 포이체카가 긍정했다.
“하지만, 아니기도 하다. 혹시 그 이유도 알고있나?”
이윽고, 일레힌 포이체카는 말하는 앵무새를 재미있다는 듯 응시했다.
* * *
약간의 법력이 담긴 음성이 서재를 울렸다.
“로키의 군벌 숙청은 연막이지. 표면적인 명분에 불과해. 어차피 로키는 라그나로크보다 작은 도시라 먹을 것도 적고, 군벌들도 자기들만의 대응 체계가 있어서 제대로 숙청하려 했다간 연방쪽도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닐 거다. 아마도 진짜 이유는 로키에 숨어든 네임드의 토벌과 멸절. 더 정확히는 ‘가륵’ 을 위시로 한 시체다. 야단스럽게 피를 뿌리고 다니는 놈들.”
“네임드 시체가 로키에 있다는 건 어찌 확신하지?”
“연방 내부에 둥지를 틀고 숨어있을 수 있는 거점이 사실 로키밖에 없다. 거긴 이미 연방이 반쯤 포기한 곳에다, 로키를 맡은 칠좌는 은거한지 오래이니.”
휘익! 휘익!
앵무새 법기는 날개를 정신없게 끄덕거리면서 말했다. 어쩌다 보니 일레힌 포이체카와 종후표의 선문답 시간이 되었는데, 나는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수복전이 끝난 뒤에 1차적으로 변절자를 색출해 처리했고 라그나로크 시티까지 안정 되었으니, 이제 라그나로크를 거점으로 삼아 공권력이 작동하지 않는 로키에 숨어있는 위협을 뿌리부터 뽑아버릴 계획이겠지. 현 연방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칠좌(七座), 슈나우젠 하비에르의 결정일 테고. 최근 피를 뿌리고 다니는 시체놈들의 위치를 특정할 만큼, 무언가 확실한 신호나 사건이 있었을 것 같다.”
종후표는 실로 정보의 화수분이었다. 자기 혼자만 몰래 알고있던 고급 정보들이 수두룩했다.
일레힌 포이체카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겠으나, 종후표의 추측이 다 맞아 들어가는 게 재미있다는 듯 흥미로운 얼굴로 되물었다.
“그런 부분까지 세세히 알고있나? 신기한 일이군.”
“계획의 초안을 작성한 게 연방 의회이고, 나 종후표는 변절자들과도 계속 접촉을 해왔으니. 앞으로 어떻게 돌아갈지 대충은 예상이 간다. 라그나로크 수복전에 실패했을 때를 상정한 계획도 있었거든. 다른 정치인들도 꽤 알고 있을 거야.”
백리뇌부 종후표는 자그마치 연방 의원 출신.
연방의 대소사를 결정하고 수많은 기밀을 독점할 수 있는 권력집단 중앙에 들어가 있던 놈이다. 연방 정부라는 형태가 조금 기이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건 뭐 세상이 등신같아서 등신같이 발전한 거라.
“그렇게 잘 알고 있었으면 좀 진작에 열심히 막지. 정치하는 새끼들, 존나 무책임하네.”
와중에, 그걸 듣던 루돌프놈이 슬쩍 입을 열었다.
“응?”
허나 종후표는 루돌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아니, 아예 이해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뇌 구조가 짜여있는 게 분명했다.
의아한듯 위 아래로 갸웃대던 앵무새의 머리는 곧장 욕을 뱉었으니.
“무슨 개뼉다귀 뜯어먹는 소리인지.”
“뭐?”
“반반 괴물. 넌 대체 정치계에 무얼 기대하는 거냐. 정치인들이 힘을 합쳐서 으쌰으쌰 좋은 법안이라도 발의할까? 세상이 망해가는 게 눈에 뻔히 보이는데, 정보를 독점하고 단 하루라도 더 권력과 명예가 가져다주는 도파민 과다분비를 즐겨야지. 권력을 올바르게 쓰면 뭘 얻는데? 정당 수뇌부의 눈칫밥?”
“······.”
“원래 정치는 무책임하고 이기적으로 하는거다.”
원래가 그렇다는 종후표의 말에 나는 쉽게 납득해버렸다. 망할 걱정이 전혀 없는 현대에서도 그랬는데, 실시간으로 망해가는 세상임에야 논할 거리도 안 된다. 말세의 정치 권력, 타락과 부패는 실과 바늘처럼 따라오게 되어있다.
“정치판 돌아가는 원리가 별로 대단하지가 않아. 연방 의원들이 막 고결한 성인군자라 아침에는 운기조식하다가 점심에는 의회가서 건설적인 토론을 할 것 같아? 아니라고. 아침까지 술 퍼먹고 여자좀 주무르다 점심쯤 되면 아무 핑계나 대고 원격회의로 대체한다고. 그나마 양심있는 놈들은 제 보좌관을 보내오지. 의원님께서 급성치질에 걸렸다는 개소리나 찍찍 뱉으면서. 밤에 똥꼬로 뭘 했길래 급성 치질이 걸리는지는 몰라도, 이 세상이 그래요 세상이!”
“······.”
종후표는 답답했는지 말을 마구 뱉었다. 앵무새 부리가 마구 움직이며 신묘한 법력이 슬쩍슬쩍 흘러나오는 듯했다. 시체가 된 변절자놈이 대단한 법기같아 보이는 기적이다.
“그리고 정당에서 똘똘히 일 잘하는 놈들 좋아할 것 같아? 아니지. 인간 대가리가 아무리 똑똑해봐야 인공지능 언저리도 못 오지. 네 새대가리 100개를 합쳐봐라. 인공지능보다 셈이 빠른가. 그저 힘있는 놈들 사타구니 심심하지 않게 옆구리에 파트너 척척 붙여주고, 질 좋은 당가표 한정판 마약 구해다주는 놈을 더 아끼고 좋아한다고. 권력이 지나치면 도파민이 머릿속에서 계속 나오는데, 거기다 마약까지 해봐! 도파민이 두 배야 두 배!”
종후표는 루돌프를 한심히 쳐다보며 마지막까지 말을 덧붙였다. 지랄발광을 하면서 딱딱한 날개를 푸드덕댄 종후표놈 덕분에, 듣고만 있던 루돌프가 조금 질린 얼굴로 말했다.
“형님, 이거 아주 완전히 미친 새끼네요. 대가리를 계속 띵가먹었더니 돌았나. 법 뭐시기라 먹지도 못하고.”
“······.”
나는 종후표의 말을 듣다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약 팔아먹는 사천당가 그 놈들을 대체 무슨 수로 막아야할까. 연방의 권력을 쥔 인간들이 정신을 조금이나마 차리려면 자제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스윽-
나는 당가의 소가주가 준 음각패를 꺼내 보았다가, 금세 다시 집어넣었다. 아직은 당가를 상대로 어깨를 펼 수준이 아니다. 수복전에서 죽은 당명 원로를 생각해보아도, 필시 한 줌 독수로 녹아내려 죽겠지.
역시 난세의 영웅이 되는 건 멀고도 험하구나.
“그만.”
그렇게 마약을 근절하는 영웅이 되려다 한줌 독수로 녹아 내리는 상상을 하고 있던 때, 일레힌 포이체카가 우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아직 구체적인 보상안이 확정되지 않았고, 실행 단계까지는 시간이 2주일 정도 남았을 거다. 그리고 이번 연방의 행사는 연방군도 참여하지 않고 조용히 진행될 예정이다. 저번처럼 필참도 아니다. 다만 참여할 마음이 있다면, 남은 시간 준비를 단단히 해오도록.”
“생각해보겠습니다.”
“앵무새는 두고 나가라. 물어볼 것이 있다.”
“예.”
나는 고개를 숙이고는, 종후표를 두고 마탑주의 서재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 * *
나는 마탑에서 빠져나와 곧장 산맥을 내려왔다.
카산드라 교수 저택에 있는 레나를 보러갈 생각으로. 내 옆에는 아힘사 뿐이었다. 루돌프놈은 슬레모킨이 자신의 짐승 부스러기와 싸움을 붙여 보겠다며 데려 갔고, 앵무새 종후표도 당장은 마탑주와 있으니.
잠시 뒤,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 근처.
나는 카산드라 교수의 대저택에 이르렀다.
“어라, 레반? 레반 맞아?”
“메리.”
그런데 저택 중앙의 식탁에는 레나도, 루벤카도, 카산드라 교수도 아닌 시종인 메리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악독한 루벤카년의 그나마 착한 안드로이드 시종 메리. 그녀는 싱긋 웃으며 나를 맞이하고는, 손수 탄 차를 내주었다.
“레나님을 보러 왔구나. 그런데 어쩌지? 지금은 루벤카님과 함께 외유를 나가셔서 안 계시는데.”
“그럼 다음에 오지.”
덥썩-
“어디가게? 더 있다가 가지.”
그 순간, 빠른 속도로 뛰어온 메리가 대뜸 나를 껴안았다. 메리는 원래 성적인 농담이나 농염한 짓거리를 즐겨하는 안드로이드. 이건 루벤카가 없을 때마다 나오는 메리의 장난이다. 아직 반 바이오 컴퍼니에서의 시종 생활을 잊지 못한 듯했다.
“······.”
나를 안고있던 메리를 아힘사가 빤히 바라봤다. 아힘사의 안광이 붉게 빛났다. 딱히 반응을 하지 않으니, 메리는 막상 머쓱했는지 내게서 슬쩍 떨어졌다.
“······나 조금 과했나. 옛날 생각이 나서.”
“다음에 레나가 있을 때 올 테니 전해줘.”
“응, 빠뜨리지 않고 전해둘게.”
나는 메리를 그렇게 떼어버리고는 카산드라 교수의 저택을 나왔다.
그런데 그때.
“레반.”
메리를 보고 저택 밖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아힘사가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품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내게 건넸다.
그것은 빳빳한 글씨로 무언가가 쓰여있는, 한 장의 종이였다.
[ 발할라 시티, 로메로 주점 ]
[ 발할라 시티 ······ ]
[ 발할라 시티 ······ ]
그런데 그곳에는 총 다섯 개의 주소가 적혀 있었고, 그 중 세 개가 발할라 시티 내에 있었다.
종이는 아힘사가 다르간트의 손에 재탄생한 뒤부터 계속 간직하고 있었던 듯, 안쪽에서 꽤 오랫동안 구겨져있던 흔적이 보였다. 나는 답을 원하는 눈빛으로 아힘사를 바라봤다.
그러자 아힘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힘사의 한쪽 손은 꼭 불안한 사람처럼, 회중시계를 쥐고 있었다. 회중시계의 줄이 찰랑거렸다.
“······열반을 벗은 앙굴리마라가 있는 장소. 다르간트께서 일러주셨습니다.”
백 육십 먹은 앙굴리마라의 제작자, 다르간트.
그래, 그때 분명 또 다른 앙굴리마라가 있다고 했지.
나는 바로 답하지 않고, 아힘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제 레반의 시간이 조금 생긴 것 같아서, 그들을 한 번 찾아가보고 싶어요. 열반에서 벗어난 그들은 어떤길을 걷고 있는지 보고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나를 따라다닌지 햇수로 이 년이 넘게 지나니, 회의감이 든 것인가. 아니면 언평 선생의 토막같은 말에서 무언가 느낀점이 있는 것일까. 아힘사의 적극적인 물음에, 나는 이전에 내뱉어둔 말이 다시금 기억났다.
내 옆자리에서 진정한 열반을 고민해 보라고 했던 그 말이.
그간 떠올려보면, 아힘사는 어떤 위험한 곳이라도 나를 늘 따라와 주었다. 별 것은 아니라도 항상 조용히 옆에 있었다. 마침 생긴 시간을 아힘사에게 사용해보는 것도 좋을 듯했다.
나는 대답을 기다리는 아힘사를 응시했다. 마법사의 손가락을 꿴 염주를 발목에 차고는, 삼호문 기루를 다 부숴놓던 녀석이 마치 사람처럼 굴 줄도 안다. 아니. 사람인가. 이제 사람으로 봐도 되는가.
“안 될 것은 없지.”
“!”
그렇기에 나는 아힘사의 제안을 수락했다. 생각해보면 항상 옆에 있던 아힘사의 길도 아직 구하지 못했는데, 그런 내가 무슨 세상을 구하겠답시고 설치겠는가.
내가 흔쾌히 대답하자, 조심스럽게 물었던 아힘사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레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