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그들의 세계수
#90화.
불굴(不屈).
굽히지 아니한다.
그게 인간의 육체를 말함이라면, 광인으로 살아온 어떤 사내에게는 그 무엇보다 의미 없는 얘기다.
뭘 거창하게시리 굽히지 아니해.
얼마든지 굽혀준다. 끝까지 안 굽히다 뒈질 바에 그냥 슬쩍 한번 굽혀주고, 후에 추진력을 얻어 뒤통수를 때리는 게 백번 낫기 때문이다.
다만 불굴에 의(意)가 끼어들면 얘기는 달라진다.
의지 불굴.
무릎은 굽혀도, 정한 뜻은 굽히지 아니한다.
그것이 바로 사내다.
— 이상으로 마치겠다. 좆같은 연방군 새끼들아. 그러니까 발표를 애초에 똑바로 해야지. 그리고 앞에 앉은 저 인간은 자꾸 명령조로 방송 끊으라고······내가 인마 당신 아들이야? 하고 싶은 말 얼마든지 하랄 땐 언제고.
그렇게 대쪽같이 굽히지 않는 뻣뻣함을 뽐내며 기관차처럼 폭주하던 한 사내는 ‘이 자리를 빛내주러 오신 관계자’ 들의 경악 어린 눈빛, 절규와도 같은 만류에도 끝까지 제 할 말을 마쳤다.
연방군이 전술핵 투발 시점을 숨긴 것부터 시작해 연방군의 허술한 작전과 사전 정보. 강력한 네임드 개체들이 수복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연합을 이루어 대응했던 것에 대한 의문, 참가한 세력의 피해가 이전 연방의 발표와는 달리 심각하다는 것까지.
며칠 전, 연방의 발표와는 전혀 딴판인 내용이었다.
게다가 이미 수복전에서 대단한 전공을 세운 젊은 영웅이라며 띄워뒀던 자. 연방이 빵빵하게 밀어주기로 내정해 두었던, 신원이 확실한 줄 알았던 마탑 소속의 마법사.
정치권의 인물이나 이합집산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세력의 수장급도 아니고, 그저 수복전에서 큰 공을 세웠을 뿐인 7레벨의 젊은 마법사.
그런 이가 아픈 몸을 질질 이끌고 나와 직접 입을 연 것이다.
입도 걸걸한 게 혈기가 방장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젊은 천재. 뭐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누군가의 말대로 배경 그림이 퍽 나쁘지 않았다.
주변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어떤 이들은 단상 위에서 내려온 그 사내를 붙잡으려 했으나.
— 아오! 나 지금 아프니까 잡지 말어! 팔 자른다!
그는 아귀처럼 붙잡는 손길들을 신묘한 보법으로 뿌리치고는, 휘적대며 한 줄기 바람처럼 사라졌다.
폭탄을 떨어뜨린 뒤, 신속하고 민첩한 탈압박과 깔끔한 퇴장.
한바탕 막대한 폭풍이 장내를 휩쓸고 지나가니, 이제 얼빠진 이들만이 덩그러니 자리에 남았다.
인류 연방이 시체에게 빼앗긴 도시를 완전히 수복했음을 알려야 할, 역사적이고 희망찬 자리였다.
태양처럼 떠오르는 영웅들의 의기있는 모습과 비범한 풍모를 담아가기 위해 놓여져있던 송출기만 자그마치 수백 대.
그런데 수많은 실시간 송출기의 바다 앞에서, 걸걸한 욕설과 함께 연방의 이번 작전을 겨냥한 쓴소리와 폭로가 5분간 이어진 것이다.
그런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훌륭한 기삿거리가 될 법한, 성대한 헤드라인에 특집기사를 편성해 집어넣기 딱 좋게 각종 의혹들과 의문점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수습 불가.
어느 누구도 이 사태를 수습하지 못했다.
그리고 원래 그 사내의 다음 번째에 나서기로 예정되어 있던 연방 수복전의 두 번째 젊은 영웅.
‘허허, 형장이 또······.’
화산 그룹의 젊은 검수, 화령검절 청풍은 질끈 동여맸던 매화건을 슬며시 풀어 소맷단에 넣었다.
같은 시각.
어느 화면 너머.
짝짝짝!
“화끈하네, 저게 요즘 스타일인가?”
폭로의 주문자인 로라 마르티네즈조차, 고명한 영화제의 수상작을 관람한 관객처럼 기립박수를 치며 극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의 일처리였다.
“역시나 내가 점찍은 녀석 다워. 확실히 감동이랑 서사가 있잖아. 이거 파급력 하나는 끝내주겠어. 안 그래?”
그녀는 둥근 원탁의 참여자들을 향해 물었다.
고급스러운 비단 무복을 입은 무인은 말을 아꼈고, 연녹빛의 머리칼을 한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옷 소매에 꽃이 자수되어 있는 무인은 그저 빙긋 웃어 보였으며.
그들의 뒤로, 새카맣게 늘어앉아 있는 수십의 인영은 저마다의 감상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 * *
‘챙길 건 다 챙겼나?’
수복전의 승리를 자축할 새는 없을 것이다.
당분간 연방이 발칵 뒤집힐 것은 당연한 수순.
지금부터는 진공진인과 로라 마르티네즈를 비롯한 세력의 장들이 폭로에 지원 사격을 하든, 저들끼리 뭐 지지고 볶든 하겠지.
그러니 나는,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
로라 마르티네즈의 조언대로, 발할라 시티로는 가지 않을 생각이다.
그렇다고 군벌 세력들이 판을 치는, 특히나 카스트라 뷔에탕이 기거하는 로키 시티에 계속 남아 죽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수르트 시티의 화산과 당가에서 공교롭게도 초대를 받았으나, 내가 일언지하에 다 거절했고······.
그래서 처음에는 발두르 시티로 가려고 했다.
로키에서 꽤나 가까운 거리에 있는 도시니까.
몸을 적당히 숨길 수 있는, 천혜의 숨바꼭질 요새이자 마음속의 고향인 웨스트 정크타운이 마침 발두르에 있지 않겠는가.
“알 헤임달로 가자. 아무래도 거기보다야 낫지 않겠어?”
“흠.”
그러나 마지막에 바뀐 행선지는 알 헤임달 시티였다.
마탑주, 일레힌 포이체카의 명을 받은 슬레모킨은 나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따라붙어 동행하기로 했다.
“···알 헤임달에 확실히 안전하고 조용한 곳이 있어. 몇 달이면 연방 정부도 절대 못 찾을 거야. 그러니까 나만 믿고 있으면 돼.”
알 헤임달로 가면 저 자신만만한 슬레모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터.
또한 ‘대개척’ 이라는 이유로 연방의 수복전에도 참여하지 않았던 도시가 알 헤임달 아닌가.
앞으로도 딱히 연방과 크게 엮일 사건도 없을 듯하고, 지금 편히 숨어들어가 휴식기를 가지기에는 최고의 도시가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아힘사의 고장난 팔도 대장간에서 고칠 수 있으면 더 좋겠지.
바만차의 공격을 막느라 꽤 심하게 고장나긴 했는데······설마 그 대단한 다르간트가 고치지 못할 리는 없을 테니.
몇분 뒤.
우리는 몇 가지 짐만 챙겨 로라 마르티네즈쪽에서 준비해둔 캐리어에 올랐다.
나와 아힘사, 슬레모킨과 루돌프를 태운 캐리어는 금세 로키에서 이륙해 하늘을 가르며 쏘아졌다.
* * *
알 헤임달 시티에 무사히 도착한 우리는, 가장 먼저 아힘사의 거취 문제부터 처리해야 했다.
적어도 몇 달을 내리 은거하며 지낼 생각.
그동안 아힘사를 애매한 외팔이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라, 칼드락 스미스에 수리를 맡겨야 했다.
대장간의 주인인 칼드락이야 늘 그렇듯 툴툴댔지만, 다행히도 다르간트가 거절하지 않은 덕에 아힘사의 팔 파츠 수리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되었다.
다만.
“이리도 빨리 부숴먹고 돌아올 줄이야. 언데드놈을 때려잡다 이렇게 되었다니 고쳐주기야 하겠지만, 금번부터는 크레딧을 내야 할 게다.”
아쉽게도, 공짜 호의는 오늘로써 끝인 듯했다.
그래도 그간 받은 게 워낙 많은 탓에 불만은 없었다. 광선은 물론이고 본래 7레벨의 아힘사도 잠시지만 바만차의 강력한 일격을 받아낼 정도로 업그레이드 해주지 않았는가.
“소식은 전해 들었다. 이번에 사고 한 번 제대로 쳤더군!”
백 육십의 다르간트도 세간의 소식에 귀가 닫혀있는 건 아닌지, 날 보자 수복전 폭로 얘기를 먼저 꺼냈다. 아직 시간이 많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 변방까지 퍼져나간 것 같다.
“저 봤다고 경찰에 신고하시면 안 됩니다.”
“이 노구가 젊었을 적보다 훨씬 낫군.”
“···그렇습니까?”
“피가 끓는 나이의 사내라면 그렇게 불덩이같은 면이 있어야지. 다른 것은 몰라도 그 점 하나는 마음에 찬다. 가슴 속의 불덩이는 나이가 먹을 수록 점점 식어가기 마련. 젊을 때 다 해봐라.”
“예, 그럼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나는 으허허 웃는 다르간트와 남은 손으로 회중시계를 꼭 쥔 아힘사를 두고 급히 발걸음을 돌렸다.
원래는 칼드락의 대장간에서 아힘사와 조금 더 시간을 보낼까 했는데, 슬레모킨이 빨리 출발해야 한다며 재촉아닌 재촉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 헤임달 남쪽의 칼드락 스미스에서 나와 꽤 긴 시간을 북쪽으로 이동했다. 대장간들이 모여 있는 길가와 수인들이 밀집해 살아가는 타운을 가로질러 지나오길 몇 시간.
시티 북쪽의 어떤 지점에 이르자 주변의 인기척이 확연히 드물어지더니, 이제는 하얀 증기로 사방이 이루어진 듯한 동네에 진입했다. 그 안에서는 유달리 방향감각을 잡기가 힘들어 슬레모킨의 뒤를 좇아야만 했다.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루돌프놈이 내 팔을 붙잡으며 입을 열었다.
“저, 형님.”
“왜.”
“어쩐지 당장 도망쳐야 할 것같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약간 미궁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인데요.”
“그러냐.”
“굉장히 무시무시한 일이 조만간 벌어질 것 같습-”
“보이는 것만 이렇지, 괜찮으니까 그냥 입 닫고 따라올래? 죽고 싶으면 계속 떠들어도 좋고.”
“······.”
홱!
슬레모킨은 나 대신 루돌프의 팔을 손수 붙잡아 내려주며 답했다. 어딘가 불편한 기색으로 몸을 돌리며 미간을 잔뜩 좁힌 그녀는, 들릴 듯 말듯 아주 작디작은 목소리로 웅얼대며 불만을 표했다.
- 저 망할 딸기놈 때문에···대체 왜 데리고 다니는 거야. 쓸데없이 분위기만 깨고···일부러 이 길로 온 건데···없애버릴까···.
“······.”
루돌프는 그 이후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입에 지퍼를 채우고 그녀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그렇게 30분 정도를 더 걸어 들어갔을까?
알 헤임달 시티는 많은 이종족이 자리잡은 도시인 만큼, 확실히 특색있고 개성이 확실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아서 세계수를 볼 줄은 몰랐네.”
왜 있잖은가.
엘프들이 모여사는 마을 중심에는 막대한 생명력을 지니고 하늘까지 자라있는 물푸레나무나 특이한 재질의 나무인 ‘세계수’가 존재하고, 그 주변으로 장엄한 대수림이 펼쳐져 있어서 풀만 뜯어 먹고 사는······.
그 세계수 비슷한 것이, 지금 눈앞에 있긴 있다.
부글부글—
온천처럼 끓어오르는 꽤 큰 규모의 호수.
그 호수 중심에는 둥그렇고 넓은 섬이 있다.
그리고 그 둥그런 섬의 지면 위로는···.
초고층 건물들의 군집과 황동색의 파이프 라인으로 이루어진 메카닉 세계수가 꼭대기도 보이지 않을 만큼 오연하고도 드높게 자라 있었다. 호수를 자연적인 방어막인 해자(垓子)로 삼아서.
코어를 이루는 거대한 빌딩의 옆구리에 나뭇가지처럼 삐죽빼죽 자라있는, 또다른 빌딩들이 합쳐져 실로 거대한 나무의 형태를 연상케 한다.
신기한 것은 이런 환경에서도 녹빛의 수생 식물이 드문드문 빌딩의 외벽을 뒤덮고 있는 부분도 있었다는 것. 호수 주변이 워낙 습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발할라의 설산목처럼 여기서만 자라는 식물일 수도 있겠군.
취이이이익—
빌딩 세계수의 어딘가에서 힘차게 뿜어져나오는 증기와 절절 끓는 호수의 수증기가 만나, 산맥 중턱에 걸린 구름처럼 빌딩 세계수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준다.
내가 잠시 말이 없자, 슬레모킨이 눈을 맞추며 넌지시 물었다.
“······어때? 앞으로 지내야 할 우리 마을의 첫인상이.”
“굉장히 크네. 멋있군.”
“정말? 멋있어?”
“저게 다 몇 평이나 될런지.”
슬레모킨은 조금 뿌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평수는 잘 모르겠고, 높이는 1천 미터가 좀 넘어. 가지처럼 증축한 빌딩들까지 따지면 어지간한 업무지구보다 약간 부족한 급?”
“정말로, 저 많은 빌딩이 다 한 덩어리인가.”
“응. 옛날부터 증축을 거듭하다 보니까 결국 저렇게됐어. 다들 물가에 모여사는 걸 너무 좋아하는데, 지금의 알 헤임달에는 물가가 많이 없거든.”
도망자가 숨어 있기는 최적의 환경이기야 한데······.
이곳에서 거주하는 엘프들은, 아무래도 인간을 그리 반기지 않는 듯하다. 저 건물에 들어가기 전부터 따가운 눈초리들이 이쪽으로 쏟아지고 있으니.
[ ······. ]
하나같이 뾰족한 귀를 한 세계수의 주민들.
그래도 내 옆에 슬레모킨이 있어서 그런지, 그들이 우리를 다짜고짜 공격하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기이이이이—
이윽고 우리가 호수의 뭍에 이르자, 20미터쯤 되는 다리가 빌딩의 낮은 외벽에서 분리되어 빌딩의 섬과 이어준다. 증기력으로 가동하는 하나의 타워 브릿지인 셈이다.
“가자.”
언제는 집이 싫다던 슬레모킨은 막상 고향에 도착하니 기분이 좀 나아진 건지, 빠르게 앞장서 다리를 건넜다.
그리고는 수십 개는 될 법한 입구중 가장 커다란 입구를 택해 들어가더니, 오래 사용하지 않은 듯 덩굴식물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승강기의 버튼을 연타했다.
띵동-
“문 열어!! 약혼자 데려왔어!!!”
“?”
느닷없이 터져나온 그녀의 고함이었다.
내가 의문을 표하려 입을 채 열기도 전에.
덜컥!
즉시 닫혀있던 승강기의 문이 활짝 열렸고.
곧바로 안으로 쏙-하고 들어간 슬레모킨이 너도 얼른 들어오지 않고 뭐하냐는 듯, 멈춰선 나를 나무라는 얼굴로 바라봤다.
“거기서 뭐해?”
귀끝이 한껏 뾰족해진 슬레모킨은,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 계속 ‘여기서’ 지낼 거니까······어서 인사부터 드리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