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흠...그 정도인가?
#91화.
슬레모킨의 설명은 대강 이러했다.
이곳은 엘프족들의 마을이라 조금 전에 보았듯 인간을 반겨주지는 않겠지만, 엘프와 약혼관계인 것이 알려진다면 전혀 문제가 없을 것이고, 그때부터는 아주 무릉도원처럼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거다.
연방에서 큰 사고를 치고 도망쳐 왔다고 해도, 알 헤임달 시티의 엘프들은 보통 연방과 그리 친하지 않다. 그러니 여긴 신고 같은 걸 할 사람···아니, 신고할 엘프도 없다.
그러니 자신의 약혼자라 소개한다면 이곳에서 몇 달간 안전히 지내는 것은 아주 식은죽 먹기다.
말하자면, 가짜 약혼자 전략이다.
하지만 이곳에 머물며 약혼자 행세를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의 단계를 거쳐야 했는데, 바로 그녀와의 약혼을 허락받는 일이고.
그 허락의 주체는, 그간 베일에 싸여있던 슬레모킨의 부모님이란다.
“어차피 가짜로 하는거야. 알지? 가짜.”
그리고 지금은, 그녀의 부모를 만나기 위해 별도의 입구로 들어와 잘 쓰이지 않는 개별 승강기에까지 올라탄 마당이다.
그러니 이제와서 무를 수도 없었다. 로라 마르티네즈가 내어줬던 비밀 캐리어는 이미 돌아갔을 것이다.
우지직-
덩굴이 여기저기 붙어 있어서 그런가.
우리가 올라탄 승강기는 쓸데없이 느릿느릿했다.
그런데다가 이 승강기는 하필 통유리창으로 만들어져 있어서, 올라가는 동안 다른 엘프들의 시선을 묵묵히 견뎌내야만 하는 아주 괴상한 구조였다. 무슨 동물원 우리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
어찌됐든 승강기는 느리더라도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발밑을 잠시 내려다보자, 슬슬 거대한 빌딩의 가지들이 보였다.
호숫가 위에 세워진 메카 세계수의 규모와 좌표가 고정된 개별 승강기를 사용하는 것을 보아하건대, 그녀의 부모는 절대 평범한 엘프가 아닐 터. 이종족인 엘프 중에서도 역시 꽤 고위층이지 않을까 싶다.
나와 슬레모킨은 목적지까지 느리게 올라가는 동안, 혹시 모를 돌발질문에 완벽히 대비하기 위해 몇 가지 말을 맞춰두었다.
— 좋아하는 음식은?
— 처음 만난 장소는?
— 첫 데이트는?
— 인간이 아닌 엘프가 좋은 이유?
— 신혼집 매수비용은 몇대 몇 비율로 부담할건지?
—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도 육아 휴직이 가능한지?
간단하게 서로 어디서 만났는지부터 시작해 혼인을 준비하는 연인이라면 으레 알고 있어야 할 예민한 부분까지 말이다.
평범한 협력관계 그 이상을 연기해야 한다.
다행히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이라는 공통분모가 사이에 자리하고 있었기에 우리는 그에 관해 적당한 얘깃거리들을 감쪽같이 꾸며낼 수 있었다.
띵.
어느 중간층 쯤에 이르자 승강기문이 열렸다.
“?”
헌데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다.
웬 화분들에 꽃이 꽂혀있고 좋은 아로마 향이 났다.
마음을 편안하게 진정시켜주는 클래식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오고 있었고, 푹신한 쿠션들과 공손한 태도의 엘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옷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목소리를 깔았다.
“여기인가.”
“···아 여기? 아직은 아냐. 이 층은 별 건 아니고 조금 준비 해주는 곳이랄까.”
“여기서 무슨 준비를 더 해?”
“뵙기 전에 발도 씻고 그러는 거지 뭐.”
슬레모킨은 대수롭지 않게 행동했다.
그간의 노고를 풀어주고 간단한 단장을 위해 상시 준비되어 있는 장소라며 내게도 편하게 받기를 권했다.
부모를 뵙기 전에 따로 준비하는 방도 있다니.
엘프들은 원래 이렇게까지 효심이 깊은가?
곧, 굉장히 섬세한 손길을 가진 엘프들이 다가와 세족 세면은 물론이고 장인 정신으로 수염을 한올한올 깎고 손발톱을 만져 다듬었다. 엘프로 이루어진 테라피스트 전문가 집단이라던가.
어찌나 반딱하게 잘 닦던지, 고문당할때 빼고는 별 관심도 없던 손발톱들이 오늘 섬섬옥수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후후······.”
슬레모킨은 자신의 부모를 속이고 기망(欺罔)해야 하는데도 흠흠 거리며 외모를 단장하기에 바빠 보였다. 아마 그간의 혼인 압박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단번에 날릴 기회로 여기는 듯하다.
그렇게 발끝부터 머리끝에 걸친 관리가 끝나자.
“넌 며칠 여기서 지내.”
“예?
루돌프놈은 이 테라피스트 층에서 강제로 내리게 되었다. 약혼자가 아니면 같이 올라갈 수 없다나.
“오 그럴까요? 오히려 좋은데?”
하지만 루돌프놈은 만족한 듯한 얼굴이었다. 엘프와의 행복한 한때를 꿈꾸기라도 하는 건가? 역시 외모에 어울리게 천박한 놈이다.
그렇게 단 둘만 남은 이후로 승강기가 도착해 문을 열어준 곳은, 빌딩 세계수의 가장 꼭대기 층이었다.
“······.”
그리고 나는, 그 꼭대기 층에 내려서야 알았다.
슬레모킨, 그녀의 부모가 보통 고위층이 아니라는 사실을.
승강기는 한 번도 꺾지 않고 코어층의 꼭대기로 그대로 올라왔다. 그러니까 이 메카 세계수의 제일 꼭대기에서 거주하는 엘프들이 그녀의 부모인 것이다.
슬레모킨의 어릴 적으로 추정되는 사진들과 같이 찍은 부모의 사진이 액자에 전시되어 긴 복도의 벽에 붙어있었다. 유복한 부잣집에서 자란 꼬마 엘프 슬레모킨은 연도가 지날수록 사춘기라도 왔는지 늘 뚱한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서있는 부모 엘프는.
“어때?”
수인들에게 수인왕이 있다면, 알 헤임달의 엘프들이 옹립한 왕도 있다.
알 헤임달 시티 북부의 실질적인 통치자.
엘프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강력하다 평가받는 무력의 화신. 공포스러운 이종족의 정점. 영광스럽고 위대한 엘프의 군주. 알헤임달 북부의 지배자. 철혈의 사냥꾼. 등등 온갖 호칭을 보유한 엘프.
“아이작 모드릭이잖아.”
“누구?”
“저 사진, 아이작 모드릭이잖아. 엘프 군주.”
“아~”
엘프 군주, 아이작 모드릭.
슬레모킨은 내 반응에도 그저 천연덕스러웠다.
“응, 사실 우리 아버지셔. 만나기 전에 긴장되면 여기서 물이라도 마시고 갈래?”
“······.”
묘왕이 그녀를 ‘토퀸타이아의 딸’ 이라고 불렀던가.
토퀸타이아는 그냥 그녀의 어머니쪽 이름이었나. 수인왕도 익히 알고있는, 이 호숫가 엘프들의 귀족 가문 여식 그런 거겠지.
귀하게 자란 티는 나지 않았는데, 이거 보통 귀한 집 자식이 아니었다.
아무튼, 이렇게 된다면 슬레모킨은 엘프족과 이족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막강한 군주의 딸이라는 소리군.
거기다 슬레모킨은 작게 마을이라고 불렀지만, 이곳은 사실상 엘프들의 왕국이나 다름없는 거고.
당황스러웠다. 우리가 지금 하려는 것은 가짜 약혼이다. 그런데 무려 엘프들의 통치자를 기망한 걸 그것도 엘프 왕국 내에서 들킨다면······.
‘어, 진짜 이래도 되나?’
저벅. 저벅.
우리는 미궁같은 복도를 함께 걷고 있었다.
루돌프놈이 말했던 것처럼, 왜인지 미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나는 최대한 호흡을 길게 빼며 최대한의 평정심을 유지했다. 평범한 약혼자처럼 굴자. 약혼자처럼.
근데 약혼자면 어떻게 굴어야 하는 거지?
떠올려보니 나 지금까지 결혼해본 적 없잖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며 입을 열었다. 몇 걸음만 더 가면 긴 복도의 끝이자 환하게 밝아지는 구역이 있다. 저곳은 슬레모킨의 부모님이자 엘프의 왕이 나를 평가하는 자리.
음, 돌아설 거면 지금이라도 돌아서야 한다.
“아무래도 돌아가봐야겠어.”
처억!
그러자 슬레모킨이 팔짱을 끼며 앞을 막아섰다.
“······후후, 이제 와서? 너무 늦었지.”
“그게 아니다. 이걸 봐.”
“뭐를?”
“예의없는 빈손이잖아. 어쩐지 찝찝하더라니, 뭐라도 사 들고 왔어야했는데. 지금이라도 나가서 작은 과일바구니라도.”
“과일바구니를 어디서 사! 그냥 들어가!”
퍼억.
답답한 얼굴의 슬레모킨이 나를 거세게 밀쳤고, 나는 발이 공중에 뜬 채 복도 밖으로 떠밀려 나온 와중에도 균형을 잡으며 목례를 했다.
쯧쯧-
나와 슬레모킨이 우당탕대며 들어오자마자, 어디선가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곳엔 식탁이 있었고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식탁 건너편에는 두 명의 나이든 엘프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마치 중세 왕족들이나 입을 법한, 고급스러운 엘프들의 전통 예복을 입고서.
다만 약혼자를 맞이하는 자리라 그런가 분위기는 대체적으로 딱딱했다. 느릿한 승강기에 타서 손발톱 풀 관리를 받으며 올라오는 동안 최상층에 이런 세팅을 해놓는, 대충 그런 시스템인가보군.
“흐음······.”
일단 그녀의 부모, 방금 혀를 끌끌 찬 아버지쪽은 떡대가 어마어마한 거한의 근육질 엘프였고.
“반가워요.”
슬레모킨의 어머니는 빼입지 않았어도 귀부인의 태가 철철 흘러넘쳤을 여인이었다. 고상한 몸짓에는 기업의 회장들에게서도 보기 힘든 품격이 배어있었다.
또한.
저릿- 저릿-
이 세계에서는 상견례 자리에 데리고 올 부모가 없이 태어난게 다행인 듯했다. 아마 있었다면 여기에 발을 들이자마자, 저 거한의 엘프가 마구 쏘아내는 투기에 기절해서 쓰러지셨을 테니까.
엘프들은 딸의 약혼자를 이렇게 맞이하나?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일단 나는 당당하게 인사를 올린 뒤, 준비된 식탁에 앉아 그들이 내게 뭔가를 물어올 때까지 차분하게 기다렸다.
그런데, 슬레모킨의 아버지인 아이작 모드릭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망부석처럼 앉아있다가 갑자기 식기를 들더니, 식사부터 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실로 불편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순간이었으나, 슬레모킨은 이 별난 상황이 꽤 익숙해보였다.
[ 식사 중에는 대화하지 않는 게 예의야. 일단 맛있게 먹어. ]
슬레모킨의 전음.
다행히도 밥은 내 입에 맞았다.
단지 엄격한 분위기가 내 입에 안 맞았았고, 샐러드를 씹는 거한의 엘프가 신경쓰지 않는척 줄기줄기 쏘아내는 강맹한 투기(鬪氣)역시 나와는 맞지 않았다.
슬레모킨의 아비는 식사가 끝날 때까지 나를 향한 투기를 거둘 생각이 없어보였다.
나······아직 환자인데.
어색하고 고요한 식사자리가 이어졌다.
스윽-
“옛말에, 그런 말이 있네.”
그때, 돌연 아이작이 입을 닦으며 말문을 열었다.
뜬금없이 밥부터 퍼먹을 땐 언제고.
그는 정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엘프였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야하지.”
“?”
“네가 견뎌낼 수 있겠나?”
호칭은 ‘자네가’ 도 아니고 ‘네가’ 로군.
왕관은 무슨 얘기인지 잘 모르겠고, 나를 별로 마음에 안 들어한다는 건 동네 개가 와서 봐도 알겠다.
아이작은 나를 체하게 하려는 게 목표인지, 투기를 멈추지 않고 보냄과 동시에 이런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조금 무거운 얘기를 꺼냈다.
“인류 연방에 편입되어 언데드를 막아낸지도 어언 백 년이 넘었다. 무림계와 마법계로 대표되는 인류의 무수한 기업들과 온갖 이익집단의 틈바구니에서도 우리는 이렇게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고 있다. 힘이 약하면 잡아먹는 세상이야. 그들 사이에서 엘프의 터전을 당당히 지켜낼 수 있겠나? 책임질 수 있겠나? 수명은 짧고 아이처럼 작기까지 한 인간의 몸으로?”
그건 당신이 유독 덩치가 큰 것 같은데···.
나는 아이작의 질문 폭탄에 슬레모킨을 슬쩍 바라봤다.
하지만 이쪽도 대충 ‘약혼자 데리고 오래서 막상 데려왔더니, 저 인간은 왜 또 저러는 거야’ 같은 표정이었다.
슬레모킨이 어째서 도망쳐다녔는지 알겠다.
저 엘프왕, 보통 고루한 사내가 아니로군.
하지만 일단, 딸을 앞에둔 아버지가 원할만한 모습을 보여준다.
“예!”
“확실한가?”
짦은 대답과 동시에 나를 향한 투기가 강해졌다.
저릿한 감각이 전신을 내달리고, 강대한 투기에 전신이 반응해 털을 곤두세운다.
자칫하면 몸이 짓눌려 퍼져버릴 듯하다.
긴 식탁을 호랑이처럼 내달려와 목줄기를 뜯어버릴 것 같은, 그런 상상을 하게 만드는 아이작의 투기.
억지로 버티면 버틸수록 압박이 더 강해진다.
그런데도 아이작은 흐음-소리를 내며 모르는척 물었다.
“한낱 식사 자리조차 버거워하는데 무얼 견뎌낸다는 말이지? 어디가 아픈 건가?”
“몸은 건강합니다. 버겁지도 않고, 음식도 맛있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물을 마시며 답했다.
전투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은 몸은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으나, 진짜 부서지면 나노 로봇이 어떻게든 해주겠지 뭐.
그 후로 질문과 답변이 몇 번 오가는 시간동안 그의 투기를 계속 묵묵하게 버텨내자, 생각보다 흥미가 생겼는지 아이작은 이제 다른 질문으로 선회해 압박하기 시작했다.
“아이는 생겼나?”
“그건 아직···.”
“그래, 식은 언제 올릴 예정이지?”
“······.”
“혼인을 약속해 놓고서는 그런 기본적인 것도 정하지 않았나? 그런 기본적인 것도 완벽히 해내지 못하면서, 연방 정부와 우리 엘프들간의 외교적인 마찰이 생겼을 때는 현명하게 헤쳐나갈 수 있겠나?”
이제는 무슨 연방 정부와의 외교적 어쩌고까지 등판했을 때쯤, 양갓집 규수처럼 조용히 앉아있던 슬레모킨이 시기적절하게 끼어들었다.
“그거야 아버지 어머니한테 여쭤보려고 온 거죠. 독단적으로 결정해서 통보하는 것보다 낫잖아요.”
“알았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라.”
아이작 모드릭의 단호한 축객령.
대뜸 먹다말고 압박 질문들을 던지다가 또 갑자기 물러가라고 하니, 슬레모킨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네? 가라고요?”
“식사가 끝났지 않았느냐! 다음에 다시 찾아와라!”
호통을 친 아이작은 이만 나가보라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그것이 슬레모킨 부모님과의 첫 대면이었다.
* * *
레반과 슬레모킨이 어물쩍 자리를 비운 후.
조용히 식탁에 앉아있던 토퀸타이아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엔 괜찮아 보이네요. 그만한 능력이 있으니까 연방을 상대로도 배짱을 부리지 않았겠어요? 나는 예비 사위가 너무 멋있는데.”
“흐음······.”
그러자 곧, 모습을 드러낸 아이작은 못마땅한 얼굴로 아까 놓았던 포크를 다시 집었다.
사실 식사를 다 마치지도 않았는데 녀석들을 내쫓는 바람에 배가 덜 찼다. 불편하기만 한 예복을 벗어 던지고 식사에 열중하던 아이작을 향해 토퀸타이아가 말을 보탰다.
“너무 그렇게 고깝게만 보지 말아요. 우리 딸아이가 그 아이를 보는 눈빛이 충분히 사랑스러웠잖아요.”
아이작은 샐러드를 우물대며 답했다.
“흠···그 정도인가?”
“당신, 보지 못했어요? 정말 사랑하는 게 분명해요. 딸아이가 이곳까지 데려온 남자 중에 저 정도로 눈빛을 누그러뜨린 사윗감은 없었어요. 모두 당신의 눈에 들기위해 데려온 가짜들이었죠.”
“흠···그 정도인가?”
“다음에 올라오면 확실하게 결정해요. 마음에 들면 든다고 하시고, 들지 않으면 들지 않는다고 해요. 당신이 식사하는 내내 불편하게 굴었으니,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어도 사위 마음이 오죽 타들어 갔겠어요.”
“흠···그 정도—”
“내가 그 말버릇 듣기 싫으니까 고치라고 했죠!”
“······.”
빼액-!
품위있는 토퀸타이아의 입에서 결국 큰 고성이 터져나오자, 아이작은 곧장 조개처럼 입을 꾹 닫았다. 들고 있던 포크도 바로 내려놓았다.
“······미안하오 부인.”
“식사를 목으로 넘긴 것만 해도 대단한 거라구요! 그리고 당신이 매번 이렇게 사납게 구니까 수많은 엘프 중에서도 사윗감이 없었던 거예요. 다들 당신을 두려워해서 딸아이를 피하니까요. 언제까지 우리딸 혼삿길에 훼방을 놓으실 건가요?”
“부인, 그것은 사내로써 쓸만한 놈이 없으니······.”
“조용히 하세요! 딸아이 나이가 벌써 몇인데. 만약 이번에도 혼사에 훼방을 놓는다면 나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는 않겠어요. 다음에도 또 이러기만 해봐요.”
“······노력해보겠소.”
* * *
숨이 턱턱 막히는 약혼자 소개 자리에서 도망치듯 나온 뒤.
나는 꽤 넓은 개인공간을 받았다.
메카 세계수의 꽤 상층부에 위치한 큰 빌딩이었는데, 이전에 슬레모킨이 가끔 별장으로 쓰던 곳이라던가.
침실은 물론이고 옥상에는 넓은 공간까지 딸려있어서 수련에 매진하기가 꽤 괜찮을 듯했다.
나는 이곳에서 몇달간 휴식기를 가지면서 몸을 회복하고, 경지를 다듬을 것이다.
로라 마르티네즈가 말했던 육체의 재구축도 확인해보고, 얻은 바만차의 에센스도 쓸 만큼은 써줘야겠지. 깨진 마나 회로도 다시 쌓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튼 여기까지 잘 왔다.
“후우······.”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부모들이 나를 그닥 마음에 들어하진 않는 것 같던데.
하기야, 가짜 약혼이니 깨졌다 해도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속옷 바람으로 쫓겨나지만 않으면 상관없다.
아마 그 자리에 조금만 더 머무르며 투기를 받아냈다간 필시 쓰러졌을 테니까.
수복전 이후, 몸이 많이 망가진 것을 느낀다.
나는 더 지체없이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우선, 기력부터 좀 회복해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