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좋은 의견 있는 사람?
#107화.
끼익-
도로가 끊기는 지점에 차를 세웠다.
인류와 시체들의 경계인 수르트 시티 장벽이 보인다.
시티의 장벽은 대단한 광역마법이나 진법으로 보호받고 있기에 멋대로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다.
다만 시체 사냥꾼이나 기업의 에센스 수급팀을 장벽 내, 외부로 보내기 위해 만들어둔 출입통로가 지역마다 있다.
사람 몇 지나갈 만한 장벽 내부의 출입통로는 진법의 힘이 잠시 해제되는 시간대가 있고, 대대급의 연방군 경비부대가 그 앞을 철통처럼 지킨다.
‘여긴 수준 높은 병사들이 많군.’
만약 시체가 시티로 침입하거나 밖으로 도망치려면 저 연방군 경비대는 물론이고 신속 타격부대까지 전멸시켜야 한다. 진법도 억지로 뚫어버릴 만큼 강력한 힘까지 필요하겠지.
아마도 남궁천 정도의 고수라면 능히 그리했을 터.
“그러니 이곳에 있는 수백의 군인은 우리가 살린 것과 다름없구나.”
“형장의 말이 맞소.”
“한데, 저 군인들이 나를 좋아할지는 모르겠다.”
“걱정 마시오 형장. 그때와 비교하면 형장께서 워낙 헌앙해져 알아볼 수 없을 거요. 오죽하면 나도 형장이 맞는지 헷갈렸을 정도겠소?”
장벽과 점점 가까워지자, 작은 출입구가 시선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출입구 앞에서 눈을 부릅뜬 연방군의 병사들이 시체 사냥꾼으로 보이는 자들의 신원을 꼼꼼히 확인하고 있었다.
근방의 경비가 삼엄하다.
신원 증명이 되지 않으면 출입구에 접근조차 불가해 보이니, 알 헤임달 시티의 널널함과는 차원이 다르다.
사실 개척이 도시의 모토인 알 헤임달이 지나치게 자유로운 편이라 그렇지, 원래는 저리 빡빡하게 검사하는 게 옳은 일이다. 그렇기에 종후표놈은 아힘사에게 맡겨놓고 우리 셋만 장벽으로 온 것이기도 하고.
찰박-
— 정지.
오늘처럼 비가 오거나 모래폭풍이 부는 날에는 진법이 완전한 제 역할을 하기가 힘들어 군의 경계도 더욱 강해지기 마련이다.
— 화산 그룹? 지나가십시오.
다행인 건 이쪽에는 화산의 청풍이 있었다. 덕분에 신원 증명 절차는 매우 간단했다. 메가콥의 위명을 방패삼아 나와 루돌프는 신속하게 출입구를 통과했다.
장벽은 높이뿐 아니라 두께도 매우 두껍다.
작은 출입구를 통과하자 꽤 긴 통로가 나왔고, 우리는 단단한 강철문 몇개를 더 지나야했다. 그런데 그 문들을 지날 때마다 방향감각이 틀어지는 걸 보니, 무슨 진법이 또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출입문에서는, 내 의지로 장벽 바깥으로 나가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자필로 작성해야 했다. 실상 장벽 밖은 공권력 따위가 없는 무법지대라 의미 없는 요식행위에 불과하지만.
살아 돌아오면 살아 돌아오는 거고.
돌아오지 못하면 죽거나 시체가 되었다는 뜻이라.
— 매번 할 때마다 지겹군. 절차가 너무 까다로워.
우리가 통로를 지나 마지막 문에 이르자, 먼저 온 몇 명의 시체 사냥꾼이 복잡한 절차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무인으로 보였는데 검은 물론이고 대물 저격총, 유탄 발사기나 수류탄같이 구하기 힘든 화기들을 기본적으로 장비하고 있었다.
— ······통과.
그것도 모자라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구할 수 없는 군문의 무기까지 떡하니 장비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문을 지키고 있던 연방의 장교와 병사들은 그것을 보고도 실랑이는커녕 적당히 못 본척 통과시켜 주었다.
하기야 한껏 예민하게 날을 세운 사냥꾼들 면전에다 대고 ‘연방군 무기네? 밀수했구나. 내려놓고 가’ 라며 통과를 거부했다간 난리가 날 것이다.
나는 시체 사냥꾼들의 뒤를 이어, 삭막하고 황폐한 장벽 바깥에 이르렀다.
쿠웅—
시간이 지나자 등 뒤에서 문 닫히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앞의 사냥꾼들과 우리 말고 다른 통과자는 없는 모양.
이제 다음 출입문의 개폐가 있을 시간까지는 돌아갈 수 없다.
나는 안력과 청력에 집중해 먼저 장벽을 나와있던 사냥꾼들을 주시했다.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무리였고 대부분 6레벨급 정도로 보였으며, 개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베테랑은 7레벨에 근접한 초일류 경지의 고수였다.
그들의 분위기는 나름 자유분방해 기업 소속은 아닌듯 보였다. 에센스는 만성적인 공급 부족으로 인해 돈벌이가 되니, 개인과 기업 구분할 것 없이 뛰어든다. 저렇게 실력이 비슷한 이들끼리 사냥팀을 꾸리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 비가 많이 내리는군.
저 사냥꾼들은 비 때문인지 판초우의를 뒤집어 썼다. 주변 환경에 자연스레 동화되는 우의를 보자, 나의 2회차인 아포칼립스 시절이 떠올랐다. 그 세상에서는 나도 저거 많이 쓰고 다녔는데.
그때.
휘적휘적···
“?”
사냥꾼중 하나가 이쪽을 향해 웬 손짓과 눈짓을 했다. 표정을 보니 별다른 악의는 없어 보였는데, 나는 저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기에 대답을 주지 못했다.
— 풋내기들인가.
그러자 작게 혼잣말을 한 사냥꾼은 머리를 절레절레 젓더니 금세 무리와 함께 멀리 떠나버렸다.
시체 사냥꾼 무리가 떠나고 장벽 앞에는 나, 청풍, 루돌프놈까지 셋만 남았다.
장벽 바깥은 어두웠으므로 나는 마나를 모아 밝은 불빛을 만들며 말했다.
“돌프야.”
“예.”
“나랑 청풍이는 여기에서 널 기다리고 있을 테니, 지금부터 배고픈 네가 직접 사냥해라. 대신 잡혀가거나 일 터지면 안 도와준다.”
“······에이, 또 왜 이래요. 일부러 겁주시는 거죠?”
“아니.”
농담이 아니었다.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겠으나, 강력한 시체라도 갑자기 튀어나오면 곧바로 도주할 작정이다.
천운이 따라주는게 아니라면, 이 넓고 광활한 장벽 밖에서 지원을 바라는 것은 불가하니까.
장벽 밖으로 기어나온 인간들은 드넓은 망망대해 위에 던져진 배와 같아 조난 당하면 대부분 그대로 끝을 맞이한다.
그야말로 인세의 마경.
저 루돌프놈은 이런 곳에서 앞으로도 쭉, 시체를 잡아먹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아악—
때마침 시체 몇 마리가 멀리서 사람 냄새를 맡았는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다. 무작정 뛰는 걸 보니 딱히 지능이 높지도 않아 보인다. 한 3레벨급 내외. 에피타이저로 적당할 것이다.
“돌프야, 온다.”
“······.”
“아까 양아치놈들 팰 때처럼 해.”
“후우, 한 번 해보겠습니다.”
“그래. 힘내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루돌프놈의 식사는 성공적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헤맸으나 점점 몸에 맞는 전투 방식을 찾아갔다.
우선 인간들처럼 감염의 위험이 없으니, 시체들에 둘러싸이더라도 별 걱정이 없었다. 그리고 무통귀갑신공은 몸을 단단히 만들어주긴 해도 그다지 공격적인 외공이라고 할 수 없는데, 그 부족한 부분을 짐승화가 채워주었다.
콰지지직-
루돌프놈은 피가 나야 강해지는 게임 속 광전사같았다.
강하게 처맞거나 커다란 상처를 입을수록, 수인과도 비슷하게 강성한 신체로 변해 전투를 휩쓸었다.
처맞아야 강해진다니, 정말 오묘한 전투 방식.
어느덧 칠흑색의 짐승으로 완벽히 변한 루돌프는 몰려든 시체의 대가리를 물어뜯으며 전투를 지속했다.
“꺼억.”
“······.”
시간이 지나자, 루돌프놈은 입가에 피를 잔뜩 묻힌 채 배를 두드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서른 마리 이상은 잡아먹었을 것이다. 뱃속에 시체가 끝없이 들어갔다.
나는 루돌프놈에 대한 총평을 내렸다.
“6레벨 초입 정도는 가뿐하겠군. 상대가 공격해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지만, 큰 공격을 받아 신체가 변이를 일으키면 7레벨까지도 비벼볼 수 있겠다. 종후표의 도끼에 목이 잘리지 않았던 것도 그렇고.”
“형님, 제 잠재력과 재능은 똑똑히 보셨습니까.”
“봤다.”
“한 3천 마리쯤 죽였죠 제가? 이게 제 본모습입니다.”
“주접 떨지 마라. 겨우 3레벨쯤 되는 시체들이었다.”
“······그것 밖에 안됐어요?”
사실 루돌프놈 주제에 혼자 서른 마리면 굉장한 성과를 낸 거지만, 어깨를 으쓱거리는 게 상당한 꼴불견이라 오랜만에 주먹질을 해 다져줬다. 루돌프놈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는지, 아주 약간은 쓸모가 있는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형님, 자신감이 생겨서 그런지 아까보다 힘이 팔팔해진 것 같습니다. 몸도 덜 아프고. 제 착각이겠죠.”
“시체 처먹으면서 에센스도 같이 들어갔나보지.”
“······어, 그런 겁니까?”
“밥이나 더 먹어라. 다시 나오기 귀찮으니.”
나는 한숨을 쉬고는 시체들의 위치를 짚어주었다.
우리는 그 뒤로도 장벽과 가까운 거리 내에서 보이는 놈만 사냥했다. 다행히 강력한 시체가 나타나는 일도 없어서 루돌프놈의 배를 든든히 채울 수 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보내자, 슬슬 장벽 출입구의 개폐시간이 찾아왔다. 지금 복귀하지 못하면 세 시간 뒤까지 또 기다려야만 한다.
이윽고.
다시금 장벽의 통로 앞쪽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
어딘가 눈에 익은 시신들이 보였다.
우의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두 구의 시신.
둘중 한 구는, 나더러 풋내기라던 사내가 확실했다.
그 시신들은 장벽의 통로와 고작 몇 걸음을 남겨두고 엎어져 죽어있었다. 허리 아래로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면 여기까지는 기어온 듯하군.
청풍이 말했다.
“형장, 행색을 보니 아까 같이 문을 통과했던 사냥꾼들인 것 같소.”
“음. 그렇구나.”
그들은 시작할 때 분명 다섯이었는데, 돌아온 것은 두 구의 시신뿐. 그렇다면 나머지 세 명은 어디에 있을까.
고개를 돌려봐도 칠흑같은 어둠만이 펼쳐져 있었다.
——!
헌데 그 순간, 저 먼 어둠 속에서 시체의 요기섞인 괴성이 희미하게 들렸다. 적어도 3km 이상 떨어져 있는데, 꽤 강력한 놈이란 걸 여실히 느낄 수 있는 괴성이다. 나는 마력으로 유지하고 있던 불빛을 곧장 껐다.
“돌아가자.”
······이것은 우습게도 나중에 알게 된 얘기인데, 다리 잘려 죽은 사냥꾼이 장벽 앞에서 했던 손짓과 눈짓은 수르트의 사냥꾼들끼리 서로의 무운(武運)을 빌어주는 의식이라고 했다.
허나 그깟 미신이나 징크스 따위를 믿지 않는 사내인 나는, 고작 무운을 빌어주지 못해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힘이 부족해 죽은 거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같은, 한심한 감정은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왜인지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오늘은 비가 와서 운치가 좋은 날이었다. 차로 흑도들을 밟고 지나가기만 해도 기분이 적당히 좋은 날. 나는 괜찮았던 기분이 더 가라앉기 전에, 시신 두 구를 수습하여 돌아왔고, 연방군의 수중에 넘겨주었다.
화르르륵—
그런데 연방군은 두 구의 반쪽 시신을 인도받자마자 신원만 대충 확인하나 싶더니, 서약서만 골라놓고는 옷과 무장을 벗긴 후 불태워 화장했다. 뼛가루만 남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고는 죽은 이들이 채 사용하지 못한, 수류탄과 유탄 발사기까지 벗겨 가져갔다. 연방군의 병사들은 정말 알뜰하게도 챙겨갔다. 시체 사냥꾼은 장벽 밖이 아니라 안에도 있었고, 방산비리로 인한 밀수품은 제 주인을 찾아갔다.
* * *
우리는 장벽과 인접한 모텔에서 대기하던 종후표와 아힘사를 태우고 화산으로 이동했다.
차로 두 시간쯤을 달리자.
어느덧 깨진 차창 밖으로 화산이 보였다.
얇고 긴 기암괴석들 수십 개가 하늘로 솟아 절벽을 형성하고 있는 기막힌 절경에, 루돌프놈이 신기하다며 탄성을 질렀다.
화산이 가까워지자, 청풍이 웃으며 말했다.
“그거 아시오 형장? 우리 화산은 원래 평탄한 고지대 위에 세워진 도문이었소. 공기가 좋아 조용히 수련하기에 화산만큼 좋은 곳이 없지.”
원래 이 세계의 화산은 암석으로 이루어진 고지대 위에 세워진 도문이었다.
그런데 그 고지대를 이루는 암석은 보통이 아니라, 대리석보다도 값비싼 고급 석재였고 기운까지 잘 통하는 귀물이었다.
과거 인류가 한창 시체의 힘에 밀릴 때 화산은 크레딧이 필요했다. 해서 도가 주변의 암석을 깎고 잘라 팔아치웠고, 암석의 뿌리가 있는 저지대까지 파고들어가 암석을 채취했다.
그러다 보니 주변의 지대는 점점 낮아졌으며, 극히 높고 기다란 기암괴석들이 이곳저곳에 뾰족하게 솟아있는. 그리고 그 뾰족한 괴석 위로 도문의 전각이 남아있는 지금의 신기한 형태가 되었단다.
드높은 기암괴석들 위에 조형된 화산의 도문.
이제야 조금 진정한 무림에 들어온 것 같았다.
“낭만 있군.”
“하하하! 천풍곡에 올라갔다 떨어져 죽은 무인의 수를 헤아릴 수가 없소. 혹시 모르니 형장도 조심하시오.”
우리는 화산의 입구가 되는 석문에 도착했다.
청풍이 말하길, 이 화산에 오면 우선 장문인을 뵈어야 한다기에 장문의 처소라는 천풍곡으로 가야했다. 천풍곡은 삼백 미터가 넘는 기암절벽 위에 세워진 처소로, 화산에서도 거센 바람이 부는 골짜기였다.
그런데.
루돌프와 종후표가 천풍곡 문지기 무인에 막혀 화산 경내로 들어오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청풍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경한 존재들은 진입을 불허한다며 한사코 거절당하고 만 것이다.
“와 너무하네 시벌, 난 사람도 아니다 이거야?”
“원래도 사람은 아니었잖아. 금수였지.”
“말을 그렇게 하세요 또.”
“화산이 구분은 잘하는구나.”
결국, 나는 쓸모없는 두 놈을 외부 도처에 떼어놓고선 화산의 장문에 인사를 올리기 위해 절벽을 딛고 올랐다.
나는 청풍을 따라 절벽을 오르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다른 세계의 화산이라······.
중원무림에서 나를 죽인 흉수였던 화산이다.
헌데 이번에는 대단한 후기지수의 환영과 초대를 받아 들어왔지 않은가. 괜스레 남다른 감회가 들었다.
나는, 앞으로의 일이 뭐든 잘 풀릴 것만 같기에 또 기분이 상쾌해졌다.
* * *
오딘 시티.
기다란 테이블을 두고 둘러앉은 사람들이 있었다.
외관이 특이한 걸 빼면 너무나 평이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는데, 몸에선 털끝만큼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공이나 마법을 익히지 않았더라도 사람이면 약간의 기척은 가지고 있으나, 그들에게선 그것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흐음···.”
그들중 가장 먼저 말문을 연 자는 평생 총칼과는 전혀 연이 없을 듯한, 호리호리한 체격의 백면서생(白面書生)이었다.
“라그나로크에서 진공진인의 활약이 그렇게 놀라웠다더군. 무한에 가까운 내공을 얻는다는 공령지체의 경지가 그리 대단한가? 폐관도 끝났겠다. 한번 붙어보고 싶은데.”
그러자, 백면서생 반대편에 앉은 사내가 말했다.
“진공은 우리 중 가장 강한 무위를 가졌으니, 어쩌면 칠좌의 말석과 동급의 경지를 이루었을 수도 있다.”
그는 장대한 기골의 거한으로, 어깨 위에 세 자루의 박도를 매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차림에도 아무런 기세가 느껴지지 않아 실로 이질감이 가득했다.
장한의 말에 백면서생이 이번에는 농담조로 말했다.
“이제 ‘팔좌’ 로 봐야 하는 건가? 그럼 십일제가 되는 것이라 곤란한데.”
“공석이 생기면 과거 퇴출당한 ‘인형사’ 를 다시 넣으면 되겠지. 인형사라면 그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그 여인은 너무 기이하고 음흉해. 저번에 마탑이랑 무슨일이 있었던지, 인형들과 마피아가 일레힌 가문의 사업체를 건드리고 다닌다더군. 마탑에서 자기더러 ‘아줌마’ 라고 한 놈을 찾고 있다던가.”
“뭐, 간덩이가 부은 마법사가 있었나보군.”
장한과 백면서생의 실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탈각-
하지만 긴 탁자의 끝 쪽, 두꺼운 뿔테안경을 낀 여인이 안경을 추켜올리며 그들의 대화를 끊어냈다.
“자자 그만. 조용히 좀 해줄래?”
“마녀, 이번에 진공과 같이 라그나로크 수복전에 참여했다고 들었다. 어때, 직접보니 그리도 강하던가? 정말 내가 손조차 대보지 못할 정도로 강한가?”
백면서생은 오늘따라 유독 말이 많았다. 뿔테안경을 낀 여인이 그나마 이들 사이에서 말을 많이 하는 편이었지만, 현재 백면서생은 꽤 길었던 폐관수련으로 인해 말벗이 고픈 상태였다.
허나 뿔테안경을 쓴 여인도 성정이 보통이 아니라 백면서생이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 할 말만 했다.
“닥치시고. 하나, 둘 셋, 넷, 다섯 명 온 거야? 아 여섯이구나.”
스르륵—
여섯이라는 여인의 말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한 남자가 나타나 자리에 앉았다.
남자는 늑대의 털처럼 빳빳한 의복을 입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누군가의 것인지 모를 혈액과 액체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뿔테안경을 쓴 여인이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열두 자리 중 절반은 채워서 의미있게 시작할 수 있겠네. 당신 안 왔으면 쫑날 뻔했어.”
“흰소리 말고 본론으로 들어가라.”
“응, 그럼 안건 회의 시작한다?”
남자가 시간이 촉박하다는 듯 신경질을 내며 말했다. 서릿발처럼 차가운 태도에 뿔테안경을 쓴 여인.
십이제, 로라 마르티네즈가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별 건 아니고,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 9레벨 남궁천이 변절자가 되어 죽었어. 연방의 집행관이 어디서 좋은 정보를 듣고 찾아간 모양인데, 강제집행에 불응해서 요기를 꺼냈다가 그 영감탱이한테 딱 걸려서 죽었대.”
“오호!”
여인의 말에 백면서생이 놀란 얼굴로 입을 가렸고, 장한은 조용했다. 다른 두 명은 처음부터 단 한번도 입을 열지 않았으며, 마지막으로 들어온 남자는 시시하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무림계쪽에서 파장이 꽤 크겠군. 다음.”
“집행관이 수르트에서 가륵의 피를 구해왔어.”
“네임드 가륵? 추적은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라. 다음.”
“현자, 체슈탈 아스파로프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어. 꽤 입지있는 거부가 아스파로프 생전의 유물을 찾고 있다는 소문도 같이.”
“헛소리군. 다음. 다음 안건 없나? 끝났으면 이만 가겠다.”
남자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려했다.
그러나, 이어진 로라 마르티네즈의 말을 듣고 나서는 내내 인상을 구기고 있던 그도 조용히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다음 안건, 전(前)십이제 카스트라 뷔에탕이 예전에 자기더러 ‘아줌마’ 라고 한 놈을 찾았는데, 슬슬 잡아 죽여야겠으니까 로키에서 기어나와도 신경 쓰지 말고 넘어가달라네. 그때 화가 좀 많이 났었나봐.”
“······.”
그녀의 말이 끝나자 백면서생이 불쑥 튀어나와 물었다.
“인형사가 직접? 넘어가주면 어쩌겠다던가?”
“네임드, 가륵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겠대.”
“반대로 안 넘어가주면?”
“자기가 '넘어' 간대.”
“넘어가? 한 번 봐주겠다는 얘기가 아닌가.”
“스읍, 들어보니까 그 넘어가는 게 아니고.”
로라 마르티네즈가 코를 슬쩍 긁으며 대답했다.
“당장 로키 시티 개박살내버리고 시체 쪽으로 '넘어' 갈 수도 있다네. 자기도 가륵 그 개새끼 혈액 받았다고 하더라. 피를 여기저기 뿌리고 다니나 본데, 뭐 따로 좋은 의견 있는 사람?”
좋은 의견을 구하는 그녀의 질문에, 탁자 주위로 적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