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역시 우리 돌프 답구나! (끝)
#95화.
콰아아아아—
짐승의 폭주.
강대한 요기가 줄기차게 뿜어져 나오자 짐승의 몸체가 담겨있던 어항의 혈액이 철썩이며 파도를 이루었다. 이윽고 혈교단의 금지 전체를 가득 메우며 퍼지는 요기.
저런.
나는 기함하며 기운을 적당히 끌어 올렸다. 루돌프놈이 워낙 단단한 바람에 맛이 없는 걸까.
우선 안주머니에서 꺼낸 나뭇대를 이리저리 돌리며 상황을 지켜본다. 하지만 물끄러미 지켜본다 하여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흡혈귀 주교들의 말대로 짐승의 혈술이 유독 격하게 반응하는지, 요기는 시간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었던 탓이다.
결국 지켜보던 내가 마땅히 말문을 열었다.
“저대로 두면 위험할 듯 하니, 손을 써야겠습니다.”
“힘들겁니다. 요기의 세력이 너무나 강합니다.”
내 말에 세 명의 흡혈귀 주교들은 약속이나 한듯 고개를 저었다. 일에 휘말린 루돌프놈이 멀쩡히 나오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이미 짐작하고 있는 듯하다.
“무언가를 시도하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맞습니다. 늦었습니다.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혈술이 이미 작용하고 있는데, 어떻게 멈추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설마 짐승을 훼손시킬 작정이라면 절대로 허락할 수 없겠습니다.”
주교들의 극구만류에도 나는 안주머니에서 꺼낸 나뭇대를 연신 만지작거렸다.
요기만 잘 가라앉히면 강한 놈이 나온다라.
재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좋은 건지······.
이건 나만의 생각이지만, 사내는 때때로 폭력성을 배출해야한다. 물론 자주는 아니고 가끔씩 말이다.
무통귀갑신공의 창시자, 파계승 괴노야는 불가에 귀의해 숭산에 오른 뒤로 술도 못마시고 고기도 못 먹고 여인도 품지 못했다.
객점에서 흑도나 파락호들을 상대로 주먹을 휘두르는 대신 절간에 꿇어앉아 목탁이나 쳤을 테고. 심지어 혼자 용두질마저 못 했을 테지.
소림의 규율이라는 미명 아래 자연스러운 폭력성을 배출하지 못하였으니, 그것에 잠겨 서서히 미쳐가다가 마침내 무통귀갑신공이라는 미친 무공을 창안하고 내 스승 광마와 장단이 맞을 정도의 광인(狂人)이 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루돌프는 상당히 중요한 자원이다.
나의 성질을 마음껏 배출할 수 있게 돕는 수단.
그러니까 정신머리가 가끔 돌아버리는 사내인 내가 인간성을 편히 유지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욕받이인 셈이다. 전장에서 살지 않더라도, 아직까지 내가 멀쩡한 정신으로 남아있는 이유중 하나라고 할 수 있겠다.
어느날 갑자기 돌아버려서 칼춤을 추지 않게 하는. 그래, 아마도 루돌프놈은 정크타운의 하레니오 갱단 피해자들이 내려준 수호신이 아닐까. 하레니오 갱단 놈들도 저 놈때문에 다 뒈진 것이니.
뭐 루돌프놈이 그런 욕받이 신세를 원할지는 모르겠으나, 고분고분하게 굴던 내 얼굴에 칼빵이나 놓는 개놈이었으니 녀석의 신세 따위 사실 내 알 바는 아니지.
허나 나는, 한 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내다.
루돌프녀석에게 오늘은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 장담했으니, 내가 그리 만든다.
우우우웅—
흡혈귀 주교는 외부에서 요기를 가라앉힐 방법이 없다고 단언하였으나, 나는 카산드라 교수에게 받은 아스파로프의 마병, 나뭇대 지팡이에 공력과 마력을 동시에 주입하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양의 공력이 기경팔맥을 내달리고.
그 막대한 양의 기운을 순식간에 빨아삼키는 나뭇대는, 발할라 봉우리에서 사용했을 때와 같이 한 극점에 기운을 압축시키기 시작했다.
“······흐음.”
당연히도 아이작의 시선이 곧장 꽂혀들었다.
나는 나뭇대에 진력을 쏟아 부으며 일전의 일을 떠올렸다.
이 아스파로프의 나뭇대에서 쏘아진 원형의 기운 덩어리는 생명체에 유효하고, 느리지만 적중당한 생명체는 급속도로 생기를 빨아먹힌다. 설산목을 상대로 실험을 해보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저걸 다 빨아 처먹을 수는 없을 터.’
이 악마같은 흡성대법 나뭇대라도 저리 강맹한 요기를 남김없이 빨아먹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이전에 보았던 놀라운 효과를 생각해 보았을 때, 요기를 일정 부분 가라앉히는 것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다만 혈마의 술법을 머금고 거대한 요기를 보이는 저 ‘짐승’ 의 기운을 빨아먹는 동안 세 명의 흡혈귀 주교들이 가만히 두고 보느냐가 문제인데.
연방 전체에서 터부시되는 흑마법이나 흡성대법마냥 생명력을 쭉쭉 빨아 먹는 이 끔찍한 마병을, 아이작과 흡혈귀 주교들의 눈앞에서 쓰는 것보다 루돌프놈의 가치가 높은가?
아니다. 루돌프놈은 한낱 양아치일 뿐이니.
아이작은 어쩔 수 없고, 흡혈귀들은 그냥 때려 눕힌후에 진행해야 하나.
나는 일단 내뱉은 말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공력을 주입했다. 와중에도 짐승이 뿜어내는 요기는 점점 더 커져만 가고 있었다.
그렇게.
조그만한 나뭇대 하나 꺼내들고 저 미친놈이 뭘 하는거지? 하며 수군대던 흡혈귀 주교들이 점점 이상함을 느끼고는 어어, 소리를 낼 즈음이었나.
털썩-
“?”
순간, 지켜보던 아이작의 신형이 사라지나 싶더니 셋이나 되는 흡혈귀 주교들을 일시에 때려 기절시켜버렸다. 흡혈귀 주교들도 따로 떼어놓고 보면 상당한 실력자들인데, 저 근육덩어리가 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신속한 몸놀림이었다.
귀찮게 구는 장애물들이 잠시 퇴장했다. 나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연방에서 많이 꺼려한다 하더라도 ‘짐승’ 은 혈교의 금지에 자리해 흡혈귀들에게는 신물과도 다름 없는 취급이다.
그런데도 아이작은 대놓고 내 손을 들어준 것이다.
같은 이족이 아닌 인간의 손을.
혹시나 하며 입을 열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저 친한 동료일.”
“꽤 문제가 많아보이는 물건인 듯 한데, 어서 시작해야 하지 않겠나?”
그것도 맞는 말이군.
나는 아이작의 말에 대답할 새도 없이 한번 끄덕여보이곤 마지막으로 공력을 쏟아부어 한계까지 채워냈다. 적어도 지닌 내공의 절반은 썼을 거다.
우우웅—
그러자 곧, 나뭇대의 극점에서 발출된 원형의 기운이 도깨비불처럼 뭉쳐 팔랑팔랑 날아가기 시작했다.
곧이어.
——!!!
그 기운이 방해없이 짐승의 몸체에 닿자, 놈은 금지가 떠나가라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짐승이 담겨있는 혈액의 어항에서 요기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소용돌이가 친 뒤, 몇 분이 지났을까.
“······.”
이내 짐승이 뿜어내던 요기와 나뭇대가 쏘아낸 기운이 허공에서 얽히더니, 천천히 나뭇대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리고 세월의 흔적이 가득하던 나뭇대는 그 기운을 잠시 되새김질하다 통째로 꿀꺽 하고 삼켜버렸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웃기는 놈이다. 설산목의 기운은 바로 뱉어버렸으면서.
나는 요기를 삼켜버린 나뭇대를 곧장 안주머니에 넣고서는 휘파람을 불었다.
“헙!”
때마침, 기절했던 흡혈귀 주교들이 부스스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냉막한 표정을 짓고있는 아이작에게는 차마 묻지 못하겠는지, 또 나를 붙잡고 늘어졌다.
“이 무슨!”
한 흡혈귀 주교는 어항에서 한가득 흘러나온 혈액을 보고는 가여운 표정을 짓더니 소리를 질렀다. 화라도 났는지 분위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이,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음.
현자의 저주가 담긴 의문의 마병이 ‘짐승’ 의 기운을 빨아먹어버렸습니다. 덕분에 요기가 줄어들었으니 꿩 먹고 알 먹고지요-
내가 그리 말할 강단까지는 없는 사내지만, 실제로 본 것과 단순히 짐작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 않겠는가.
일단 흡혈귀 주교들이 이 사태에 기겁하며 격하게 해명을 요구했기에, 나는 정색을 하며 단호히 거짓을 늘어놓았다.
“요기를 잠시 가라앉힌 것 뿐입니다.”
“가라 앉혔다니요? 어떤 수를 쓰신 겁니까?”
“그것까지는······여튼 그 과정에서 요기가 폭주하는 바람에 기절들을 하시더군요. 그나저나 뒤통수부터 엎어지던데 다들 괜찮으십니까.”
“우리 주교들이 그 정도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리가 없습니다.”
“그랬을까요?”
“······.”
의심의 눈초리에 나의 주특기인 철판을 깔았다.
짐승은 이 흡혈귀 주교들도 한번 수틀리면 통제가 쉽지 않은 물건이고, 주교들은 요기가 흘러넘치는 어항을 앞에 두고 아무것도 건드리지 못했다.
헌데 뭘 잘했다고 큰 소리인지.
괜히 자신감이 붙은 나는 뻔뻔함을 한술 더 보탰다.
“그리고 나의 절친한 벗이 죽어버리게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애당초 주교님들께서 미리 설명을 잘 해주셨어야죠. 오랜만에 생 인간을 집어넣어서 그런가? 뒤에서 그리 말씀하시는거 다 들었습니다.”
“······.”
큼큼-
약속이나 한듯 헛기침을 한 주교들은 내 해명에 불편한 심경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아이작이 없었다면 달려들어 포박한 뒤에 감옥으로 끌고갔을 기색이다.
“아이작님의 손님이라 하셔도 방금의 행동은 정도를 한참······.”
“안에 멀쩡한 인간이 들어있는데, 요기가 넘쳐흐르니 배 째라고 하셨잖습니까.”
“그것은 안타깝지만 저희로서도 어쩔 수가-”
“교단의 주교씩이나 되는 분들이 어찌 그토록 무책임할 수가 있습니까. 내가 막았어요 내가! 아멘!”
“······.”
나는 되려 고함을 치고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흡혈귀 주교들의 얼굴에 붉은 혈색이 과하게 돈다.
아니 시발 우린 반대했는데, 네가 굳이 넣겠다 했잖아···대강 그런 표정들이로군.
당장은 아이작이 가만히 상황을 주시하고 있기에 더 크게 따지고 들지는 못했으나, 자꾸 엉덩이를 들썩들썩 하는 것이 굉장히 당황스러워보였다. 교에서 애지중지하던 신물이 고장이라도 나면 어쩌나 하는 면면들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어항 속 혈액이 부글부글 끓어 오르며, 웬 검고 커다란 형체가 짐승의 안에서 그 자태를 드러냈다.
화난 복어처럼 부풀어올랐던 짐승은 요기가 뽑히자 안정을 되찾더니, 금세 루돌프놈을 퉤! 하고 뱉어낸 것이다.
푹 잠겨있던 루돌프 녀석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당장 끄집어내세요!”
반색한 흡혈귀 주교들은 헐레벌떡 달려가 놈을 뜰채로 건져내고는 어서 보충할 혈액을 가져오라며 어딘가에 소리쳤다. 아무래도 이쪽에는 신경쓸 마음이 없어보인다.
이렇게 끝인가.
“······.”
나는 주교들이 건져놓은 형체의 앞에 가 섰다.
전(前)루돌프.
그리고 이제는 전신에 어두운 칠흑빛이 도는 거체.
푸확!
놈의 입이 울컥거리더니 큼지막한 선지를 뱉어낸다.
루돌프의 형상은 온데간데없이. 육체는 인간보다 두어 배는 컸다. 입은 괴물처럼 양 옆으로 찢어져 있었으며 검고 매끈한 비늘이 덮고있는 전신의 피부가 인상적이었다.
“쯧, 이런 괴물의 모습을 원한 것은 아닌데.”
루돌···짐승 부스러기의 전신에서는 투박하지만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공력이나 마력, 요기도 아닌 그 무언가.
눈을 감고 긴 한숨을 내쉰 나는···두 주먹을 불끈 쥐어올렸다.
“그래도 강화 성공인가!”
실로 비통함을 감출 수 없었으나 억지로나마 힘을 내보는 것이다. 정말로 슬펐다.
하지만 그 억지 행복도 잠시였다.
“커헉!”
“?”
“어우 씨이벌! 커허헉! 아오 씨벌!”
“······.”
데굴데굴-
연신 구르며 바닥에 선지를 뱉어내던 칠흑빛의 육체가 푸스스- 소리를 내며 점점 작아지나 싶더니, 커졌다가 작아졌다가를 어지럽게 반복했다.
그러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루돌프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버린 것이 아니겠는가! 한바탕 욕을 뱉으며 지랄발광을 하더니 기절해 추욱 늘어진 루돌프놈은 내 발치 앞까지 굴러와 있었다.
나는 기감을 놈의 육신에 집중해 훑어보았다.
곧, 녀석의 기운이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외형은 그대로이지 않은가?
혹시 멋들어진 외형으로 바뀌지 않을까 하며 은근히 기대하긴 했는데.
짐승의 폭주 현상과 중간에 나뭇대가 요기를 빨아먹어버리는 변수들이 추가되어 무언가 결과가 달라진 건가.
그 사실에 나는 그만,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이거 설마 다시는 안바뀌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앞으로도 공중전은 힘들겠군.”
사내의 로망,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분노의 질주는 정말로 물건너 갔단 말인가!
일단 루돌프녀석이 깨어나면, 곧장 붙잡고 캐물어봐야겠군.
나는 엎어진 루돌프놈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결의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