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마나회로 재건
#108화.
적막한 침묵을 깬 이는 백면서생이었다.
“인형사가 원하는 자가 대체 누구이기에?”
그는 호리호리한 체격이나 인상과는 다르게 수시로 폐관에 드는 수련광이자 호승심이 충만한 전투광.
백면서생은 천하의 인형사가 로키를 벗어나 직접 움직인다는 얘기를 듣고는 크게 흥미가 동한 것이다.
꺄핫-
백면선생의 질문에 로라 마르티네즈는 가볍게 웃었다.
네임드 개체 ‘가륵’ 의 혈액이 연방 내부에 퍼져있다는 충격적 사실보다, 뷔에탕이 관심을 보인다는 녀석을 더 궁금해하다니.
‘이거 아무래도 우선순위가 좀 잘못된 것 아니야?’
하지만 다른 십이제들도 그걸 더 궁금해하는 눈치.
로라 마르티네즈는 원하는 전개까지 잘 끌어냈음에도, 어떻게 이리도 상식적인 인물이 없을까···하는 의문을 가지며 입을 열었다.
“수복전 마무리 연설에서 연방군을 씹었던 녀석이야.”
“연방군을 왜?”
수복전이 진행되던 시점, 백면서생은 폐관에 든 상태였다.
그런데다가 그는 강자와 관련된 소식이 아니라면 전혀 관심을 두지 않거나 금방 잊어먹기 일쑤라, 이해한다는 듯한 얼굴의 장한이 대신 대답했다.
“마탑 소속의 젊은 마법사다. 라그나로크에서 9레벨급 네임드 ‘바만차’ 를 잡았다고 세간에 소문이 자자했다. 수복전이 끝나고는 연방군을 지칭해 좆같은 땅깨라고 했지.”
“9레벨급 네임드까지 잡았다? 전의 일이야 어찌 되었든 그 무서운 여인을 ‘아줌마’ 라 부르고, 연방군을 싸잡아 욕까지 뱉었으며, 9레벨급 네임드를 토벌한 강자라는 소리 아닌가!”
백면서생의 안면에 들끓는 듯한 열기가 감돌더니, 곧 기분 좋은 감탄이 터져나왔다.
“세상을 오시할 강자가 탄생한 건가!”
동시에 하얗기만 했던 낯빛에 생기가 돈다.
백면서생은 강자와의 전투를 통해 희열을 느끼는 인물. 강하기만 하다면 언데드나 사람도 가리지 않는다. 저런 싸움 중독자는 어디가서 찾기도 힘들다.
자칫하면 뷔에탕보다도 일찍 녀석을 찾아가 전투를 신청할 분위기라, 로라 마르티네즈가 즉시 나서 찬물을 끼얹었다.
“그 정도는 아니고, 아직은 7레벨인데.”
그러자 백면서생이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7레벨이 9레벨을 죽였다? 말 같지도 않다. 아무리 조력을 받았다 해도 그만한 격차라면 감히 숨조차 쉬지 못할 것인데?”
“응, 이해해. 그런데 사실인걸 어떡해.”
로라 마르티네즈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마탑주의 조력을 듬뿍 받긴 했지만, 녀석은 분명 9레벨 네임드 바만차를 상대로 버텨내고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오색빛의 찬란한 검강이 세상에 뿌려졌다.
녹량백량의 에센스를 전부 태워가며 수준 이상의 잠력을 끌어냈다지만, 7레벨 주제에 그만한 잠력을 꺼내어 쓸 수 있다는 것부터가 비상식적인 영역.
‘게다가 단전뿐 아니라 마나 회로까지 있고, 그걸 깨뜨려가며 싸웠다는 걸 알았을 때의 그 충격이란······.’
바만차는 당가 출신 변절자였던 녹량백량과 달리 인간 시절의 정보가 없는 개체였다.
짐작하기로, 대전쟁 이전 초창기에 감염되어 지금까지 살아온 개체일 것이다. 특별한 고유의 기술이 없더라도 긴 세월 쌓아온 방대한 양의 요기로 상대를 짓누르는 타입.
달리 말하면, 그 방대한 요기마저 버텨냈다는 뜻.
계속 말하면 끝도 없고, 아무튼 정말 미친놈이다.
동일한 조건이라면,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7레벨에 바만차급 괴물을 때려잡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다.
···그 믿기 힘든 장면을 눈앞에서 보았으니, 제자를 시켜주겠다는 말로 이례적인 호의를 표했던 것이고.
그러나.
“그래서, 7레벨인데 어쩌자는 거냐. 재능이 출중한 7레벨이니 인형사와 대신 싸워 구해주자는 뜻인가?”
“······.”
저 시종일관 삐딱하게 굴어대는 남자처럼.
여기있는 이들은 호락호락한 자원봉사자가 아니다.
레반. 그 녀석을 직접 보았다면 자신처럼 생각이 달라지겠지만, 남궁세가의 일이 끝난뒤 수르트에 남은 거로 봐서 딱히 오딘 시티로 올 마음도 없어 보이고······참 걱정이네.
그렇게, 로라 마르티네즈가 속으로 한숨을 삼키던 도중.
“나는 인형사가 무슨 짓을 하든 신경쓰지 않겠다.”
“······엥? 갑자기?”
조용히 고심하던 장한이 불현듯 말문을 열었다. 그 느닷없는 타이밍에 로라 마르티네즈가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고.
“왜?”
“잠재력이 대단하다고 쳐도, 그 잠재력이 만개할 때까지 세상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
허를 찌르는 장한의 한 마디가 돌아왔다.
여기있는 십이제 중 모르는 사람은 없다.
연방의 수명은 이미 한참 전부터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그리고 벼랑 끝까지 몰린 인류는 이번 라그나로크 시티를 시작으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으니, 일곱 도시 안에서만 아웅다웅대던 이전과는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바뀌어갈 것이란 사실도.
그러니까, 즉시 전력감이 필요한 시기란 거다.
“라그나로크를 수복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네임드가 피를 뿌려댄다는 얘기가 들리는데, 바로잡을 기회가 있다면 조기에 바로잡는 게 낫다.”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즉시 뷔에탕의 제안을 수락하고 대가로 가륵의 위치를 특정해 사냥하자는 장한의 말에 로라 마르티네즈가 곧장 날카롭게 물었다.
“그 이상한 년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쩌려고?”
“안건에 올릴 정도의 약속을 어기면, 아무리 인형사라도 반드시 큰 손해를 본다는 걸 알고 있을 테지. 오랜 기간 십이제였으니.”
등 뒤의 커다란 박도를 만지작대며 단언하는 장한.
외견으로 보자면 이곳에서 가장 앞뒤없이 달려들 것만 같으나, 그는 이성적인 판단에 근거해 신중히 움직이는 편이었다.
장한은 곧, 낮게 깔린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의 연방에는 미래의 유망주인 7레벨의 마법사보다 인형사의 힘이 더 필요하다.”
인형사는 세뇌 혹은 저주 마법으로 인형을 만들어 강력한 전투원을 양산하는 강자.
그쪽 분야의 마법사는 연방에서도 지극히 귀할 뿐더러, 비록 악행으로 퇴출당했다 해도 ‘십이제’ 라는 지위가 주는 무게감이 있다.
물론 7레벨도 낮은 경지는 아니나, 초월의 반열에 서있는 이들의 눈에는 연방군 병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수준.
무엇보다.
현재에도 마피아 조직과 인형사가 자체적으로 사냥하는 시체와 에센스 수급량은 연방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마피아 조직은 연방과 기업들의 공적 취급을 받는다지만 점점 필요악이 되어가는 모양새.
“······으흠.”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을 기점으로 이제 웅크려있던 연방이 기지개를 킨 상황에, 잠재력 있는 7레벨 하나 살려보자고 십이제들이 발벗고 나서 마피아의 보스를 죽이거나 내친다는 건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장한은 로라 마르티네즈의 반응이 좋지 못하자, 자신도 그다지 내키지 않는듯 말했다.
“어차피 인형사는 변절하지 않을 거다.”
로라 마르티네즈가 볼멘 얼굴로 물었다.
“흐음, 그건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변절할 생각을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었다면, 마피아 토벌전때 변절하고도 남았을 여인이니까.”
카스트라 뷔에탕.
그녀가 십이제에서 퇴출되고 벌써 20년이 넘게 지났다.
만약 오늘 일처럼 감정적이기만 한 인물이었으면 몇 차례에 걸친 대규모 마피아 토벌에 반항해 진작에 변절했을 거란 얘기다.
“또한, 욕정을 주체하지 못해 남자를 심히 밝힌다. 그런데 시체의 몸이 되면 그렇고 그런 일들을 할 수 없지 않은가.”
“그건 그러네.”
인형사, 카스트라 뷔에탕은 남자를 밝힌다.
이것은 뷔에탕을 조금이라도 아는 이라면 모두가 인정하는 얘기다. 초월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도 남자 없이는 하루도 살지 못하는 여인.
어마무시한 욕정만큼 성적인 부분에 크게 집착한다.
그런데 그 7레벨의 마탑 소속 마법사는, 여인의 여성성을 난도질하는 단어의 최고봉인 ‘아줌마’ 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것은 여인을 여인으로 보는 게 아닌, 지형지물 수준으로 바꿔버리는 마법의 단어.
특히나 여성성에 집착하는 뷔에탕에게는 허투루 넘어갈 농담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자승자박이다. 애써 도와줄 이유가 없다.”
그렇게 장한이 판단을 내린 다음 순간.
“7레벨과 가륵을 맞바꿀 수 있다면 남는 장사겠군.”
“나는 그놈이 죽든 말든 상관없다. 마지막 안건까지 끝났나?”
백면서생과 남자도 장한과 비슷한 대답을 내놓았다.
인형사와 대적하면서까지 녀석을 보호해줘야 할 이유나 동기가 부족하고, 가륵의 위치를 특정해 처리하는 게 더 중요하단 판단을 내린것.
로라 마르티네즈는 그들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래서, 다들 좋은 의견은 없다 이거지~?”
“라그나로크에서 무얼 보았길래 자취를 감춘 신예에게 관심을 기울이는지는 확실히 궁금하군. 회의에 안건 상정까지 해가며.”
“뭐, 말했던 대로 잠재력과 재능이 역대급이야. 지금 수르트 시티에 있긴 한데, 에이 아니다. 이제 말해봐야 뭐 해.”
“······.”
장한의 혼잣말에 로라 마르티네즈가 지나가는 말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안건의 결론은 슬슬 정해진 것 같으니, 더이상 공들여 설득할 필요가 없기에.
다만 아쉬운 점이 남았다.
‘흠, 남궁에서 바로 오딘으로 왔으면 설득할 수 있었을 텐데······분명 바만차의 에센스 절반을 그대로 주고 왔잖아. 시간도 많이 지났고. 그걸로 마나회로 구축을 해봤다면 분명히 놀라 자빠지고도 남았을 텐데? 아주 이상하단 말이지.”
물론······
로라 마르티네즈조차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무려 9레벨급 네임드의 에센스는 당연하게도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사용해야 했겠지만—
시기상조라며 에센스를 아껴두다가 무력하게 당할 뻔한 사실에 화가 치민 레반은, 화끈하게 바만차의 에센스를 단전에 다 때려부어 초절정과 맞먹는 공력을 얻은 참이었으니.
집행관에게 차마 그런 정신나간 짓을 한 부분까지 세세하게 듣지는 못했으니, 그녀라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튼 좋아, 회의는 이쯤 하고 마무리하자.”
십이제 여섯이 참여한 안건 회의가 진전없이 마무리된 뒤.
로라 마르티네즈와 연신 대립각을 세우던 남자가 자리에서 기상하며 냉소적인 말을 던졌다.
“재능이라, 이 자리에 재능 없는 사람도 있었나?”
“······하아, 좋게 마무리 하려 했더니.”
남자의 뒤늦은 비아냥에 로라 마르티네즈 역시 냉담해졌다.
순간 오싹할 정도로 오만해진 로라 마르티네즈의 얼굴에서 형용할 수 없는 한기가 줄기줄기 흘러나왔다.
“야, 뒷북 좀 치지 마. 너는 10년 내로 걔한테 따인다.”
“그리 대단한 재능을 지녔다면 네가 인형사를 죽여 일을 막아라. 나는 시체를 사냥할 시간도 부족하니.”
“참 나, 누가 보면 1억 마리는 죽인 줄 알겠네.”
“인형사를 죽이는 건 힘들지. 연방군과 메가콥이 손잡고 몇 번이나 토벌에 나섰는데, 죽여봐야 인형이었다.”
“?”
로라 마르티네즈가 남자와의 대화중에 갑자기 끼어든 백면선생을 바라봤다. 그래. 안건 회의에 참여한 이들 중, 그나마 설득해볼 여지가 있는 자다.
“어! 그러고 보니, 아까 진공 영감과 싸워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인형사도 강하니까 좋은 기회 아냐?”
하지만, 크게 관심을 보이던 전투광 백면서생마저도 그 말을 듣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귀찮은 일을 모두 떠맡길 셈이라면 사절하겠다.”
“내가 떠맡은 변절자 색출도 충분히 귀찮고 좆같은 일이거든? 폐관하다가 이제야 기어나왔으면서.”
로라 마르티네즈, 그녀는 수복전 이후부터 진공진인과 함께 연방 내의 변절자 색출을 맡았다. 워낙에 흘러 들어오는 정보량이 많아 일일이 확인하고 처리하려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카스트라 뷔에탕이라는 로키의 악녀가 검은손까지 드리우려한다. 내가 특별히 제자로 점찍어 놓은 놈인데! 내가 나설 시간도 없는데!
“하여간 도움이 못 되어 아쉽구만. 나중에 보자고 마녀.”
머리를 휘휘 저은 백면서생이 싱긋 웃으며 떠났다.
이미 사라진 장한에 이어 백면서생까지 미련이 없다는 듯 떠나자, 빳빳한 의복을 정돈한 남자 역시 의뭉스러운 말만 남기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놈이 네 제자인지 아니면······정신을 옮겨갈 몸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신경이 쓰이면 자기 일은 스스로 하는게 어떤가.”
“입좀 닥······아, 벌써 갔네.”
남자가 사라지기 전에 욕을 완성하려 했으나 실패.
열 받은 얼굴의 로라 마르티네즈가 꺄하하- 광소한 뒤,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걸걸한 욕설을 마구 뱉었다.
“야! 이 망할 새끼야! 너 오늘 몇 마리나 죽였는데 그렇게 잘난 척이야? 3천 마리? 5천 마리? 씨발, 못해도 200억 마리가 넘는데 1년에 백만 마리쯤 잡아봐야 그게 티나 나겠냐? 네가 앞으로 1년에 백만 마리씩 백 년을 더 죽여야 1억 마리야. 그거 잡아서 뭐할래! 199억 마리는 조상님이 잡아주냐! 숫자 계산 못해? 응? 그리고 내가 너보다 바쁘다고 씨발! 거 쓸데없는 짓이나 해대면서 존나 잘난 척하네 쓸모없는 새끼!”
* * *
“저리 관심받는 7레벨은 흔하지 않은데.”
동상이몽.
십이제의 안건 회의에 참여했던 이들은 단호하게 거절했던 것과는 달리 마녀, 로라 마르티네즈가 말한 마법사에 대해 각자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백면서생이 기지개를 켜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수르트 시티에 있다고 했나? 당장 얼굴부터 보러 가야겠군. 7레벨때 9레벨급을 잡았다라···과연 내게 무의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인재인가 한 번 확인해 주겠다.’
뒤이어, 가장 먼저 나갔던 장한이었다.
‘인형사와는 엮이지 않는다. 다만 로라 마르티네즈가 저리 칭찬할 정도의 잠재력을 가진 이라면, 이른 시일 내에 봐두는 것도 좋겠군.’
이윽고, 장한의 다음은···
피가 덕지덕지 붙은 의복을 입은 남자였다. 그는 시체라면 눈이 돌아가는 사내로, 오늘만 해도 수천 마리의 시체를 죽이고 십이제의 안건 회의에 참여한 참이었다.
[ 쓸데없는 짓이나 해대면서 거 존나 잘난척하네 쓸모없는 새끼! ]
‘······.’
그런데 쓸데없는 짓?
남자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었다.
세상에 자기만큼 시체 사냥에 혼을 쏟아붓는 이는 없으니.
그는 생각이 짧기로 유명한 마녀의 말을 한심하다는 듯 흘려 넘겼으나, 과연 누가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 똑똑히 보여줄 생각이었다.
‘놈이 인형사에게 넘어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곧바로 가륵을 친다.’
누가 쓸모없는지는 그때 알게 되리라 생각하며.
······그리고 다시 오딘의 어느 테이블로 돌아와.
안건 회의 내내 입을 열지 않던 나머지 둘중 한 명.
십이제의 최상위권의 무력을 지닌 마법사.
카시오페아 파냐탈루가 마력을 끌어올렸다.
“여기.”
스아아—
파냐탈루의 손에서 피어난 마력이 저 멀리 떠나고 있는 백면서생과 장한, 남자의 모습을 그대로 재생해낸다. 그들의 위치는 달라도 현재 약속이나 한듯 오딘 스테이션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걸 확인한 로라 마르티네즈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미친년처럼 크게 웃었다.
“꺄하하하핫! 저거봐! 저거봐! 아닌 척하면서 움직일 놈들만 딱 불렀는데, 역시 생각대로 해주잖아? 아주 좋네~”
사실, 다른 십이제는 회의에 부르지도 않았다.
이 소식을 들으면 분명히 움직여줄 셋을 불러낸 거다.
수련이랑 싸움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놈, 신중하고 이성적인 만큼 제 눈으로 꼭 확인해야 믿는 놈, 조금만 자극하면 홀라당 넘어가서 불타는 놈.
뭐, 마지막 한 놈이 조금 문제긴 한데.
“······쟤는 지 혼자 헛짓거리나 좀 하다 말겠지. 암튼 좋아 좋아.”
* * *
화산파.
그러니까 화산 그룹에는 무력을 담당하는 문파가 있고, 화산 그룹의 사업을 총괄하는 기업쪽이 있다.
양쪽 다 속해있는 경우도 있지만, 수련에 주력하고 싶다면 문파쪽으로. 무재가 부족하거나 기업의 일에 재능이 있다면 그룹쪽 일을 맡는 편이다.
이 천풍곡이 있는 기암괴석의 지대는 옛납루터 문파쪽의 문도들이 수련하고 기거하는 장소였다. 그룹일을 맡은 쪽은 따로 떨어져 수르트의 남경 신도심에 자리하고 있다.
— 수복전의 영웅이라고 들었네. 환영하네.
대 화산의 장문인 선천자(琁泉子).
그는 예상외로 나를 크게 반겨주어, 잠시 적응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선천자는 나를 보자마자 좋은 차를 내어주고는, 라그나로크 수복전에 참여했던 선운자 장로와 팔이 잘린 천무연의 얘기를 늘어놓았다.
대부분은 같이 싸워주어 고맙다는 식의 얘기였다.
‘맞다. 12조장 천무연도 있었군······.’
하여튼, 화산의 장문인은 청풍이가 대체 무슨 얘기로 구워삶아 놓았는지 정말로 나를 귀중한 객 대하듯 했다. 생각해보면 객따위가 무슨 장문의 얼굴을 보겠는가. 특별 대우가 확실했다.
— 여기 형장은 남경의 무학관에서도 견식한 적 없는 오성을 지니고 있고, 제가 본 모든 검수중 가장 뛰어나다고 과히 자신할 수 있습니다.
— 허허, 그렇더냐.
청풍이 화산이 밀어주는 후기지수라는 말은 사실이다. 거리낌 없는 청풍의 말솜씨에도 장문은 그저 부둥부둥해주는 모양새였으니.
하기야 문파의 적극적인 도움이 있었다해도, 약관의 나이에 초절정을 찍은 천재중의 천재인데 무엇이 아까우랴.
그리고, 저게 벌써 나흘 전 일이다.
화산에서의 생활은 당연히도 편했다.
“흐음.”
헌데, 화산에 온 지 나흘만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 생겼다.
나는 그동안 한쪽 팔이 날아간 천무연도 보고, 대련을 청하는 청풍이와 가끔 비무도 해주었다.
무공으로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이상 3위계의 마법은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았으나, 그래도 비무는 항상 아슬아슬하게 나의 승이었다.
그런데 천하의 기재이자 무림계 제일의 후기지수 청풍은, 성취와 배움이 극도로 빠르기에 나와의 비무에 며칠새 적응해버렸다. 해서 점점 무공으로만 꺾어내기가 버거워지고 있었다.
계속 이대로 가다간, 언젠가 밀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의 특 장기중 하나인 마법을 살려보기 위해 마나 회로 제작의 필요성을 조금씩 느끼고 있는 중이다.
무공으로 이룬 전생의 경지는 어느 정도 따라잡았고, 바만차의 에센스로 내공까지 든든하게 채워두었다. 단전에 이 정도쯤 기운이 들어차면 허접한 에센스를 먹어봐야 더이상 공력을 채울 수는 없다. 오히려 그런 허접한 기운은 방해만 되겠지.
“그러니 무공이나 내공 쪽은 이제 나중에 생각하고.”
나는 화산에 편히 머무는 동안, 아직 성장의 여지가 크게 남아있는 마법쪽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마침, 나흘 전에 남궁세가의 재경각에서 얻어온 크레딧만 무려 1천만이 넘었다. 두당 떨어지는 거마비였는데 아힘사는 돈이 필요 없고, 루돌프놈 돈은 원래 내 것이니까.
게다가 상급 에센스도 꽤 가져왔다.
내가 남쪽 어머니의 에센스나 우르드, 바만차의 에센스같이 말도 안되는 귀물들만 자주 본 탓에 눈이 높아져 그렇지, 상급 에센스면 매우 귀한 축에 속하는 에센스.
···무림계의 한 축인 화산에서 마법에 집중하게 되어 조금 상황이 우습긴 하군.
꿀꺽-
나는 박살났던 네 번째 마나회로를 재건하고 그 다음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남궁에서 가져온 에센스를 들이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