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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펑크의 전생자-118화 (118/157)

#118화. 다음 계획

#118화.

언평 선생의 정신이 돌아오고 하루가 더 지났다.

내가 보기에, 그의 정신력은 어지간한 수도자도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견고했다. 륭의 메모리칩을 받아들인 이후로, 륭이 생전 했던 행동이나 버릇이 언뜻 드러나긴 했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면, 예상보다도 자신을 멀쩡히 잘 유지하고 있었다.

“어지럽군. 지금까지 발작이 몇 번이나 있었냐.”

“기억하기로, 한 두어 번쯤 됩니다.”

다만, 마공의 정신 침식은 끝나지 않았는지 간헐적인 발작이 있었다. 뭐든 초기에는 불안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애당초 불안정한 정신에 다른 이의 생까지 억지로 밀어 넣었으니······

게다가 원영경의 수도자 둘과 법력 대결을 하느라 피를 워낙에 많이 흘린 탓에, 그의 원기도 많이 쇠했을 것이다. 그의 안색은 조금 파리했다.

“됐다. 아예 광인이 되느니, 발작 정도는 담백하게 받아들여야지. 적응이 되면 차차 나아질 것이야.”

다행히도, 언평 선생은 그것에 기꺼이 순응했다.

륭의 기억과 깨달음이 안착하여 언평 선생의 정신에 완전히 스며들 때까지, 혼란한 시기가 반복될 것이다. 다행인 점은 옆에서 발작을 막아줄 풍령개와 경험 많은 수도자들이 있다는 것.

이곳을 떠날 나까지 나서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탁!

언평 선생이 마신 물잔을 내려놓기에, 내가 물었다.

“수도자들이 언가 안을 샅샅이 뒤져보던데, 뭐가 나왔답니까?”

이를테면 네임드 시체 가륵의 혈액이라든지.

하지만 언평 선생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시체의 혈액이나 수상한 요기가 느껴지는 물건은 따로 발견하지 못했다. 언가 바깥 어딘가에, 따로 변절할 방법을 안배해 둔 것일 수도 있겠어. 어쩌면 특별한 진법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숨겨두었을 수도 있다.”

“원영경의 수도자가 둘이니, 그랬을 수도 있겠군요.”

“부모와 가까웠던 수도자들을 회유해 찾아볼 거다. 가문의 큰어른이 나를 도와주고 있으니,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하루 사이, 신선수염의 수도자가 나서 출가한 언평 선생을 진주언가의 품으로 다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남은 혈족중 배분이 가장 높은 자의 말이고, 언평 선생도 나름 제정신을 차렸기에 반발은 없었다.

최근 원영경 넷이 죽어, 이제는 몇 남지 않았다는 원영경의 수도자. 앞으로 진주언가를 이끌게 된 언평 선생의 입지가 수도계 내에서 꽤나 커질 듯했다.

“이제 진주언가는 완전히 봉문을 푸는 겁니까?”

언평 선생이 머리를 끄덕였다.

“안온하게 모여살던 이전보다야 세상 밖에 자주 모습을 비출 거다. 사람의 도리를 앞세워 패륜까지 저지른 이 불효자 언가가 그렇게 만들 거다. 사람으로 살다 사람으로 죽어야 하니, 시체에 뜯어먹혀 망자들과 같은 꼴이 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

만약 드워프 다르간트와 마주하기 전이라면.

자신의 혼과 삶, 미련까지 병기에 벼려내는 드워프의 집념을 목도하지 못했더라면, 방금 언평 선생의 말은 내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삶은 다르간트를 만난 뒤로, 전생들보다 대차게 살아 인류의 멸망을 조금이나마 늦춰보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니, 그의 말에서 전해져 오는 느낌이 왜인지 남달랐다.

“그렇군요. 그거 아주 잘된 일입니다.”

자연히 미소가 지어졌다.

잠시 뒤, 내가 유치하게 물었다.

“하면, 언평 선생은 세상을 구하려 하십니까?”

“내가 세우고 믿는 도리를 지키려면 그리되겠지.”

세상을 구할 거냐는 유치한 물음에, 언평 선생은 부끄러운 기색이 일절 없이 즉답했다. 그래서 나도 한 치의 부끄러움이 없어졌다.

“나도 세상을 한 번 구해보려 합니다. 벗인 언평 선생이 많이 도와주십시오.”

“그런 놈 치고는 어째 한가로워 보이는데. 누가 보면 몇 번은 죽은 놈인줄 알겠다. 미친놈이냐?”

나는 언평 선생의 가벼운 힐난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한가롭지는 않았으나 실제로 미친놈은 맞기 때문이다.

“한가로워 보이면 절간에 들어가서 폐관이나 할까요?”

웃으며 그리 묻자, 언평 선생이 코웃음을 쳤다.

“그건 길을 구할 때나 하는 거다. 헌데 너는 이미 길을 구했잖냐. 앞에 무엇이 기다리든 끝까지 걸으면 될 터.”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막 가려던 길바닥에 언평 선생이 칼 맞고 쓰러져있지 뭡니까. 내친김에 금창약도 바르고 반창고도 붙여줬지요. 그러니 좋은 법부적이나 써서 몇 장 내려주십시오. 어서 세상을 구하러 가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어이없는 등신들이라며 한껏 비웃었을만큼, 매우 등신같고 비현실적인 사내들의 대화였다.

우리는 누구도 쉬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대단히 높은 경지를 이루긴 했으나, 아직은 십이제급에도 한참 못 미친다. 그런 놈들이 세상을 구한다니 만다니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고 있으니 참으로 우습겠지.

“그나저나, 저 백리뇌부 종후표놈 말이다.”

언평 선생도 나처럼 그게 우습다 생각했는지, 화제를 돌렸다. 실은 법부적을 써달란 말에 귀찮아서 화제를 돌렸을 수도 있다.

아무튼, 덜렁 대가리만 남아있는 종후표. 이번 언가 전투에서 딱히 활약이라 할만한 것은 없었다. 딱히 귀중히 돌보지 않았는데, 어차피 언가의 진법 속이라 도망도 못 치고 상당히 좆같았을 것이다.

“예, 따로 좋은 방법이 있겠습니까?”

“있다. 어렵고 귀찮더라도 벗의 부탁이니···.”

언평 선생이 이어서 말했다.

“저 종후표는 내가 해결해주겠다. 꽤 번거로우나 법기를 통해 육신을 구속해둘 방법을 알고있다. 원영경에 오르니 그 해법이 보이는구나. 정 힘들면 생강시 쪽도 있고.”

자신있게 장담하는 언평 선생.

이로써 종후표 대가리의 긴 여정은 끝이 나겠군

나는 언평 선생에게 고맙다고 한 뒤, 말을 돌려 다시금 물었다.

“하시는 김에 법부적도 몇 장 얹어주시지요.”

“법부적? 뭔 법부적?”

언평 선생이 모르는 척하기에 집요하게 물었다.

“상계 법부적보다 더 좋은 법부적이 있더군요.”

“남한테는 절대로 못 내어주는 물건이다. 상계 열 장 만드는데 드는 노력으로 연성하는 법부적이야. 재료도 극히 귀해서 대단한 수도자들도 많이는 못 만든다.”

“그래도 몇 장만 내려주시지요.”

“네놈은 어째 개방 거지들보다 구걸을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개방에 찾아가봐라. 너는 한 삼 결개부터 시작할 수 있겠어.”

“그럼 저기서 마당 청소나 하는 왕초삼 놈보다 밑이지 않습니까.”

“시끄럽다.”

“헌데, 왕초삼놈은 왜 끌고 다니시는 겁니까?”

“풍령개가 아끼는 제자다. 나중에 개방에서 크게 한자리 받겠지.”

“저런 놈이요?”

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언가 앞의 길거리를 쓸고있는 왕초삼을 바라봤다. 저놈은 확실히 발두르의 모래폭풍 속에서 마주쳤을 때와는 또 달라져 있었다.

그때, 슬며시 일어난 언평 선생이 아힘사를 보며 말했다.

“이미 길을 정해놓고 걷는 놈 옆에, 길을 묻고 다니는 구도자(求道者)가 뽈뽈 따라다니고 있으니 그야말로 재미있는 광경이야. 그토록 믿음이 있다면······함께 걸으면 될 일인데 말이지.”

“······.”

아힘사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언평 선생은 그 말과 함께, 아힘사를 지나쳐 언가의 진법 앞에 섰다. 무너진 대라금몽진의 자리에 진법을 만들어 임시로 마련한 언가의 거처였다.

그 앞에서 하늘을 올려다본 언평 선생이 입을 열었다.

“······옛 수도자들은 하늘을 보고 천기(天機)를 읽으며 때때로 길흉화복을 점칠 수 있었다고 한다. 사람에 재액이 붙어있는지도 알 수 있었지. 나도 어릴적, 천문으로 세상의 흐름을 읽는 법을 배웠었다.”

“선생이 보는 제 운은 어떻습니까?”

“너는 이번에 굉장히 운이 좋았다.”

“그거 그냥 유사과학 아닙니까?”

“맞다. 원래는 실재했으나 지금은 의미가 없지. 하늘이 저리 우중충하고 침침하여 이제는 없어진 말이다. 천공에 떠있는 것들을 누구도 보지 못하니.”

“언평 선생, 발할라 산맥의 여섯 번째 봉우리에 오르시면 언제나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탑주의 서재 윗면에는 무수한 별이 떠 있어요.”

“마탑주의 서재? 아서라. 경지의 마법사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는 곳에 언가의 수도자가 무슨 수로? 게다가 마법은 내가 추구하는 길이 아니다.”

“그렇습니까.”

“다만, 삼존(三尊)중 한 명이 수행하고 있다는 발할라의 첫 번째 봉우리 정도면 마음에 차겠다. 세상의 지붕에 서야 천문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 듯해.”

“마공법을 공부한 수도계의 수도자가, 발할라의 첫 번째 봉우리에 서면 그거 볼만 하겠군요.”

내 말이 끝나자 언평 선생은 몸을 못 가누고 휘청였다.

“······이제 어디로 갈 것인지만 말해라. 말을 너무 많이 했더니 머리가 어지럽고 울린다.”

언평 선생의 상태가 아주 온전치는 못해 많은 대화가 힘들어 보였다. 아무래도 상대가 나인지라 최대한 어지러움을 참아가며 배려를 해주었을 것이다.

이제 언평 선생과 더 대화를 나누는 것은 힘들겠군. 다시 마공이 도져서 법력을 사방팔방으로 난사하면 안 되니까.

나는 잠시 고심하다가 답했다.

“언평 선생의 말대로 세상을 구하겠다 해도 그저 한심한 치기로 보이는지라, 이제 힘을 기르러 다녀야겠습니다.”

“어떻게?”

“그야 시체를 죽여야겠지요.”

“알았다. 그건 너 알아서 해라. 그리고 첫 번째 봉우리 얘기는 어디가서 얘기하고 다니지 마라. 이 언가를 죽이기 싫다면.”

“예.”

“또 보자.”

언평 선생은 그 말을 끝으로, 종후표의 대가리를 가지고 진법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리고 이틀뒤.

나는 백리뇌부 종후표가 담겨진 법기와 심후한 법력이 가득 담긴 법부적 몇 장을 받아 진주언가의 영역을 빠져나왔다. 법기 속이라 종후표의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지극히 감격한 듯한 놈의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어찌 되었든 살았구나. 하하하하! 내가 해냈다. 이 백리뇌부 종후표가!!!”

종후표는 앵무새처럼 생긴 법기에 담겨 봉해져 있었다. 앵무새의 입이 열리면 종후표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언평 선생이 법부적까지 써가며 요기를 눌러 놓은 덕에 요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진주언가에 종후표의 육신을 봉해두고, 이 법기에는 놈의 음성만 담아낸 것이다. 이것은 진주언가에서 혈시 제작에 쓰이는 비전을 언평 선생이 특별히 개량시킨 것으로, 놈의 육신을 완전히 되찾으려면 언가로 가야 한다던가.

종후표는 이제 요기도 쓸 수 없기에 도망은 어림도 없을 것이나, 신기하게도 굉장히 흡족해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뭐가 좋은 건지는 몰라도 일단 그토록 원하던 대로 살아남긴 했으니.

“말만 하는 앵무새가 되었구나. 나는 그래도 안전하게 살아간다.”

언평 선생의 법력이 다 사라지지 않는 한, 종후표는 앵무새 모양의 법기에 계속 담겨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진주언가를 뒤로 한 채, 몇 시간을 걸어 수르트 시티 스테이션 근처에 도착했다. 이제 수르트 시티에는 큰 볼 일이 남아있지 않았고, 슬레모킨이 나를 찾아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 저기 오네. 야! 막내!

마침, 약속대로 나를 마중나온 슬레모킨이 보였다.

그런데 그 슬레모킨 옆으로.

“···아니, 마탑주님 아니십니까?”

연녹색의 머리칼이 옷 바깥으로 흩날렸다.

동시에, 청록빛의 마력이 내 팔에 빛났다가 사라졌다.

슬레모킨과 같이 우리를 마중을 나온 사람은, 긴 로브를 걸친 일레힌 포이체카였다.

무려 발할라의 마탑주가 수르트까지 친히 걸음한 것이다.

마법계를 상징하는 거물이 무림계의 고향인 수르트 시티까지 오다니. 이건 정말로 희귀한 광경이어서 나는 마탑주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께서 여기까지는 어쩐 일입니까.”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건지 궁금해서 같이 와봤다. 또 이상한 걸 가지고 있군? 심지어 느껴지는 기운도 놀라울 정도로 늘었구나.”

“제가 없는 동안 마탑에 특별한 일이 있었습니까?”

“있었지. 나의 마탑에 십이제가 셋이나 왔다 갔거든.”

“······.”

그간, 여섯 번째 마탑의 인기가 상당히 많아진 모양이군.

나도 그렇고.

하여튼 나는 십이제중 누굽니까? 혹은 그 사람들이 왜요? 보다는 다른 방향의 질문으로 물꼬를 텄다.

“혹시 개중에 전 십이제도 있었습니까?”

“모두 현재 십이제의 위에 있는 자들이다. 카스트라 뷔에탕은 내 가문의 사업체를 비집고 다니다가, 요즘 조용해졌다.”

“그거 다행이군요.”

뷔에탕 그년만 없으면 뭐. 괜찮다.

다만, 독고웅백과의 비무로 십이제들 사이에 내 얘기가 퍼져나간 듯했다.

하기야 10레벨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 자체가 크나큰 충격이고, 그는 10레벨에 올랐다고 해서 가만히 수련만 할 사람도 아니었으니.

“그런데 하오문주께서는, 진공진인과 붙었습니까?”

느닷없는 나의 질문에, 일레힌 포이체카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헛웃음이 나왔다.

독고웅백은 10레벨의 경지에 오르기가 무섭게, 정말로 십이제 수좌인 무당의 진공진인에게 대결을 신청하러 간 것이었다.

남이 뭘 하든 신경 쓰지 않는 나라도, 초인 둘의 비무결과는 궁금했다.

“누가 이겼답니까?”

“아침에 시작된 비무가 새벽이 되어서야 끝났다더군. 밤낮으로 천 이백합 가량을 겨루었고, 끝까지 동수를 이루었다고만 들었다.”

그렇군.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는 말인가?

현경이라는 무의 경지는 너무도 아득해서 아직은 내가 가늠할 수 없다. 나는 생각을 마치고는 마탑주와 슬레모킨을 따라 걸었다.

스테이션이 보이자, 일레힌 포이체카가 조용히 말했다.

“십이제 중 특히 로라 마르티네즈가 네게 관심을 많이 보이더군. 하지만 호의를 보인다고 해서 너무 가까이하지는 말도록. 그녀는 절대 허술한 마법사가 아니니 적당한 거리를 둬.”

“예.”

마탑주, 일레힌 포이체카는 내게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수복전 이후로 나를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설마, 마탑주께도 제자 어쩌고 했습니까?”

“제자로 키워볼 테니 마탑에서 너를 넘겨 달라더구나.”

“저 대신, 아카데미에 있는 반 루벤카를 소개시켜주면 되겠군요. 재능있는 마법사를 찾는다면 필시 마음에 들어 할 겁니다.”

“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일단 발할라로 돌아가지.”

“무슨 일이 있습니까?”

“수복전 이후, 연방의 다음 계획이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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