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퓨전펑크의 전생자-86화 (86/157)

#86화.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 8

#86화.

쨍그랑-

바닥에 떨어진 유리병이 깨져나간다.

꿀럭이며 목구멍을 통과해 흡수되는 에센스.

중상(中上)급의 에센스를 몇 병이나 들이켰는지.

재계에서도 부유한 편인 일레힌 그룹의 든든한 후원을 받을지라도, 꽤 부담이 될만한 양이다. 지금까지 적어도 3, 4천만 크레딧은 족히 깨져나갔을 것이다.

“으음······.”

라그나로크 북부의 어느 플라자 빌딩 지하 7층.

깨끗하게 비어있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

그곳에는 호흡을 정교하게 고르며 사방으로 마력을 퍼뜨리는 한 마법사가 있었다.

마탑주 일레힌 포이체카. 그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바닥으로 흘러내린다.

우우우웅—

막대한 양의 마력이 폭포수처럼 빠져나간다.

건물의 환풍구를 통해 빠져나가는 진한 청록빛의 줄기.

에센스를 물처럼 마시며 기운을 다시 채워놓아도, 전신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이 빠져나가고 있다.

가까스로 마력의 총량을 유지해내고는 있으나, 그 작업은 드높은 경지를 이룩한 그에게도 꽤 버거운 일이었다.

땀을 흘리던 일레힌 포이체카의 입이 열렸다.

“이걸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무섭다고 해야 할지.”

마력이 빠져나가는 속도가 점차 빨라진다.

이제 점점 줄어드는 에센스가 문제가 아니라, 마나 회로의 내구성이 끝까지 버텨줄지가 걱정인 지경. 7위계에 오른 고위 마법사가 회로의 내구성을 걱정해야 할 처지라니.

우우우웅—

일레힌 포이체카는 또 뭉텅이로 흘러 나가는 마력을 느끼며, 에센스가 담긴 유리병을 연속으로 들이켰다.

“······고작해야 갓 7레벨을 넘어선 녀석이.”

레반.

정말,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녀석이다.

언제까지 자신을 놀라게 할 셈이란 말인가.

라그나로크 시티 북부 편제.

작전이 틀어지고 지휘권이 갈렸다.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는 전장이었다.

그렇기에 수장중 한 명인 일레힌 포이체카는 당명 원로의 뒤를 이어 신속하게 결정을 내렸다.

[ 두 분이 선발대와 동행 부탁드립니다. 시티 밖의 편제와 합류해 재정비를 하는 것도 중요하나, 통신이 불가하니 발전소 쪽으로 향하는 후발대 생존자들도 있을 겁니다. 만약 본대에 힘이 필요하다면 즉시 지원하겠습니다.]

연방의 장군은 당연히 반기지 않았으나, 성을 내며 홀연히 사라진 당명의 뒤를 그가 이었다.

장로 선운자와 루 막슨 회장이 연방군 3사단과 동행해 원군을 부름과 동시에 흩어져있는 후발대를 최대한 본대에 규합한다.

그리고 마탑주는 그들의 중간에서 갈려버린 세력의 균형을 조율한다. 쉽지 않은 일이겠으나, 그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있었다.

마탑의 중요 구성원들에게 주입해둔 마력이 남아있다. 거리가 그리 멀지만 않다면, 마력을 주입받은 이의 주변 상황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헌데.

공교롭게도, 그 양쪽에서 비슷한 시점에 전투가 벌어졌다.

더 강력한 전력을 보유한 선발대의 열 개 조와 본대의 수장, 연방군이 모여있는 도심 쪽이 습격당했고.

원자력 발전소까지 도망쳐오는 것에 성공한 후발대의 일부조, 더해서 사라졌던 당명 원로가 갑자기 발전소 앞에서 나타나 전투를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조율자로 남은 그는, 가장 먼저 본대를 습격한 언데드와의 전장을 지원했다. 땅에서 불쑥 튀어나온 언데드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본대가 처한 상황이 순식간에 급박해졌다.

그는 마탑의 8레벨급 구성원 두 명에게 본신의 마력을 적절히 분배했다. 그렇게 대륙급의 언데드를 나름 의도한 대로 통제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다른 쪽이 문제였다.

우웅- 우웅-

슬레모킨에게 배분해둔 마력이 구원 신호를 끊임없이 보내오고 있다. 발전소쪽의 상황도 최악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당명 원로가 같이 있다해도 9레벨급이 두 마리.

최악으로 치닫는 양쪽 전장의 상황은, 마탑주에게 강제적인 양자택일을 강요했다.

이윽고, 일레힌 포이체카는 판단을 내렸다.

화산의 장로, 선운자가 자하강기를 뽑아 두른 것을 느끼며 본대쪽 8레벨 둘에게 내주었던 마력을 어느 정도 거둬들였다. 본대 쪽에서는 강대한 요기와 선운자의 자하신공이 내는 기운이 얽히며 증폭되었다.

저만한 괴물과의 전투라면, 서쪽과 남쪽의 수복군을 이끄는 수장들이 필시 눈치챌 수 있을 터.

반대쪽이 문제인데······.

슬레모킨이 있는 발전소 쪽의 전장은, 그가 마력을 거둬들이는 와중에도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지금, 마력으로 전해져 느껴진다.

잠시간의 돌풍을 일으킨 레반이 쓰러져 죽어간다. 그리고 슬레모킨은 자폭을 결심했다.

잠시 유지되나 싶던 생명의 기운이 순식간에 하나둘씩 꺼져갔다. 그나마 살아남았던 후발대의 조원들이 바만차의 낫에 쓸려나가고 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피해.

설상가상, 다른 8레벨급 언데드까지···이제 더 미룰 수는 없었다. 인정을 받은 구성원들을 저리 의미없이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

일레힌 포이체카는 생각을 끝낸 즉시, 슬레모킨과 신호가 꺼져가는 레반의 몸에 원격으로 마력을 퍼부었다.

그리고.

우우우웅—

대부분의 마력은 레반에게 떨어졌다.

그는 넓게 전장을 관조하던 중, 직전의 전투를 보았다.

고작 7레벨의 레반이 9레벨 네임드를 상대로 경이로운 신위를 보이며 한 줄기 희망을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일레힌 포이체카는 슬레모킨이 아닌 레반에게로, 우선순위를 변경한 것이다.

무시무시할 정도의 전의와 극히 고절한 무공.

그의 육신을 자신의 마력으로 지원해줄 수만 있다면-

유일하게 전투의 향방을 뒤집어 볼 수 있는 존재다.

그는 슬레모킨에게 간 청록빛 마력과 다른 전장에 있던 모든 청록빛 마력을 일시에 거둬들여 모조리 레반에게 쏟아부었다.

그 뒤로.

전장은 복잡하게 흘러갔다.

레반이 네임드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던 도중, 당명이 녹량백량과 동귀어진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레반의 기운이 바만차에 근접할 정도로 거대해졌다. 자신의 마력을 온전히 흡수하고 있다고 해도 과한 변화. 무언가 다른 것이 작용했다.

그렇다면 녹량백량의 에센스를 흡수한 것인가?

좋은 소식이나, 곧바로 걱정이 물밀듯 밀려왔다.

“9레벨급 에센스다. 온전히 소화시킬 수 없을 터.”

저런 거대한 기운을 과연 멀쩡히 흡수할 수 있을까.

높은 수준의 에센스를 소화시키려 할수록 극도의 집중력과 오랜 준비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자신의 마력이 없으면 손가락 하나도 까닥할 수 없는 몸, 게다가 9레벨의 강대한 네임드를 눈앞에 두고서 저것을······

허나 당장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가 지금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면, 레반에게 주입되는 마력의 흐름이 끊길 것이다. 아마 저곳에 도착하기도 전에 전장은 피바다로 변해 있겠지.

그렇다면.

마나 회로가 불타 마력이 동나는 한이 있더라도···

유일한 희망, 레반을 계속 지원해주는 수밖에.

“어디 또, 그때처럼 기적을 보여봐라.”

간절함 가득한 일레힌 포이체카의 음성이 잔잔하게 실내를 울렸다. 그의 회로에서 쏟아져 나오는 청록빛의 마력이 한층 더 짙어지며 박차를 가했다.

* * *

으지지지직—

광선의 궤적에 걸린 것들이 모두 토막나 떨어진다.

쿵!

바만차의 거체도 다리를 잃고 땅에 털썩 주저앉았다.

“······.”

슬레모킨과 천무연은 작은 감탄조차 하지 못했다. 방금 그들의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이 현실인지, 아니면 어떠한 환각의 일종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레반은, 8레벨의 언데드와 함께.

9레벨 바만차의 다리 세 개를 일검에 잘라냈다.

“마, 말이 돼? 이게?”

“······.”

경악하는 슬레모킨과 천무연의 침음성을 배경삼아, 화경의 경지에 오른 레반이 진각을 밟았다.

염원했던 정기신(精氣神)의 조화로운 합일.

세상을 인식하는 속도가 곱절 이상으로 가속되고, 무거웠던 몸은 깃털보다도 가볍다. 허나 그것에 반해 검격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지금도, 떨어졌던 십 미터짜리 오색 검강이 다시 하늘로 솟구칠 준비를 마쳤으니.

스아아악!

용이 승천하듯, 지면으로부터 솟아나는 빛줄기.

다리가 썩둑 잘려 주저앉은 바만차는 황급히 거대한 낫을 들어올려 레반의 공격을 다급히 막아냈다. 그러자.

콰드득! 낫을 쥔 손가락들이 부러지고 뒤틀리는 소리.

【 !!!! 】

레반의 검에는 이전과는 격이 다른 힘이 실려 있었다. 죽어가는 벌레에 불과하던 놈이 어느새 자신과 비슷한 격까지 치고 올라온 것이다.

하나, 그래도···

바만차 본신의 요기만큼은 아직 줄어들지 않았다.

인간의 근원인 선천지기를 뽑아 싸운 무인도, 결과적으로는 녹량백량과 공멸했다. 그런데 바만차의 요기는 죽은 녹량백량과 비교해도 절대 뒤떨어지지 않았다.

저 벌레가 자신과 완벽히 동격을 이룬 것도 아니다.

황당무계한 격의 진화를 예상하지 못하여 다리가 모두 잘려 나갔지만, 놈의 몸을 휘감은 기운들은 일시적일 것이다. 사라지기를 기다리기만 한다면—

푹!

돌연, 쏘아진 검강줄기가 복부를 뚫고 지나간다.

【 그, 그어억···! 】

“눈알 그만 굴려라. 다 보인다.”

바만차가 미처 생각치 못한 것이 있었다.

레반의 정신이 성공적으로 합일되었던 시점부터-

기량과 전투적인 경험은 레반이 바만차보다 윗줄이었다.

바만차는 여태껏 그 기량의 격차를, 거대하고 압도적인 본신의 요기로 짓누르고 있었던 것뿐.

그러니, 부족했던 기운까지 더해진 레반의 움직임을 따라잡기가 요원한 것이다. 이윽고 레반의 검은 바만차가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세상을 둘로 쪼갤듯이 공간을 잘라갔다.

거대한 오색빛 검강이 대기를 무섭게 떨어울린다.

곧, 파공성이 발전소의 하늘과 대지를 메웠다.

바만차의 육신에 속수무책으로 상처가 늘어갔다.

머리로 떨어지는 검을 막았는데 가슴팍이 꿰뚫리고, 가슴팍을 방어하면 신묘한 검의 움직임이 어깻죽지를 뜯어놓는다.

레반의 다채로운 검격은 바만차의 급소들을 집요하게 노렸다. 머리를 잘라 박살을 내든, 요기를 모아둔 내장을 찢어버리든 신속하게 끝을 볼 작정으로.

푸후—

참았던 레반의 호흡이 길게 터져나왔다.

마탑주의 마력, 녹량백량의 에센스까지 태워 잠시간 벽을 부수었을 뿐이다.

이 축제의 시간은 분명 그리 길지 않을 터다.

레반은 조금도 여유를 부릴 생각이 없었다.

‘몸이 허락하는 시간 내로 끝장을 본다.’

그 생각과 함께 고절한 레반의 검이 전장을 잠식했다.

쾅! 꽈자자작!

동시에 요기를 주입한 낫의 끝부분이 날아가며, 바만차의 손가락뼈가 다 부서졌다.

바로 그때.

그아아아아악——

“으윽!”

슬레모킨이 다급히 두 귀를 막았다.

귀청이 통째로 뜯겨져 나갈 듯한 살기짙은 흉성.

레반의 검에 방어 일변도로만 임하던 바만차가, 갑작스레 낫을 둥글게 휘두르며 레반을 물러서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마치 지금부터가 전투의 시작이라는 듯 아까 끝맺지 못했던 흉성을 내지르며 포효했다.

꾸르륵.

그리고 그 포효가 끝나자, 잘린 다리쪽의 거죽과 살점이 꾸물거리며 다시 솟아났다.

분명히 잘렸던 네 개의 다리가-

당연하다는 듯 일거에 새로 자라났다.

“······망할. 미쳤어 이건.”

바닥에 짓눌려 으깨진 천무연의 팔과는 심하게 대조되는 장면.

그것을 본 레반도 혀를 내둘렀다.

같은 인간과의 전투와는 궤를 달리한다.

인간은 보통 사지가 잘리면 움직임이 극히 제한되나, 강한 언데드들은 비현실적인 재생력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현실에 꺼내놓으니.

쿠구궁.

네 개의 다리가 다시 솟아나며 바만차의 몸체가 지면을 딛고 일어섰다. 3m의 거체가 다시 사신처럼 낫의 장대를 쥐었다. 요기는 더욱 부풀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보다도 더 강성한 기운의 밀집을 형성했다.

막대한 요기의 파동에 대기가 덜덜 떨렸다.

푸욱!

불현듯 요기를 부풀리던 바만차가, 자신의 가슴에 뼈다귀같은 손을 찔러넣었다. 그리고는 역하고 검붉은 피가 묻은 손을, 요기와 섞어 전방으로 뿌렸다. 터진 수류탄처럼 쏘아진 그 피의 조각들은 쓰러져있는 조원들의 사체에 가 닿았다.

그러자, 검붉은 피에 닿은 사체들이 들썩였다.

사후감염.

“······.”

저 끔찍한 불합리함에 사기가 떨어질 법도 하건만.

서걱!

레반은 살인기계처럼 달려들어 검을 휘둘렀다.

하늘까지 치솟는 막대한 요기조차 두렵지 않았다.

비교적 몸이 성한 상태에서 결심을 굳혀 선천지기를 뽑았던 당명의 그것과는 다르다. 당명이 한 것은 생에 마지막 결전을 위한 각오였다면, 바만차의 저것은 발악에 가깝다.

수많은 전장에서 구른 그의 직관으로 알 수 있다.

생에 대한 집념이 얼마나 강한지, 저리 망가지고 나서야 각오를 다졌는가. 레반은 그리 생각하며 광선에 기운을 주입했다.

그런데 그 순간.

쾅! 쾅! 쾅! 쾅.

“어?”

다리를 만들어낸 바만차의 다음 판단은 장내의 모두를 당황케 하기에 충분했다.

마치 마지막 발악을 할 것처럼, 피를 뿌려 감염시키고 요기를 하늘 끝까지 증폭시켜놓은 바만차가 급작스레 몸을 돌려 쏜살같이 달아나는 것이다.

육중한 유령마가 전속력으로 도망친다.

심지어.

우적우적!

가던길에 인간의 사체를 주워 사탕처럼 씹어먹으며 말이다.

“······하.”

지금 레반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정기신이 이렇듯 합일해 있을 수 있는 순간이, 그에게는 얼마 남지 않았다. 레반의 입이 삐뚜름이 열렸고.

“웃긴 놈, 뭐 얼마나 오래 살려고 그래.”

그 작지만 삐딱한 목소리가 도망치는 바만차의 귓전까지 가서 닿았다.

이미 수많은 인간의 목을 잘라 차가운 땅바닥에 쓰레기처럼 늘어놓고, 막상 전황이 불리하게 흘러가니 마음 편하게 도망치려 한다.

명예도, 자존심도, 죽은 당명 원로와 같은 일말의 비장함도 없이. 인간의 사체를 으적대며.

이렇게 살려보내면 또 어디선가 인간을 죽여 잡아먹겠지.

그렇게, 레반의 그 짧은 상념이 끝난 순간.

“혼자 어디 가.”

【 ······! 】

레반은 이미 바만차와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구웨엑!

그에 사람 머리를 으적대던 바만차의 주둥이가 쩌억 벌려진다. 곧이어 요기를 한가득 실은 핏물이 토해진다. 폭발하는 크레모아처럼 전방을 휩쓸어버리는 핏물의 폭발.

상처에 슬쩍 닿기만 해도 감염의 위험이 있는, 그 역하고 더러운 피가 레반의 전신을 가득 덮어버린다.

그러나.

치이이이익——

일레힌 포이체카의 청록빛 마력 갑주가 그 핏물을 막아냈다. 청록빛의 마력과 함께 증발해버린 핏물.

그 핏물들이 불똥처럼 사방으로 흩어지며, 레반이 있던 주변부가 형체도 남기지 못하고 깡그리 폭발했다. 적어도 반경 삼십 미터가 사라지고 달의 크레이터처럼 깊은 반원의 구덩이가 생겼으나.

지금 레반은 어느 때보다 멀쩡했다.

또한.

어느 때보다 전력으로 공격을 뻗어내고 있었다.

섬전이 번쩍였다.

콰지지지직!

진심전력으로 내뻗은 레반의 광선이 바만차의 흉부의 뼈를 죄다 부수고 들어가 등짝을 단숨에 꿰뚫어버림과 동시에.

“막내야!”

쾅! 쾅! 쾅!

바만차의 머리 위로 마공학 탄들이 마구 쏟아진다.

슬레모킨과 아힘사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가세했다. 팔이 없는 천무연도 날이 나간 매화검을 붙잡고 초식을 전개한다. 천무연의 검 끝에서 분분한 검화(劍花)가 피어나 바만차의 육신을 두들긴다.

그리고.

바만차를 꿰뚫은 레반의 검이 사선으로 그어지며 뼈다귀와 살가죽을 길게 갈라낸 시점이었다.

【 ······. 】

극히 혼란한 전장 속에서 아주 짧은 부르륵- 하는 소음이 들리더니 바만차의 육신이 급격히 부풀어오른다.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듯이.

헌데, 하늘 높은줄 모르고 치솟던 바만차의 강대한 요기가, 어느 순간 급격하게 회수되더니 한 점에 뭉치기 시작했다.

창졸간 이루어진 일련의 과정.

“!”

레반의 직감이 거세게 경종을 울렸다.

방금까지는 그렇게 살고 싶어 하더니···

정말, 포기 한번 좆같이 빠르군.

【 그흐흐. 】

바만차의 침침한 안광에 독기와 희열이 차오르는 게 레반의 눈에 보인다.

놈이 갑자기 기운을 거둬들일 이유는 없었다.

이 자리의 모두가 공멸한다는 선택지를 제외하고는.

마법이라도 쓸 수 있었다면, 청록빛 마력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어떻게든 막았을 것인데.

슬레모킨, 아힘사, 천무연, 당령.

······몰려든 이들에게 피하라는 말을 뱉기에는 너무나 늦었다.

레반은 결국, 에센스로 얻은 기운을 모두 태워 놈과 똑같이 한 극점에 기운을 모아냈다. 이제 바만차의 죽음은 확정이다. 이들 중에서 몇 명을 살리느냐에 달렸.

콰지지지직——

“꺄핫! 거의 다 죽었잖아?”

“······?”

그것은 실로 갑작스러웠다.

천공에서 혜성처럼 떨어진 누군가가, 바만차의 부푸는 요기와 머리통을 가차없이 짓밟으며 전장에 난입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힘든 중력이 작용하며 전신에 추를 매단 듯 무거워졌다.

꺄하하! 낙천적으로 웃는 소리를 낸 누군가.

레반은 그 이상한 존재에게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탓!

바만차를 죽이겠다는 의념이 먼저 움직였다.

주르륵.

정기신의 합일이 점점 흩어져가던 레반. 그가 무리하게 극점까지 끌어올린 기운은 관자놀이로 통하는 혈관과 기맥들을 터뜨릴 정도로 강대했다.

화경의 경지로도, 과부하가 걸려 벌벌 떨리는 육신.

옆통수로 피가 줄줄 흘렀으나, 레반은 괘념치 않았다.

서걱.

푸화악!

레반은 땅을 박차며 짓쳐들었고, 피가 튀었다.

【 그, 그아아악! 】

늘어난 검강줄기가 공멸을 노리던 바만차의 육신을 세로로 절단한다.

그렇게 양단된 바만차를 다시 가로로 양단한다.

이제 네 조각이 된 살덩이를 사선으로 양단한다. 거침없이 휘몰아치는 오색 검강의 유려한 줄기가, 한겨울의 삭풍처럼 끊임없이 몰아쳤다.

그렇게.

서걱대며 잘리는 소리만이 울려퍼지는 전장.

잠시 무아에 빠져 검을 휘두른지,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덧 그 무아에서 깨어난 레반이 눈을 떠보니.

“······.”

웬 땅이 보였다.

발전소 근방의 독수가 스민 땅.

그리고 자신은, 그곳에 검을 깊게 꽂고 있었다.

녹아가던 당명의 독기와 유언이 흘러내린 자리에.

레반의 피를 잔뜩 머금은 광선의 검신이 깊게 꽂혀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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