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백 번 남았다.
#111화.
퉷!
나는 백면서생이 누군지 묻지 않았다.
저 양반도 자기 입으로 말하진 않았으나···
수복전의 전선에서 세력을 지휘하고, 네임드를 때려잡았던 진공진인이나 로라 마르티네즈와 같은 반열에 있는 절대고수가 틀림없다.
적어도 완벽한 반박귀진의 지경을 이루었으니···십이제(十二帝)중 한 명인가.
그런 거물이 갑작스레 화산에 나타나 이러는 것을 보면, 내게 호의를 보인 로라 마르티네즈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가장 크겠고. 어쩌면 남궁이나 화산 장문인 선천자가 흘렸을 수도 있겠지.
아무튼, 저 백면서생의 정체가 무엇이든 한참 후배에게 비무를 청하더라도 다음 경지를 절실히 밟고 싶어하는 무인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을 터.
“잠시 내상을 다스리겠습니다.”
“얼마든지.”
가만히 선 채 기운을 전신으로 돌리며 숨을 고른다.
나는 연방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장 내가 화산 밖으로 빠져나가 안전히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이 백면서생이 단초를 얻도록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뭐, 뷔에탕의 인형이 화산의 경내까지 숨어든 이상 청풍이가 발벗고 나서 도와주기야 하겠지만, 20년간 연방과 메가콥의 추격도 피했던 뷔에탕이 그걸 멍청하게 당해줄 리가 없다. 잠시 로키로 물러났다가 내가 혼자있을 때 다시 돌아와 쳐죽이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러나 백면서생급의 강자라면, 말이라도 듣겠지.
나는 백면서생이 뷔에탕을 죽여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 아줌마는 그냥 대가리좀 몇 대 때려서 보내주기만 하면, 내가 나중에 어련히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지금 나의 수준으로 어찌 단초를 주느냐가 문제군.’
무공의 성취에 대한 욕심이 있고, 수련광의 모습도 있다면 그간 사람의 몸으로 해볼 수 있는건 다 해봤을 터.
애초에 재능이 없으면 7레벨 이상으로 올라오는 것도 힘들어서, 일단 비무중에 미세한 영감이라도 얻으면 자기가 알아서 꽉 붙들 것이다.
다만 백면서생의 경지가 지극히 높다는 게 큰 걱정인데.
정크타운.
사무라이 륭이 6레벨에서 절정의 벽에 막혀있을 때, 내가 무아의 검로를 유도해가며 깨달음을 주었고 결국 경지 상승을 유도할 수 있었다.
일류에서 절정. 그것은 대단한 진일보다.
허나 백면서생은 최소 화경 이상.
화경에서 그 이상의 경지로 가는 벽은 겪어본 적도 없고, 그야말로 신선의 길을 걷는 수준이라 나조차도 정확한 방법을 알지 못한다.
상단전을 열어젖혀 화경 수준의 심득까지는 무난히 깨달았는데, 그 이상은 나도 다섯 번의 삶 동안 도달해보지 못한 경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면 올랐을 것이나, 계속 젊은 시절에 죽어버린 바람에.
물론, 그것은 앞에 있는 백면서생도 마찬가지일 터. 오백 번의 기회가 있으니, 한 번 머리를 감싸쥐고 여러가지 다 해보는 식으로 가자.
나는 내상을 적당히 다스리고는 슬슬 입을 열었다.
“시작하시죠.”
“그러마.”
백면서생의 첫 초식은 탄지신공(彈指神功).
조금 전에 인형을 부숴버렸던 지풍이었다.
쾅! 쾅! 쾅! 쾅!
그리고 나는 총 다섯 번째 비무가 진행될 때까지, 백면서생의 그 첫 초식을 버티지 못했다.
고작해야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는 거다.
눈으로 다 보고 있는데도, 손가락에서 쏘아진 지풍따위를 흩어내거나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
실로 어마어마한 힘의 격차. 백면서생의 생사결같은 비무라는 말이 들어맞았다. 거력이 담긴 지풍을 못 막으면 죽을 것이라, 일단 힘겹게 막고 멀리 날아간 뒤에 절벽을 꽤나 기어 올라와야 했다.
퉷!
여섯 번째 비무부터는 지풍을 방어하고 멀리 튕겨나가진 않았으나,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쾅! 퍼걱!
그리고 나는 열한 번째 비무에서 드디어 첫 초식 지풍을 성공적으로 흘려내고 다음 초식까지 볼 수 있었다.
백면서생의 두 번째 초식은 권풍(拳風).
“후우—”
나는 태산같은 권풍에 직격당해 피범벅이 된 몸으로, 기운을 세맥으로 돌려 내상을 다스렸다.
단단한 기암괴석도 박살 내버리는 지풍보다 수 배는 더 강력한 권풍이 연속으로 날아오니, 아주 큰 부담이었다.
“······호오.”
그래도 백면서생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삼 초식을 못 버틸 것이라 무려 오만 번의 비무를 하자고 한 양반인데, 고작 열댓 번 만에 일 초식을 넘겼으니 놀라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후의 과정이야 어쨌건 버틴 건 버틴 거라.
퉷!
“다시 시작하시죠.”
“좋다.”
그렇게 나는 스물일곱 번째 비무에서 권풍까지 버텨내고 다음 세 번째 초식을 보았다.
콰과과광!
앞선 두 합은 원거리 지풍과 권풍이었으나, 세 합부터는 공력이 실린 진짜 주먹에 맞아 화산의 산문까지 튕겨져 날아갔고, 충격이 심해 전신의 뼈가 으스러지고 뒤틀렸다.
‘아프군.’
부서진 뼈가 장기를 찌르는 것은 막았어도 내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산문을 지키던 화산파 무인의 도움을 받아 다시 비무대 위로 기어 올라왔다.
백면서생은 진행되는 비무마다 초식을 달리하지 않았다. 그저 막아볼 테면 막아보라는 듯, 피할 거면 피해보라는 듯 동일한 초식을 사용했다.
그것이 내게 하나의 숙제가 되었다.
일 초, 지풍.
이 초, 권풍.
삼 초. 단순히 주먹을 강하게 내뻗는 권격.
나는 적응이 빠른 사내다.
그러나 저 간단한 권격을 못 막는다.
마법은 어림도 없고, 광선의 검기도 무용하다.
그야말로 삼초지적(三招之敵).
고작 세 합도 버티지 못하고 있군.
쿨럭-
나는 주먹에 맞아 낙지처럼 흐물거리는 몸을 이끌고 기암괴석 위로 기어올라온 뒤, 조용히 가부좌를 틀었다.
“화산 속가의 명의들을 본산으로 즉시 불렀소.”
“어, 고맙다.”
다행히도 청풍이 이 비무를 눈이 빠져라 보고 있었기에 외부에서 훌륭한 의원들을 불러와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거기다 든든한 6세대 나노로봇이 있으니, 이런 식의 비무 방식에는 참 잘 어울렸다. 나는 운공으로 체력을 회복하고, 주변의 마나까지 빨아들여 몸을 치료했다.
“형장. 자칫 틀어지면 정말로 죽을 듯한데, 괜찮으시겠소?”
“괜찮다. 지켜보는 게 도움이 좀 되나?”
“······아직은 잘 모르겠으나, 솔직히 말하면 더 지켜보고 싶긴하오.”
“알았다. 내가 고생하마.”
나는 부상의 정도가 심했던 것 치고는 아주 빠르게 완치되었고, 반나절도 되지 않아 다시 비무에 돌입할 수 있었다.
몇 번의 비무가 더 지났다.
가끔 누가봐도 심각한 부상이 생기면, 백면서생도 직접 나서 진기를 주입하는 등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어차피 비무의 결과는 내내 삼초지적.
그럼에도 백면서생은 전혀 지루해하지 않고 기꺼운 얼굴로 비무를 받아주었다. 와중에 나는 현재까지도 가벼운 백면서생의 주먹을 보았다. 아무런 무기도 없는 맨주먹. 아직 백면서생은 전력을 다 꺼내지도 않았다.
쾅!
그날은 정확히 삼십 번의 비무를 겪고, 그만 정신을 잃어 다음 날로 넘어갔다.
다음날 비무장.
“오호, 이럴수가······!”
나는 백면서생과의 오십 번째 비무에서 자그마치 다섯 합을 버텼고, 예순일곱 번째 비무에서 여섯 합, 구십 번째 비무에서 일곱 합을 버티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백면서생의 경지는 최소 화경의 끝자락 즈음이다. 하기야 그쯤 갔으니 깨달음을 줄 단초를 눈에 불켜고 찾아다니고 있겠지. 9레벨중 거의 최상위권이지 않을까 싶다.
“놀랍구나.”
다만 그는 이따끔 놀라기만 할 뿐, 구십 번째 비무동안 딱히 깨달은 것은 없어보였다. 당연했다. 나는 근근이 버티고만 있는 중이라. 사실 내가 아니라 9레벨을 여기 데려다 놓아도 저 거물을 상대로,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거다.
콰과광!
백면서생과의 비무는, 일곱 합에서 턱 막혀 진척이 멈추었다.
퉷!
나는 다음 수십 번의 비무간 백면서생의 강력한 칠 초식을 파훼하지 못하고 있다. 남의 눈에 보이기 싫어 최대한 자제하고 있던 오형검의 수를 꺼냈음에도 마찬가지다. 사실 못한다기보단 할 수 없다는 게 맞았다. 파훼할 길은 보이는데 육신이 따라가질 못하니.
도무지 진전이 없다. 절대 못 막는다 칠 초식은.
실은 억지로 막으라면 막겠는데, 그러면 비무는커녕 남은 한 평생을 죽만 먹고 살아야 할 거다.
그래서 안 되겠다고 말했다.
“안 되겠습니다.”
“포기인가?”
백면서생이 물었고, 고개를 저었다.
포기라니.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8위계 대마법사의 로브자락도 찢어버린 무시무시한 사내다. 그때가 마법의 경지로 6위계에 가까운 5위계에 무공으로는 초절정 수준이었다.
그러니까 그때처럼, 마법 수준이 5위계는 되어야 뭐라도 해볼 성 싶었다.
5위계 마법사에 초절정 무인.
이 세계의 기준으로 각각 7레벨과 8레벨이면, 백면서생의 칠 초식도 막을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칠 초를 깨려면, 마나 회로 하나를 더 쌓고 와야겠습니다.”
“그게 말처럼 쉬이 가능한 일이 아니다.”
“많이도 필요 없으니, 칠 주야의 여력만 주십시오.”
“······칠 주야? 그렇다면 알겠다.”
백면서생은 일주일의 시간을 허락했다.
나는 그즉시 청풍에게 부탁해 보유한 크레딧을 모두 에센스로 바꾸고, 특별대우로 천풍곡 구석의 작은 전각을 얻어 다섯 번째 고리를 엮기 위한 폐관에 들어갔다.
천풍곡 구석 전각 앞에는 집채보다 거대한 암석이 있었는데, 나는 일주일간 폐관에 들기 전에 4위계 공격 마법으로 암석을 한 번 밀어보았다.
콰과광! 구르릉—
허나 정말로 꿈쩍조차 하지 않는 단단한 암석.
나는 머리를 끄덕이며 폐관에 돌입했다.
“아힘사.”
“네. 역장을 가능한 최대로 작동. 맞습니까?”
“아니. 진정한 열반의 길을 찾는 건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 어찌, 내 옆에 머무는게 도움이 되고 있나 궁금해서.”
“······작동하겠습니다.”
우우우우웅—
나는 눈빛이 가라앉은 아힘사의 방해역장을 최대로 견디며 회로를 굴렸다. 심장 부근이 조여 그대로 터져버릴 것만 같았으나, 백면서생의 주먹질보다는 덜 고통스러웠다는 게 한 줄기 위안이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나는 또 다른 비무를 겪고 있다.
“레반, 땀을 많이 흘리는데 괜찮으십니까?”
“아직은 괜찮다.”
회로 네 개인 4위계와 다섯 개인 5위계.
그것은 무림계에서 초일류와 절정의 깊은 간극처럼, 아예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는 거대한 기준선.
5위계부터 제대로 된 상위 마법사 취급을 받는다.
왜냐하면, 회로가 많을수록 다수의 마법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고 마법의 위력도 껑충 뛰기 때문이다.
루벤카가 마탑의 설산에서 근방 수십 미터를 홍염으로 불살라버린 것도, 5위계의 경지에 이르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전생에서 왕국 마탑 벽면에 새겨진 한 비사를 보았는데.
— 4위계까지는 한 명의 마법사가 되어가는 과정이고.
— 5위계부터는 완성된 마법사로서, 신화적인 경지인 9위계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이다.
······라고 배웠다.
9위계.
라아기스 대륙의 최강종, 용(龍)과 동일한 경지.
제국의 ‘위대한 세 별’ 이라고 불리는 노괴 대마법사도 8위계였는데, 그보다도 한 단계 진보한 신화 속의 얘기.
라아기스 대륙의 모든 마법사는 그 경지를 꿈꾸었다. 9위계라면 이곳의 기준으로는 11레벨쯤이 되겠군.
그리되려면, 완성된 마법사의 기준선부터 넘어야겠지.
나는 첫 토대가 되는 두 개의 마나회로를 아주 잘 다져 놓았고, 마음껏 힘을 쓸 수 있는 비무 동안 성장한 것도 없지 않았다. 무엇보다 로라 마르티네즈의 육신 재구축이 일주일이란 시간을 알차게 쓰는 데 도움이 크게 되었다.
주변의 마나가 회로와 동화되어 과열도 잘 되지 않는 회로를 미친듯이 혹사했다. 그것도 아힘사의 방해역장을 받으며, 심장이 터져라 굴려댔다.
값비싼 에센스를 아낌없이 마시는 것은 물론이고, 분에 넘치는 마법도 마구 사용해가며 서둘러 네 번째 회로의 단조 단계에 들어간 것이다.
자그마치 칠 주야.
나는 칠일밤낮을 쉬지 않고 마법을 사용했다.
심지어 알 헤임달의 다르간트가 직접 손봐가며 업그레이드한 아힘사의 배터리가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나는 네 번째 회로를 쉬지 않고 두들겼다. 나중에는 말할 힘도 없어 아힘사와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어야했다.
그래서, 내 오주야의 기억 속에는 아힘사의 자홍빛 눈동자만이 남아있다.
그리 뜨겁게만 흘러가던 어느 날이었다.
늦은 새벽이라 화산의 매화꽃 조명들이 밝고 환하게 피어난 날, 나는 폐관하던 전각에서 나와 집채만한 암석을 바라보고 섰다. 4위계 공격 마법으로도 꼼짝조차 하지 않던 놈이다.
한참을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거대하고 단단한 암석.
“······.”
나는 그 암석 앞에서 입을 천천히 열었다. 화산의 전각 근처를 농밀한 마나가 휘감고 있었는데, 그 마나들이 허공의 극점으로 일순간 응축되었다.
“떨어져라.”
쾅!
이윽고, 극점에 응축되었던 마나의 빛줄기가 공중에서 낙하해 암석의 중간을 꿰뚫었다. 작은 암석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강력한 위력이었다.
그러나 나는 거기서 음성영창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 떨어져라. 더 줄기차게 떨어져라.”
그러자 극점의 마나가 격렬하게 반응했다.
극점에 모인 그것은 상공에서 순간 폭발하듯 드넓게 펼쳐지더니, 두터운 마나로 이루어진 먹구름이 되었고 어느 순간 응축된 마나의 덩어리를 빗물처럼 쏟아내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쾅! 광!
상단부에서부터 천천히 깨져나가는 암석.
“···됐군.”
5위계 광역 마법, 「 가랑비 」
거대 암석은 쏟아지는 빗물에 몸을 숨길 곳이 없어 작은 돌가루로 해체 되어가기 시작했다. 화산의 붉은 매화꽃 조명을 배경으로 푸른 마나의 빗물이 떨어지니, 나는 그것이 상당히 조화로운 듯하여 넋을 잃고 구경했다.
* * *
칠 주야가 흘렀다.
“······.”
백면서생은 설마설마했으나, 정말 매우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분명 백오십 번째 비무까지 칠 초식에서 진전이 없었는데, 고작 칠 주야 폐관의 성과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보란듯이 두 합을 더 버텨낸 것이다.
레반은, 첫 비무부터 무려 아홉 합을 버텼다.
그리고 레반은, 백 칠십 번째 비무에서 마침내 열 합을 버텼다.
산산조각으로 찢겨나가는 몸을 악으로 깡으로 버텨낸 레반보다, 도리어 백면서생이 더 크게 감명받은 얼굴로 말했다.
“좋다. 좋구나.”
비록 비무하는 시간보다 절벽에서 기어 올라오는 시간과 회복을 기다리는 시간이 훨씬 더 오래 걸렸으나, 백면서생은 한 번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너는 나와의 싸움에서 열 초식을 버텼다.”
백면서생은 수십 년이 넘는 세월을 벽에 막혀 있었다. 긴 세월간 해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에서야 이해해 보지 못할 일을 마주했으니, 이제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고 싶은 심정이 더욱 강해졌다.
“좋다. 이럴 마음까지는 없었으나, 기왕 이리된 거 제대로 하자.”
그때, 백면서생이 드디어 무기를 꺼내들 기미를 보였다. 여태껏 맨손으로만 비무를 펼쳤기에 레반도 백면서생의 무기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러시죠.”
쫘악—
백면서생은 품이 넉넉한 의복을 입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단숨에 찢어버리더니, 팔과 주먹에 붕대처럼 둘둘 둘렀다.
그러고는 자기 어깻죽지에 손가락을 그어 피를 냈다. 아래로 흘러내리는 피가 붕대처럼 감은 옷가지를 적시자 옷이 축축해져 주먹에 달라붙었는데, 피에 젖은 옷가지 위로 권강(拳罡)이 형성되었다.
우우우우웅—
그런데, 권강의 규모가 너무도 비대했다. 농담 조금 보태서 레반이 저번에 부수었던 암석 정도. 안력을 돋구어 확인한 레반은 그 이유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백면서생의 찢어진 옷자락. 그러니까 실보다 가는 의복의 섬유 한 가닥 한 가닥마다 백면서생의 강기(罡氣)가 스며들어 있던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주먹 이상으로 크게 부풀어 보이겠지.
스치기만 해도 죽는 강기의 실이 거대하게 나풀거린다.
‘대단한 권사로군.’
게다가 넉넉한 의복에 가려져 있던 상반신이 드러나자, 그에게는 이제 더이상 백면서생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았다. 풍기는 기세마저 달라졌다. 호리호리하던 백면서생은 어느새 수라(修羅)의 기백을 지닌 사내가 되어있었다.
레반이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비무라고 하지만, 상대의 의지를 이렇게 꺾어도 되나? 물론 백면서생은 그따위 하찮은 부분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죽을까 두려우면 여기서 포기해라.”
“······.”
바만차, 남궁천과 같은 9레벨급이라도 존재의 격이 다르다.
육신에서 뿜어지는 저 거대한 중압감과 박력만 보아도, 남쪽의 어머니를 손으로 북북 찢어버렸던 묘왕(卯王)을 연상케 한다.
이것이 생사결같은 비무가 아니라 진짜 생사결이었다면? 아마 싸워볼 각오보다는 다음 생으로 넘어가도 열심히 살아볼 각오를 다지고 있었으리라.
“좋습니다.”
“포기하겠나?”
“기분이 좋습니다. 훌륭한 기회를 얻어서.”
“그건 나도 그렇다. 내게도 좋은 기회가 꽤 남아있구나.”
중원무림도 아니고, 이 세계에 와서 총칼이 아닌 주먹과 맞선적이 있던가.
한 번 물리면 좀비꼴이 되는 터라 자연스레 거리를 벌릴 수 있는 병기들이 유리한 세상. 이곳에서 권법은 사장된 무술이나 다름 없어 더욱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레반은 즉시 백면서생과의 비무를 재개했고.
쾅!
이전에는 열 합까지 버텨냈는데, 그가 주먹에 옷자락의 강기를 두르자마자 곧장 두 합으로 다시 떨어졌다. 숙제같던 초식도 조금 바뀌어 초기화되었다. 그래도 다행히 적응을 빨리 해 세 합까지는 돌아왔다.
그때가 총 이백 번째 비무였다.
첫 초식. 왼쪽 주먹에서 쏘아낸 권강더미.
이 초식. 오른쪽 팔꿈치.
삼 초식. 알 수 없음.
퉷!
레반은 다시 삼초지적이 되었다.
이제 삼백 번의 비무 기회가 남아있다.
레반과 백면서생은 특별히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백면서생이 묻지 않으면 레반도 입을 열지 않았다. 별달리 나눌 말이 없었다고 보는게 맞으리라.
레반은 보이지도 않는 백면서생의 삼 초식을 파훼하기 위해 꽤 갖가지 무공을 섞어 사용했다.
그러나 놀라는 기색 하나 없는 백면서생의 강력한 삼 초식은 일말의 자비가 없었다. 5위계에 올라 마나 수발이 더욱 쉬워진 덕에, 백면서생을 상대로도 주변의 마나를 장악하는 지경에 이른 레반도 도저히 파훼가 힘들어 혀를 내둘렀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고.
그들의 이백여든 한 번째 비무가 찾아왔다.
“가겠습니다.”
“알았다.”
백면서생은 유유한 고래 같아서 레반이 어디를 찌르고 공격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선공을 내주고 후발제인(後發制人)으로 8레벨 따위는 쉽게 제압할 자신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레반은 이백 번을 훌쩍 넘긴 그와의 비무에, 이제는 백면서생의 다음 움직임이 어디로 갈지 모두 익혀버린 상태였다. 죽어있던 안광에 공력과 마력이 함께 빛났다.
레반은 전생에서 무림십대고수인 광마의 샌드백이자, 비무 상대이자, 화풀이 상대이자, 믿음직한 제자였기에 마음을 굳게 먹은 이상 과히 꺾이지 않고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쾅!
“!”
그렇게 이백여든 한 번째 비무에서 각성한 레반이 돌연 세 합을 뚫고 무려 네 합까지 버텨버리자, 백면서생이 계획하지 못한 초식이 본능적으로 뿌려졌다.
백면서생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듯한 얼굴로 레반을 주시했다.
주먹에서 흐르는 피가 그의 마음을 대변했다.
“오른팔이 떨어졌군.”
“이거 붙이면 됩니다.”
“어서 고쳐라.”
“예.”
아프다.
그러나 기분 좋은 고통이다.
깨지 못할 바위에 몸을 부딪친다.
지금까지 레반의 인생이 그러했을진대 무에 아프다 하겠는가. 무작정 대가리부터 박고 살아온 삶이다. 백면서생은 이제 레반과 비무가 아닌 싸움을 하고 있으나, 서로에게 득이 되는 싸움이라 생각해 힘을 빼지 않았다.
······삼백 번째 비무 다섯 합.
······삼백 열번째 비무 여섯 합.
······삼백 스무번째 비무 다섯 합
······삼백 서른 세번째 비무 일곱 합.
레반이 말했다.
“이제 또 칠 합까지 버텼습니다.”
“그전의 비무에서 힘을 아껴놓은 것은 아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미리 보고, 추진력을 얻은 것이지요.”
이후.
그들의 시간은 쏜살처럼 흘러갔고.
어느덧, 사백 번째 비무를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백 번 남았다. 너는 반드시 버텨주어야 할 것이야.”
그리고 백면서생의 정광이 더없이 진중하게 변하고,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간 것도 분명 그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