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퓨전펑크의 전생자-113화 (113/157)

#113화. 진주언가

#113화.

— 마지막 비무를 기대하고 있겠다.

현경의 경지에 오른 독고웅백은, 마지막 비무를 기대하고 있겠다는 말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다.

그리고 하루 뒤.

화산의 장문인을 통해 전해 듣기로, 화산 근처에 진을 치고 있던 카스트라 뷔에탕은 백 기가 넘는 인형을 일방적으로 잃고 도망쳐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독고웅백은 나와의 약조를 즉시 지킨 것이다.

뷔에탕은 많은 수의 인형을 잃었으니, 당분간은 근거지인 로키로 돌아가 잠잠히 숨을 죽이고 있을 터. 하오문주인 독고웅백은 후에 하오문의 전령까지 보내어 그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개방만큼 정보력이 훌륭한 하오문. 그들은 거지처럼 도처에 깔려있다. 아무리 뷔에탕이라도 10레벨이 된 독고웅백의 경고까지 무시하고 움직일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한낱 인형 따위에 당할 수준도 아니라, 뷔에탕의 본신이 몸을 숨긴 이상 당분간은 안전해졌다.

데구르르-

헌데.

그날 저녁에 화산의 산문으로 죽은 녹림도의 머리가 송달되었다. 흘러나오는 마력을 보니, 종적을 감추었다던 카스트라 뷔에탕의 짓이었다. 심히 부패한 녹림도의 이마에는 날카로운 손톱으로 파낸 듯한 글씨로 이렇게 쓰여있었다.

【 로키 시티, 신동경에서 기다릴게 】

끈질긴 년.

누가 보면 연애편지인 줄 알겠군.

화르륵!

나는 성불하라는 의미로 불쌍한 녹림도의 머리에 불을 질러 화장해 버렸다. 그런데 앞쪽 얼굴이 녹아내리자, 뒤통수에 남아있던 마력이 들불처럼 치고 일어나 또박또박 글자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한 자 한 자에 절절한 살심이 녹아내려 있는 글자들이었다.

【 오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단다. 언제까지 숨어지낼 수 있을 것 같아? 네 부모를 찾아 사지육신을 비틀어야······. 】

과연!

쑥스러웠는지 연애편지 뒷장에 본심을 숨겼는가.

나는 일을 저질러 놓고도 후회를 하는 편이 아닌데, 이번만큼은 내 생각이 틀렸다고 기꺼이 인정했다. 이거 아무래도 보통 거머리같은 년이 아니군.

다행히도 나는 이 세계에서 천애고아로 태어난 덕에, 애꿎은 부모의 사지육신이 비틀릴 일은 없을 듯했다.

그때.

【 반드시 인형으로 나와 여생을 함께할······거야———!!! 】

연신 허공에 욕과 저주를 써 내려가던 글자들이 갑자기 내게 달려들었다. 정크타운 근처에서 잘생긴 시체 공장장을 죽였을 때처럼. 기이한 마력이 끈적한 살기를 풍겨내며 들러붙었다.

하지만.

“더럽고, 시끄럽다.”

화아악—

노선을 틀어 정신을 파고들려는 뷔에탕의 기이한 마력은 내 손짓 한번에 그대로 박살이 났다.

전 십이제가 살심을 담아 남겨둔 마력의 편린과 조각들은, 달려들던 투기가 무색하게도 쉽게 흩어진 것이다. 그동안 나도 괄목상대한 성취를 이루었기에, 앞으로는 저런 사후 저주에 똑같이 당할 일은 없을 듯했다.

더해서, 저 아줌마와 여생을 함께할 일도 없을 테지.

* * *

‘지나간 아줌마는 잊자.’

무너져내린 기암괴석 위.

뷔에탕의 저주를 떨쳐낸 레반은, 지나간 비무를 다시 한번 복기하고 있었다.

499번의 비무가 있었다.

백면서생, 독고웅백과의 400번째 비무부터 레반은 1초식 만에 병신이 되어 화산의 경내를 뒹굴었다. 하루 종일 찢어진 몸을 초인적인 재생력과 정신력으로 기워냈고, 다시 덤벼 1초식만에 병신이 되었다. 그러니 백번의 비무간 막상 초식을 나눈 시간은 몇 분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400번째 비무를 시작할 때와는 달리 시간이 꽤나 지나있었다. 적어도 백일은 훌쩍 넘겼고, 한 4개월 정도가 지났다. 세월은 실로 쏜살같아서 무언가에 깊이 빠져들면 이리도 빠르게 지나가곤 한다.

말인즉, 독고웅백과 무려 네 달 가까이 한 초식만을 가지고 비무를 나눈 것이고. 그 긴 시간동안 9레벨 끝자락 절대고수의 초식을 파훼하려 깊이 사색하고 노력을 기울였다는 말이 된다.

레반은 그 기간동안 얻은 성취가 꽤 마음에 들었다.

“이랬던 적이, 스승 말고 또 있었던가.”

무(武)의 이치에 관해 이리 오래, 깊이 사색한 것은 정신이 화경에 오르고 난 뒤로 처음이었다. 게다가 비무가 잘못되었을 때의 대가는 여지없이 목숨이었기에 백 일이 넘는 시간동안 수많은 고찰과 궁리를 해야만 했다.

현경의 경지에 오른 독고웅백이 레반과의 비무에서 어떤 깨달음을 구했는지, 지금의 그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독고웅백의 모든 공부가 담긴 일 초식을 파훼하려는 무수한 노력 끝에, 확연한 단초를 얻어 경지가 깊어진 참이라 그것에만 신경을 쏟았다. 정신적으로 화경의 초입께 어딘가에서 머물던 레반의 무학은 눈부시게 발전하여, 전보다 한 발짝 더 높은 반열에 둥지를 틀었다.

무려 화경이라는 초월적인 반열에서, 무학의 근원과 뿌리가 더 깊어졌다는 말이다. 틀어진 정기신의 균형 역시 성과를 이루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남궁세가에서 허접한 제왕검형을 쓰다가 죽었던 8레벨 끝자락의 검수 남궁진. 이제 그놈이 극성에 이른 창천무애검법만 쓴다고 해도 베어넘길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부족하나, 9레벨도 머지않았군.’

불현듯, 검을 뽑아 기운을 밀어 넣었다.

우우웅—

내공이 단전에 가득 차지 않았는데도, 초절정 극에 이른 무인만큼 검강을 더 자유로이 뽑아낼 수 있었다. 다르간트가 제작한 광선에는 내공의 낭비를 아껴주는 좋은 효과가 있으니, 실 전투에서도 크나큰 도움이 될 듯했다.

“내공도 당장 크게 부족하지는 않겠어.”

현재 레반의 단전에는 일 갑자 하고도 반갑자를 더한 내공이 잠들어 있었다. 60년간 쉼 없이 내가공부를 해야 겨우 쌓는 양이 1갑자인데, 속옷 바람으로 세상에 뛰쳐나온지 2년 정도 만에 거의 백 년치의 내공을 얻은 것.

그것도 어지간한 심공으로 마구 들여놓은 탁한 내공이 아니라, 절세심법인 무선대지신공으로 정순한 기운만 걸러 쌓은 내공 백 년치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여 마구 거들먹댈 수도 없는 것이, 이 세상은 천고의 영약인 에센스를 무한정 추출하는 미친 세상이라 영약이 귀했던 중원무림처럼 토납한 내공의 양이 엄청나게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당장 베테랑 시체 사냥꾼인 사무라이 륭도, 절정 경지에 오르고도 한참 남아 흘러넘칠 양의 내공을 가지고 있었지 않은가.

출신 좋고, 부모가 돈 많으면 내공 정도는 돈으로도 얻을 수 있는 세상. 그걸 얼마나 훌륭한 무공과 깨달음으로 갈무리하느냐가 문제지.

무공에서의 성과뿐만 아니라 이제 마법마저도 5위계의 반열에 넉넉히 올라 왔다. 그렇기에 휴식기를 가지며 경지를 가다듬을 만도 하건만, 당장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또 레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종후표 그 놈이 제일 문제로군. 쓸만한 놈이라 버릴 수도 없고. 계륵이다. 계륵이야.”

그것은 바로 대가리만 덜렁 남은 종후표.

신선 지망생과 백 번의 비무를 끝낸 탓에 병신같은 몸이 되었는데, 휴식은커녕 앞으로 해야 할 일처리부터 생각해야 한다니. 참으로 병신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지금 화산은 바쁘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화산의 역대 최고 기재이자, 무림계 후기지수 중 제일이라 평가받는 화령검절 청풍이 10레벨 경지에 오른 권제 독고웅백의 진전을 이어받았다.

독고웅백은 권(拳)을 쓰고 청풍이는 검(劍)을 쓰나, 녀석은 규격 외의 대단한 천재라 필시 자신에게 필요한 심득만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독고웅백이 지닌 고유의 성정이나 기억이 같이 섞여들 수도 있는데, 구더기 무섭다고 장 못담그는 것은 아니니까.

······독고웅백같은 초월자의 편린을 구더기라고 표현하는 것도 좀 그렇군.

뿐만 아니라, 레반이 독고웅백과 경내의 기암괴석 위에서 비무를 벌이고 무학의 성취를 얻는 동안 라그나로크 수복전의 공적 분배가 마무리 되었다. 화산도 거기에 한 숟가락 얹었으니, 정신이 없을 것이다.

라그나로크를 수복한 연방은, 이제 8개 거대 도시의 연합이 되었다.

시체의 잔당 소탕마저 끝난 라그나로크 시티로 대형 인프라 관련 기업과 각종 기술자, 건설 기계, 노동으로 한탕 벌고 흥청망청 쓸 생각에 신난 생체기계들이 대거 몰려갔다던가?

인류는 뻗어나갈 땅이 없었을 뿐, 기술력은 좋으니 라그나로크의 땅을 몇 달 만에 갈아엎고 사람이 살아갈 만한 신도시를 만들어냈다.

대형 건설사를 보유한 기업들은 이미 입지 좋은 목을 받아놓고, 신도시 아파트 광고를 백만방도 포털에 때리는 지경이다.

[ 돌아온 신세계! 라그나로크 시티의 첫 프리미엄 주거 단지 『라그나로크 시범 혁신도시 에코월드 센트럴 퍼스트 스카이 메트로 더 프라임 로얄 포레온 1차 시티』 절찬리 분양중! ]

첫 삽도 안 떴는데 일단 분양부터 때려버리는 건설사들의 악독함에 혀를 내둘렀다. 저기도 사람 여럿 죽어 나갈 것이다.

아무튼 도급순위 높은 초대형 건설사들이 벌써 선분양을 시도할 정도로, 사람이 아주 못살 곳은 아니긴 한가보다.

인류의 터전이 하나 더 늘어난 것이라 주민들의 분위기도 나쁘지 않다. 도시가 초고밀집에 포화 상태라 다 같이 쪄죽기 전이었는데, 라그나로크로의 이주가 시작되고 있으니 숨을 좀 돌릴 수 있을 거다.

그런데 의외의 점이 있었다.

[ 잘 지내? 각 편제끼리 전공에 대해 협의 다 끝났어. ]

로라 마르티네즈가 보낸 전령에게 듣기로, 레반에게 라그나로크 시티의 한 필지를 뚝 떼어 주기로 했단다. 심지어 중심부에 세워질 관청과 고급 주택가로 낙점된 핵심지 옆에 붙어있는 노른자 땅이란다.

비무에 빠졌던 동안, 정말 많은 것이 바뀌어 있었다.

“···괜찮긴 한데.”

뭐 당장 팔아서 현금화를 해도 내공 증진에 도움이 될만한 에센스는 살 수 없을 것이라 묻어두기로 했다. 후에 레나에게 권리를 양도해서 알아서 굴리게 내버려 두는 것도 괜찮겠지. 일단은 신경 쓰지 말자.

부스럭-

“대강 정리는 끝났나? 장문인께서 마음이 깨끗이 정리되면 천풍곡으로 올라오라 하셨다.”

슬슬 상념이 끝나가자 누군가 다가왔다. 그는 한쪽 팔이 없는 사내. 수복전의 12조 조장이자 지금은 외팔이 검수인 천무연이었다.

레반은 이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이제야 물었다.

“어째서 사이버웨어 팔을 새로 달지 않았지? 8레벨의 검수라면 문파의 중역인데, 화산에 크레딧이 없는 것은 아닐 테고.”

“그간 팔을 잃어볼 기회가 없었으니, 외팔인 게 수련에 도움이 될까 해서 달지 않았었지.”

“12조장께서는 라그나로크에서의 일로 싸움이 두려워졌던 모양이야.”

“······.”

천무연이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것도 맞다. 매화검수도 결국은 사람이니,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을 보고는 나의 무력함을 절실히 느꼈다.”

천무연은 머리칼이 짧고 선이 굵어 사내다운 인상인데, 겁을 집어먹었노라 순순히 인정해 버리니 그 모습이 특이했다. 레반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라그나로크에서 13조장 슬레모킨을 구하러 갈 때, 12조장인 천무연이 레반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슬레모킨은 죽은 목숨이었을 테지.

해서 레반은 호의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부터 그룹 쪽 사업일을 맡을 건가? 무인으로 대가리가 굳어서 회계나 영업같은 건 힘들지 않나.”

“아니다.”

그러자 천무연은 호쾌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본문에 있는 화산의 모두가 하오문주께 산산이 깨지고도 계속 달려들던 네 모습을 똑똑히 보았는데, 팔 하나 잘렸다고 나 혼자 도망치기에는 새삼 부끄럽지 않겠나.”

그 대답에 레반도 호쾌하게 웃었다.

“그런가? 잘된 일이로군.”

“어서 천풍곡으로 올라가 봐. 우리는 기회가 있다면 나중에 또 보겠지.”

“가장 값비싼 사이버웨어를 달아라. 돈 부족하면 연락하고.”

“······.”

레반이 일어나 유령과도 같은 신법으로 허공을 주파해 사라지자, 기암괴석 위에 홀로 남은 천무연이 짐짓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보면, 내가 조원이 되어 있겠군. 한쪽 팔이 없어 포권을 나누지 못함이 아쉬울 뿐이구나.”

그렇게, 레반이 화산을 떠날 시점이 다가왔다.

청풍 하나만 보고 화산에 들렀는데, 이제는 녀석이 독고웅백의 심득을 소화시키기 위해 기약 없는 폐관에 들어갔으니 더 머무를 생각이 없었다.

천무연이 말한 대로, 독고웅백과의 비무로 부담스러운 화산 문도들의 시선들이 따라붙어서 더욱 부담스러웠다. 때마침 독고웅백이 근처에 도사리고 있던 뷔에탕을 해결해주어 나가려면 지금 나가야 했다.

천풍곡의 처소, 화산의 장문인이 말했다.

“오래 잡아둘 생각은 없었네만, 더 쉬다 가지 않아도 괜찮겠는가?”

“화산의 은혜에 그저 감사드립니다.”

“···음.”

레반이 떠날 마음을 단단히 먹은듯 하자, 장문인 선천자는 붙잡는 대신 아쉬운 기색을 비쳤다.

그래도 선천자는 레반덕에 화산의 보물인 청풍에게 거대한 득이 떨어졌으니 손에 무언가를 쥐어주고 싶어했다. 결국 그는 품속에서 작은 패 하나를 꺼내놓았다.

“가져가라.”

“이게 무엇입니까?”

“대화산의 장문이 보증하는 보은패다. 이 도시에는 정신나간 고수들이 많다. 허나 감히 화산을 상대로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자는 없을 것이야.”

“예, 요긴히 잘 쓰겠습니다.”

보은패를 챙긴 레반은 장문 앞에 포권지례를 올렸다.

전생에서는 자신을 죽였던 화산이, 이번의 생에서는 살리고 싶어하는가.

실로 요상한 인연이라,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 * *

루돌프놈, 아힘사, 종후표.

나는 셋과 함께 화산을 떠나왔다.

“형님, 가기 전에 장벽 바깥에서 식사를 좀······.”

“시간 없어.”

“하······시간이 어떻게 맨날 없지?”

이제 나의 목적지는 수도자들의 가문인 북경의 진주언가(辰州言家)였다. 청풍이 폐관에 들기 전 장문인에게 부탁했고, 장문인은 청풍의 청을 들어주었다. 덕분에 북경에서도 알려져있지 않은 진주언가까지 가는 길과, 화산 장문의 보은패를 비롯한 화산 장로들의 보증서까지 넉넉히 받아올 수 있었다.

“죽을 것 같구나. 배가···나도 배가 고프다! 계속 이런 취급이라면 차라리 죽. 죽이라도 줘라!”

백리뇌부 종후표의 대가리는 아직도 잘 있었다. 가만히 요기를 모아 재생할 때마다 배가 너무도 고픈 루돌프놈이 반쯤 잡아먹기를 반복했으므로, 적당히 힘없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진주언가는 수르트 장벽의 진법을 담당했을 정도로 그 실력이 우수한 수도자 가문. 언가의 수도자하면 진법과 생강시를 비롯한 주술에 통달한 기인들로 여겨진다. 신묘한 힘인 법력을 사용하며 생강시도 제작해온 자들이니, 시체인 종후표의 거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보통 속세와 단절되어있는 삶을 산다. 바깥으로 나와 돌아다니는 언 선생같은 경우가 특이했던 것이지. 조금 걱정은 되었으나 어차피 가기로 마음먹은 것,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어느덧.

“여기가 남북의 경계인가.”

우리는 남경과 북경을 나누는 지역에 도착했다.

폭이 수십 미터는 될 법한 대로 중간에, 하나의 기다란 줄이 가로로 그어져 있고, 그 양 옆으로 거대하고 화려한 전각들이 수백 개나 늘어서 있다.

눈을 사로잡는 건물들은 대로 건너편과 경쟁이라도 하는 양 서로의 불빛을 뽐내기에 바빴다. 앞에서 호객꾼으로 보이는 이들이 대로의 경계까지 나와서 상대편 호객꾼에게 걸걸한 욕설과 침을 뱉고 있었다.

홍등 안에 넣어둔 종후표의 대가리가 말했다.

“이곳은 남경과 북경의 경계가 되는 도시로군. 저 빛나는 중간선을 밟지 마라. 왈패들이 남경과 북경 어느쪽 편이냐고 반드시 시비를 걸어올 테니.”

“등신같은 건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군.”

“무림은 원래 이해할 수 없다.”

“그건 맞지.”

무림계는 분열과 뒤통수 치기가 취미라, 마법계뿐 아니라 저들끼리도 남쪽과 북쪽 두 덩이로 나뉘어 자존심 싸움을 한다. 뭐 아군의 청백전 같은 것이라 그다지 심각한 사안은 아니지만, 고향이 어디냐며 남북경 출신을 따져 박대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들었다.

화산과 남궁은 남경에 있었기에, 수르트 시티 북경은 또 생전 처음이었다. 오늘은 시간이 많이 늦었으므로 언가까지 주파할 여력이 없기에, 우리는 남경쪽의 커다란 객잔에서 하룻밤을 묵고 가기로 했다.

그리고.

“!’

그 커다란 객잔 로비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귀인을 만났다. 객잔의 로비에 들어가자마자 웬 소형 진법이 걸려있어 그만 본능적으로 흩어버린 것인데, 그 안에서 누군가와 바둑에 열중하고 있는 한 사내가 보였다.

한 손에는 커다란 부리또를 들고서는 말이다.

두루마기 통을 둘둘 말아 지고 다니는 사내.

저자를 내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과정이야 어쨌건—

[ 에라, 내가 이딴 촌구석에 천년만년 있을줄 알아? 귀찮게 들러붙지 말고 나가라 이 돌연변이놈아. ]

‘언 선생?’

그는 내 목숨을 두 번이나 살려주었던 언 선생이 확실했다.

발두르같은 촌구석에 천년만년 처박혀있을 생각이 없다던 언 선생. 내게 상계 법부적을 내어주고 쫓아버린 그 젊은 수도자를, 실로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마주친 것이다.

“멈춰라 괴이한 놈들. 여길 어떻게 기어들어 왔느냐.”

“?”

헌데 언 선생은 나를 알아보는 기색이 아니었다. 바둑판에 눈을 고정하고 있으면서도 법력을 일으켜 이쪽을 경계했다. 발두르에 있을 때와는 나의 외형과 기운이 아예 달라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게다가 시체인 종후표의 대가리까지 들고 있었으니, 언 선생은 이리 가까운 거리에서 그걸 몰라볼 사람이 아니었다.

댕—

그는 품에서 작은 종을 하나 꺼내 들고는 즉시 법력을 일으켰다. 종소리를 따라 흩어냈던 진법이 다시 강력히 세워지고, 강대한 법력이 순식간에 공간을 장악했다. 나도 예전과는 보는 눈이 달라졌기에 알 수 있었다. 언 선생은 수도자 중에서도 법력이 심후한 편일 것이다.

“터져죽기 싫다면 그 길로 다시 나가라.”

더해서, 언 선생과 바둑을 두고 있던 자도 아는 얼굴이었다. 딱 봐도 냄새가 고약한 놈이 좋은 건틀릿을 끼고 있었는데, 저놈은 나를 죽일 뻔했던 거지가 확실했다.

이 세계에서 나를 첫 심마에 들게 했던 놈.

“개방의 초삼이도 같이 있었구나.”

“······어?”

“잠시만. 네놈 혹시······.”

그쯤 되어 언 선생도 무언가 이상했는지 나를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얼마간 그러더니, 내가 몇 년전 개방 팔 결개인 풍령개의 겁박에 못이겨 부적을 쥐어주었던 그놈이라는 것을 알고는 결국 화들짝 놀랐다.

“네가 정말 그놈이라고?”

“예.”

“내 피같은 상계법부적을 강탈해간 무뢰배 놈이 맞구나! 허어! 불과 2년쯤 된 일인데, 그간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꽤 많은 일들이 있었지요. 그때 찾아가기로 했었는데, 여기서라도 보았으니 인사부터 올리겠습니다.”

“됐으니까 앉아라. 담소나 나누자.”

그리고 우리는 객잔로비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종후표의 일 관련으로 진주언가로 가는 중이라 하니, 언 선생이 한다는 말은 이랬다.

“나도 본가인 진주언가로 향하는 중이다.”

“마침 잘 되었군요. 같이 갑시다.”

나는 진주언가 출신인 언 선생을 다시 만나 크게 운이 좋다고 여겼다. 악연이든 인연이든 연은 있으니, 화산이 보여준 호의와 합쳐 조금이라도 일을 더 잘 풀어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묘한 표정의 언 선생이 고개를 휘휘 젓고는 말했다.

“북경의 언가 본산은 현재 봉문(封門)했을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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