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퓨전펑크의 전생자-110화 (110/157)

#110화. 사백 구십 구번 남았다

#110화.

“화산은 오랜만이군.”

십이제 절반이 모인 안건 회동 이후.

백면서생은 곧장 수르트 시티로 날아왔다.

서로 상이한 이유이긴 해도 ‘마녀’ 와 ‘인형사’ 가 지극한 관심을 표하는 7레벨의 마법사. 한참 낮은 수준으로도 강력한 9레벨급 시체를 잡아먹었다는 그런 인물이 어찌 궁금하지 않을 수 있겠나?

번쩍···

지금 화산의 기암괴석들을 올려다보는 백면서생의 뽀얀 낯빛과 눈빛에는, 적당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그가 9레벨, 화경(化境)에 오른 뒤 까마득한 세월이 흘렀다.

오랜 시간 각고의 노력으로 뼈를 깎아 화경의 초입을 지났고, 수많은 폐관으로 정신을 다듬어 완숙한 지경까지 이르렀으며, 이제는 완숙함을 넘어 어느덧 화경의 끝자락까지 당도해 경지의 극을 보았다.

같은 9레벨, 화경의 절대고수라도 초입에 머무르는 자와 화경의 끝자락까지 당도한 자는, 해수면과 심해의 그것처럼 격차가 극심하기 마련.

백면서생은 상대가 어지간한 9레벨의 고수라도 단 몇 합내로 거꾸러뜨릴 무위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는 9레벨의 한계에서 오래 정체되었다.

수련에 전념하여 배움을 얻어도 어두운 심연으로 끌려 내려가는 듯, 끝없는 벽이 새로이 나타나 그의 앞을 가로막았으며.

쉬지않고 그 다음의 경지를 밟기 위해 칼을 갈았으나, 아무리 노력해도 10레벨의 심오한 벽을 돌파하기에는 요원하기만 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자타공인 수련광의 면모를 가지고 있는 백면서생은 최근 수시로 폐관에 들어 그간의 심득을 수없이 복기하고 정리했음에도, 특별한 진척없이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것이다.

세상을 오시할 천재 중에서도 큰 천운을 타고난 이들에게나 허락된다는 초월적 경지 10레벨.

가진 무재(武材)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했다.

그리고 이만한 경지에 오르면 누군가의 뒤꽁무니를 보고 배워 쫓아갈 수도 없기에, 오로지 자신만의 힘으로 돌파구를 찾아내야 한다.

해서 그는 마녀가 말했던 대단한 잠재력의 그자가 다음 경지로 가는 연결고리를 이어줄 수 있지 않을까, 혹은 막혀있는 깨달음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수르트로 온 것이다.

“배울 점이 티끌만큼이라도 있다면 좋다.”

그자의 경지가 낮아도 상관없다.

가끔은 타산지석으로 삼을 거친 돌도 필요한 법.

수련광이라 불리는 것은 무공에 대한 욕심이 많다는 뜻이기도 해서, 백면서생은 거대하고 높은 10레벨의 벽을 깨부수기 위해 여기까지 걸음한 시간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게다가 마침, 벗이 있는 화산에 그자가 있다는 소식을 구해 즉각 달려온 참.

“초인종도 벨도, 감시 폐쇄회로조차 없어 뵈는군. 문파의 본산만큼은 전통을 지키는 것도 좋지.”

그는 체격도 호리호리한데다 눈빛이 순하고 서글해 아무런 경계나 제지도 받지 않고 쉽게 화산의 산문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스르륵 스쳐 지나가는 백면서생을 보고도 없는 사람처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

그러다 화산의 초입인 산문에 이르자, 절정 경지에 이른 무인 하나가 걸어나와 백면서생을 마주했다.

화산의 산문을 지키던 문지기는 아무런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는 이 샌님이 어찌 이곳까지 올라왔는지 의구심을 가졌으나, 이곳은 가끔 거물들이 들락날락하는 화산의 본문.

정체가 확실치 않다고해서 무작정 박대했다간 후에 크게 경을 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산문을 지키던 무인은 무언가 심상찮다고 생각하여 정중하게 물었다.

“무슨 일로 화산을 찾으셨습니까?”

“벗을 보러 왔다.”

“허면, 누구에게 무어라 전하면 되겠습니까.”

“배분이 높은 자 아무나 붙잡고, 다섯문이 걸음했다 일러봐라.”

“······예.”

배분이 높은 자를 아무나 붙잡고 물어? 다섯문?

광오하면서도 의미심장한 말이었으나, 화산의 무인은 잠시 기다려달라는 말과 함께 사라졌다.

홱!

“고인(高人)께 정중히 인사 올립니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빛살처럼 튀어나와서는 허리를 푹 숙였다. 눈앞의 호리호리한 샌님은 그가 올려다볼 수조차 없는 대단한 고인이 맞았던 것이다.

“이쪽입니다.”

산문을 지키던 이는 대화산의 자존심마저 접어두고, 조금 질린 얼굴로 백면서생을 직접 안내했다.

백면서생의 뒤를 따라왔던 한 방문객의 ‘나를 두고 어디가냐’ 는 식의 외침이 들려왔으나 별수 없이 못 들은 체했다. 등에 세 자루의 거대한 검을 멘 사내였는데, 그냥 나중에 내려와 안내하면 될 것이었다.

아무튼 매화로 대표되는 화산답게 경내는 매화꽃으로 장식한 전통적인 조명들이 많았고, 백면서생은 눈이 즐거운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그자의 생각뿐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찾아내고 싶었으나, 오랜 벗이 있는 화산의 경내에서 경거망동할 수는 없는 일.

“이제 되었다.”

“!”

후웅—

능공허도. 우화등선하는 선인처럼 표표히 날아 기암괴석의 지대를 통과한 백면서생은 드높은 천풍곡에 이르러서야 땅을 딛고 내려섰다.

화산의 장문인 선천자를 만나 적당히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눈 뒤, 변소가 급한 사람처럼 참지 못하고 장문인 처소를 뛰쳐나와 마녀가 말한 그 마법사 녀석을 찾아간다.

그것이 백면서생의 계획이었다.

“화산(華山)의 경내에 들인 객이 원치 않는다면, 삼존칠좌가 와도 대면을 허락할 수야 없는 일.”

“······.”

그러나 화산 그룹의 회장이자, 화산의 장문인 선천자는 뜨거운 차를 단숨에 비워내고 급히 나가려는 백면서생을 그 말로 붙잡았다.

선천자의 말에, 백면서생은 오히려 흥미가 더욱 솟구침을 느꼈다.

단순한 빈객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화산도 그 젊은이를 잘 알고 있어 뵈는군.”

“본문의 보배가 좋은 인연을 물어 온 게지.”

“폐관에 들었던 동안 신기한 놈이 나왔구만. 이만 가보겠네.”

이윽고.

사아아······

백면서생이 한 줌의 연기처럼 사라진다.

“······.”

하나, 선천자는 넌지시 말렸던 것과는 달리 조용히 차를 마시며 틀어진 의복을 정돈할 뿐 움직일 생각조차 없었다. 십이제의 고명한 싸움광을 맞이해, 이만했으면 장문의 역할은 할 만치 해준 것이다.

그리고 군자의 모습만을 보여야 할 장문이, 경내에서 체통도 없이 술래잡기나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곧.

선천자는 차를 마시며 방(幇)의 직인이 찍힌 문서를 꺼내들었다.

그는 화산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요들을 개방을 통해 수시로 보고 받고 있었다. 오늘은 근방의 녹림(綠林)이 운영하는 유흥객잔에서 절정 경지의 녹림도들이 오체분시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 있었다.

“허어······.”

선천자는 세상이 실로 흉흉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 * *

어느 기암괴석의 높은 꼭대기.

쉭!

기척을 죽인채 밑을 내려보던 백면서생이, 순간 어깨를 설핏 움직였다.

아주 미세하디 미세한, 지금 움직인 게 맞나? 싶은 그 행위에 반응한 자는 주위의 넓은 경내에서 딱 둘이었다.

비무장 위에서 합을 나누고 있던 사내 둘.

화산의 후기지수로 보이는 헌앙하고 젊은 사내와, 역시 비슷하게 헌앙하나 화산의 검수는 아닌듯 보이는 사내 하나.

백면서생은 흥미로운 눈으로 그들을 지켜봤다.

— 형장. 무언가 이상한 느낌 없었소?

백면서생 탓에 진행되던 둘의 비무가 멈추었다.

헌앙한 화산의 검수는 본능적인 위험을 느끼고 곧장 검집에 손을 올려놓아 언제든 방어할 태세를 갖추었고, 다른 사내는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 청풍아. 갑자기 뭐가 이상하다 그러냐.

— 방금······어디서 옅은 살기가 느껴진 듯한데.

— 신경쓰지마라. 저 밑에서 루돌프놈이 종후표 대가리라도 뜯고 있나보지. 요기일 거다.

— 어서 내려가 말려야 하는 거 아니오?

— 사내들은 치고받고 싸우면서 친해지는 거지.

— 하하! 틀린 말은 아니군. 우리도 한번 더 합시다.

— 좋다. 다만 전과 같은 상황에서 검을 낼 때는, 팔꿈치 각도를 좀 더 좁혀봐라. 팔이 몸통에서 벌어질수록 힘을 받기가 힘들다.

— 새겨듣겠소.

그렇게, 아무 일 없단 듯 비무를 속개하는 둘.

‘연기를 잘 하는군.’

허나 백면서생의 눈은 속일 수 없었다.

신속하게 방어 태세를 갖춘 화산의 검수도 훌륭했으나······반대쪽의 사내가 분명 한 치 앞서 반응했다. 맹금류보다도 날카로운 백면서생의 눈동자는 저자의 가슴께가 아까부터 부풀지 않고 있던 것을 집어냈다.

비무 도중에 이유없이 호흡을 멈추었을 리 없다. 필시 어떠한 낌새를 진즉 느끼고는 기감을 펼치는 과정에서 숨을 멈춘 것이었다.

백면서생은 이룩한 경지가 너무도 깊은 나머지 도리어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는 반박귀진(返撲歸眞)의 지경에 이르렀는데, 저자가 어찌 미리 눈치챘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것도 격렬한 비무 도중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곧, 다시 시작된 둘의 비무를 견식한 백면서생이 허허로이 웃었다.

‘확실히 마녀가 제대로 보긴 했구나. 7레벨도 아니고.’

왜인지 점점 마음에 드는 것이, 잘 찾아온 듯했다.

원래 가지고 있던 그의 생각도 순식간에 뒤집어졌다.

저거, 시체 하나 잡자고 내어주기에는 아까운 놈이 아니던가?

게다가 마법사라더니, 칼솜씨가 심상치 않다. 화경의 극에 이른 백면서생이 놀랄 정도의 초식 교환이 저 둘의 비무에서 번번이 일어나는 것이다.

심지어.

“!”

검을 일부러 손에서 떨어뜨린 뒤 마법으로 허공의 검을 통제하는 대단한 기예를 목도한 뒤로, 백면서생은 저 사내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무공과 마법을 동시에 쓰는 괴이를 대체 얼마만에 보는지!

그런데.

도통 둘의 비무가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수준높은 후배들의 비무에 눈이 즐거워지긴 했으나, 결국은 한 쪽이 슬슬 물러서며 가르침을 내려주는 형식이라 백면서생이 얻어갈 것은 없었다.

‘흠!’

그는 빨리 저 기이한 놈과 독대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했다. 그래서 돌연 허공을 권격으로 때렸는데, 수백 미터 밖의 기암괴석 기둥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

우르르릉—

굉음을 내며 진동하는 천지.

그러자 경내에 기거하던 화산의 검수들이 황급히 나와 무슨 일인가 살펴보았고, 큰 소란이 일어나니 둘의 비무도 당연히 멈추었다.

백면서생은 자신의 식견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가벼워졌으므로, 평소라면 하지 않을 짓을 했다.

타닥.

허공을 나비처럼 날아 비무대 위에 오른 백면서생이, 레반을 똑똑히 바라보고 서서 입을 열었다.

“너는 화산 밖으로 나가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 * *

청년과 중년 사이. 평범한 문사같은 외형.

아까부터 숨어 감시하더니, 다짜고짜 와서 나가면 뒈진단다.

다만 지금까지 해온 행태로 보아, 그는 굉장한 고수가 확실해서 아주 헛소리는 아닐 것이다.

레반은 이런 부류의 사내들을 꽤나 많이 겪어보았다.

눈빛의 정광은 맑아 악인은 아니나, 심대한 광기와 욕망이 뒤섞여 들끓고 있는 것을 보면 무언가 바라는 게 있을 터.

이런 이들은 가끔 제멋대로 행동할 때도 있으나, 대부분 기분파이기도 해서 비위를 맞추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다.

“그렇군요. 바깥에 무서운 귀신이라도 있나 봅니다.”

“고작해야 귀신이나 악귀 수준이면 다행일 것이다.”

이미 그 대답쯤에서 레반은 일단 예측을 끝냈다.

자신을 확실하고도 반드시 죽여버릴 수 있는 존재.

카스트라 뷔에탕, 그 미친년이 혼내주겠다며 예고했던 대로 마침내 여기까지 쫓아온 게 틀림없다.

설마 화산의 바깥에 진이라도 치고 있는가?

얼굴이 약간 구겨진 레반이 대뜸 물었다.

“그럼, 무슨 수를 써야 살아나갈 수 있겠습니까?”

“나와 일만 번의 비무를 하자. 내 너를 통해 작은 단초나마 얻어낼 수 있다면, 흉신악살이라도 기꺼이 쫓아내 주도록 하마.”

“······.”

수련이나 무공에 미쳐있는 자였군.

그렇다면 원하는 것은 깨달음의 실마리인가?

레반은 다짜고짜 찾아와 단초를 얻어가겠다는 백면서생의 언행에도 일절 당황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일만 번의 비무가 지나도 고인께서 단초를 얻지 못하면, 제가 죽음을 비껴갈 수 있겠습니까?”

그 질문에 백면서생이 잠시 입을 닫더니 생각에 잠겨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한 걸음 한 걸음에 형용할 수 없는 힘이 담겨있었다.

분명 깡마른 체격이라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아야 하거늘, 아까 보여준 무위가 기겁할 정도라 그 누구도 차마 그리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

“글쎄. 그것은 나도 모른다.”

쐐액!

그리 말한 백면서생이 불시에 쏘아낸 지풍. 그 지풍은 빛살처럼 쏘아져 어느 기암괴석을 때렸다.

폭탄같은 거력에 기암괴석의 중간이 몇 미터나 움푹 파였는데, 놀라운 것은 그 안에 숨어있던 무언가 풀썩 쓰러지며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 크헥!

그것은 지형지물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인형’ 이었다. 이곳은 신성한 화산의 경내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저것을 들였는지는 모를 일.

···어째 아까부터 저쪽에 검을 던져보고 싶더라니.

레반의 그런 상념을 깨고, 백면서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일만 번의 비무간에 무얼 얻게 해주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

부서진 인형쪽을 잠시 바라본 레반이 입을 열었다.

“평범한 비무입니까?”

“네게는 생사결같은 비무가 될 것이다.”

“좋습니다. 밥은 챙겨 먹으면서 합니까?”

“화산의 음식이 잘 나온다 들었다.”

“맞습니다.”

레반은 전혀 잃을 것이 없는 좋은 제안이라 여겼다.

눈앞에 있는 이는 적어도 화경 이상의 경지에 이른 고수.

덧붙이자면, 화산의 경내를 마음껏 휘젓고 다닐 정도의 거물.

그런 자와 생사결같은 비무를 겪는다면 부족했던 마법 부분도 실전처럼 갈고 닦을 수 있고, 정기신의 조화에도 매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데, 정말 비무 일만 번을 합니까?”

“그래. 헌데 생각을 해보니 네가 세 합 이상 견뎌내지 못할 것이라 일만 번으로 부족할 듯하다. 오만 번을 하자.”

레반이 딱히 부족하다고 한 적도 없는데, 당연히 부족하겠다고 생각하는 점으로 보아 눈앞의 백면서생은 미친 사내였다.

오만번의 비무라면 아무리 삼초지적이라 해도 몇 달은 훌쩍 지나갈 것인데, 그런 사실은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레반도 그에 못지않게 미친 사내라서 상관없었다.

“그게 아니고 오만 번의 백분지일인 오백 번이면 족합니다. 제가 세상을 구해볼 생각이라, 비무 따위에 몇 달이나 낭비할 마음이 없습—”

쾅!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면서생이 레반을 후려쳐 날려버렸다.

잠시 뒤.

기암괴석 저 밑바닥으로 떨어졌다가 기어 올라온 레반은, 입에 고인 피를 퉤 뱉으며 비무장 위에 섰다.

백면서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뒷짐을 졌다.

“좋다. 사백 구십 구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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