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이게 무슨 상황이오?
#100화.
사람은 제 분수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내가 어느 위치에 서있는지 똑똑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다. 그렇지 못하면 언젠가 큰 일을 당하기 십상이라.
1회차, 현대에서야 제 분수를 몰라도 ‘분수도 모르는 놈’ 이라며 욕이나 좀 처먹고 말겠지만, 다른 세상들에서는 아니다.
이 세상이 그렇다.
분수 파악 못한 대가는 죽음으로 돌아온다. 법보다는 총칼과 주먹이 더 훨씬 더 가까운, 야만적인 세상에서 대개 통용되는 이야기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 생각해볼 필요가 있었다.
무림의 축소판이라는 수르트 시티의 정경에 호기심이 이는 것은 사실이나, 과연 이 수르트 시티행이 나의 분수에 맞는가.
우선, 나는 8레벨을 달성했다.
무공의 성취나 심득이 충분한 상태에서, 보물과도 같은 바만차의 에센스를 단전에 전부 다 때려박아 일단 초절정 경지에 걸맞는 내공을 얻었기에.
초절정 초입의 경지. 본래라면 어림도 없지만, 나는 무리를 좀 하면 검강도 뽑아낼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이미 상위의 경지를 엿보았다는 것은, 이렇듯 큰 이점이 있다. 그런 생각을 하니 정기신 합일이 문득 그리워졌다.
‘좋았는데 그때.’
마법쪽은 회로가 깨져나간 뒤 아직 3위계 그대로다.
나는 대책없는 미친놈인데다 가끔 참을성이 없을때가 있어 에센스의 기운을 단전에 모두 때려 넣어버렸기 때문에, 초절정의 무위는 달성했어도 네 번째 마나 회로를 다시 쌓지 못한 것이다.
‘5위계만 되어도 무공과 연계해 전투 수준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인데. 마나 회로와는 이상하게 연이 없군.’
쓰임새가 많은 마법들이 많은데, 효과를 극대화해 활용하려면 최소 루벤카와 같은 5위계는 되어야 한다. 지금 이 정도로 무공과 마법의 격차가 벌어졌다면 보조의 역할 정도가 최대.
이전 생, 라아기스 대륙에서의 나는 꽉찬 5위계 마법과 초절정의 무공을 섞어 제국의 별을 상대했다. 그 노괴는 8위계 대마법사로 용 바로 밑의 존재로 불리던 괴물에 워낙 좋은 로브까지 걸친 탓에 보기좋게 패했으나···
죽어가며 아주 실낱같은 가능성 정도는 보았다.
고절한 지경에 이른 무공과 마법의 융화는 상승의 깨달음을 얻는 단초가 될 수 있다. 이제 상단전도 뚫렸으니 더 높은 경지를 바라보아도 좋았다.
물론 전부 나중의 얘기이고···
지금의 나는 어지간한 8레벨급 상대로는 승리를 점치겠고, 경지가 무르익은 8레벨의 끝자락이라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며 9레벨 이상을 상대로는 목숨은 물론이고 패기, 용기, 객기, 독기등의 각종 요소들이 필요하겠다.
“수르트 시티의 남궁을, 지금 바로 말입니까? 좋습니다.”
놀랍게도 나는 저 요소들이 골고루 내포되어 있는 사내이기에, 수르트 시티에 아주 못갈 정도는 아니라는 판단이 섰다. 수르트로 향한다고 하여 제 분수도 모르는 놈은 아닌 것이다.
루베르겐 집행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절하지 않는 이유를 물어도 되나?”
“화산 그룹에 절친한 벗이 있는데, 도와드리는 김에 보러 가려합니다.”
내 대답에, 집행관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궐련을 꺼내 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딘으로 가면 귀찮아질 것이란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군?”
“그래 보입니까.”
“연방과 세력들간의 복잡하게 꼬인 혼선을 정리하려면, 백리뇌부를 잡았다는 공으로 자네를 다시 전면에 내세워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쉬운 길일 테니···아, 연설은 감명깊게 보았네.”
집행관이 이렇게 길게 말할줄 아는 사내였던가.
텅!
나는 종후표의 대가리가 든 석탄등을 툭툭 치며 답했다.
“마탑의 영향력이 큰 발할라 시티도 아니고, 제가 아무 연고도 없는 오딘 시티까지 기어갈 이유가 없지요. 무작정 갔다가 무슨 고초를 겪으려고.”
“나도 연방정부 소속이네만,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겠군.”
그렇게 집행관은 독자적으로 이번 사태의 조사를 택했다.
9레벨의 전설적인 집행관 모리 무라타. 그의 인격메모리칩을 이어 받았으니, 가륵이라는 시체의 이름에 동요하는 것이 당연하다.
나도 이 세계의 초창기 배양 인큐베이터 속에서, 인공지능 지니에게 주입받았던 내용이라 잊을 수가 없었다.
“35년 전인가.”
궐련의 흰 연기가 공중으로 퍼져나갔다.
“자그마치 9레벨의 집행관을 시티 안에서 살해한 시체는 유유하게 장벽 밖으로 도망쳤다. 시티 장벽을 방어하는 광역 마법진은 수준이 높아. 하나 9레벨쯤 되는 존재가 마음먹고 뚫으려면 못할 것도 없었겠지. 오늘에서야 놈의 단서를 잡았으니 꽤 기쁘군.”
그 말을 마친 집행관이 대가리만 덜렁 남은 종후표를 바라봤다. 그의 푸른 광망이 꽂혀들었다.
그러자 종후표가 대뜸 화를 냈다.
“이런 때려죽일! 집행관, 정말 이 무슨 황망한 상황인가!”
종후표의 입장에서는 큰 마음먹고 밀고한 곳에 직접 가보겠다고 하니 당황할 수 밖에. 거기에 가봤자 겨우 남긴 대가리가 박살밖에 더 나겠나.
“갑자기 남궁세가에 가겠다니, 설마 남궁천과 날 대질이라도 시켜볼 작정인가? 만약 그럴 생각이라면 나는 입을 닫겠네. 나머지 한 명의 변절자도 알아낼 수 없을 거야! 그래도 정말 좋은가?”
“나머지 한 명은 관심도 없고, 정 여기서 죽고 싶다면 말리지 않겠다.”
“······.”
“노력한 보람도 없이 허무하게 죽는 것도 괜찮지. 좋은 대우도 여기까지다.”
“아, 아니 그 말이 아닐세. 진정하게.”
그러나 종후표가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그의 생사여탈권은 루베르겐 집행관의 손에 달려있다. 불리하다고 해서 큰소리칠 처지가 아니다.
“내가 흥분이 과했군.”
삐질삐질 땀을 흘리던 종후표도 그걸 알고 있는지, 빠른 사과를 끝으로 입을 닫고는 눈도 감았다. 사색에 잠긴듯한 모습이었다. 실은 가열차게 잔머리를 굴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집행관에게 전음을 보냈다.
[ 연방에 일을 맡기면 결과를 알 수 없기에 서두르는 겁니까. ]
[ 변절자로 낙인찍히면 그 뒤로는 회생불가지. 거물인 만큼 조사과 집행 기간은 기약없이 길어질 것이고, 그동안 만약 다른 이들이 이 일에 끼어들게 되면, 나는 어떤 정보도 얻을 수 없을거다. ]
[ 로라 마르티네즈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
[ 그 여자가 움직이면 남궁천도 눈치를 챌 것이다. ]
루베르겐 집행관은 이미 심지를 굳혔다.
종후표가 남궁천의 변절을 증명하려 우리에게 던진 증거는 너무도 확실했기 때문에.
집행관은 곧, 허리를 굽혀 캐리어에 앉았다. 연방 정부가 집행관에게 특별히 배속해준 공무용 캐리어였다.
“이거 보이나? 연방 공무용이다.”
“타고가면 적어도 맞아 죽을 일은 없다는 겁니까.”
“정당한 공무를 집행하러 가는 거니까. 연방이 뒤를 받쳐준다는 뜻으로 알아들어도 되겠지.”
“그럼 제 뒤도 받쳐준답니까? 내가 보기보다 앞뒤 없는 놈인데.”
후우우-
궐련 한 까치로 비공정의 증기보다도 하얀 연기를 피워낸 루베르겐 집행관이 입을 열었다.
“나도 경우에 따라 위 아래가 없는 놈이니, 우리는 꽤 잘 맞을 수도 있겠군.”
* * *
슬레모킨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전대 가주가 변절자라는 폭탄을 들고가면 환대받지는 못할거야. 다짜고짜 칼이 날아올 수도 있는데, 뾰족한 수라도 있어?”
“늘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지 않았나. 이제는 먼저 말도 거는군.”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대답이나 해.”
슬레모킨의 재촉에 루베르겐 집행관이 말했다.
“수르트 시티는 거대해서, 이곳에 상주하는 연방 집행관들이 있다. 여차하면 그들의 지원까지 이끌어낼 수 있을 거다.”
집행관 여럿이라면 믿을만 하다.
최소 8레벨급 이상으로 이루어진 연방의 집행관들이기에.
당연히 남궁세가도 꿀릴 것은 없지만, 기업들의 저승사자이자 연방에서 보낸 전령을 해할 정도로 무식하진 않을 테고.
다만 연방의 무력을 운운해야 할만큼 남궁세가라는 이름이 주는 압박감은 컸다.
슬레모킨은 복잡하다는 듯 대뜸 누워버렸다.
“무림계 애들은 마법사만 보면 아주 무시하기 바쁜데······벌써부터 귀찮다 귀찮아.”
수르트 시티. 무림의 축소판.
지금 착륙중인 우리의 발 밑에 있는 도시였다.
스아아아아—
자그마치 10억을 넘겨버린 인구와 압도적인 자금력으로 연방 내에서 물자들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도시. 구파일방 오대세가로 대표되는, 수많은 희생자와 불어난 시체들만 남기고 종료된 대전쟁의 주역. 마법계와 함께 연방을 반으로 갈라먹은 거대한 축.
무림계가 케케묵은 내분을 일으키지 않고 완벽하게 일통(一統)되어 합치했다면, 마법계를 어렵잖게 누르고 대전쟁의 승리자가 됐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을 정도로 강한 세력들과 절대고수들이 복마전처럼 드글거리는 곳.
‘일통은 무슨.’
그 대목에서 조금 우스운 것은, 시체같은 위협이 다섯 쯤 더 있어도 무림의 세력들은 힘을 합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대라신선급의 무위를 지닌, 어떤 지고하고 초월적인 존재가 나타나 억지로 일통해버리지 않는 한 어림도 없다. 그게 무림이다.
- 그걸 남궁의 가주께서 어찌 아십니까······?
- 역시 남궁의 주인이십니다.
나는 남궁세가의 사람들을 잘 모르기에, 수르트까지 오는 길에 그들을 대하는 연습을 단단히 했다. 무인들 앞에서 함부로 야야 거렸다가는 곧장 따귀가 날아올 거다. 아무래도 체면과 명예를 중요시하는 무림계다보니, 호칭등에 민감한 면이 있어서.
또한 무림이 최고라는 생각이 대가리에 깔려있는 놈들이라, 다른 시티 출신들을 경시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겉으로는 명예와 의, 협을 운운하며 뒤통수칠 때만 노려보고 있는 놈들이라 행동도 어지간하면 조심하는 게 좋겠군.
‘제왕검(帝王劍) 남궁천.’
무림계의 거두이며 화경의 고수.
일선에서 한참 전에 물러난 노괴라지만, 못해도 원로 이상가는 지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을 것이고 가문내에서의 입김도 강력할 것이다.
남궁 전체를 아우르는 막후의 왕이자, 본신의 무력도 보통이 아니겠지.
남궁의 무공은 대체로 패도적이며 강맹함이 주를 이룬다. 중원에서도 감히 무공 이름에 제왕검형이니 하며 '제왕' 을 붙일 정도였으니.
황제도 아닌데 제왕을 붙이다니. 미친놈들이다.
중원을 다스리는 황제가 칼잡이놈들이 무슨 제왕이여! 하며 걸고 넘어졌으면 황군, 관군의 이지매에 멸문지화를 당할 위험도 있었으나, 그 세계의 남궁은 그러든 말든 꿋꿋하게 제왕을 지칭했다.
관무불가침이라는 걸 믿고 그랬는지, 여튼 남궁은 그런 놈들이었다.
“다른 길로 새지말고, 바로 출발하지.”
루베르겐 집행관은 옆을 보는 법이 없었다.
수르트 시티 스테이션에 내리자마자 종후표의 대가리를 들고 남궁세가로 직진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몇 시간에 걸쳐 남궁에 도착했다.
“음.”
으리으리한 대궐같은 남궁세가 본원 앞.
거의 성벽과도 같은 담을 쌓아둔 남궁세가의 본원 안에는, 이 근방에서 가장 높고 거대한 전각들이 자리해 있었다. 십 미터를 훌쩍 넘을 법한 강철의 성벽 위로 높이 솟은 동양풍의 전각들이 화려하게 사방을 빛낸다.
“누구시오.”
우리가 그앞에 서자, 부리부리하고 진한 인상의 무인이 튀어나왔다. 앞을 막아선 그는 중년이었는데 기도가 마치 잘 벼려진 칼같아서 평범한 세가의 식솔은 아닌듯했다.
무인은 우리 일행을 찬찬히 둘러보며 말했다. 아힘사가 든 석탄등에도 무인의 시선이 잠시 갔다가 이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보아하니, 연방 정부에서 나왔소이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나를 따라오시오.”
그런데 그 부리부리한 무인은 미리 언질을 받아둔 것이 있는지, 루베르겐이 연방의 집행관임을 확인하자 우리를 본원과 상당히 떨어진 별도의 전각으로 안내했다. 그곳도 화려하긴 매한가지였다.
이윽고.
별도의 전각 앞에 우뚝 선 집행관이 말했다.
“남궁의 가주를 먼저 뵙고 싶습니다. 이곳은 본원이 아닌 것으로 압니다.”
“가주께서는 이미 무림의 명숙들과 선약이 있어 한참을 기다려야하오. 연방의 전령이라 하여도 차례는 지켜야 하지 않겠소.”
“······.”
루베르겐 집행관은 재촉하는 무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곧 집행관의 손이 안주머니로 향하더니, 자연스럽게 궐련을 꺼냈다.
“그렇습니까.”
“그렇소, 어서 들어가서 차례를 기다리시오.”
“명문대파를 자처하는 세가의 대접이 이리 박해서야.”
“···지금 남궁을 모욕하는 건가?”
부리부리한 눈의 무인이 더없이 불쾌한 얼굴로 답했다. 그의 손은 어느새 허리춤에 얹어져 있었다. 검이 뽑혀나오기 직전이었다.
“들어가지.”
결국 크게 실랑이가 벌어지기 전에 집행관은 전각 안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돌려 슬쩍 보니, 그 어두운 전각 속에서는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집행관의 다음으로 아힘사가 종후표의 대가리가 든 석탄등을 들고 전각에 들어갔을 때였다.
퍼걱!
“······.”
전각의 심처에서 쏘아진 한줄기의 지풍.
거력이 담긴 지풍은 오랜 여정을 거친 종후표의 허탈한 마지막을 고했다. 석탄등과 함께 두부처럼 터진 그의 머리는 다시 재생되지 않았고, 머리의 잔해가 철퍽 엎어지자마자.
【 감히—!!! 】
저 어둡고 깊은 전각의 심처에서, 누군가의 쩌렁쩌렁한 노호성이 들려왔다. 초절정의 무위를 지닌 나라도 방심했다간 귀청이 찢어질 듯한 사자후였다.
【 감히 더럽고 역겨운 시체를 이곳에 들여 나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우려 하다니! 이 연방의 변절자— 】
그 우렁우렁한 노호성에, 멀리서 전각을 지키고 있던 남궁 무인들의 기세가 가까워지던 그때였다.
“아니 형장! 그새 많이 헌앙해지셨소.”
발랄한 음성과 함께 의기당당한 사내가 그 누군가의 노호성을 끊어버리며 나타났다. 집행관과 슬레모킨은 물론이고, 장내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수르트 시티에 왔으면 당연히 내가 있는 화산에 먼저 들러야지. 연도 없는 남궁에는 어찌하여 걸음하셨소? 나는 또 왜 이곳으로 부른 것이고?”
나는 청풍이의 인사를 받아주며 반갑게 입을 열었다.
“어. 대 화산 최고의 기재, 화산이 밀어주는 잠룡, 화산의 미래 장문인, 화산이 가장 사랑하는 무림계 최고의 후기지수. 화령검절 청풍이가 때맞추어 도착했구나.”
내 말에, 청풍이 당황한 눈빛으로 소곤댔다.
“···듣는 사람 창피하게 나를 왜 그리 소개하시오?”
“청풍아, 너도 저 안에다가 인사 올려라.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시다.”
“···?”
그렇게.
내가 수르트 시티에 도착해 남궁으로 향한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한 달음에 남궁세가로 달려온 대 화산 그룹의 기재.
박살난 채 전각 앞에 흩어진 살점의 잔해와, 전각 안에서 흘러나오는 살기짙은 기세를 느낀 청풍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상황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