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퓨전펑크의 전생자-104화 (104/157)

#104화. 일각

#104화.

전각의 심처.

웅웅웅······

안주머니에 고이 모셔두었던, 아스파로프의 나뭇대가 튀어나가고 싶다는 듯 꿈틀댄다.

혈교의 금지에서 ‘짐승’ 의 요기를 빨아먹은 이후로 자꾸 대가리가 이리저리 돌아가긴 했었으나, 오늘따라 그 정도가 과했다.

액티브가 아니라 패시브 마병이었나.

요기를 처먹으면 상시 발동되는 패시브 아이템이라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요기를 처먹고 싶어 안달이라도 난 것인지.

나뭇대의 끝은 귀물함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얘야, 왜 이러니. 이러지마라.”

혹여 고장이라도 날까 나뭇대의 움직임을 제한해보려 했으나, 과거의 칠좌가 작정하고 제작해 신병이라 불리우던 물건. 지금의 내 수준으로 어떻게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현상을 몇 번이나 더 막아보려다 결국 포기하고는 나뭇대를 꺼내놓았다. 오늘부터 나뭇대의 꿈을 마음껏 펼치게 해주는 것도 좋을 듯했다.

그런데.

나뭇대를 꺼내어 놓자마자 주위의 공간이 일그러지나 싶더니, 그 안에서 요기가 흘러나와 혈액이 들어있는 귀물함에 철썩 들러붙는 것이 아닌가!

“!”

순식간이었다.

마치 자석처럼 들러붙은 그 요기는 귀물함의 요기와 서로 뱀처럼 엉켜 부풀었다 줄었다를 반복했다. 그런 뒤 약간의 시간이 지나자, 귀물함을 방어하고 있던 특별한 술법이 자연히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 순간 귀물함이 내뿜던 요기가 상당히 줄어들었고, 흘러나오던 증기도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었으니.

“흠.”

아마도 마병, 아스파로프 나뭇대의 승리.

고도의 힘을 지닌 두 마병이 만나 한쪽이 승리한듯 보인다만, 그 원리에 대한 의문점은 더욱 강해졌다.

다만 이것은 기운을 빨아먹는 마병이라 함부로 남들에게 보여주기는 힘든 물건이다.

법기에 통달한 수도자나 ‘내게 호의를 보이면서도 대단히 고강한 경지를 지닌 마법사’ 쯤은 만나야 이것의 정체를 파헤칠 시도나마 할 텐데.

한······십이제 로라 마르티네즈 정도?

사실 그녀도 명확히 규명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것은 현자의 명호를 받은 칠좌가 쓰던 것이라.

“귀찮은 일을 덜어주어 감사하게 됐습니다.”

나중의 일이야 어찌 흘러가든, 나는 즉시 체슈탈 아스파로프의 영령에 대강 인사를 올리고 나뭇대를 소중히 집어넣었다.

그 후, 좀도둑처럼 주섬대며 귀물함을 주워 챙기려 할 때였다.

“건방진 놈. 그게 푼다고 풀리는 물건인 줄 아느냐!”

모든 일은 쉽게만 흘러가지 않는다고.

전각 입구쪽에서 진법을 흩어낸 누군가의 인영이 심처로 걸어 들어왔다.

그는 아까 우리를 이 전각으로 안내했던 부리부리한 무인이었다. 지금까지의 이력으로 보았을 때, 저자는 남궁천의 수발을 맡은 앞잡이로 보였다.

물론 앞잡이라도 가진 무위는 우습게 볼 수 없다. 피부로 느껴지는 기세가 꽤나 저릿하다.

게다가 나는 진법을 흩어내고 들어왔는데···저놈은 그냥 진법이고 뭐고 쉽게 들락날락 거리는 것을 보면 필시 남궁천이 신뢰하는 심복이겠지.

뚝···뚝···

놈은 바깥에서 사람을 몇 명이나 베었는지, 칼날에 피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채로 우뚝 섰다. 칼끝에서 떨어진 피가 전각의 바닥을 적셨다.

“남궁의 땅을 밟지 않았다면, 이리 험한 꼴은 보지 않았을 것을.”

고수.

저자는 평이한 외양에 비해, 굉장한 고수다.

최소로 잡아도 완숙한 초절정 경지에 이르렀다.

재수가 없으면 경지 끝자락에 이르렀을 수도 있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저자는 아직 내가 귀물함의 술법을 풀어낸 걸 모르는 눈치였다.

“마탑의 마법사 레반이다. 이름을 물어도 되겠나?”

나는 밍기적대며 귀물함을 몸으로 가린 뒤, 어떻게 빠져 나갈지를 궁리하며 적당히 이름을 물었다.

놈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남궁진이다.”

“그래 궁진아, 너는 아직 변절자가 아니니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참작의 여지가 있다.”

남궁이 성이고 이름이 진일 것이었으나, 나는 지금 정신을 온통 탈출과 앞으로 벌어질 전투에만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그따위 사소한 것에 신경을 쏟지 않았다.

다행히 남궁진도 그닥 신경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우습구나. 그것도 도발이라고 하는가? 너는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내 칼에 맞아 죽을 터이니, 마음껏 더 해봐라.”

“음.”

거만하군.

아무래도 혼자 있을때 더 오만해지는 성정인 모양.

저놈은 자기가 화경의 고수라도 되는 양 거만을 떨어댔다. 주인이 신뢰하는 심복이 주인 대신 주접을 떠는건 흔한 일이기에, 나는 사내답게 그냥 넘겼다.

“네놈은 자랑스러운 무인의 긍지와 명예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남궁의 이름을 더럽혀도 좋은가?”

“시체가 되더라도 나는 그대로 무인(武人)일 것이다.”

“최근 들어본 개소리 중에 두 번째로 참신했다.”

첫 번째는 종후표의 변절자다! 가 되겠지.

저 개소리 뒤로도 남궁진과 나는 서로를 노려보며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었고, 남궁진은 입이 근질근질했는지 묻지도 않은 사실을 알아서 꺼내놓았다.

“나는 남궁의 가주만이 익힐 수 있는 제왕검형까지 익혔다. 말재주는 좋다만, 네놈 따위가 시간을 끈다하여 방도를 내볼 수 있을 성 싶나?”

“······.”

제왕검형을 익혔다라.

가주 일인전승으로 내려오는 남궁의 최종절기를 마음대로 사사해도 되는 것인가? 참 웃기는 놈이군.

하기야 서비스는 주는 놈 마음이라지.

“이야 대단한데.”

나는 남궁진의 기분을 띄워주며 시선과 정신의 분산을 유도했다. 내 오른손은 느긋하게 움직이는듯 보여도 착실히 검집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초절정 검수들의 결전에선 작은 차이가 승부를 가른다.

“남궁천 전대 가주께서 너를 많이 신뢰하나보군. 그런데 막상 덤비지는 못하는 걸 보니, 겁이 많은가봐.”

“입은 살았구나. 이따위 것에 속아줄줄 알았나?”

투두두둑-

내 도발에 남궁진은 돌연 검을 들더니, 전방의 미세하게 얇은 와이어줄을 잘라 끊어냈다. 전각에 진입한 뒤 혹시 몰라 쳐둔 것인데, 입은 가벼워도 바보는 아닌 모양이다.

까딱까딱.

남궁진이 검을 까딱거렸다.

“선수는 양보하마.”

“좋지.”

생사가 달린 전투에서 선공을 양보하겠다는데, 나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저 남궁진은 어떠한 사실에 홀린듯,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아마도 자신이 남궁천에게 선택된 인재라 여기는 것이 아닐까.

스아악!

나는 한 호흡에 마나를 빨아들여 마력 투사체 수백 개를 쏘아냈다. 남궁진이 검을 꺼내 그것들을 튕겨내는 사이 검을 뽑아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출수.

내가 택한 선공은······

‘남궁세가의 검법’ 인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劍雷)였다. 십수개의 검로가 패도적으로 나아가 종국에는 하나의 검로로 수렴했다.

캉! 카강!

급히 창궁무애검으로 대응한 남궁진의 부리부리한 눈매에 당혹이 서렸다.

“······서, 섬전십삼검뢰?”

남궁진은 몸에 익은 대로 초식을 잘 막아냈으나, 필시 당황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남궁의 무인도 아닌자가 남궁의 검법을 사용했으니.

나는 남궁의 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내.

중원을 주유하던 시절에 남궁과도 부딪친 일들이 많았다. 패도적인 검을 쓰는 만큼, 성격들도 걸걸해서 마주치면 칼 뽑아 싸우는건 예삿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굳이 시비를 걸고 다니지 않더라도, 십대고수이자 여기저기 적을 둔 광인의 제자인지라 나를 박살내 스승을 부르려 하거나, 가벼이 보고 가늠해보려는 정파의 무인들이 많았다.

“네, 네놈이 창궁의 무공을 어떻게!”

놈과 나의 검이 허공에서 어지러이 얽혔다.

나는 남궁의 무공을 섞어 공격하는 와중에 선공의 기세를 몰아 [ 음성공명 ] 마법으로 남궁천의 목소리까지 흉내냈다.

“반갑다. 남궁레반이다.”

“이 빌어먹을 놈이 이따위 사술을 부려? 오냐. 끝을 보자꾸나!”

그에 남궁진은 크게 흥분했고, 판단이 흐려진 게 틀림없었다.

벌의 날갯짓처럼 파르르 진동하는 남궁진의 저 칼끝.

“남궁의 무공을 어디서 익혔는지는 몰라도, 단칼에 죽여주마! 어디 이것도 따라해보거라!”

제왕검형이다.

남궁진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극성의 성취를 이루었을 창궁무애검법이 아닌, 최근에 익힌 제왕검형을 선택한 것이다.

확실히 흉흉한 무학이자 남궁의 오의이긴 하나···

하필 상대가 나라면,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 된다.

일 분쯤 걸렸나.

서걱!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제왕검형을 꺼내든 남궁진의 목이 허무하게 떨어졌다.

툭. 투두둑···.

남궁진의 발악은 고작 삼분도 못가는, 60초짜리 맛보기 광고 같았다. 나 이제부터 제왕검형 쓴다! 아주 난리를 쳐놓고서는 실로 어설픈 검을 꺼내놓았다.

실로 조악하기 이를 데 없는 제왕검형이었다.

제왕이 아니라 재앙.

한심했다.

초절정에 오를 정도라면 창궁무애검법의 극을 보았을 텐데. 어딜 헛바람만 잔뜩 들어서는 성취가 낮은 무공을 꺼내놓는다는 말인가?

저것은 고명한 무인들도 가끔 저지르는 실수다.

대단한 무학을 익히면 그것으로 세상을 오시할 수 있을줄 안다. 각 무공마다 지닌 이치와 사용처가 다 있고, 명확히 숙련의 차이가 있거늘.

만약 남궁진이 처음부터 끝까지 창궁무애검만 사용했다면 나는 온 전력을 다해 필사의 전투를 펼쳐야 했을 것이다.

허나 놈이 보인 제왕검형의 성취와 경력은 미숙하다 못해 처참하기 그지 없었고, 나는 그 틈을 단박에 헤집고 들어가 목을 쳤다.

휘익!

그렇게 나는 잘린 남궁진의 머리를 잡아 전각 밖으로 던졌다. 귀물함을 가지고 나가니 남궁천이 바로 보였다.

“배울 수준도 안 되는 놈한테 제왕검형을 사사하면 어떻게 합니까. 제대로 쓰지도 못해서 그렇게 죽었잖아요.”

촉!

전각 앞에서는, 루돌프놈이 혀를 쓰는 종후표의 머리를 들고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저게 대체 뭘 하는 꼬라지인지는 잘 모르겠다.

“형님!”

“형장!”

“촉!”

【 ······. 】

아무튼 내가 남궁진의 머리통은 물론이고 혈액이 든 귀물함까지 가지고 나왔으니, 남궁천의 낯짝은 거뭇한 흙빛에서 다시 새하얗게 질려버린지 오래였다.

이제 저 화경의 고수이자 전대미문의 변절자가 어떻게 나올지가 궁금했다. 가진패도 다 털린김에 그냥 확 질러볼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도망칠지.

【 ······그 피, 당장 내놓아라. 목숨은 건져나갈 것이다. 】

잠시 벙쪄있던 남궁천은, 당연하게도 전자를 택했다.

쾅!

“크악!”

자리에서 찰나간 사라진 뒤 종후표 앞에 나타난 남궁천은 종후표의 머리통을 후려치더니, 그 반발력을 이용해 이쪽으로 뛰어들었다.

【 내놓아라!!! 】

나는 쏘아지는 남궁천의 지풍을 피하며 귀물함을 단단히 등에 결박했다. 빛살같은 남궁천의 궤적을 따라, 무시무시한 기세의 루베르겐 집행관과 슬레모킨까지 동시에 내쪽으로 달려들었다.

스릉—

나도 가까워지는 남궁천을 보며 검을 들어올렸다.

* * *

삼검살, 남궁산이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남궁의 하늘이 어째서······.”

현재.

하늘 높이 솟은 남궁의 전각 벽면에 손가락을 박아넣으며 기어 올라가는 피투성이의 노인이 있었다. 백발의 머리칼은 귀신같은 산발이었고 정제된 의복은 형편없이 찢어지고 뜯어졌다.

그는 남궁의 전대 가주, 남궁천이었다.

【 ······. 】

그리고 남궁천은 어느덧 남궁세가의 가장 높은 곳에 섰다.

펄럭이는 무복에 기운을 불어넣어 허공을 답보하는 것처럼, 남궁천은 전각의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당장이라도 도망갈 것처럼 굴었다.

싸움에서 밀리니 도망친다. 언뜻 보기에 합리적이다.

남궁천은, 내게서 귀물함을 결국 빼앗지 못했기 때문에.

“······형장, 일이 끝나면 화산에 꼭 오시오. 반드시 형장과 같이 화산에 가야겠소.”

“생각해보마.”

이제 남궁천은 시간을 많이 소모했다고 여긴 듯했다.

지금이라도 혈액이 든 귀물함을 빼앗아 가려면 홀몸으로 여기 있는 모두를 쓰러뜨려야한다. 허나 남궁천이 십이제급도 아니고, 상대하기에 까다로운 8레벨이 이렇게나 모여있으니 가능할 리가 없었다.

꾸욱.

나는 귀물함을 등에 단단히 결박하며, 남궁의 전각 꼭대기까지 기어올라간 남궁천을 바라봤다.

지금, 거대한 대검을 든 루베르겐 집행관이 공중을 날아 그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강대한 마력의 화산이 남궁의 하늘을 잡아먹으러 간다. 나는 방금의 전투를 견식한 뒤로, 연방 집행관과는 반드시 척을 지지 않기로 했다.

그때, 종후표가 옆에서 입을 열었다.

“혈액을 이리 쉽게 버리고 도망칠 생각이었으면, 진작에 전각에서 귀물함만 들고 도망쳤어도 됐다. 일이 이렇게까지 꼬이는데 저러는 거면 뭔가 있겠군.”

“?”

“이상해. 이상하다. 저렇게 쉽게 삶을 포기할 양반이었으면 시체도 안 됐을 건데.”

남궁천은 늙어 죽는게 두려워 시체가 된 참이다. 분명 노리는 무언가가 더 있을 수도 있다. 종후표도 그 사실이 못내 찝찝한지 인상을 구기며 생각을 곱씹는 중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종후표가 그리 말한 뒤.

우르르릉——

“!”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흔들렸다.

슬레모킨에게 듣기로, 남궁천은 강박적으로 일각이라는 시간의 단위를 신경쓰고 있었다고 했다.

나는 다시금 저 높은 전각 위를 바라봤다.

어딘가 자포자기한 듯한 남궁천의 저 얼굴.

우리는 그 이유를, 지금에서야 알 수 있었다.

【 무림의 하늘이라는 분이 이제야 오셨소! 】

꽈과과과과광——!!

찰나의 순간.

남궁세가의 전각 꼭대기로 기어 올라간 남궁천의 머리 위로, 수십 줄의 번개가 내리쳤다. 남궁천의 끔찍한 비명마저 그 섬광에 묻혀버렸다.

저 위에서, 산산조각으로 흩어지는 남궁천의 몸뚱아리.

나는 저 비현실적인 광경이, 뇌전의 경력을 담은 이기어검술(以氣馭劍術)의 일종이란 것을 알았다.

누군가 넋이 나가 입을 열었다.

“칠좌(七座).”

남궁천이 요기를 내보인 시간이 어느 한계 지점을 지나자, 연방의 최강자 반열에 앉아있는 도시의 칠좌가 직접 나선 것이었다.

이윽고.

나는 신선에 필적하는 기운을 가진 수십 개의 칼날들이 남궁천의 육체를 도륙내는 걸 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저 하늘이 변절자의 피로 물들고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