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진주언가 2
#114화.
“북경의 언가 본산은 현재 봉문(封門)했을 것이다.”
봉문(封門).
세가의 대문을 단단히 걸어 잠구었다는 거다.
그런데 진주언가는 원래가 속세와 교류하지 않고 세상과 동떨어진, 일상이 봉문 상태인 곳 아니던가.
평범한 봉문이 아닌가보군.
언 선생은 그런 나의 의문을 눈치채곤 말했다.
“진주언가는 수도계의 종주로써 오롯이 존재한다. 무림계가 워낙 거대해 그들과 함께 통틀어 묶일 뿐이지, 수도계는 수도계만의 방식이 있다. 헌데 몇몇 고강한 수도자가 큰 말썽을 일으키는 바람에 봉문했다.”
나는 수도자들의 세계를 깊고 세세히 알지는 못하므로 언 선생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속세와 관련을 두지 않지만 수르트 시티의 커다란 장벽 전체에 광역진법을 칠 정도로 무림계의 중요한 한 축이라, 무시해도 될 정도가 아니다.
“고강한 수도자가 무슨 말썽을 일으켰습니까?”
“수도계의 경지는 본래 연기경(炼气境), 축기경(築基境), 결단경(结丹境), 원영경(元婴境)으로 나뉜다. 연방의 레벨로 치환하자면 연기경은 3레벨, 축기경은 6레벨, 결단경은 8레벨까지. 원영경은 9~10레벨, 그리고 화신경이란 경지도 있는데, 비현실적인 수준이라 알 필요 없고 아무튼······.”
와작.
언 선생은 부리또를 씹어먹으며 별 대단한 얘기는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몇 결단경과 원영경에 오른 수도자들이 ‘시체가 되는 것’ 을 현세에 존채지도 않는 화신경으로 가는 통로이자, 중경계로 가는 하나의 도(道)로 낙점했다. 변절하면 인간의 수명을 뛰어넘을 수 있으니, 생과 수련이 무한할 것 아니냐면서.”
나는 그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들었다.
무림계와 마법계의 상황과 큰 틀에서 다르지 않다.
결국에는 더 높은 경지를 보기 위해 변절을 하겠다는 의견들이 수도계 언가 내에서 오고고 있다는 것. 높은 경지의 수도자들이 목표로 잡은 천계의 신선이 되기 위해 인간성을 버리고 변절하자며 다른 수도자들을 선동하고 있다는 말이다.
“시체가 되면 수련 역시도 무한히 할 수 있다 말하겠군요.”
“바로 그거다. 언가를 포함한 수도계는 애초부터 속세에 별 관심이 없는 꼴통이자 촌놈들이라 인간의 수명에 만족을 못하는 놈들이 슬슬 기어나오고 있다는 말야. 솔직히 변절하면 수명이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되잖아.”
“그래서 봉문한 진주언가 내부도 시끄럽다는 겁니까?”
언 선생이 그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진저리가 쳐진다는 듯 머리를 도리도리 저었다. 어찌나 빨리 젓던지 마치 헬기의 프로펠러를 연상케했다.
“내가 본산에서 출가할 때만 해도 정신이 똑바로 박혀있는 노인들이 있어서 괜찮은 수준이었다. 작은 소요쯤은 그들의 힘으로 충분히 막았어. 몰래 변절을 준비하다 쥐도새도 모르게 죽은 결단경 수도자도 있었지.”
“하면, 그 노인들이 죽은 뒤로 난리가 났겠군요.”
언 선생이 긍정했다.
“맥락은 잘 짚는구나. 대단한 수도자도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이 정해진 수명은 있다. 탈태환골이나 반로환동을 해도 몇십 년 정도를 늘릴 뿐 정해진 하늘의 뜻은 크게 역행하지 못해. 그런데 얼마 전에 원영경에 이른 노인 두 명이 한날한시에 세상을 떠났다. 살만큼 산 수도계의 거물들이었지. 그들이 타계한 이후, 문제가 커졌다.”
언 선생은 부리또를 와작와작 씹으며 말세다 말세야를 반복했다. 그런데 내가 잠시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부리또를 어느새 다 해치운 언 선생이 바둑판에 백돌을 딱 소리 나게 착수했다.
“자, 이 판은 끝났구나.”
“어!”
흑돌은 집은 왕초삼의 대마가 죄다 잡히는 형국이었다.
그때, 언 선생이 죽어버린 왕초삼의 대마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짓나 싶더니 대뜸 바둑판을 엎어버렸다. 동그란 흑백의 바둑알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아이고! 왜 이러십니까 선생님.”
“난 판이 끝나 기분이 좋은데, 화나면 네 사부한테 가서 이르던지. 으하하!”
와장창!
그래, 저 좆같은 부리또.
분명 그때도, 빌어먹을 부리또만 먹으면 사람의 성격이 종잡을 수 없고 희한하게 바뀌었다. 예측할 수 없는 다른 자아가 언 선생의 속내에서 기어나오는 걸지도 몰랐다. 나는 갑자기 언 선생이 지랄할 때를 대비하여 공력을 슬쩍 끌어올렸다.
가벼웠던 언 선생의 태도가 돌변했다.
“판의 축인 대마가 잡히면 바둑판을 엎어버리지 않는 이상, 도리가 없는 법 아니겠냐.”
“······.”
그렇게 건틀릿을 낀 왕초삼이 힘겹게 바둑알을 하나하나 줍는 사이, 나는 언 선생과 눈이 제대로 마주쳤다. 즉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눈동자. 강바닥처럼 극히 혼탁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심유한 면이 있다.
저만한 인물이 어찌 정신이 나가있다는 말인가.
나는 잡념을 지우고는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언 선생께서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속세로 나왔는데도 다시 봉문중인 본가로 향하는 이유가 있으시겠지요.”
“걱정하지 마라! 수도계 놈들이 아니더라도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다! 나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시끄럽다.”
“······.”
진주언가로 가서 방법을 구하지 못하면 마침내 대갈통이 박살날까 기겁한 종후표가 느닷없이 끼어들기에, 입을 닫으라고 일갈했다. 종후표는 싸해진 분위기를 단박에 느끼고는 입을 딱 닫고 끼어들지 않았다.
“언 선생,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왜 봉문한 본가로 향하십니까.”
나는 어찌 데려갈 방법이 없어진 백리뇌부 종후표를 그냥 죽여버리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서 언 선생의 대답을 기다렸다.
언 선생은 의자에 털썩 기대더니 입을 열었다. 부리또를 먹었는데도 생각보다는 멀쩡했다. 다행이었다.
“에휴, 뭐 말한다고 해도 네놈이 알겠느냐.”
“어쩌면 운이 좋아 알 수도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
꽤 강력한 공력을 일으킨 내가 조금 진중하게 질문하니, 언 선생도 여기까지 말한 김에 입을 닫아버리기에는 아쉬웠는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나는 결단경 십이성을 이룬 수도자다.”
법력이 심후한 이유가 있었군.
“9레벨 이상인 원영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시군요.”
“내가 원영경에 오르면, 변절을 통해 화신경이니 중경계니 헛소리 지껄이는 수도계 노친네들을 싹 다 죽여버릴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닌 오성에는 한계가 있는 탓에 제정신을 허무에 바쳐 공법의 수준을 높여왔다. 아마 원영경에 오르면 지금보다도 더 정신이 오락가락할 거라 고민 중이다.”
“······.”
싹 다 죽인다느니 하는 소리가 나오기에 조금 경계심을 높였다.
언 선생은 과거에 나를 살려준 은인이면서도, 제정신이 아닐 때가 있어 마음만 먹으면 혈겁을 펼칠 수 있는 수준의 강자. 진법이나 법부적, 법기에 별다른 지식이 없다면 죽을 때까지 나오지도 못하고 굶어 죽는다.
듣자하니 익혔다는 공법도 정상적인 공법이 아닐 것이다. 무공으로 따지자면 제정신을 잃어가는 대신 성취와 성장이 극히 빠른 마공이라고 할까.
여튼 나는 마침 떠오른 것이 있어, 살기등등해지는 대화의 방향을 돌리려 물었다.
“그러고 보니, 언 선생께서는 연방에서 일했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연방에 투신해 변해가는 언가를 한 번 구해보려했다. 변절을 반대하는 노친네들이 죽고 나면, 수도계에서는 자정작용이 힘들 거라 예상했거든.”
“실패했습니까.”
언 선생은 콧잔등을 긁으며 한숨을 쉬었다.
“남궁의 전대가주도 변절하네 마네 지랄하다 콱 뒤져버린 세상에, 진법에 틀어박힌 수도계에 신경이나 쓰겠나? 심지어 당장 변절을 한 것도 아니고 얘기나 나오는 수준으로 알 텐데 말이지.”
“남궁의 전대가주가 죽은 건 어찌 아셨습니까?”
“어찌 알긴 뭘 어떻게 알아? 네 눈에는 저 거지놈이 무슨 꿔다놓은 맹꽁이로 보이는 모양이로구나.”
언 선생은 왕초삼을 가리키며 어이없어했다. 왕초삼은 두꺼운 강철 건틀릿을 낀 손으로 바둑돌이나 줍는 등신이라 신경조차 쓰지 않았는데, 신기하게 개방에서도 나름 제 입지가 있는 놈이었지.
이번에는 언 선생이 화제를 돌려 물었다.
“저 시체놈은 출신이 어디냐.”
“연방의 정치인 출신인데, 아는 것이 워낙 많고 지식이 방대해 데리고다닐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연방의 정치인? 이름이 뭔데?”
“종후표요.”
“종후표? 연방 의원 백리뇌부 종후표?”
“언 선생도 아십니까?”
“그야 알다마다.”
“?”
“비켜봐라. 내가 그자와 긴히 할 얘기가 있다.”
촤르륵—
“?”
언 선생은 느닷없이 다가오더니, 등 안에서 종후표의 대가리를 불쑥 꺼냈다. 잠시 뒤, 그는 종후표의 주둥이를 벌려 바둑알을 한가득 집어넣고는 다시 입을 닫게했다.
그리고는 놀랍게도······.
“크악!”
연신 주먹질과 발길질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수도자가 저리 폭력을 쓰는 건 처음 보아서 꽤 재미있게 구경했다. 종후표는 지친 와중에도 혀를 내밀어 대항하려 했으나, 물지 못하게 넣어둔 입 안의 바둑돌과 언 선생이 법부적까지 손에 꽉 쥐고있는 탓에 혀를 내밀지 못했다.
언 선생은 아주 철저한 사내였다.
결국, 종후표의 얼굴은 몰라보게 피떡이 되었다.
나는 건수를 제대로 잡았으니, 언 선생이 연성한 상계 법부적을 뜯어보려는 목적으로 짐짓 과장되게 화를 냈다.
“아니, 언 선생이라도 이 무슨 괴상망측한 짓입니까. 시체 기분 나쁘게 머리를 왜 때려요.”
“그건 저자가 나보다도 더 잘 알 것이야.”
“짧게 해명해라.”
내가 고개를 돌려 묻자, 코피를 철철 흘리던 종후표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솔직했다.
“수도계에 좋지 못한 법안을 발의했다. 힘도 있는 사람들이 속세를 떠나 진법 속에만 박혀 있으니까, 세상 밖으로 나와보라는 뜻에서 강제적으로 주기적인 시체 사냥이나 장벽 보수등의 할당을 내렸다. 다만, 나 혼자 그리한 게 아니고 동조하는 의원들도 많았다.”
줄여 말해 수도계를 탄압하는데 앞장섰다는 얘기.
곧장 광선의 검집에 손이 갔다. 나는 진주언가의 일도 이렇게 되었겠다, 계륵인 종후표를 그냥 죽이기로 마음을 먹었는데 언 선생은 또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흐름을 끊었다.
“아니다. 저놈은 쓸모가 있으니 죽이지마라. 이래저래 아는 게 많은 놈은 맞다. 네게 얘기한 내용은 아마 알고있는 십분의 일도 안 될 것이야.”
“그런데요.”
우리가 그러고 있는 도중에, 조용히 있던 루돌프놈이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마치 자기가 새로운 방법을 발견해 냈다는 듯 의기양양한 목소리였다.
“누가 변절한다고 하면, 칠좌가 나서서 처리하면 되는거 아닙니까?”
“······.”
루돌프의 실로 뜬금없는 개소리에 여러 곳에서 한심한 시선들이 꽂혀들었다.
“왜, 왜요. 왜 그렇게 봐요.”
“칠좌가 그런걸 뭐하러 힘써가며 도와주는데?”
“당연히 인류가 살아남는데 도움이 되죠. 존나 강하니까 안전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잖아요.”
그러자 나 대신 종후표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네까짓 게 뭔데.”
“···?”
“네놈도 당장 발벗고 나서서 자원봉사도 하고, 길거리에 있는 쓰레기도 줍고 흑도도 잡아 죽이고 기부도 하면 주민들이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될텐데. 안전하고 말이야. 하는 김에 강력 범죄자도 좀 잡아넣지 그래. 왜 안하고 여기에 있냐.”
“아니, 그거랑 그거는 다르지 않나······.”
내가 말했다.
“칠좌가 네 일처리 해주는 자원봉사자냐? 쪼르르 달려가서 해 달라면 옳타구나 해주게.”
“······.”
“돌프야. 너는 저기 옆객잔에 있는 호객꾼 양아치들이 우르르 기어와서, 너더러 막춤 한번 춰달라고 하면 좋다고 춰줄거니.”
“술 좀 마시고 존나게 신나있는 상태면요?”
“지랄. 몰래 쫓아가서 퍽치기나 하겠지.”
“······.”
내가 주먹을 슬쩍 들어올리자 루돌프놈이 자동반사로 입을 닫았다. 드디어 개소리가 멈추니 귓구멍이 편해졌다.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칠좌가 무슨 해달란 대로 다 해주는 자원봉사자도 아니고, 세상 편하게 양아치짓만 하면서 살아온 놈이라 현실감각이 저리도 없다.
나는 갑작스레 짜증이 도져서 버럭 화를 냈다. 사실 진주언가가 봉문한 탓에 일이 어그러져 짜증이 난 걸 수도 있지만, 그냥 짜증을 냈다.
“칠좌한테 말한다고 다 들어줄 거면 새끼야, 내가 지금 진주언가를 왜 찾아가는 거니? 그 인간이 산타 할아버지야?”
“······산타 할아버지요?”
“그냥 종후표 이놈 잡아서 칠좌한테 고문해달라 해가지고 그냥 다 불게 만들고 쓸모없어지면 쳐죽여버리면 되지. 그래 안 그래.”
내 답답한 물음에, 루돌프와 종후표가 동시에 기겁했다.
“왜, 왜 그러세요. 알았어요. 진정하세요 형님.”
“진정해라. 지금 너무 흥분했다. 마음을 가라앉혀. 저 새끼는 원래 등신이다.”
“돌프야, 연방 집행관은 왜 필요하니. 응? 말 안들으면 칠좌한테 일러바쳐서 처리 해달라 부탁하면 되는데. 라그나로크 수복전에서는 뭐하러 십이제가 지휘했어. 씨팔 거 삼존칠좌 열 명 불러다가 도시좀 깨끗이 치우라고 시키지.”
“······아, 아니 그냥 해본 말인데 그러시네.”
루돌프놈이 한심한 표정으로 입을 삐쭉 내밀더니 ‘모르면 좀 알려주면 되지 괜히 화를 낸다’ 는 말과 함께 뒤로 물러섰다.
그 뚱한 표정이 굉장히 거슬리는 바람에 나는 황망한 눈을 떼지 못했다. 보면 볼수록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신경질이 솟구쳤다.
사람이 어찌 저렇게 꼴보기 싫을 수 있는가.
아. 그것은 내가 차차 풀어갈 숙제겠구나.
“이제는 사람이 싫구나.”
“다, 다가오지 마시고 거기서 얘기하세요.”
나는 가슴이 턱 막히는 게 갑자기 정신병이 도질 뻔해서 다급히 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올라오는 분노를 잠재웠다. 루돌프놈은 두들겨 맞을수록 외공의 성취가 늘어가니, 폭력 행사보다는 수련을 돕는다는 표현이 맞겠다.
그걸 지켜보던 종후표의 대가리는 한숨을 돌렸다.
“···후우, 대가리가 꽃밭인 놈때문에 화가 옮을 뻔했군.”
* * *
“바둑돌 다 주웠습니다. 선생.”
시간이 조금 지났다.
소란했던 상황이 대강 진정되자, 언 선생은 왕초삼을 무시하고는 다시 입을 열 준비를 했다. 그의 눈빛은 아까보다도 더 심유해졌다. 나는 조용히 언 선생의 말을 경청할 자세를 갖추었다.
이윽고, 언 선생이 말문을 열었다.
“나는 천재다.”
“···오성이 부족해 정신을 바쳐 공법을 익히셨다 했으면서 어떻게 천재가 됩니까? 재능이 대단한 수도자들은 자신의 공법을 창시한다던데요.”
바둑돌을 다 주운 왕초삼이 질렸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놈은 더러운 산발에다 냄새나는 모양새로 정크타운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달라진 거라곤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담담한 눈빛 뿐이었다.
와작.
아무튼 언 선생은 또 어디서 났는지, 부리또를 씹어먹으며 입을 열었다. 조금 오락가락해 보이는 상태였으나, 서로 말이 안통할 정도는 아니었다.
“초삼아, 남이 닦아놓은 길을 빠르게 걷는 사람은 천재가 아니냐?”
“그거야······.”
“자신의 길을 새로이 개척해야만 천재인가? 그렇다면 평생을 바쳐 절세공법을 만들고 죽은 연기경의 수도자가 천재야, 아니면 그 절세공법을 받아 갈고닦아서 화신경을 이룬 수도자가 천재야. 초삼이 네 눈에는 둘 중 누가 더 천재로 보이더냐? 십이제의 수좌인 무당의 진공진인이 천재냐. 아니면 무당의 무공을 창안한 시조가 천재냐. 과연 둘 중 우위를 가릴 수 있겠느냐. 무당의 시조는 진공진인보다 필시 무위가 약했을 것인데?”
“······.”
“나는 고리타분해서 본래의 것이나 지키고 익히는 천재고, 전대의 수도자들이 닦아놓은 길을 빠르게 걷는 천재다. 그래서 신세계니 중경계니 헛소리하며 변절하자는 수도자 놈들을 이참에 싹 치우고, 본래의 수도계로 회귀시킬 생각이다. 본래회귀하고 숨어있는 수도자들을 세상에 끄집어 내놓을 거다. 그래야 세상이 돌아간다. 나는 수도자들의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내 정신까지 공허에 버렸다.”
그래서 진주언가를 치러 가는가.
본심, 저게 언 선생의 본심이로군.
언 선생은 부리또를 먹으면 오락가락 횡설수설하는 사람이지만, 가끔 머리가 탁 트이게 하는 말재주가 있었다. 나는 머릿속으로 언 선생이 한 말을 되감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내게 오늘 하늘의 운이 따르나 보겠다.”
언 선생은 불현듯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고개를 돌려 언 선생의 두루마기 통을 보았다. 아주 빵빵한 것이 당장이라도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언 선생이 쳐둔 진법이 씻은듯 사라졌고 조용했던 객잔의 로비가 언 선생의 음성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출가를 파하고 언가로 회귀한 나는, 진주언가의 봉문진을 부수고 들어가 변절을 주장하는 원영경의 수도자 둘을 죽일 것이다. 한 명은 나의 아비이고, 또다른 한 명은 나의 어미가 될 것이야. 그게 오늘이구나! 이제 그만 먹고 일어나라.”
심후한 법력이 실린 언 선생의 목소리가 울리자.
옆에서 그를 보좌하던 왕초삼 놈도 기다렸다는 듯 따라 일어났다. 언 선생은 이후 유유히 걸어 객잔의 로비 밖으로 나갔는데, 수백 채가 길게 늘어진 남경쪽의 객잔에서 웬 거지들이 배를 두드리며 우르르—몰려나왔다. 게다가 거지들 중에는 기척을 죽이고 있던 걸개도 보였다.
그 기백이 대단한 젊은 행색의 사내.
왕초삼의 스승이자 개방원로 풍령개(風鈴丐).
개방의 장인 용두방주와도 맞먹는 거물이자, 발두르에서 언 선생과 바둑을 나누며 투닥대던 벗까지 있는 걸 보니, 보통 큰 행사가 아니었다.
호객꾼들은 남경 북경간의 무슨 세력전이라도 펼쳐지는 줄 알았는지, 다급히 줄행랑을 쳤다.
하오문주인 독고웅백과의 비무 뒤에 경쟁사인 개방도를 이리도 많이 보다니. 세상은 참 신기하게 돌아간다. 게다가 변절을 주장한다는 원영경의 수도자가 언 선생의 부모였다는 말인가.
“······.”
진주언가의 출가자인 언 선생은, 오늘 개방까지 끌어들여 진주언가의 봉문을 뜯어버리고 문에서 변절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혈겁을 펼치려 마음을 먹은 것이다. 알았다면 수도계에서 난리가 날 것인데, 개방과 한 편을 먹었으니 정보 통제까지 하고 있을 터.
눈앞에서 물 흐르듯 돌아가는 상황을 유심히 주시하고 있던 나는 문득, 그 시절의 언 선생이 발두르같은 촌구석에 숨어 사부작사부작 무얼 하고 있었는지 지금와서야 제대로 알 수 있었다.
나는 전각 밖으로 나온 언 선생에게 물었다.
“허면 발두르 촌구석에서 풍령개 선배에게 법기를 전달받은 것도, 나이 지긋한 개방도들이 자꾸 찾아와 바둑을 둔 것도. 선생의 본가인 언가의 도모를 준비하기 위함이었습니까?”
언 선생이 웃으며 답했다.
“너 기억하는구나. 기이한 놈아! 나처럼 속에 다른 놈이 들어가있는 것 같은데, 다른 놈은 아니란 말이지. 이상하고 기이한 놈. 으하하!”
“하하하!”
그는 뜻모를 말과 함께 박장대소했고, 나도 가만히 있기는 그래서 같이 박장대소했다. 하하하 웃는 소리가 전각의 처마 밑을 맴돌았다.
한참 웃던 내가 언 선생에게 물었다. 나는 이전 발두르에서 법부적을 구걸하던 사내도 아니었고, 왕초삼을 미끼삼아 목숨을 구하려던 사내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와 다른 사내로서 넌지시 물었다.
“선생께서는 무엇하러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언 선생은 어떤 부적을 휘갈겨 쓰며 답했다.
“나는 제정신을 버렸지만, 다른 수도자들은 제정신을 차렸으면 좋겠어서 그렇다. 그러면 좋겠다. 내가 좋으니 한다. 때문에 혈겁에 패륜까지 저지르려 한다.”
“그렇습니까. 실로 그랬군요.”
“기이한 놈아. 너는 도리(道理)가 무엇인 줄 아냐. 도리는 마땅히 앞뒤가 들어맞는 것이다. 허면 나는 태어나기를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앞뒤가 들어맞으려면 사람으로 살다 사람으로 죽어야지. 그게 나 언가가 말하는 도리이자 이치다.”
그것은 언 선생이라는 한 수도자의 신념이었다.
나는 딱히 신념이랄 게 없는 편이라, 신념있는 사람이 부럽고 달가웠다. 신념이 곧게 선 사람은 주위를 감화시킨다. 발두르에서의 나약한 도망자였던 나라면, 감화될 여력도 없이 살아남기에 급급했겠지.
그런데 나는 그때보다는 일신상의 여력이 생겼으므로, 언 선생의 신념에 작은 숟가락을 얹고 싶어졌다.
헌데, 나보다 아힘사가 먼저 물었다.
“사람을 죽이는 병기로 탄생했으면, 마땅히 병기로 살다 죽어야합니까?”
언 선생의 신념과 도리는 아힘사의 존재와 상충한다. 아힘사는 전쟁병기로 태어났으나 전쟁병기로 살다 죽지 않을 것이다.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부분이었다.
허나, 언 선생은 별스럽지 않게 답을 내려주었다.
“나의 부모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요기를 가진 괴물이 되려 함에 나의 도리에 따라 사람으로 죽게 해주려 한다. 병기로 탄생한 이는 지금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아직도 사람 죽이는 병기냐?”
“진정한 열반을 구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괴물로 세상에 나왔으나, 진정한 열반인지를 구하기 위해 병기의 길을 버렸구나. 그렇다면 이제 너 알아서 잘 살다 죽으면 될 일이지. 그걸 누구한테 물어야만 하나?”
“······.”
그에게 물었던 아힘사가 조용해졌다.
언 선생은 상대방이 말을 곱씹게 하는 재주가 있다. 나는 아힘사의 뒤를 이어 개방도들을 이끌고 진주언가를 치러가려는 예비 패륜아, 언 선생에게 물었다.
“언 선생, 그런데 왜 하필 오늘입니까?”
내가 언 선생의 행사에 대해, 가장 궁금한 것이었다.
아무리 천운에 때가 맞아도 하필 이리 맞을 수가 있는가.
“오늘은 운수가 대통해서 두렵지 않은 날이라.”
“설마 나와 연관이 있습니까?”
“응. 공교롭게도 끊겼던 인연을 다시 만났으니, 오래되어 묵은 인연은 끊기 좋은 날이지. 너는 그리 생각하지 않으냐?”
“나를 오늘 보지 않았다면 어찌했을 겁니까.”
“결심이 설 때까지 여기서 거지들 밥이나 먹이며 일 년이고 이 년이고 이 객잔 근처에 죽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오늘 인연을 보았으니, 머리가 뜨끔하여 바로 진주언가로 향해 부모를 죽일 생각이라 진주언가로 향하는 중이라 했다. 바둑판도 그래서 엎었다.”
나는 언 선생의 대답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 선생의 말은 여러번 곱씹고 되감아야해서 머리가 아팠다. 고개를 계속 끄덕이다보니, 두통이 조금 사라지는 듯해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그거 기억 나십니까? 전에 선생께서 나를 두 번 살려주었는데, 그럼 나는 몇 번을 살려주어야 선생이 말하는 도리에 맞겠습니까?”
나는, 지금 언 선생과 진주언가까지 동행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푸하하하!”
그러자 언 선생은 갑자기 앙천대소하더니 곧장 다시 내게 물어왔다.
“그때 쥐여준 상계 법부적이 그리 쓸만했냐?”
“쥐고 있어서 나쁠 건 없었습니다.”
“으하하핫!”
언 선생의 호방한 웃음 뒤로······
경계선을 따라 늘어서 있는 남경의 전각들 앞.
수백의 배부른 거지들이 도열해 있는 것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언 선생과 풍령개를 필두로 한 거지들은 북경으로 가는 경계선을 밟아 넘었다. 그리고 나 역시도 그들을 따라 경계선을 넘었다.
언 선생은 자신을 왜 따라오냐 묻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