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변절자다!
#102화.
대가리 종후표가 한 마디를 강조하며 외쳤다.
“쫄리면 뒈지시라고.”
“······.”
남궁세가가 황제처럼 다스리는 땅에서, 그것도 막후의 왕인 남궁의 전대 가주에게 ‘쫄리면 뒈지시라고’ 하는 시체가 세상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백리뇌부 종후표는 그걸 또 손쉽게 해냈다.
그의 생존욕구는 남궁천의 기세마저 이겨냈다.
남궁천이 격노할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허, 당최 무슨 헛소리인지.”
그러나 남궁천은 오히려 흥분을 가라앉혔다.
“만금전장이라는 이름을 네가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목만 남은 변절자의 헛소리를 믿는 자가 과연 대 남궁에 있을 것 같던가? 그리고 시체의 거짓말을 철썩같이 믿는 것도 모자라, 남궁의 본원에 들이다니······마법계 집행관이 공을 세울 생각에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로군? 아니면 다른 세가의 사주라도 받은 겐가.”
남궁천은 전각 안에 조용히 처박혀 있다가 감염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재깍 모습을 드러내어 여론을 제 쪽으로 끌어간 노괴.
루베르겐 집행관을 공에 눈이 먼 마법계 집행관으로 매도하며, 침착하게 만금전장의 이름부터 지우려했다.
워낙에 늙은 능구렁이라 호락호락하지 않다.
허나 분위기가 술렁이기 전에, 종후표가 다시 나섰다.
“보세요 남궁 어른. 그래봐야 다 끝났습니다. 우리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추하게 가지 맙시다.”
“······저 시체놈이.”
“내 성격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가 그냥 되는 대로 떠드는 놈 같아요? 그렇게 대책없이 사는 놈이면 연방 의원까지 해 먹었겠습니까? 천년만년 살아야 하는데!”
“버러지 같은 놈이 어디서 아는 척이냐!”
캉!
일갈한 남궁천이 집행관을 피해 또 지풍을 쏘아냈으나, 이번에는 내 검에 의해 막혔다. 손이 얼얼했다. 죽일 작정이었군.
“나 백리뇌부 종후표야 변화하는 세상의 격류를 현명하게 올라탄 것뿐이지만, 남궁 어른께서는 그저 늙어 죽는 것이 두려워 변절을 선택한 것 아닙니까! 이 말이 토씨 하나라도 틀려요?”
“······더 들을 가치조차 없구나! 당장 저놈을-”
“아직 남았다! 지금 나를 공격하면 남궁천과 뜻을 같이한 변절자인 것으로 알겠다! 대가리만 달랑 남은 내가 뭐 남궁을 뒤집어엎기라도 하겠나? 시작도 안 했으니 경거망동 하지마라!”
— ······.
남궁천의 명에 따라 움직이려던 남궁의 무인들이 움찔했다.
종후표의 그것은 거의 웅변(雄辯)과도 다름없었다.
대중을 상대하는 데에는 이골이 난 정치인 종후표.
놈이 대가리를 휘적 돌리더니, 이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전에 알 헤임달의 주점에서 말했잖은가. 나를 백리뇌부로 만들어준 부법은 과거 ‘남궁의 가주’ 도 인정한 절학이라고!”
“그랬지.”
“그때 말한 ‘남궁의 가주’ 가 바로 저기 서있는 제왕검 남궁천이다. 지금은 세월이 오래 지나 전대 가주가 되었지. 이 종후표는 남궁천과 오랜 구면이고, 나를 변절로 유혹한 자중 한 명이 저 남궁천이다.”
바다 위의 해적이 상선에 갈고리를 던지듯.
종후표가 툭툭 던져놓았던 말들은, 어느새 날카로운 갈고리로 변해 남궁천과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윽고 다시 대가리를 돌린 종후표는, 우리를 뱅글 둘러싸고 있는 남궁의 무인들을 향해 외쳤다.
“매우 애석하게도,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에 참여한 남궁세가 역시 큰 피해를 보았겠지. 세가의 기둥이던 초고수들과 정예들이 예상치 못한 시체들의 전력에 죽거나 은거에 들어갔고 아직 많이들 정양 중일 것이다.”
— ······.
수십 개의 눈이 종후표만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종후표는 뼛속까지 천상 정치인이라, 보는 눈이 많을 때 더욱 빛이 나는 유형이었다.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했고 반쪽남은 얼굴 위로 정의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 틈을 파고든 것이다. 세가의 근본이 흔들려 혼란스러우니, 너희는 구석에 처박힌 저 노괴까지 신경쓸 틈이 없었겠지. 지난 몇 달간 남궁천은 폐관이니 수련이니 하며 내내 저 안에 있었을 거야.”
— ······.
“그런데 목숨줄이 오늘내일하던 뒷방 양반이, 신변 정리는 안하고 갑자기 무슨 놈의 폐관에 든다는 말인가?”
남궁의 무인들은 긍정하듯,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들은 세가의 정예인 만큼, 제 스스로 옳고 그름을 판별할 줄 아는 자들이었다.
“그 입 닥쳐라! 누굴 모욕하는 것이야!”
“그쪽 빼고 다 가만히 있는데, 듣고 움직이지?”
“······이, 이족 마법사년이!”
“욕하지마. 당신 몇 살이야.”
철컥-
와중에 부리부리한 인상의 무인이 더 이상은 못 들어주겠다는 듯 칼을 뽑았지만, 슬레모킨에 막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종후표는 잠깐 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폐관이 아니라, 혹여나 들킬까 노심초사해 식솔들과도 소통을 끊었던 거다. 세가 무인들이 라그나로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나갈 때, 남궁천은 쥐새끼처럼 시체의 피를 홀짝대며 나와 같이 변절을 준비했다. 저 늙은이는 죽기가 두려워 너희 남궁을 저버렸다는 말이다!”
의문을 제기하며 돌직구를 던진 것은 청풍.
켜켜이 쌓인 의문을 날려버린 것은 종후표다.
“남궁천은 나와 같은 변절자다. 그것을 밀고하러 여기까지 왔다.”
— ······.
“진실은 전각의 문지방 너머에 있다.”
이제 제왕검 남궁천도, 남궁천을 수행하던 중년의 무인도, 그리고 별도의 전각을 빙 둘러싸고 있던 남궁의 정예 무인들까지도.
다들 뇌에 과부하라도 걸린 사람처럼 조용했다.
일 초가 일 분처럼 천천히 흘러갔다.
지금 종후표의 대가리가 뱉어낸 말이 얼마나 엄청난 폭로인지 모르는 이는 여기에 아무도 없으니.
나는 슬슬 누군가 이 씁쓸한 침묵을 깨주었으면 했다. 내가 먼저 깼다가는 남궁천의 지풍이 목을 노리고 날아올 수도 있잖아.
그리고 그런 나의 바람대로, 공무를 수행중인 루베르겐 집행관이 움직였다.
“남궁천, 해명해라. 할 수 있다면.”
연방 집행관이라도 무려 남궁의 전대 가주를 상대로 하대할 수는 없다. 집행관중 가장 수위에 있는 자도 남궁천을 상대로는 하대가 불가능 할 것이다.
그러나 루베르겐 집행관은 이미 남궁천이 변절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결심을 굳힌지 오래.
두 번째로는 내가 침묵을 깨고 나섰다.
“전각 내부를 샅샅이 조사해보면 끝날 일을, 왜 종일 밖에 세워두는 겁니까? 우리 사내답게 갑시다.”
집행관은 경우에 따라 위아래가 없는 사람이고, 나는 원래 앞뒤가 없는 사람이라 아주 장단이 잘 맞았다. 위아래앞뒤가 없으니 눈에 뵈는 게 없어지는 것이다.
“······흥, 다들 눈이 있다면 보아라. 우리 남궁이 저딴 헛소리를 언제까지고 경청해줄 것이라 생각했나?”
우우우웅—
남궁천이 자신의 검을 뽑더니, 단숨에 기다란 검강을 만들어냈다. 화경의 고수다운 강대한 검강이 전각의 주위를 환히 밝혔다.
— 한 치의 의심 없는 정순한 공력이다.
— 기운을 일으켜도 요기가 전혀 없지 않은가.
— 역시 세 치혀를 놀려 우리 남궁을 모욕하러 온 것이 틀림없군.
그러자 남궁의 무인들 몇몇이 동조하여 주변을 어지럽혔다. 그들은 슬그머니 입을 놀리며 남궁천의 무혐의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걸 두고볼 종후표가 아니었다.
“아니지 아니지! 추악하다 남궁천! 사건의 본질을 흐리지 마라. 너는 시체의 피, 극히 미량을 혈도에 조금씩 흘려넣어 적응시키고 있지 않느냐!”
— !
정치와 선동에 특화된 인물. 정치구단 종후표는 남궁의 무인들이 웅성거리자마자 큰 소리로 반박 의견을 꺼냈다.
“시체의 피를 미량씩 받아들이면 당장은 시체로 보이지 않고 요기도 조절이 가능하여 운신의 폭은 넓어진다. 저기 보이지 않나? 남궁천은 정순한 검강까지 쉬이 뽑아내는 화경의 고수다. 저런 경지라면 감염 시기를 약간 늦추는 정도는 못할 것도 없다! 저자는 이미 사람이 아니다! 자신을 신처럼 모시는 남궁에 숨어 적응기를 가지고 있는 중이라는 나의 견해가 더 타당할 것이야!”
“······.”
맞는 말이었다. 나도 알고 있었고.
6레벨, 거의 7레벨에 이르던 마법사.
모래 폭풍이 지나간뒤, 발두르 시티 연방의 격리동에서 난동을 피웠던 쿼롯 가문의 마법사인 페디치가 떠올랐다.
그는 며칠간 상위 마법으로 감염 사실을 숨기고 격리동에 있다가 끝끝내 이성을 잃고 폭주했다.
바꿔 말하자면, 7레벨급이 마음먹고 숨긴다면 며칠 정도는 어찌저찌 숨겨볼 수 있다는 뜻. 심지어 페디치는 마땅한 아군도 없이 혼자였는데 남궁천은 아니지 않은가.
“남궁천! 이제 그만 인정해라! 지금 속으로 덜덜 떨고있잖아!”
“······.”
강력한 아군이 있고, 세가 내에서 무소불위의 위세를 가진 전대 가주라면 더욱 쉬울 것이었다.
경지가 화경에 이르러 정신력도 보통이 아닐 터.
남궁천이 내놓은 것들은 종후표에 의해 하나하나 반박당했고, 이제 마지막 결론만이 남았다.
“대답해라 남궁천. 전각을 조사해봐도 되겠나?”
“······.”
루베르겐 집행관이 남궁천의 성질을 벅벅 긁었다.
그는 오랜 기간 기업의 회장급을 상대해온 인물. 항상 상대의 목줄을 쥐고 있는 입장이었으니, 하대가 어색하지 않았으며 기세에서 밀리지 않고 몰아붙일 줄도 알았다.
“남궁의 가주도 만나지 못하게 막고, 이 전각으로 유인해 요기가 느껴지는 석탄등을 부수었지. 어딜봐도 부자연스러운 정황 투성이지 않은가.”
루베르겐 집행관은 멈추지 않았다.
“남궁세가는 속부터 썩었군. 강제 집행하겠다.”
“허허.”
그러자.
남궁천이 쥐고있던 검을 축 늘어뜨렸다.
그러고는.
팟!
갑자기 전각에서 가볍게 뛰어오른 남궁천이 허공을 가로질러 한 무인의 앞에 내려섰다. 지금 우리를 빙 둘러싸고 있는 무인 중, 가장 강력한 기세를 풍기던 검수였다.
척!
그 검수는 절도있게 포권했다.
“실로 오랜만에 뵙습니다.”
“산,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남궁산. 분명 들어본 적이 있는 고수다.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무인으로, 세 합 내에 죽인다고 하여 삼검살(三劍殺)이라는 별호로 불리우는 자.
칼날같은 기도를 풍기던 남궁산은 잠시 고민하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전각을 조사하게 함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무언가 큰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당당히 결백을 증명하신 뒤에 저들을 천참만륙(千斬萬戮)내도 늦지 않습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예.”
남궁천은 시선을 옮겨 옆의 무인에게 물었다.
“만도. 네 생각도 동일한가?”
“예.”
만도라고 불린 퉁퉁한 무인도 종후표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깊게 숙였다.
상황이 그렇게 되니, 남궁천이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좋다. 뜻이 정 그렇다면 내 그리하지.”
“저, 정말이십니까?”
“천참만륙(千斬萬戮). 울림이 좋군. 천참만륙으로 갈라버리면 되겠어.”
시원한 대답에 남궁의 무인들이 크게 반색했고.
“태상가주! 정말 잘 생각하셨—”
서거거걱—
퉁퉁한 남궁만도를 시작으로···
반색한 무인들의 목이 전부 깔끔하게 절단되었다.
찰나의 순간 남궁천의 팔이 움직이나 싶더니, 그의 주변에 있던 세가 무인들의 목이 일거에 공중으로 떠오른 것이다.
“······이 무슨 짓이오 태상가주—!!!”
남궁천의 기색이 어딘가 달라졌음을 진즉 눈치채고 몸을 뺄 준비를 하고있던, 삼검살 남궁산만이 그 혈겁에서 살아남았다. 남궁산은 즉시 주변의 무인들을 규합해 대항하려 했으나.
서걱! 서걱!
— 크아악!
어느순간, 남궁의 무인들끼리 칼부림이 나나 싶더니 순식간에 혈겁이 펼쳐졌다.
그새 남궁천과 뜻을 함께하기로 한 놈들일 터.
부리부리한 인상의 중년인도 아니나 다를까 슬레모킨의 손아귀를 벗어나 남궁의 무인들을 썰어버리기 시작했다.
대혼란이 일어나는데 몇 초면 충분했다.
콰득!
와중에 남궁천은 붕 떠오른 머리통 하나를 잡아 깨부수더니, 과일처럼 쥐어짜 입안에 흘려넣었다.
주르르륵···.
인두겁을 덮어쓰고 있던 괴물의 본성.
“그래. 알아냈구나. 헌데 날 제압할 수 있을 듯 싶나?”
남궁천은 흡족하다는 듯 쥐어짠 머리를 휙 던지더니, 얼굴로 피를 흠뻑 뒤집어 쓴채 기수식을 취했다.
스스스—
남궁천의 검끝이 뱀의 혀처럼 흔들린다.
제왕을 명칭으로 택한 남궁의 최종 절기다.
······제왕검형(帝王劍形).
아힘사의 초진동블레이드처럼 흔들리던 검끝은 보는 이로 하여금 본능적인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시작부터 남궁의 절기. 뇌전처럼 출수해 단숨에 끝낼 요량이군.
“벼.”
심히 혼란스러운 전각 앞.
전투의 시작을 알리듯.
변절자, 종후표가 음성에 요기를 담아 고함을 빽 질렀다.
“변절자다!!!!!!!!”
너도 변절자잖아.
[ 내가 막는다. 전각으로 들어가서 가륵의 피를 챙겨라. ]
그렇게 루베르겐 집행관의 전음이 끝나자마자, 무시무시한 기세를 일으킨 남궁천이 땅을 박찼다.
【 귀에 다 들린다!!! 가만히 둘 줄 아느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