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 7
#85화.
무의식과 정신의 영역.
레반이 닦아온 무공은 스스로 제 검로를 그렸다.
그러나 곧,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가열차게 박차를 가하던 몸이 결국, 정신보다 먼저 무너졌다.
약속이나 한 듯 일정 지점에 이르자 호흡은 즉시 멈추었고 내장은 서로엉켜 아우성치며 선혈 덩어리를 목구멍으로 밀어 올렸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체의 미래를 담보로 삼아, 정해져 있는 한계를 벗어나 힘을 끌어다 썼기에.
이제는 그 인과(因果)에 따라, 넉넉히 돌려받을 차례.
마나 회로와 하단전에 서릿발같은 냉기가 치밀었다. 기맥으로 수발되던 공력은 길을 잃고 헤매다, 냉기에 얼어붙은 단전으로 되돌아가 작은 모닥불이나마 지피려했다.
사지말단이 수백 갈래로 찢어지는 격통.
레반의 기억은 거기에서 뚝- 끊겼다.
그 뒤로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어느 순간, 죽어가던 단전과 회로에 고요한 파문이 일더니 두 눈이 번쩍 뜨였다.
“······.”
시선을 밑으로 내렸다.
먼지가 낀 돌바닥이다.
레반의 손은 아직 광선을 부서져라 붙잡고 있었다. 사방으로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핏줄기가 흐르고 있었으며, 안 그래도 못생긴 루돌프놈이 더 흉측해진 얼굴을 들이밀어놓고 눈물을 훔치는 중이었다.
훌쩍.
“끄흑. 이 악랄한 새끼 드디어 죽었네. 진짜 따라오는 게 아니었······어. 어?”
“참 못생겼다. 못생긴 걸로는 네가 최고다.”
“······형님? 뭐 하러 일어나셨. 아니 왜, 이걸 어떻게 부활하셨죠?”
밴스의 벙찐 표정은 일류 배우도 어려워한다는 ‘희망과 절망 사이의 애매한 감정’ 을 완벽하게 구현해냈다. 그러고는 끝끝내 시체로 변한 것이라며 도망치려던 밴스의 목덜미를 레반이 잡아 제지했다.
“컥!”
“염라가 너 두들겨 패라고 다시 보내줬다.”
홱-
레반은 밴스를 대충 던져두고 일어났다.
괴이한 일이다.
분명 허물어져가던 육신이 그의 뜻대로 움직인다.
혹, 이것이 죽기 전에 환하게 타오르는 촛불처럼 회광반조(回光返照)를 겪는 중인가.
그렇다면 나조차도 모르게 당명처럼 선천지기를 끄집어냈는가?
아니다.
사아아—
“이 마력.”
보드라운 온기가 녹아있는 이 청록빛의 마력.
하늘의 어딘가에서 요정처럼 날아와 레반을 일으켜 세운 이 신비하고 강대한 마력, 이것은 마탑 서재의 뒷면에서 부여받았던······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의 것이 확실하다.
쏴아아아아······
어디선가 날아온 마력이 폭포처럼 쏟아진다.
메마른 땅을 빗물로 적시듯.
막대한 양의 기운이 죽어가던 레반의 전신에 톡톡히 스며들었다.
그 덕분에 찢어졌던 근원이 회복되고 채워진다. 하릴없이 무너져 내리던 육신과 깎여나가던 생명력은 청록빛의 마력이 작용하며 제자리를 되찾고 있었다.
‘······계속 주시하고 있었던 건가.’
마탑의 주인. 일레힌 포이체카는 여기에 그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북부의 두 전장 중, 어느 곳도 버리지 않은 듯했다.
그리고.
북극의 오로라처럼 내려앉은 그의 마력은 레반을 종교에 귀의한 성자, 용사처럼 보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마력이 청록빛인 이유가 있었군. 힐러잖아.”
덕분에 약간의 여유를 되찾은 레반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혼잣말을 계속할 정도로.
“성령이 충만하다는 게, 이런 기분이었나.”
철저한 무신론자이자, 언제나 무교로 살아왔던 레반도 열렬한 신자로 만들 수 있을법한 마탑주의 기운이 단전과 심장에 충만히 차오른다.
후폭풍이라는 거친 풍랑에 떠내려가던 레반의 육체는 막대한 마력의 개입을 지지대삼아 명경지수를 되찾았다.
“······.”
세상이 달리 느껴졌다.
오감 이상의 그 무언가.
구태여 눈을 부릅뜨고 유심히 보지 않아도, 수많은 정보가 레반의 피부로 전해져온다.
슬레모킨의 뒤를 낫을 든 유령마가 쫓아간다. 힘겹게 도망치는 그녀는 손에 두툼한 탄창을 들고서 질주에 박차를 가했다. 발전소의 입구에 이르러 슬레모킨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만약 터지면 되돌리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레반은 저 빌어먹을 바만차를 막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의념을 가졌다.
그래. 그저 그랬을 뿐인데.
광선을 꼬나쥔 레반은 어느새, 흉포하게 돌진하던 바만차의 앞에 당도해 있었다. 침침한 바만차의 안광이 풀지 못할 의문을 머금었다.
【 ······. 】
“후우.”
바만차를 막아선 레반의 폐에서 깊은 숨이 토해졌다. 이전과는 호흡의 깊이가 다르다.
그는 세상을 더 가까이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이번 생에 처음, 의지가 원하는 대로 몸이 움직였다.
모래주머니 수십 개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듯 하던, 아무리 단련해도 성에 차지 않던 육체. 한참이나 앞장서있는 상단전의 경지를 따라잡지 못하던 그 한심한 육체.
스르릉—
정기신의 세 가지 요소 중 두 가지.
정신(精神)이 합일했다.
퉷, 핏물을 그러모아 뱉은 레반이 전투를 위해 광선을 들어올렸다. 언뜻 기수식을 취하는 듯 보였다.
푹!
그러나 레반의 주변을 구성하던 장면들이 후욱 밀려나며, 바만차의 눈두덩이로 예리한 칼끝이 꽂혀들었다.
극성까지 갈고 닦은 오형검 일 초식. 출(出).
【 !!! 】
콰과광—!
어렴풋한 잔상만을 남기고 섬전처럼 짓쳐든 레반의 신형은 근방의 대기를 뒤집어엎었다. 방아쇠를 당겨야겠다는 의지만 가졌을 뿐인데, 육체는 이미 쏘아져 목표물을 관통해버린 것이다.
인간이 낼 수 있는 규격을 벗어난 탄력과 속도.
바만차는 거대한 낫으로 그 검을 막아내긴 했으나, 침침한 안광은 이미 경악으로 치떠졌다.
뼈마디가 저릿했다.
육신의 고통을 느껴본 것이 대체 얼마 만이던가?
【 이······. 】
한낱 벌레 따위가 아니다.
단숨에 죽여주마—
번쩍!
바만차의 흉험한 안광이 살기를 사방으로 풍겼다.
거대한 낫에서 분리된 무형의 요기가 실처럼 나뉘어 줄기줄기 뻗어진다. 그 요기의 실에 닿은 모든 것은 저항없이 잘려나갔다.
오직, 레반의 광선만을 제외하고.
콰직!
호쾌한 오색빛의 검강 궤적이 요기의 실을 대차게 부러뜨렸다. 한 치의 간격을 두고 벌이는 근접전.
낫과 검이 춤을 추며 일렁인다.
삽시간에 자그마치 열 합이 오갔다. 날카로운 파공성이 연신 터져나오며 전장의 먼지들을 주변으로 밀어냈다.
오색 광채의 검강과 무형의 요기가 맞부딪친다.
상식과 법칙을 아득히 벗어나는 기운들의 대결.
7레벨. 심지어 8레벨도 눈으로 쉬이 좇을 수 없다.
“저게 대체······.”
어깻죽지를 붙잡고 전투의 파장을 견뎌내는 천무연과 8레벨 언데드를 피해 달아나던 슬레모킨이 입을 떡 벌렸다.
요기를 뿌리는 바만차의 낫을 광선으로 막아낼 때마다, 레반의 몸을 두른 청록빛의 갑옷 장막이 흐릿해졌다가 다시 진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던 순간.
“엇······?”
슬레모킨의 팔에서 청록빛의 마력이 빠져나갔다.
그리고 스르륵 빠져나간 마력은 허공의 한 지점에 뭉치더니, 전투중인 레반의 머리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마치 이제부터 레반에게만 집중해 퍼붓겠다는 듯, 허공에 결집되었던 청록빛의 마력 응집체는 모두 레반의 갑옷으로 스며들었다.
그의 발끝부터 짙게 차오른 청록빛의 마력이 이전보다 곱절이 된 농도와 양으로 레반을 조력했다.
“아아.”
슬레모킨은 본분도 잊고 경탄을 머금었다.
【 그아아아아아! 】
그러나 전투가 뜻대로 흘러가지 않자, 격노한 바만차가 육성으로 포효했다. 그간 자신의 앞에 대적할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바만차는 흥분한 말처럼 앞다리를 허공으로 치켜들며 달려들었다.
시간이 갈수록.
바만차의 요기가 점점 더 거대하게 증폭된다. 9레벨의 네임드가 진정으로 발광하며 낫을 휘두르니 레반이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검막을 만들어 방어해냈다.
경탄을 지운 슬레모킨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아니, 절대적으로 부족해. 근본적으로 기운에서 밀려.”
마탑주의 마력을 뽑아쓰고 있다고 해도, 레반의 무공과 깨달음은 비정상적으로 드높은 것은 사실이다. 7레벨이라 믿을 수 없다. 아마 실종되었던 전설의 인격 메모리칩 뭉치를 실제로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카가강!
“······.”
하지만 압도적인 기운의 격차는 기예로 메울 수 없다.
바만차가 강대한 본신의 요기를 낫에 담아 휘두르면 레반은 속절없이 밀려난다. 현재는 경이로운 움직임과 고절한 무공으로 근근이 방어하고 있는 듯하나, 마탑주의 마력은 무한하지 않을 것이다.
레반이 공격을 성공시킨 것은 정확히 두 번.
바만차가 제자리에서 여유를 부렸을 때, 그리고 마탑주의 마력을 받자마자 검을 들고 쏘아졌을 때.
숨겨둔 실력을 꺼내어 기적적으로 어울리고는 있으나, 9레벨과의 격차를 좁히기에는 요원하다.
서걱!
아니나 다를까, 레반의 팔이 길게 갈라진다.
눈이 충혈된 슬레모킨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정확히 그때였다.
쿠르르르릉——
독기의 뇌우가 천지사방으로 몰아친 것이.
“!”
지면을 무너뜨려 잡아먹을 듯한 독기의 파동.
둑이라도 터진듯 요기와 독기의 파도가 밀려온다.
진원은······저 멀리. 당명 원로와 녹량백량의 결전지.
그 말인즉.
당가의 결전이 마침내 그 끝을 고했다.
뒤이어.
극독의 아지랑이 속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쿨럭-
그 자욱한 독연의 늪지대에서 빠져나온 것은, 독기운에 줄줄 녹아내리는 육신을 절대적인 공력으로 기워 붙잡고 있는 무인이었다.
죽을 각오로 지체없이 선천지기를 태운 무인은, 마침내 녹량백량을 궤멸시켜 오래 묵은 악연의 매듭을 풀어낸 것이다.
허나 당명은 살아도 산 몸이 아니었다. 당령마저도 처음에는 당명을 녹량백량으로 오해했을 정도로 망가졌다.
발을 덕지덕지 붙잡고 늘어지는 녹량백량의 처절한 저주와 요기가 당명의 육체를 갉아 먹는다. 거대한 강기를 가득 실어 휘두르던 편과 자랑스러운 당문의 무복은 온데간데없었고 얼굴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닌.
당명은 이미 초주검이었다.
비척비척 독무를 걷어내고 걸어오는 초주검.
그런 당명이, 남은 힘을 끌어모아 번개처럼 비도(飛刀) 하나를 출수했다.
쐐애애액!
어마어마한 기운이 담겨있는 비도. 그것은 당명의 눈앞에서 사라졌다가 바만차의 뒷덜미에서 나타났다. 레반이 기다렸다는 듯, 그 비도와 합을 맞추어 검강줄기를 쏘아냈다.
그러나, 이런 기습을 허용할 바만차가 아니었다.
이미 독무가 걷힐 때부터 상정해놓은 뻔한 기습.
바만차의 거체가 허공으로 뛰어오른다.
곡예에 가까운 움직임으로 비도를 피한 바만차의 시선이 돌아갔다. 바만차의 흉광이 대지를 가로질러 닿았을 때, 선천지기를 모두 태운 당명의 육신은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바만차는 흡족하게 시선을 다시 돌렸다.
끝이다.
이제 귀찮게 구는 한 놈만 눌러 죽이면—
【 ······? 】
“큽.”
당명이 출수한 비도가, 레반의 늑골에 박혀있었다.
공격을 회피한 바만차로써는 알 도리가 없었으나······.
그것은 단순한 비도가 아니었다.
정순한 세상의 기(氣)가 모여있는 응집체.
당명이 추출한 녹량백량의 정수. 그것을 응집해둔 ‘기의 그릇’
비록 비도의 형태를 했으나, 녹량백량이 세상에 두고 떠난 9레벨급 에센스였던 것이다.
“당씨의 성을 받아 태어나지 그랬느냐.”
허허-
위대한 경지를 이룩한 한 노인의 기운 빠진 웃음소리가, 이 전장에 어울리지 않게도 고고히 울려퍼졌다.
【 ······!!! 】
주르륵.
그리고 레반의 늑골을 파고든 당명의 비도는, 어느 기맥에 이르러 신기루처럼 녹아 사라졌다.
이미 정신이 합일했던 레반이 그 거대한 기운마저 받아 삼키자, 찌르르하게 퍼져나가는 고양감 뒤로, 정기신(精氣神)이 조화로이 합일했다.
조화를 이룬 정기신.
어쩌면 이번 생에서는 다시 못 느낄지도 모르는.
그렇게 인류라는 종의 한계, 알껍질 속에 단단히 갇혀있던 레반의 육체마저 잠시 알껍질을 빠져나와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존재의 격이 달라졌다.
다섯 번째 전생에 깨달음을 얻고 신(神)을 격이 다른 세계에 올려놓은 사내. 그 경지에 걸맞는 육체와 기운이 잠시간 레반에게 주어졌다.
녹량백량 에센스의 기운은 레반의 단전으로 흘러 들어갈 틈도 없이, 대맥을 거세게 휘돌아 대주천을 완성했다.
터진 활화산처럼 분출되었어야 할 기운은, 레반의 침착한 인도에 따라 가라앉았다.
화경.
지금의 레반은 화경의 경지에 이르렀다.
몇 번의 생을 거치며 그토록 염원했던 절대의 경지.
잠시 뒤. 레반이 깊은 눈으로 전장을 둘러보았을 때.
“똘똘한 놈. 아직 젊다. 따라오지 말아라.”
스르륵.
허허 웃던 당명은 이제서야 만족스레 단념한 듯 유유한 물줄기처럼 녹아내렸다. 지면과 섞여버린 당명의 유언은, 레반의 마음을 깊은 심해로 가라앉혔다.
“예.”
따라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일전에 단언했던 대로.
또 허무하게 뒈져나가지 않을 것이다.
곧.
광선의 끝이 천천히 바만차를 향한다.
심유한 눈빛의 레반은, 덤덤히 기수식을 취했다.
【 ······. 】
낫으로 전장을 지배하던 바만차도 걸음을 멈추었다. 곧 깊은 안광에서부터 살을 에는 요기가 끓어올랐다. 과분한 기운을 다스리며 변화하는 레반을 당장 요격할 요량.
이윽고, 어떠한 전조와 움직임도 없이.
서걱.
순간이동한 바만차의 거대한 낫이 레반이 머무르던 공간을 통째로 절삭했다. 천무연의 오른팔을 잘라낸 그 공격. 9레벨의 네임드 개체가 전력을 쏟아부은 일격에는, 청록빛의 마력 갑주도 효과가 없었다.
레반은 그 공격에 채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구경꾼들의 숨이 턱 하고 멎었다.
“······.”
핏기없는 천무연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고.
“아, 안—”
눈가가 붉어진 슬레모킨이 짧게 비명을 질렀다.
서걱.
레반의 목덜미가 낫에 반쯤 잘려나갔다.
···분명, 슬레모킨의 시선에는 그리 보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캉! 카가가가가가강!
“!?”
목이 잘렸던 레반의 신형은 어느새 연기처럼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는 전쟁 병기의 초진동 블레이드가 요란히 진동하며 그 낫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힘사의 한쪽 팔은 거대한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뜯겨져 나갔다.
하지만 그렇다면 사라진 레반의 진체는···
【 ! 】
바만차의 후위에서 어두운 인영이 솟아났다.
상승의 경신법, 이형환위(移形換位)의 수법이 바만차의 기감마저 속여내며 펼쳐진 것이다.
동시에.
마치 녹량백량의 기운을 모조리 주입한 듯한 레반의 검, 광선이 세상을 모조리 자신의 오색빛으로 덮어씌웠다.
이어서, 장면을 붙잡아 주욱 늘린듯.
오색으로 빛바랜 세상의 시간이 느릿하게 흐른다.
【 그아아아아!! 】
압도적인 위용을 보이던 바만차의 진노한 흉성조차도 길게 늘어졌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경지의 진화. 위기를 느낀 바만차가 요기를 급히 터뜨렸으나.
찰나를 쪼개고 또 쪼갠 정도의 시간.
흐릿하게 늘어난 세상에서 레반만이 움직였다.
인식의 간극을 비집고 들어가 바만차의 뒤를 잡은 레반이 무심히 광선을 들어올린다.
우우웅——
이윽고 모든 것이 정지해버린 듯한 세상 속에서, 오색의 광채를 흩뿌리는 검기성강만이 염라의 심판을 자처하며 떨어져 내렸다.
십수 미터까지 늘어난 오색의 패도적인 검강. 그 빛줄기는 지면을 단두대삼아 다급히 범위 내에서 벗어나려던 바만차의 세 다리를 절단해 주저앉혔으며.
종래에는 바만차와 일직선상에 위치하던 원자력 발전소 입구와 함께, 슬레모킨의 뒤를 노리던 8레벨 시체의 목을 추가로 참수했다.
그리고 그 모든 사태가 끝나자, 빛줄기가 지나간 공간이 뒤늦게 일그러지며 멈춰있던 세상이 다시금 힘차게 박동했다.
궤적에 걸려있던 것들은 그제서야 느릿한 비명을 지를 수 있었다.
으지지지직——
그것은 실로, 광선(光線)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