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신선
#112화.
— 퉷!
높은 기암괴석을 끝끝내 기어올라 또 전투적으로 피가래를 뱉는 레반을 보며, 갈무리되지 못한 의문과 잡념들이 백면서생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백 번을 부수었다. 포기할 기회도 주었다.
헌데 팔이 잘려도, 피를 토해도, 내상이 심해도.
— 다리가 잘렸군요. 하하. 붉은 다리 레반.
대체 왜 미친 사람처럼 기분 좋게 웃는가.
부서진 몸으로 어째서 계속 기어 올라오는가.
어째서 계속 기어 올라와 파도처럼 부딪쳐 오는가.
한낱 각오 따위로 될 것이 아니다.
과거, 강자와의 싸움에서 이런 의문을 느꼈던 적이 있었나.
이것은 수많은 폐관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신선한 감각.
기암괴석을 기어 올라와 비무대에 선 저자는, 격차가 지대하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도 강대한 초식을 하나 둘 파훼해가며 끝없이 등반을 하고 있다. 칠 주야의 여력을 주었더니, 놀랍게도 큰 성취를 이루어 다시 부딪쳐 오기까지 했다.
백면서생은 폐관에 들었을 때보다 많은 의문을 얻었다.
어째서 주먹을 쥐었나.
어째서 주먹을 뻗었나.
자신이 저리 처절히 기어 올라가본 적은 언제였나.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일이다.
‘!’
그런데 초반에는 백면서생의 일 초식조차 버티지 못한 저자가, 놀랍게도 순식간에 열 합을 넘어 다시금 열 합을 버텨내고 호탕하게 웃었을 때. 화산의 산문을 지날적만 해도 기대하지 않았던 감정이 불현듯 들었다.
‘즐겁다.’
바로 즐거움이었다.
약자와의 싸움이 어째서 즐거운가.
그것을 타산지석 삼아, 수행에 도움이 될까 하여?
아니다.
돌이켜 보자면, 강자와의 싸움에서만 희열을 느껴왔다.
그래서 반열에 이른 자들은 백면서생을 싸움광, 전투광으로 평했다.
그런데 지금에서야 새삼 알고보니, 강자와의 싸움에서만 희열을 느낄 수 있던 것이 아니라 싸움을 통해 다음 경지로 갈 수 있다는 무의 욕심에 희열을 느낀 것이었다.
백면서생은, 단순히 저자와 어울리는 지금이 즐거웠다.
그리고 그때가, 삼백 구십 구번째 비무였던가.
백면서생은 레반이 이전에 했던 말을 곱씹었다.
[ 기분이 좋습니다. 훌륭한 기회를 얻어서. ]
하면 저자는 진심으로 비무가 즐거웠는가.
그래서 몸뚱이가 깨져도 부딪쳐 왔는가.
“······좋다.”
그런 생각이 들자, 백면서생은 레반과의 비무 자체가 진정으로 즐거워져 깨달음의 단초를 얻어야 한다는 생각마저 잊어버렸다. 지푸라기라도 잡으려 했던 심정도 같이 버렸다.
“······기분이 좋구나.”
마침내 오랜 잡념들을 단념해버고, 즐겁게 주먹을 뻗기로 한 것이다.
* * *
나는 백면서생의 일초지적, 삼초지적, 칠초지적, 십초지적이 된 뒤 무기를 든 후 다시 일초, 삼초, 칠초지적에 이르렀고, 드디어 두 번째 십초지적을 달성했다.
쾅!
권강의 실타래가 너풀대는 곳에 몸을 던져 열 합을 어울리자, 백면서생은 사백 번째 비무에 앞서 다리를 땅에 박았다.
“앞으로 백 번이다. 너는 반드시 버텨주어야 할 것이야.”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다.
백면서생의 정광은 깊어지고 더없이 진중했으나, 어째서인지 즐거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 백면서생도 나처럼 웃어보였다.
아파도 왜인지 기분 좋은 고통에 웃던 나처럼.
나는 그 때문에 검병을 더욱 강하게 쥐어야 했다. 어찌나 강하게 잡았던지 광선이 부르르 진동했다.
생사결같은 비무에서 비무를 빙자한 사내 간의 싸움이 되었다가 다시 생사결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백면서생과의 비무는, 앞선 스물일곱 번째 비무에서 눈좋은 청풍이 자칫하면 죽는다 할 강도였다. 그때도 충분히 생사결같은 비무였고, 초식이 새로이 바뀐 이백 번째 비무에서는 백면서생이 직접 죽을까 두려우면 포기하라고 일렀다. 여태까지도 한 번 삐끗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전투였다.
그런데 이제야 제대로 깨달았다.
앞선 맨주먹 비무가 그의 일 초식이고.
그 뒤의 옷자락 비무가 이 초식이었으며.
지금 저 백면서생이 삼 초식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 그렇다면 나는 아직도 백면서생의 삼초지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구나.
인정하니 마음이 더욱 편해지고 가벼워졌다.
이제 백면서생도 바뀌고 나도 바뀌었다.
비무장 위의 공기가 선명히 바뀐 기점.
그렇게 사내 둘의 사백 번째 비무가 시작되었다.
사백 번째 비무에 들어서면서 백면서생은, 반드시 버텨달라 말했다. 그런데 나는 어차피 특별한 소득이 없으면 뷔에탕의 손에 죽을 것이라 버텨볼 생각이었고, 다섯 번이나 전생한 놈이 삼초지적으로 끝나면 더럽게 쪽팔려서라도 더 버텨줄 생각이었다.
쾅!
비무가 되풀이된다.
그 시점으로부터도 날이 꽤 지났다.
금일은 ‘사백여섯 번째’ 비무다.
6일간 이루어진 여섯 번의 비무. 백면서생과 여섯 번의 충돌로 인해 비무장이 크게 파손되었는데, 화산이 그룹의 기술자들을 불러 이리저리 둘러보다 결국 수리를 포기했다.
하하.
얼마나 강하게 맞았기에 비무장이 박살났겠나.
사백 번째 비무부터는 한 번의 비무를 펼칠 때마다 입은 내상이 너무도 깊어, 회복과 정양에 꼬박 하루의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다들 당황한 것이 눈으로도 보였는데 이제는 몸이 걸레짝이 되어 기암괴석 어딘가에 빨래처럼 걸리면 누군가 나를 주워다 ‘부활’ 시키는 식이었다. 주우러 오는 것은 대부분 아힘사였다.
지지지직—
“심정지 상태라, 전기로 충격을 주었습니다.”
내가 앙굴리마라의 이름을 버리고 아힘사로 새로운 생을 살아가게 하듯, 이제는 반대로 아힘사가 나의 육신을 살려내고 있었다. 그렇게 나의 육신은 하루마다 새로 갈아치워졌다.
쾅. 쾅. 쾅.
살아난 나는 죽을 각오로 돌에 대가리를 박는다.
정말로, 죽음을 염두에 둔 채 백면서생에 달려들고 있다.
예전부터 대가리박는 거 하나는 잘하니 머리가 깨져도 기분은 괜찮았다. 매일 달라지는 천장에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이러다 대가리를 잘 박으면 정신병도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거듭 정신을 차렸다. 익숙한 하늘이다.
지금이, 사백아홉 번째 비무를 할 차례였던가.
내상을 회복하는 데 워낙 오래 걸리다 보니, 앞선 사백 번의 비무보다 뒤의 여덟 번의 비무가 이루어지는 시간이 더 길었다.
“······.”
누워있는 상태에서 비척대며 고개를 들자, 땅 위에 굳건히 발을 박고 서있는 백면서생이 보였다. 백면서생은 망부석처럼 제자리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백면서생이 괜히 백면서생이 아닌가보다.
얼굴이 허얗고 뽀얘서 백면서생이 아니라, 비무하는 동안 저 얼굴을 백 번이나 봐야 해서 백면서생이다.
아무튼, 이번에는 기절한 뒤 어디에 실려가지는 않은 모양. 나는 무너져내린 비무장 위에 그대로 쓰러져 하늘을 다시 구경했다. 오늘도 하늘은 거뭇했다. 거뭇한 하늘만 보면 우울해질 것 같아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여덟 번에 걸친 비무의 여파. 비무장의 단단한 돌바닥이 무너져내려 딱 백면서생의 발밑만 멀쩡했다. 높은 기암괴석 위로, 기암괴석이 또 솟아난 것이다. 그래서 백면서생을 공격하려면 나는 몸을 가볍게 유지해 허공을 날아야 했으므로 밥도 먹지 않았다.
지금의 비무가 만들어낸 기암괴석 위의 백면서생은 무적자(無敵者)였다. 그는 며칠 전부터 한 가지 초식만 반복하고 있었고, 나는 오직 한 가지 초식을 뚫어내고 있었다.
그는 다리를 두 땅에 박아넣고, 정권을 내지른다. 현란하고 강대했던 백면서생의 초식은 다 사라지고, 기본적인 일직선의 권격으로 형태를 바꾼 것이다.
그러나 그 일직선의 단순한 권격은 비무장 전체를 쓸어버리는 상식 밖의 권격. 피할 곳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낼 수 있는 답은 막고 날아가거나 백면서생을 썰어버리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그 주먹을 썰어버릴 힘은 없으니, 백면서생은 반드시 버텨달라 한 것이다.
남궁천을 상대로 일각도 버텼는데, 백면서생과는 단 일 초에 비무가 갈렸다. 단 일 초만에 튕겨져 날아가고 하루를 꼬박 회복했다.
허나 나는 튕겨져 날아가도 계속 기암괴석 위로 기어오르므로, 비무의 자격을 얻었다. 백면서생은 하루가 지나서 올라와도 언제나 비무장 위 그자리에 있었다. 저 망부석은 거대 암석처럼 깨부술 수 있는 재질이 아니라 나는 운공을 하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래서 몸의 회복을 마치면 백면서생의 앞에서 사색을 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어떻게 하면 즐거이 웃는 백면서생의 일권(一拳)을 파훼한다는 말인가? 보여도 막지 못하고, 너무 빨라 피하지 못한다. 여래신장과도 같은 권격이 비무장 전체를 찰나간 휩쓸어버리니.
매일매일, 나의 고민이 길게 이어졌다.
나는 생사의 기로에서 정기신(精氣神)의 균형이 급격하게 진전을 이루는 것도 모르고. 오직 그것을 고민하고 사색하며 다음 비무를 준비했다. 화경 끝자락 절대고수의 작정한 일 초식을 어떻게 뚫을까. 저 주먹을 어떻게 부술까. 그러다 보니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가겠습니다.”
······사백 열한 번째.
······사백 열네 번째.
······사백 스물두 번째.
······사백 쉰 일곱 번째.
동일한 날이 얼마나 지났을까.
498패가 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나는 498패를 하고는 굉장히 크게 웃었다.
태어나서 이렇듯 수없이 패해본 적은 스승 광마말고는 없었는데, 정말 많이도 날아가고 쓰러졌다.
그리고 나는, 결국 사백 구십 구번째 비무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사백 구십 구번째 비무에서는 자신이 있었다. 기암괴석에 오르자마자 백면서생을 이길 자신이.
1승 498패.
백면서생과의 사백 구십 구번째 비무.
그 비무의 향방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승리였다. 왜냐하면 백면서생은 이번 비무에서 주먹을 휘두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먹을 휘두를 마음조차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색검광을 뿌리는 광선으로 고래 같은 백면서생을 베었다.
서걱-
다음 순간, 백면서생의 미소가 보였다.
* * *
깎아지른 듯한 화산의 기암괴석.
그 위에 생겨난 또 하나의 기암괴석.
상처를 입은 백면서생은 그 자리에 고목이 된 듯 멈춰있다.
그때, 피 묻은 광선이 부르르 떨렸다.
일을 마쳤으니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듯.
“잘했다.”
백면서생을 멋지게 베어버린 광선이 주인공이 되기를 거부했으므로, 나는 광선을 몇 번 쓰다듬어 준 뒤 칼집에 넣어 쉬게 해주었다. 백면서생과 사백구십 구번의 비무를 거친 광선은 끄떡없었다. 내 몸만 병신이었다. 역시 전설의 드워프 다르간트라 생각하며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라보았다.
푸화악!
광선이 낸 백면서생의 상처에서는 걷잡을 수 없이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그런데 그 선혈은 금세 황금빛으로 물들더니, 금색의 꽃으로 변했다. 곧 화산의 매화꽃 배경에 백면서생의 전신에서 사리처럼 뿜어져나오는 금화(金花)가 섞여 들었다.
금화의 폭포수.
곧이어 청,적,흑,백,황의 빛이 하단전에서부터 흘러나와 백면서생을 휘둘렀다. 백면서생이 쌓아온 내공으로 빚어진 오색광은 금색의 꽃에 섞여들었다.
그것은 삼화취정(三花聚頂)이자 오기조원(五氣朝元).
······처음에 빠져나온 금화들은 삼원을 이루었으나 다음에는 허공에 뭉쳐져 오색의 고리를 만들어냈다. 백면서생의 몸에서 금빛과 오색광이 같이 비쳐흘렀다. 그 오색광은 나의 애병, 광선이 보인 오색검강마저도 잠시 덮어 퇴색되게 할 정도로 밝게 빛났다. 광선을 미리 집어넣기를 잘했다.
그렇게 화산파 자색빛의 매화꽃 조명 위로 오색금광의 꽃들이 깔리니, 내가 5위계에 오른 뒤 암석을 가랑비로 부술 때만큼 신묘하고 장엄한 광경이 펼쳐졌다.
화산파의 문도들은 어느새 사실을 알고 나왔는지, 수십 개의 기암괴석 위를 개미처럼 빽빽하게 메우고 있었다. 절벽의 산등성이에서 훌쩍 날아온 화산의 장문인, 선천자가 입을 열었다.
“생의 경지를 곱씹고 있구나.”
곧, 오색금화들은 거대한 한 송이 꽃으로 뭉쳐져서는 오색영롱한 금화송이가 되어 어두운 허공을 밝혔다. 그러고는 또다시 나뉘어 수많은 오색금화가 되기를 반복했다.
옥예금화(玉蘂金花)에 천화난추(天花亂墜).
“······.”
내 옆, 청풍의 눈동자에도 금화의 황금빛이 비추었다.
그러나 청풍이는 화산의 사람이라, 매화의 분분한 자색 빛을 더 좋아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청풍이는 허공 금화에 박힌 눈을 억지로 떼고는 내게 물어왔다.
“형장, 언젠가 저 금화보다 나의 매화가 더 찬란히 빛날 수 있겠소?”
저걸 보고도 더 환히 빛날 생각이라니, 녀석의 향상심은 실로 끝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든 생각에 나는 청풍이를 둔재라고 부르기로 했다.
“가끔 천재보다 둔재가 나을 때도 있다.”
“둔재라니, 나는 저리될 수 없다는 소리를 돌려 하시는 거요?”
청풍이는 정신이 없는지, 오랜만에 내게 따지고 들었다.
언제나 서글서글한 면이 있어 의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첫 대면을 떠올려보면 말이 많은 놈이고, 아직 약관밖에 안 된 젊은 놈이다. 나는 이놈이 너무 천재라 갓 청년의 나이라는 것을 가끔 망각하고는 했다.
어느 때는 무에 달관한 놈 같으면서도, 어느 때는 치기어린 아이 같다.
나는 청풍이가 갑자기 부러워져 입을 열었다. 역시 젊은 게 좋다.
“보라는 말이다.”
“?”
“눈을 돌리지 말고 봐라. 재능을 타고난 너의 향상심이 너도 모르는새 치기로 바뀌기 전에. 머리를 비우고 눈에 담아둘 때도 있어야 한다. 둘도 없는 천재에게도 과유불급이라는 말은 통용되어, 성급하면 둔재보다도 느려진다. 욕속즉부달이라고, 빨리 가려다간 미끄러지더라. 내가 예쁜 매화를 따서 빨리 가려다가 죽었다. 마음에 둔 여인에 눈이 멀었지.”
앞은 나의 스승인 광마가 해주었던 말이고, 뒤는 내가 덧붙여 하는 말이다.
“······.”
“너는 어리니 벌써부터 눈이 멀 필요 없다. 사실 내가 보기에 별로 밝지도 않다.”
그 말에 청풍이가 잠시 멈춰있더니, 만간에 대강 알아들었는지 멋쩍게 웃고는 말했다. 녀석은 머리에 두른 매화건을 풀러 다시 묶었다.
“······하하! 이거 들렸다간 경 치는 거 아니요?”
“몰라. 좋은 날인데 한 번은 봐주겠지.”
우리가 그리 담화를 나누는 사이.
지나온 경지들을 하나하나 곱씹은 백면서생의 육신이 내공과 섞여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광선이 낸 상처로부터 시작된 변화는 이제 극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꼭 허물을 벗는 매미처럼 보였다.
금선탈각(金蟬脫殼).
이윽고, 허물어지던 육신이 갈무리되어 사람의 형상이 생겨났다.
나는 눈을 떼지 않았다.
탈각마저 끝나자, 이전과는 아예 다른 사람이 기암괴석 위에 서있었다. 청년과 중년 사이의 호리호리한 문사는 어디가고 청풍과 비슷한 연배의 청년이 눈을 감고 기암괴석 위에 둥둥 떠있었다.
그의 발은 땅이 아닌 허공을 밟고 있었으며, 반박귀진을 넘어섰는지 사람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등봉조극(登峰造極)이다.
과히 신선의 경지라는 현경(玄境).
백면서생은 어떠한 깨달음을 얻어, 오늘 화산에서 신선이 되었다.
세상에 또 한 명의 10레벨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제야 백면서생에게 물어볼 수 있었다. 저 밑에 있을 루돌프놈과 종후표처럼. 사내들은 보통 치고받은 뒤에 친해지므로, 우리는 사백구십 구번이나 치고받고 뒤늦게 통성명을 하는 것이었다.
“고인께서는 누구십니까?”
눈을 감고 있던 백면서생이 답했다.
“나는 백만의 교인을 거느린 숭무교(崇武敎)의 교주이고, 이백만의 아랫것들을 거느린 하오문(下五門)의 주인이자, 때때로 십이제의 권제(拳帝)가 되는, 독고세가(獨孤世家) 최후의 생존자 독고웅백이다. 너는 누구냐.”
독고세가.
먼 과거 변절한 연방의 전설이 수천만 명의 주민을 학살하고 인간의 피로 수영장을 만들었던···그 도시를 지배하던 가문이었던가.
게다가 하오문주.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
대단한 경지를 이루었음에도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 묻는 것을 한점 부끄러워하지 않더니, 그는 실제로 가장 낮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하오문의 문주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런 사실이 뭐가 중요하겠는가?
사내끼리 몇백 번을 치고받았으니 이름을 주고받을 차례 아니던가. 그런데 나는 세상에 제대로 나온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십이제 독고웅백처럼 떠벌리며 자랑할 거리가 없었다. 그러므로 자랑은 접어두고 포권만 했다.
“레반입니다.”
“레반.”
“예.”
백면서생은 갓 태어난 아이처럼 눈을 감은채 말했다.
“나는 거대한 벽을 부수어 법칙도, 순리도 초월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런데 내가 독고세가 최후의 생존자라 후계가 없다. 그래서 단초를 제공한 네게 넘기마.”
딸칵.
아주 작은 소리가 왜 그리 크게 들리는지.
숭무교주이자 하오문주, 십이제중 권제 독고웅백.
그의 태양혈. 관자놀이 부근의 살갗이 천천히 일어났다. 곧이어 독고웅백의 관자놀이 바깥으로 하나의 칩이 쩔걱대며 빠져나왔다. 저만한 경지를 이룬 사내의 머리에서 칩이 빠져나오는 광경은, 평생에 한 번도 못볼 진귀한 것이었다.
백면서생, 독고웅백이 말했다.
“나의 깨달음이자, 심마에 대한 해법이다. 법칙에 얽매이지 않고, 무의 이치를 잊는 바. 나는 강을 건넜으니 배를 버린다. 내 배의 다음 사공은 네가 해라.”
울림이 있는 말이었다.
허나 나는 시체 사냥꾼, 륭의 인격 메모리칩을 오랜만에 꺼내었다. 그것은 줄에 매어져 있었는데 그간 한 시도 몸에서 떼어버린 적이 없었다.
“이미 노를 젓고 있어, 다른 배는 불필요합니다.”
완곡한 사절.
저걸 받으면 독고웅백이라는 사람이 내게 섞일 것이다.
나는 온갖 심마와 정신병력이 충만하여 다른 사람의 마음과 생각까지 들일 여유가 없었다. 그랬다간 머리가 터져버리고 말 것이라.
그러자 독고웅백이 서운해하지도 않고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허면 둔재, 이제부터 네가 저어라.”
“!!!”
독고웅백이 청풍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칩을 던졌다.
청풍이놈은 얼떨결에 그걸 귀하게 받아 들고는 눈이 동그래졌다. 그럼에도 얼굴은 계속 헌앙해서 좀 부러웠다. 역시 사람은 외형이 중요한지, 괜히 죽 쒀서 개 준 기분은 들지 않았다.
아까 청풍이와의 대화는 다 듣고 있었나보군.
아무튼 청풍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린 백면서생, 독고웅백이 말했다.
“너는 이제 한 치 뒤처지던 둔재에서 천재가 될 수 있다, 좋은 머리로 좋은 것만 익혀 저놈을 눌러주도록 해라.”
“······.”
그 말에, 청풍이 망부석처럼 굳었다.
매화꽃 조명이 켜진 화산의 새벽은 조용했다.
독고웅백은 나의 스승이 아니었으나, 나는 독고웅백의 큰 가르침을 받고 목숨도 구했으므로 구배지례를 올릴 생각을 했다. 정기신의 균형이 크게 진일보하고, 화경에 이른 정신을 더 완숙한 경지까지 한 발짝 더 밀어놓은 사내의 아집이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독고웅백은 무공에 미쳐있는 사내라 나의 구배지례를 신경도 쓰지 않고 받지도 않을 것이므로, 포권지례로 대신하는 게 나을 듯했다.
독고웅백은 내가 정중히 포권하자, 천천히 감은 눈을 뜨고는 입을 열었다.
“오백 번중, 한 번의 비무가 남았다. 어쩔 테냐.”
나는 독고웅백의 질문에 고개를 더 숙였다.
“오래 가지 않아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