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역시 우리 돌프 답구나! 2
#94화.
발할라 시티, 카산드라 교수의 저택.
비어버린 통유리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은 오늘도 조심스러웠다. 원래는 카산드라가 가장 아끼던 골동품을 전시해두었던 유리장이었다.
론 카산드라는 문득, 보도된 사진을 바라보았다.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의 영웅.
단 5분간의 스피치로 연방을 뒤집어버린 남자.
“아아······아스파로프님······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어쩌면 그는 이미 본래의 외형을 탈피해버렸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는 것이 못내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겠지.
로라 마르티네즈와 진공진인이라는 마법, 무림계의 거물들을 한데 묶어 한 팀으로 만들어버린···그 괴이하고도 유령같은 존재는 현재 몇 달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가만히만 있어도 연방에서 밀어주는 수복전의 대영웅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모든 의문을 거침없이 폭로하고 잠적했다.
7레벨이 감히 내릴 수 있는 판단이 아니다. 상식의 범주를 한참 벗어난 행동의 이면에는, 평범한 이들은 알지못할 이유가 있을 터였다.
연방의 전설, 현자 체슈탈 아스파로프.
“나만, 나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거네요······.”
카산드라의 확신이 더욱 깊어지는 계기였다.
‘레반’ 이 과거 10레벨의 경지를 달성한 마법사이자 전설적인 현자, 체슈탈 아스파로프라는 것을.
그의 비범함을 자신만이 알아보았다.
일생동안 좇아온 신기루가 실제로 눈 앞에 나타났고, 그 사실을 자신만이 알고있다니. 그 형용하지 못할 감각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아···아아!”
아스파로프의 광팬, 카산드라 교수는 또다시 몰려오는 희열에 한참동안이나 몸을 떨었다.
그녀는 이로써 레반이라는 캐릭터는 아스파로프가 만들어낸 하나의 인격이 틀림 없다고 생각하며, 그가 식사할 때 썼던 저택의 식탁보를 사랑스럽게 개어 정리했다.
그 뒤로.
“다, 다음번에 만나면······뭘 드려야 하지?”
갑작스레 카산드라 교수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기존 회원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시크릿 경매장을 포함해 각종 부티크를 이잡듯이 뒤진다. 세상에 남은 그분의 물건을 찾아 자신의 손으로 돌려드릴 것이다.
정말, 상상만해도 행복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아아······.”
* * *
“하하하핫! 역시 우리 돌프로구나!”
“?”
빙글빙글 웃는 레반을 바라본 밴스가 뒤통수를 긁었다.
어, 왜 저렇게까지 좋아하지?
위화감이 스멀스멀 뒷목을 타고 올라온다.
밴스는 불현듯,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하다고 느꼈다.
‘뭐지?’
몸 좋아졌다는 소리에 괜히 기분이 들뜨는 바람에, 신나서 막 팔다리 부러져도 버틴다 등등 이상한 대답을 내뱉긴 했는데 그거야 일상이긴 하고······.
잠깐.
생각해보니까 뭐든 견뎌낼 수 있겠냐고?
두들겨 팰 거면 묻지 않고 때렸을 놈이다.
‘아······시발.’
아무래도 이상한 도발에 걸려든 것 같았다.
느낌이 너무 쌔하기에, 그냥 안 한다고 급히 말을 바꿨다.
“저 그냥 안 할래요.”
“돌프야, 언제는 좆밥이라고 하지 않았니.”
“진짜 안 하겠습니다. 마음이 바뀌었어요.”
“이놈이 갑자기 왜 이래. 누가 너한테 뭘 하겠대?”
“오늘 일정이 바빠요. 외공 수련 해야 됩니다.”
“허허.”
밴스의 저항에도 레반은 다 예상했다는 듯 부드럽게 타이르며 웃었다. 그러나 밴스는 같이 하하 웃으며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이곳에 와서 어여쁜 엘프들도 매일 구경했다. 몇 달간 유독 운수가 좋았다. 멸치처럼 얇았던 몸도 튼튼해지고, 시궁창같던 인생에 드디어 볕이 드나 했다.
하지만 그간 개처럼 두들겨맞으며 갈고닦은, 본능적인 생존 감각이 당장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아, 아무튼 안한다고요. 알아 들으셨어요?”
오늘만큼은 절대 따라가선 안 된다고.
백 퍼센트 확률로 큰일이 벌어진다고.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 엘프들의 세계수의 남아있으라고 말이다.
“돌프야, 남아일언중천금이다. 그러니 사내가 한번 했던 말을 쉽게 바꾸면 안 되겠지?”
“저 여자할게요. 그리고 이번만 바꿀테니까 좀 내버려 두세요.”
“돌프야.”
“네. 형님.”
“그러면 잠깐만 이리와봐라.”
“?”
밴스가 마지못해 다가가자, 레반은 웃는 낯으로 밴스의 목에 팔을 휘감았다.
우득-
적당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밴스의 외공의 성취가 몇성이든간에 당장이라도 어깨 위에 달린 수박을 깨부술 수 있는 사내.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의 이치를 깨달아 외부는 멀쩡히두고 내부부터 부술 수 있는 사내.
그것이 밴스에게 팔을 두른 레반이었다.
레반은 밴스의 귀에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 지금 돌프가 하겠다고 해서 다들 애쓰고 있는데, 네가 이제와서 말을 바꾸면 어떻게 할까. 그냥 좆밥이니까 반드시 하겠다며. 사람들 다 불러다놓고 똥개훈련 시키는거니?
“······.”
- 형이 어련히 너 해주려고 전부 세팅해뒀는데, 지금 와서 이러면 내 체면이 뭐가 돼? 내가 뭐 너한테 나쁜거 시킨적 있어?
척! 동시에 아힘사가 뒤에 나타나 뒷걸음질 치던 밴스의 퇴로를 막았다. 사면초가. 도망칠 구멍이 보이질 않았다.
레반은 밴스의 등을 툭툭 두들겨주며 말했다.
“끝나면 맛있는 돈까스 사줄게. 알겠지?”
“······.”
마치 허위매물 업자처럼 돌변했던 레반은 다시금 다정한 어조로 두려워하는 밴스를 달래주었다. 이미 결정했고 하기로 마음먹은 것. 사내답게 눈 딱 감고 결정하자는 식으로.
“겁먹지마. 별 거 아니야. 너 인마 잘 안죽어. 좋은 외공이라니까.”
“······.”
바짓가랑이나마 붙잡으려던 밴스의 모든 퇴로가 막혔다. 밴스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좀 아프더라도 또 뭔가 얻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건 도축장에 끌려가는 것만 같지 않은가.
‘시발. 어떡하지? 가면 좆될것 같은 분위기인데.’
그리고 레반 저 새끼 뭔가 알고있는게 분명하다.
근데 저 새끼가 마음 먹었으면 끝장이다. 아무리 지랄해도 자신의 대쪽같은 뜻을 관철시키고야 마는 놈이다. 그게 별 좆같은 결과로 이어지더라도, 이 새끼는 한다면 반드시 하는 놈이다.
이거 안 되겠다.
불안함이 전신을 찌른다. 오늘만큼은 당할 수 없다.
끝나면 맛있는 돈까스 사준다고? 시발, 나보다도 어린놈이 형님 형님 해주니까 이제 나를 아주 개무시해?
“나도 하나의 인격체라고! 뒈져 새꺄!”
화악!
울분을 한꺼번에 터뜨린 밴스는 레반의 팔을 강하게 붙잡고 주먹을 휘둘렀다.
정크타운에서 갈고 닦은 퍽치기 실력을 가감없이 뽐낸 것이다. 육 성에 이른 외공에 주먹은 암석보다도 단단했다. 황소처럼 돌진해오던 시체놈도 박살내버린 몸뚱이다.
탁!
“어허. 다친다.”
“!”
그러나 죽엽수로 가볍게 그 힘을 흘려낸 레반은 다치면 안된다는 듯, 살짝만 힘을 주어 제압했다.
그리고는, 그냥 내려놓았다.
평소같았으면 싸가지없이 손을 들어 올리냐며 일단 팔부터 분질러버린 다음 빨랫감처럼 쥐어짜고도 남았겠지만, 오늘 레반은 그리 흉악하게 굴지 않았다.
“돌프야, 다칠 뻔했잖아. 너 괜찮니.”
“······.”
밴스는 그 점이 오히려 더 두려웠다.
차라리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는게 몸은 아프지만 마음이 더 편하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이제 마음의 준비 끝났으면 출발해볼까?”
* **
이족, 흡혈귀들의 과거 성지이자 금지(禁地).
혈교.
지금은 그저 흡혈귀들이 믿는 하나의 종교로 변모한 혈교라지만, 과거 교주였던 혈마가 죽기 전에는 교세가 대단했다.
지금 레반은 그 혈교의 중심에 있었다.
“저것이 알 헤임달의 짐승이다.”
혈마가 세상에 남기고간 ‘짐승’ 은 십 미터가 넘는 피륙의 거대한 덩어리로, 거대한 어항 속에서 피에 푹 잠겨있는 형태였다.
그리고 그 혈액 어항 위에는 교수대같은 장치가 하나 있었다. 아마 부스러기가 될 재료를 결박해두는 곳이겠지.
흡혈귀들의 피에 푹 담가놓은듯 보이는 짐승은, 레반이 몇 개의 생을 겪는동안 본 것들중 손에 꼽을 정도로 기이한 생김새였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혈액의 어항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복어같았다. 빵빵하게 부풀어오른 거대 덩어리는 붉은 혈액의 늪에 잠겨 천천히 박동하고 있었다.
아이작은 놀라는 기색 없이, 익숙하게 안내했다.
“따라오도록.”
그렇게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직진한 아이작은, 현재 혈교의 주교라는 고위 흡혈귀들의 앞에 레반과 밴스를 떡하니 데려다 놓았다.
— 오셨습니까······.
시리도록 창백한 피부에 하나같이 미형의 외모.
잠시 아이작과 대화를 나누던 그들의 시선이 레반에게로 향했다.
곧 레반이 알 헤임달의 짐승 부스러기를 얻고자 한다고 하니, 그들은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물었다.
“아이작께 전해 듣긴 했습니다. 본론부터 말하자면, 시체가 아닌 인간을 넣겠다는 말입니까?”
“예.”
흡혈귀 주교의 표정이 의문으로 물들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굳이 그래야만 할 이유가 있는 건가?
흡혈귀 주교는 친절한 태도로 말문을 열었다.
“적당한 시체를 포박해올 자신이 없다면 도와드리지요. 인간에게 혈술을 행한다면, 평생 끔찍한 고통을 안고 살아갈겁니다. 혈술로 인한 통증은 시체이기에 버틸 수 있는 것입니다.”
“과거 그랬던 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예, 인간의 몸으로는 절대로 버티지 못할 겁니다. 살아남아 힘을 얻는다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이 매일같이 뒤따를 것입니다.”
“······정말로요? 이것 참.”
레반은 장담하겠다는 듯 극구 말리는 흡혈귀 주교를 보며 잠시 상념에 빠져들었다.
루돌프놈은 현재 한 외공을 익히고 있다.
놈은 신기하게도 성취가 굉장히 빠른 탓에 무려 육성의 경지를 이룬 상태다. 쓰레기놈이지만 특히 익힌 외공에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루돌프놈이 익힌 무공은 일생을 광인으로 중원을 주유하던 내 스승이 형산의 어딘가에서 얻어온 것이다.
무통귀갑신공(無痛龜甲身功).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거북이의 육신.
루돌프놈이 계속 물었을 때, 무공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았던 이유. 사실 내가 가르치긴 했지만 명칭이 워낙에 쪽팔려서 그랬다.
어찌 되었든 이 등신같은 이름의 무공은, 중원의 형산에서 터를 잡고 살아가던 한 변태 기인이사가 창안했다.
형산의 사람들은 그 기인이사를 괴노야라 불렀다.
괴노야는 한때 소림의 중이었으나 정신머리가 온전치 못해 파계당한 땡중으로 대종사급의 무위를 가지고 있었다. 소림의 중들은 고기와 술, 여인을 멀리하는 탓에 정신이 홰까닥 나가버리는 일이 왕왕 발생하곤 한다.
어느날 외공의 달인인 괴노야는 마침, 그와 똑같이 정신나간 무인인 나의 스승을 만나 한쪽은 막고 한쪽은 뚫는 생사결을 벌였고, 스승 광마가 진땀을 뺀 끝에 승리하였다.
이미 무위가 조화경에 이르렀기로 무림에 광마를 상대할만한 자가 별로 없었는데, 고작 한 합 차이로 승부가 갈렸을 만큼 괴노야는 강했다.
그리고 그 싸움 뒤에 비슷하게 정신나간 놈들끼리 쿵짝이 맞아 형입네 아우입네 하며 얻어온 무공이 바로 무통귀갑신공.
학대에 학대를 거쳐 몸에 자연히 기가 스며 극성에 이르면, 진정한 불괴지신의 뜻을 이룰 수 있다하여 그 땡중이 지어붙인 이름이라던가.
하나하나 말하자면 너무 길고, 간단히 말해 쳐맞으면 쳐맞을수록 몸이 단단해지고 맷집이 좋아지는 미친 무공이다.
심지어 무통귀갑신공을 사성 이상 익혀버리면, 그때부터는 체질이 변하여 다른 무공은 익히기가 힘들다. 오로지 이 무통귀갑신공만을 익혀야 한다. 그러니 미친 무공이 맞다.
무공의 극의이자 추구하는 목표는 불괴지신(不壞之身).
도검이 불침하고 수화가 불침하는 경지.
아마 소림 출신인만큼 그 무공을 새로이 창안할 때, 금강불괴(金剛不壞)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허나 소림에서 말하는 금강불괴의 경지를 실제로 달성할 수 있다면, 그자체로 이미 신공절학 이상이다. 외공과 내공을 가르는 의미가 사실상 없는 수준일 테니.
그래도 일단, 무통귀갑신공은 금강불괴의 경지를 노려볼만큼 훌륭한 외공이 맞다.
다만, 하나 큰 문제가 있다면.
그 대종사급의 땡중 괴노야도 무통귀갑신공의 대성에 이르지는 못했다는 것.
그리고 그 이유는 괴노야가 무통귀갑신공을 팔 성까지 익혀보니, 인간의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고통은 한정되어 있기에 성취를 더이상 진전시킬 수 없었다던가.
대성에는 이를 수 없는 반쪽짜리 무공인 것이다.
하기야···아무리 두들겨 패도 처음 몇 년이나 고통스럽지 시간이 지나면 루돌프놈처럼 다 적응하기 마련이다. 인간의 몸은 보통 그렇다. 통증의 상한선은 존재한다.
물론, 내 스승 광마는 최대한 고통에 적응하지 못하게 여기저기 골라 때리는 기술이 훌륭했다. 제자인 나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2년간 적응도 못하고 뒈지게 아프게 쳐맞은 것이지.
나는 루돌프놈에게 무통귀갑신공을 익히게 했다.
내가 아는 한에서 루돌프놈에겐 그것이 최고의 외공이었다. 데리고 다니면서 마음껏 두들겨 패도 상관없고, 다른 무공 가르치지 않아도 되고, 계속 때려도 몸은 점점 튼튼해지니까.
‘허나 인간의 몸으로는 무통귀갑신공의 성취를 늘리는 데 한계가 있다.’
사실 육 성이면 한계가 보이는 수준이다.
무공의 창시자조차 팔 성을 한계로 두었으니.
그 외공이 잘 맞는, 재능있는 놈을 기술적으로 패고 고문하여 고통으로 이룩해낸 경지.
헌데, 알 헤임달의 짐승 부스러기라는 가능성이 보인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 그것은 끔찍한 고통을 수반하며. ]
[ 살아 남으면 강력한 힘을 얻는다. ]
[ 시전자의 피를 뿌려 그 ‘짐승’ 의 안에 넣으면 마치 수인의 육체처럼 강성해지고, 대단한 회복력을 보유한 부스러기를 뱉어낸다. ]
저 대목들은, 듣기에 실로 달콤한 것이 아닌가.
모두 무통귀갑신공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조건들.
어차피 이제 루돌프놈은 팔다리 관절을 반대로 비틀어도 그때만 소리를 지를뿐 멀쩡하다. 육체적인 고통에는 슬슬 통달했다는 뜻.
여기서 루돌프가 인간의 한계를 깬 다른 존재로 거듭난다면, 매일같이 공짜 고통을 겪으며 무통귀갑신공의 경지를 꾸준히 발전시킬 수 있다면.
거기다가 육체 강성과 대단한 회복력까지 준다고?
루돌프를 위해 준비된 종합선물세트가 아닌가 싶었다.
어쩌면 무공을 창안한 대종사 괴노야조차 이르지 못한, 구 성 이상의 경지를 달성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거나, 일말의 가능성을 열어둘 수도 있는 것이다.
“돌프야.”
그렇게 상념을 끝낸 레반이 결연하게 입을 열었다.
무통귀갑신공 육 성에 이른 루돌프놈은 필시 버텨낼 수 있다. 약간의 고통이 수발될 수 있으나, 들어보니 사람이 아주 즉각적으로 묵사발이 될 정도는 아니란다.
팔 성까지 익힌 괴노야가 광마와 싸워 한 끗차이로 패배했을 정도로 훌륭한 외공이다. 자그마치 육 성이나 성취한 루돌프에게 저 따위 살덩이의 혈술이 대수랴.
레반은 그간 자신의 폭력을 견딘 루돌프라면, 충분히 견뎌낼 수 있으리라는 판단이 섰다.
“예, 형님.”
“너는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리 만들지 않을 것이야.”
“저, 정말입니까.”
“왜냐하면 네놈을 곁에두고 평생 두들겨야하기 때문이다. 이제야 육질이 쫄깃해졌는데 순순히 죽게 놓아두겠느냐. 나는 그래선 안된다고 봐.”
“······시발, 그게 무슨 개풀 뜯는 소립니까.”
“들어가라. 오늘은 더 피를 보기가 싫구나.”
“······진짜로 들어가요? 저 시뻘건 곳으로요?”
“괜찮다. 숨겨둔 대안이 다 있어.”
“구, 구라치지 마세요. 그냥 무작정 넣어보고 조, 좆되면 그냥 에이 실패했네 하고 갈거죠? 로또 긁어보는 심정이잖아요 지금.”
그렁그렁해진 밴스의 눈가를 확인한 레반은 눈물을 머금고 결단을 내렸다. 막연한 두려움은 인간의 정신을 파먹는다. 루돌프놈이 두려움과 맞서 싸울 수 있게 무대를 만들어주자.
“저기요! 이제 그만 시작합시다!”
“······.”
레반이 고개를 돌리자 흡혈귀 주교들이 천천히 다가와 밴스의 양 팔을 결박했다.
그들은 아이작을 흘긋 보고는, 질질 짜는 밴스를 피의 어항 위로 터벅터벅 끌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이어지는 광경을 확인한 레반이 손에 낸 상처를 지혈하며 신께 기도를 올렸다.
‘제발 튼튼하고 좋은 놈으로 나오게 해주세요!’
* * *
흡혈귀들은 시리도록 창백한 피부만큼 시원시원하게 굴었다.
풍덩-
루돌프놈이 혈액의 어항, 그러니까 짐승의 구멍 속에 빠질 때까지만 해도 흐름은 좋았다.
허나 그 좋은 흐름은 아쉽게도 얼마 가지 못했다.
콰아아아아—
혈액의 어항 속에 잠겨있는, 그 짐승의 피륙덩이가 느닷없이 어마어마한 요기를 내뿜기 시작한 것이다. 혈액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바깥으로 넘치려했다.
흡혈귀 주교들의 당황한 면면들을 보면, 평범한 사태가 아닌 것이 분명했다. 놈들은 저들끼리 생인간을 오랜만에 넣어서 그런가, 같은 추측들을 나누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그들에게 따지고 들었다.
“저거 갑자기 왜 저러는 겁니까?”
“혈술에 육신이 크게 반응하는 겁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짐승의 몸에 남아있는 혈술은 그자체로 거대한 생명력과 의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과거 강력한 시체들과 육신을 뒤섞어버린 혈마의 의지가 남아있을 수도 있다는 얘기지요. 따라서 재료에 따라 강한 반응을 보일 수도, 약한 반응을 보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저 짐승이 변덕을 부려서 강한 힘을 낸다는 겁니까?”
“······요기가 가라앉지 않으면 멀쩡히 나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저 요기를 버티거나 가라앉힌다면 더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방금 들어간 인간은 강력한 시체도 아닐 뿐더러—”
흡혈귀의 얼굴에 혈색이 돈다.
인간으로 따지자면 아주 창백해진 것.
그니까, 죽어버릴 수도 있다는 얘기로군.
내가 보기에 거의 바만차급에 이르는 강대한 요기다.
주교의 말대로 강력한 시체라면 몰라도, 외공 하나 딸랑 익힌 루돌프놈이 저만한 요기를 가라앉힐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저 요기만 가라앉히면 돌아온다 이겁니까?”
“그야 그렇지만, 외부에서 가라앉힐 방법이 전혀······.”
나는 즉시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웬 조그만한 나뭇대 하나가, 내 안주머니 안에서 급히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