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퓨전펑크의 전생자-117화 (117/157)

#117화. 진주언가 5

#117화.

수도자, 언평은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

오늘 일로 그의 벗이 된 나는 이제 어둑한 하늘을 보며 무작정 기다리기로 했다. 언가의 안에서 싸우는 동안 바깥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는지, 하늘을 가리던 자욱한 먼지는 어디가고 달이 꽤 가까이 보였다.

사무라이 륭이 후련히 남기고 떠난 칩을 언 선생의 머리에 밀어넣은 나는, 다리가 뻐근해 제자리에 풀썩 앉았다.

언 선생이 자신만의 심상 속에서 부모에 대한 미련을 털어내며 심마인지 마귀인지를 몰아내는 동안, 나도 상념에 잠기기로했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륭의 칩을 꽂으려다가 원영경에 오른 언 선생이 마구 쏘아낸 법력에 전신이 아주 곤죽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도 자주 병신이 되어서 이제 앉은뱅이 신세 정도는 익숙하다.

그리고 언평 선생은 나를 두 번이나 살려준 사내라, 그를 살리려다가 몸이 좀 다쳤대도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아이고.”

몸을 뒤척이자 노인처럼 앓는 소리가 나왔다.

사지육신이 이곳 저곳 뻐근하니 본전치기가 생각난다.

만약 언 선생이 제정신을 차린다면 종후표의 처리는 물론이고, 전투에서 사용했던 좋은 법부적으로 갈음하라며 당장에 압박을 넣어야겠다.

그런데 아까 전에 너무 무게를 잡았나.

조금이라도 피해가며 시도해볼 것을 그랬나.

아니다. 그렇게 했다면 언 선생이 잠깐 정신을 차렸을 때 칩을 꽂아넣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나는 언 선생을 반드시 살리고 싶었다.

그저 부리또만 처먹으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괴상한 인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숨어있는 수도계의 수도자들을 이 세상 바깥으로 끄집어 내겠다니. 그들을 바깥으로 끄집어내 진짜 하늘을 보여주겠다니. 사람으로 살다 사람으로 죽겠다니.

그 얼마나 원대한 목표이자 신념인가?

나는 언 선생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세상에 드문 사내를 보았는데, 은혜도 갚을 겸 몸이 부서지는 것이야 감수할 수 있었다. 어차피 몸은 시간이 지나면 낫는다. 이미 수백 번을 넘게 부서졌는데, 이번 한 번 더 상하는 것 쯤이야.

“언 선생은 오히려 너무 강했기에 오래 고민했구나.”

언 선생은 고고한 정신력을 제물삼아 마공법으로 결단경의 끝까지 이른 뒤, 비로소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그쪽으로 재능을 타고나, 원영경을 이룬 부모보다도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극성까지 마공법을 익히면서, 자신의 부모를 반드시 죽일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겠지.

그렇기에 발두르 촌구석 골방에 처박힌 채로, 바둑을 두며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을 거다.

그는 여지껏 후공인 백돌만을 잡고 바둑을 두었다. 고심이 끝나고 결단을 내린 뒤 흑돌을 잡은 날에, 부모는 당연하다는 듯 죽었다. 언 선생이 고심해 얻은 힘은 규격 외였으니까.

문득, 발두르에서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잃을 것도 없다고 판단한 나는, 법부적을 몇 장 내려달라며 염치없이 언 선생의 거처에 찾아갔었다.

[ 저놈은 왜 대국 도중에 와서 사단을 내? 구석에 처박혀 있었으면 그깟 부적쯤 어련히 챙겨줬을까. 쓸데없이 입을 열어서! ]

그때 두던 풍령개와의 바둑 대국에서, 언 선생은 내가 끼어든 탓에 이기고 있었음에도 흑돌을 잡은 풍령개에게 패했다. 그러자 어련히 챙겨줬을 텐데 아주 꼴보기가 싫다며 역정을 냈다.

해서 이번에 나는 언 선생의 대국에 끼어들지 않고, 그를 지키기만 했지.

언 선생의 부친과 모친은 사이가 좋았다.

죽기 전까지도 서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물론 출가한 언 선생과는 아니지만, 가족간의 정이란 게 상당히 끈끈해 보였다. 그래서일까, 피를 나눈 진주언가의 수도자들을 변절이라는 길로 같이 데리고 가고 싶어했을지도 모른다. 솔직히 그들도 이런 세상에는 어울리지 않는 자들이었다.

아무튼 언 선생은 마침내 부모를 사람으로 죽게 해주었다. 내가 없었으면 조금 더 고전이야 했겠으나, 그가 내보인 신위를 보자면 원영경의 수도자 둘이 합공했더라도 어떻게든 죽였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수도자가 친 진법 안에서는 진법가가 왕. 언 선생의 재능은 그의 부모보다 확실히 윗줄에 있는듯 했고, 부모를 죽이기 위해 오랜 기간을 연구하고 고심하고 작심한 언 선생이 대국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언 선생은 승리를 거두자마자 미쳐버렸다. 자신이 정한 도리에 따라 부모를 죽여놓고, 더없이 절망했다. 어떤 감정에 잠식되어 힘을 주체할 줄을 몰랐다. 마공을 익힌 자의 말로가 대부분 그렇지만.

그런 언 선생에게서 과거 나의 모습이 비쳐보였다.

아니라면 나는 내가 보고싶은 것만 보는 사람이라, 그에게서 독기만 남았던 내 시절의 모습을 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머릿속이 살의와 악의, 절망감으로만 가득차서 누군가를 죽여 살아남을 생각만 가득했던 시절이었다.

“형님.”

“어. 돌프왔니.”

“이걸로 다 끝난 겁니······그런데 지금 다리가 불타고 있는데 괜찮으세요?”

화르륵!

아, 어쩐지 다리가 뻐근하더라니. 감각이 없군.

나는 곧장 마력을 일으켜 언 선생의 법화를 정리했다. 잔불처럼 계속 타오르던 그것은 악의처럼 진득하게 들러붙어 나를 괴롭히려했으나, 진법이 망가진 뒤 언 선생의 법력도 멈추어서 금세 힘을 잃었다.

진법 안에서야 언 선생이 왕이었으나, 진법이 깨지고 현실로 나왔으니 나도 꽤 강했다. 법력의 불을 꺼버리고는 말했다.

“돌프야, 너는 다시봐도 정말 못생겼구나.”

저 루돌프놈은 개방도들 사이에 끼어들어 생강시와 맞섰다. 이제 적어도 제 몫은 해내는 놈이었다. 여전히 쓸모가 크지는 않지만.

“이 분위기에서, 저더러 갑자기 못생겼다고요?”

“갑자기가 아니고, 넌 원래도 더럽게 못 생겼잖아.”

“···그래서 어쩌라고요. 돈 모아서 성형 할 건데요? 턱도 깎고.”

“공연히 지랄하지마라. 그거 돈 낭비다. 기술이 아무리 좋아도 한계가 있어.”

“······.”

녀석은 거지들보다 더 못생기고 더럽게 생긴 놈이라 거지속에 던져놓아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같이 싸우던 거지들도 몰랐을 거다. 검게 변한 피딱지들이 아직 몸에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저쪽의 싸움도 꽤 격하긴 했던 모양이지.

“허어······.”

곧, 뒤로 물러서 언 선생의 폭주를 바라보던 진주언가의 수도자들도 내쪽으로 다가왔다. 아까 신선처럼 수염을 늘어지게 기른 수도자를 앞세워서는 말이다.

신선 수염의 늙은 수도자가 말했다.

“······평이의 마음이 실로 어지럽겠구나. 원영경에 올랐다 하여도, 마공법에 저항하는 것은 사람의 의지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그저 천운에 달린 일이지.”

그의 뒤로 아직 언평 선생을 이해 못하겠다는 듯 화를 삭이고 있는 어린 수도자들도 보였지만, 죽어버린 사람을 되살릴 수는 없는 일. 게다가 언평 선생의 모친이 죽기전에 변절하려 했다는 것을 구구절절 다 늘어놓고 떠났기에, 아직 몰랐던 이들도 사태의 내막을 알게되어 이제는 분을 삭여야만 할 것이다.

털썩.

신선처럼 수염을 길게 기른 수도자는 나처럼 길가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이 자리에서 언 선생 다음으로 법력이 고강한 수도자가 그리하니, 다른 수도자들도 어쩔 수 없이 길에 나앉아야만 했다.

“뜻이 맞지 않다며 출가했던 평이가 마음을 굳게먹고 돌아와 대라금몽진도 무너지고. 원영경 초기의 수도자 둘이 세상을 떠나갔구나. 얼마 전에도 둘이 죽었는데, 그 짧은 사이에 원영경의 수도자가 넷이나 떠나버렸어. 이제 수도계의 종주인 진주언가는 누가 이끌어야 하는가.”

“······.”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수도자의 물음에, 나는 원통을 붙잡고 죽은 사람처럼 꿇어앉아 있는 언 선생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과연 륭의 기억들을 다스리고 있는 것인가. 그가 제정신으로 돌아오면 진주언가를 이끌 수 있겠는가.

나로서는 알 수 없기에 대수롭잖게 답했다.

“그야 숙부도 모자라 하늘같은 부모도 죽일 정도의 사내인데, 그 사내가 잘 이끌어 주겠지요.”

“제정신을 차려야 알아서 하든 말든 할 터인데.”

“정신을 못 차리면 죽이려고 이리 오셨습니까.”

“그야 당연한 것. 운이 따르길 빌어야지.”

척!

신선수염의 수도자는 법부적들을 꺼내 언 선생의 전신에 붙였다. 괴상한 그림들이 그려진 법부적에 언 선생의 피가 금세 스며들었다.

나는 언 선생의 벗이 되었으나, 그것까지는 막을 생각이 없었다. 그가 끝까지 정신을 되찾지 못하면 마인이나 다름 없으니 죽여야한다. 하늘없는 고아끼리 살아가자 다짐하여 믿고 기다리지만, 끝끝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내 손으로 죽일 생각이었다.

물론 최후까지 미뤄둔 방법이 남아는 있다. 강냉이를 털어가며 몸을 두들겨볼 마음도 있었다.

“그럼 그리 합시다. 수도자께서도 언평이란 사람에게 천운이 따르길 빌어주십시오.”

“알겠네. 그는 나의 먼 혈육이기도 하니.”

나는 그렇게 언평 선생을 죽이려는 수도자들과 바닥에 쪼르르 앉아 쉬었다.

위이이잉—

불현듯,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한참 바닥에 둘러앉아 쉬고 있던 때였다. 아무래도 야밤에 소란이 컸는지 수르트 시티 경찰까지 이곳으로 출동했다. 그러나 몇 수도자들이 스스로 나서 별 일 아니라며 경찰을 돌려보내곤 간단한 진법을 쳐버렸다.

원영경의 고강한 수도자들이 패륜아의 손에 살해당한 건 당연히 큰일이었으나, 변절이라는 말이 나오면 그냥 큰일로 끝나지 않아서 이제 별 일이 아닌게 되었다.

“레반, 저 수도자는 열반에 다가간 게 아닐까요?”

그때, 아힘사가 내쪽으로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아힘사가 이리 관심을 보이는 대상은 처음인 것 같다.

“글쎄다. 무아에서 건져 놓은줄 알았더니 무아지경에서 살고 있었던 사내만이 알고 있겠지. 륭은 지금 언평 선생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을 테니.”

“······.”

내 옆에 앉은 아힘사는 물음을 멈추었다.

묻지않고 혼자 답을 구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잠시 뒤.

아힘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올리고는, 나와 같이 하늘만을 바라봤다. 차가운 금속으로 제작된 아힘사라지만, 어째서인지 지금은 사람의 체온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사람으로의 도리를 지키는 언평과 막연한 열반을 찾아 헤매는 아힘사의 모습이 괜스레 겹쳐 보였다.

* * *

수도자들의 진법 속에서 시간이 지났다.

그래.

못해도 한 사흘은 지났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언평 선생은 나의 바람대로 눈을 번뜩 떴다. 그는 진정한 사내라 나의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으며, 정신을 되찾기까지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나야 그의 머릿속 상황을 알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내가 겪었던 심마들에 뒤지지 않을 것이었다.

스윽.

그는 피투성이인 팔을 들어, 신선수염의 수도자가 붙여둔 법부적을 한장 한장 떼어갔다. 수도자들은 주변에서 진작에 원형의 공격진을 만들고, 그의 머리 위로 법력을 쏟아부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더해서, 풍령개의 지시에 따라 몸이 멀쩡한 거지들도 다 몰려들었다.

그의 벗인 나는 이 상황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평.”

그런 내가 곧바로 입을 열어 주저 앉아있는 그를 부르자, 언 선생은 얼굴에 말라붙은 피를 슥슥 닦더니 느닷없이 물었다.

“······담배 있나?”

“돌프야. 네가 얼른가서 사와라.”

“예.”

나는 곧장 현물지폐 몇 장을 건네주며, 루돌프놈을 시켜 밖에서 비싼 담배를 사오게 했다.

루돌프놈은 담배를 잔뜩 사왔다.

딸칵-

언평 선생은 부리또는 먹어도 담배는 태우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굉장히 익숙한 손짓으로 고급 담배 한 개비를 꺼내더니 입에 물었다.

당장이라도 불만 붙이면 피울 수 있어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이상하게도 그러지 않았다.

“······.”

그는 돌연 고개를 젓더니, 담배를 뚝 부러뜨렸다.

나는 두 쪽으로 부러진 고급 담배를 보며 말했다.

“언평 선생, 애써 가져왔더니 왜 안 피우십니까? 다른 거 드려요?”

“갑자기 피우고 싶지 않아졌다.”

“왜 그렇게 됐습니까?”

나의 물음에 몇 분이나 망설이던 언평 선생이 말했다.

“막연히 생각이 나기에 담배를 태우고 싶은 줄 알았는데, 보니까 태우고 싶은 것은 아니었던 듯 하다. 그저 아련할 뿐이다. 아련히 남아있구나.”

나는 언평 선생의 대답이 매우 기꺼웠다.

그는 마인이 아니었다. 정말 제 정신으로 돌아온 것이 맞았다.

륭은 장벽 밖으로 떠나갈 때, 모든 담배를 두고 떠났으니.

그는 클로에 덕에 담배를 끊었다. 애시당초 사무라이 륭은 담배를 태우는 걸 좋아해서가 아니라, 동료가 담배 한 까치를 달라했을때 건네주지 못한게 아쉬워 피우는 사내였다.

그래서 륭은 깨달음을 얻고서 장벽 바깥으로 나가는 날, 사무실에 있던 모든 담배를 두고 떠났다.

하하하.

그러므로, 나는 그제야 언평 선생을 보며 웃었다.

진주언가의 도움을 받아 계륵같은 종후표놈을 해결할 수 있다는 기쁨보다, 이 세계에서 화산의 청풍이 말고 또 하나의 좋은 벗을 얻은 것 같아 웃었다.

“정말 고생했습니다.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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