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퓨전펑크의 전생자-82화 (82/157)

#82화.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 4

#82화.

고밀도로 붙어있는 철거 직전의 건물들.

저 시커먼 창 안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12, 13조의 생존자들은 버려진 시체들의 도시, 북부를 가로로 관통하는 도로에 쌓인 잔해물을 밟고 빠르게 이동했다.

와직!

청록빛 괴물의 발치에 밟힌 쥐가 무참히 짓눌린다.

“징그러워, 웬 쥐가 이렇게 많아.”

“네임드 둘 이상이 힘을 합쳤다고 치면, 본대의 눈과 귀를 속이고 후발대를 쓸어버리는 것도 어렵진 않겠군.”

“막내야, 우리 재수 없는 소리는 하지말자?”

철컥. 콰광—!

몽골 기병처럼, 달리는 괴물 위에서 뒤로 몸을 틀어 샷건을 펑펑 쏘는 슬레모킨. 6층 높이의 건물 위에서 혀를 길게 뽑아 습격하려던 시체가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지워진다.

옆구리에 항공대 부사관을 낀 채, 슬레모킨과 나란히 달리던 레반이 물었다.

“통신 됩니까?”

“아, 아직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것 같습니다?”

“······.”

둘의 대화에 장전하던 슬레모킨이 입을 열었다.

“고장 안 났어도 안 될 거야. 우리 조 통신기도 그러더라.”

— 끼기긱. 치지직.

“저봐, 계수기가 지랄해대잖아. 방사능 때문에.”

“그렇군.”

서걱.

레반의 앞으로 진득한 핏물이 물보라처럼 솟구친다.

전투에 돌입한지 얼마나 됐다고, 꽤나 익숙해진 혈향.

촥-

유리창이 다 깨진 편의점 안에서 포탄처럼 튀어나와 달려든 시체를 단칼에 토막낸 레반이 검날에 묻은 피를 털었다. 이제는 말하면서도 5레벨급 시체를 일격에 쳐죽이는 지경이다.

주륵···.

시체의 혈액에서 꽤 비싸보이는 액체가 흘러나와도, 레반을 포함한 12, 13조의 생존자들은 ‘어, 에센스다’ 같은 소리를 할 새조차도 없이 앞만 보고 질주했다. 여기서 한가로이 유리병을 꺼내 에센스를 주워담을 여유는 없었다.

레반의 단전과 손아귀는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허나 피륙을 완벽히 베어내려면 검병을 꽉 붙잡아 육신과 일체시켜야 한다. 설사 손아귀가 다 찢어지더라도. 그것이 기본이다.

허나.

‘아직 부족하군.’

레반의 손아귀와 검은 한 몸처럼 찰싹 붙어있건만, 수백의 시체를 베어낸 현재에도 정기신의 균형이 합일하지 못함이 끝끝내 아쉬웠다. 움직임의 흐름이 어딘가 불편하게 맞는듯 하면서도 들어맞지 않는.

설명하기 힘든 애매한 감각이 계속 그의 신경을 갉아먹는다.

쐐애액!

그 상념을 애써 지우려, 콧김을 한 번에 몰아쉰 레반이 다시 지면을 박찼다. 신형이 화살처럼 쏘아지며 주변의 광경이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조장 천무연은 그런 레반을 보며 속으로 연신 경탄했다.

‘저자를 흠모하는 청풍이가 같은 조가 되지 못해 아쉬워하고 있겠군. 무공에 욕심이 많은 놈인데.’

초절정 경지쯤 되는 무인은 느낄 수 있다. 저 마탑 소속의 사내가 쓰는 것은 여지껏 보지 못했던 형식의 검, 화산의 무공과도 비견될 법한 고절한 상승 무학을 익혔음이 틀림없다.

게다가 젊다. 많이 잡아도 약관의 나이.

혹, 과거 멸문했던 구파일방의 무공인가?

하지만 경지에 이른 마법은 또 무엇이고···.

천무연은 어떤 관점으로 저 사내를 살펴야 하는지 감이 오질 않았다. 만약 이곳이 전장만 아니었다면 그도 청풍처럼 검을 나누어보자 청했을 것이다.

‘청풍이놈 말고도 잠룡이 또 있었군. 같은 무림계였다면 좋았을 것을······.’

천무연이 그리 생각하는 와중에, 레반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투 빈도가 생각보다도 많은 건 괜찮았는데······설마 생환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될 줄이야.’

슬레모킨의 조원들이 죽어가며 알아낸 전장 정보. 일단 북부 원자력 발전소 탈환은 둘째치고, 이 편제의 녹량백량 궤멸 작전은 그 시작부터 틀어졌다.

[ 조금 강한 언데드 무리였어. 그래서 연방군 보병들과 조원들이 같이 진입했는데, 무리의 요기가 확 부풀어 오르더니 그대로 물처럼 녹아내리더라. 7레벨 조원도 하나 녹았고, 나머지는 전부 감염. ]

[ 자세히는 못 봤는데, 사람처럼 생겼고 엄청 하얀 얼굴에 깨끗한 비단옷을 입고 있었어. 사천당가의 옛날 무복. 그리고 그놈 말고도 다른 요기도 느꼈는데 얘가 크게 다치는 바람에······. ]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니 반은 벌써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다. 13조 뒤의 후발대 7개 조가 전부 한줌 핏물이 되어 사라졌거나, 감염되어 시체로 변했을 테니까.

거기에 덧붙여서, 이 근방에는 9레벨의 네임드 녹량백량뿐만이 아니고 무언가 더 있다. 시체 주제에 전술핵이 투발되자마자 전쟁의 대비라도 시작한 것인가.

그러한 악재 속에서 당령이 꽤 희망찬 말을 했다.

“원로님은 절대 가솔을 버리실 분이 아니야.”

“음.”

당가의 원로를 떠올린 레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천당가는 본래가 그런 이들의 가문이다.

레반 때문에 일이 틀어져 결과적으로 상등신짓을 한 당절마저 어떻게든 무사히 빼가지 않았던가. 당가는 더럽고 치사하며 잔인한데다 참 꺼려지는 놈들이 맞으나, 적어도 식솔을 쉽게 내버리는 이들이 아닌 것은 레반의 경험상 명확하다.

“희망을 품어보자는 얘기군.”

이제 북부 원자력 발전소까지 약 4km남았다.

모래주머니마냥 축 늘어진 부상자들과 간헐적으로 덤벼드는 시체 때문에 이동이 조금 느려지긴 했으나, 이 속도라면 늦어도 몇 분내로 도착할 것이다.

꾸욱-

입으로 붕대를 문 슬레모킨이 덜렁이는 팔을 꽉 묶어 고정하며 말했다.

“추측이니까 흘려들어. 북부에 있는 언데드 중에, 같은 언데드를 조종하거나 부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놈이 있는 것 같아.”

“뭐, 뒈졌다 살아나기 전에는 흑마법사 였나보군. 아니면 인형사···.”

인형사, 뷔에탕이 떠오른 레반이 즉시 머리를 털었다. 슬레모킨의 말이 이어졌다.

“감염된 조원과도 싸워봤는데, 능력은 그대로 써도 이지가 없어. 7레벨이 넘어서 언데드가 되었더라도 기억은 남아있을 텐데. 상대가 9레벨이니까 감염되면 변이가 빠른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거기까지 얘기한 슬레모킨이, 대뜸 입을 빼죽 내밀었다.

“근데 우리 막내는 걱정도 안 돼? 왜 그러는 거냐, 괜찮냐고 한 번쯤은 물어봐줄 줄 알았는데.”

“솔직히 별로 안 괜찮아 보이는데. 괜찮나?”

“별로 안 괜찮아.”

“상어 대가리가 반절이나 날아갔잖아.”

많이 상한 청록빛 괴물의 얼굴을 뜻함이었다.

슬레모킨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실망했다.

“···으스러진 내 팔 걱정이 아니구나.”

“팔은 왜 그렇게 됐지?”

“됐어. 그나저나 저 쓰레기는 저렇게 둬도 돼?”

힘이 죽 빠진 슬레모킨이 뒤쳐진 밴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평균 7레벨의 일행. 외공만 익힌 밴스가 쫓아올 수 있을리 없다. 일반인보다야 조금 더 잘 뛰었으나 그뿐. 그들간의 거리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혀, 형님!”

설상가상으로 지금, 들소만한 크기의 시체가 밴스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들고 있었는데, 머리에 뼈가 뿔처럼 솟아있는 시체였다.

그런데도 레반은 태연자약했다.

“어 그래 돌프야. 무슨 일이니.”

“······.”

개새끼야, 무슨 일인지 다 보이잖아.

초연해진 얼굴의 밴스가 망연자실하게 말했다.

“······저 그냥, 먼저 가보겠다고요.”

터벅.

멀어지는 레반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던 밴스는 마침내 생존의 뜀박질을 포기했다. 어두운 폐허 속에 혼자 버려진 고독한 사나이 밴스, 그는 오늘 여기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기로 방금 막 결정했다.

‘그래, 저 괴물새끼랑 평생 같이 가느니 여기서 깔끔하게 죽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시체로 변하면 섹스는 못하게 되는 건가? 아 어차피 지금도 못 하는구나. 증말 좆같다.’

하지만 그 달콤한 생각도 잠깐.

쾅!

뿔을 앞세워 투우소처럼 달려들던 짐승형의 시체가 오히려 밀려나며 저 혼자 자빠져 뒹굴었다. 화강암보다 단단해 보이던 대가리의 뿔은 밴스의 얼굴과 부딪쳐 퍼석 깨져있었다.

— 그르아악!

“뭐여?”

황당해하던 밴스가 어버버하는 사이.

촤륵!

“억!”

아힘사의 손가락에서 발사된 소형 포획틀이 밴스의 목에 감겼다.

촤아악!

이윽고 교수대 위에서 목에 밧줄이 걸린 죄수처럼. 컥컥대며 찰나간 수십 미터를 날아온 밴스가 화끈한 목덜미를 매만졌다. 격한 줄다리기에도 목은 아직 잘 달려 있었다. 이미 밴스의 육신은 이깟 충격에 꺾이기엔 너무나도 튼튼해진 것이다.

곧이어 밴스의 귀로, 따뜻한 속삭임이 들렸다.

“너, 좋은 외공 익힌거야.”

“······.”

“평생 가자.”

* * *

“······없네.”

후발대는 곧, 원자력 발전소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발전소 입구의 푸른 혈액 자국과, 지면에 찍힌 무수한 발자국만이 한 무리가 여기에 왔다 갔음을 증명했다.

12조장 천무연과 13조장 슬레모킨, 그리고 레반 세 명이 동시에 말했다.

“몇 갈래로 흩어졌다.”

“이 앞에서 흩어졌네.”

“벌레다.”

“······?”

셋 중, 레반만이 다른 것에 신경을 기울였다.

천무연과 슬레모킨이 레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눈에 정신을 집중하나 싶던 레반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남청색 기계벌레.”

그들이 레반의 시선을 따라가자, 그의 말대로 남청색 기계벌레가 원자력 발전소의 입구 옆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그것을 그제서야 발견한 당령이 크게 반색하며 말했다.

“원로님의 독충! 길잡이로 남겨두고 가셨구나!”

하지만 당령의 말에, 레반이 곧바로 부정했다.

“지금은 당가의 것이 아니다.”

“무슨? 저건 명 원로님의 독충이 맞—”

“저 안쪽으로 기어들어 가잖아.”

스스슷.

남청색의 작은 기계벌레가 발전소 입구 안으로 들어갔다. 이전에는 당명 원로의 것일지 몰라도 지금은 아닌듯 보였다.

“······.”

발전소의 입구 바닥에 사람이 줄줄 끌린 자국이 있었는데, 그 흔적대로 나있는 푸른 혈액에서는 신묘한 독성이 느껴졌다. 당가의 당령도 눈치채지 못하는 기색이었으나, 레반은 전생에 저것을 본 기억이 있었다.

저 푸른 피는 사람의 피에 단혼사(斷魂沙)와, 추뢰만리향을 섞은 혼합독이다. 아마도 당가의 원로가 여기서 녹량백량을 추적하려 한 듯 했다. 그놈, 과거 말썽좀 부리던 당가의 무인이었군.

‘7, 8레벨쯤.’

벌레가 기어 들어간 발전소 안쪽에서는 오금이 저릿한 요기가 느껴졌다. 저 안에 있는 존재는 꽤 강했다. 그러나 녹량백량은 슬레모킨쪽의 후발대를 작살내기 바빴을 것이니, 저 안에 있는 건 다른 놈이다.

그래서 본대도 놈을 무시하고 걸음을 돌린듯했다.

그러니까, 발전소로 도망친 후발대와 길이 갈렸다.

“본대는 이미 선발대와 합류해서 퇴각했을 수도 있겠어. 편제 사령관도 대강 상황은 파악하고 있을 거다. 그리고······.”

모두가 레반의 입을 바라봤다.

“저 빌어먹을 벌레 새끼가, 지금 우리 봤잖아. 본대 아닌 거 걸렸다.”

“뭐?”

— 끼기기기기기기기기긱···.

그리고 레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들이 가지고 있던 방사능 계수기들이 당장이라도 터질듯이 지랄을 해댔다.

원자력 발전소와 지척이라 그런 점도 있겠으나-

— 끼기기기기기기긱···치지지지직···.끼기기기기긱···.

“!”

정신을 잠식하며 몰려오는 불안감과 이질감을 느낀 레반이 돌연, 광선에 공력을 전력으로 주입해 쏟아부었다.

그에 휘황찬란한 오색빛의 검기가 일어났고, 두 무릎을 구부린 레반이 곧장 거칠게 대지를 갈랐다.

쾌의 이치가 담겨있는 검격이 이질적인 한 공간을 찔러갔다. 그것은 몇 번이나 전장에서 여생을 보낸 자의 경험 혹은 요령. 방사능 계수기가 내지르는 끔찍한 비명과 함께 레반의 검 끝이 어떠한 피륙을 꿰뚫었다.

푸욱!

“······.”

그러자 당령을 찢어버리려던 손길과 함께, 광선이 우뚝 멈추었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 거세게 일렁였다.

【 호오! 】

그리고 검끝에 의복과 어깻죽지를 관통당한, 얼굴이 유령처럼 흰 존재가 나타나 탄성을 질렀다. 그는 검기에 꿰뚫렸음에도 흔들림없이 레반의 눈을 직시했다. 수십 갈래로 갈라진 긴 혓바닥에서 산이 뚝뚝 흘렸다.

흰 얼굴, 당가 무복, 9레벨 네임드 녹량백량.

“호오 같은 소리하네. 씨발놈이.”

푸지지직.

레반은 빛나는 광선을 더 깊이. 더욱 깊숙이 박아넣어 여유를 부리는 그 존재를 양단하려 했다. 검에서 일어난 오색광채가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베어지지 않는다.

발전소 앞은 도리어 더욱 고요해졌다.

급작스러운 녹량백량의 등장에, 정신의 기저에 깔려있던 생물의 생존본능이 턱밑까지 치고 올라왔다. 7레벨의 조원들마저 뱀 앞의 쥐처럼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못했고, 슬레모킨과 천무연만이 눈동자를 빙글돌려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그 시점.

“시발놈.”

방금 레반이 뱉은 욕설을 학습해 되새김질한 아힘사만이 아무런 망설임없이 뛰어들었다. 아힘사의 다리가 철컥대며 벗겨지더니, 가지런한 총열을 드러내고는 폭연을 단번에 내뿜었다. 슬레모킨과 천무연이 그 뒤를 이었다.

【 귀찮은 것들. 】

아힘사를 위시한 8레벨들이 살기등등하게 달려들자, 모습을 드러낸 녹량백량은 귀찮다는 듯 검병을 놓지않는 레반과 함께 훌쩍 뒤로 물러섰고—

“훌륭했다.”

콰악.

거미처럼 숨죽여 기다리던 사냥꾼이 나타났다.

【 ······!? 】

녹량백량의 모가지가, 구겨질듯 붙잡혔다.

강대한 압력에 전신의 혈액이 머리로 솟구친다. 녹량백량의 시선에 와락 일그러진 악귀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의 기억속에 오래도록 남아있던 얼굴. 조금은 늙었으나 그럼에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 당명······. 】

“본노가, 두 번 속아 넘어갈 줄 알았더냐?”

레반의 광선에 찔려있던, 녹량백량의 목을 조르듯 우악스럽게 붙잡은 독인(毒人)이 실소했다. 이리로 돌아올 줄 알았다는 듯.

“한심한지고. 시체가 되어서도 네놈은 여전히 한심하구나.”

눈이 벌게져 단신으로 녹량백량을 추격하겠다던 당가의 원로, 당명. 그는 3사단장의 지휘를 무시하고는 단독으로 행동했다.

독으로 심장을 정지시켜 호흡을 끊었고 기척을 죽였다. 본대는 사라진 당명이 즉시 후발대 쪽으로 향한줄 알고 있었으나, 당명은 이곳에 당도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 발전소 근방을 단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천리지청술(千里地廳術).

심장조차 스스로 멈추고 고요히 잠복한 채, 오로지 청각에만 세밀하게 공력을 흘렸다. 곧 어금니에 걸어둔 영약, 고독단(苦毒丹)을 집어삼킨 당명이 짓씹듯 말했다.

“네놈이 이래서 당가의 직계가 못 되는 것이다.”

스스스스—

단숨에 핏물로 만들어 주겠다는 듯 당명이 눌러두었던 기운을 끌어올리자, 전신을 버둥대는 녹량백량의 목덜미에 시퍼런 반점이 빠르게 번져나갔다.

【 끅! 】

사천당가의 직계중에서도 몇 명 사용하지 못하는, 추뢰만리향. 십수년이 지나도 향이 남아있는 독이며 독성이 극히 강하다.

독인(毒人) 그 자체. 기운 자체가 극독이다.

당명의 육신이 독이고, 독은 당명이다.

‘···이러다 나한테까지 옮겨오겠군.’

어깻죽지에 꽂아둔 광선 덕에 녹량백량과 함께 딸려왔던 레반이 신속히 판단했다. 다리와 발에 공력을 가득 실어 놈의 가슴팍을 때려밟는다.

콰앙! 콰앙!

진각(震脚)의 응용.

촤악—

당명의 손에 묶인 녹량백량을 진각으로 마구 때려밟은 레반은, 마침내 그 반탄력으로 검을 뽑아 회수했다. 마력으로 몸을 띄운 레반이 천천히 지상으로 낙하했다.

이제 당명과 녹량백량만이 허공에 남아있었다.

【 개, 개같은 늙은이가······! 】

덜덜-

격한 분노와 열기로 얼룩지는 흰 면면.

허나 녹량백량은 그저 퍼지는 당명의 독공을 중화하기 위해 몸을 부르르 떨며 기혈을 통째로 틀어막아야 했다. 강맹한 경력이 몰아쳤다. 당명의 우악스러운 독수를 벗어나기는 요원했다.

“네놈은 문에서 도망치고도, 지금도 도망치려 하는구나. 허나 이제 그러지 않아도 된다.”

쐐애애액!

갈라진 녹량백량의 혓바닥이 쉬륵대며 당명의 급소를 노렸으나, 그것들을 비수로 잘라버린 당명의 허리가 마치 활처럼 휘었다.

이윽고 궁신탄영의 수로 높은 공중으로 솟구친 당명과 녹량백량의 얽혀있던 신형이, 다시 허공을 박차고 혜성처럼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과과광—!!!

목을 단단히 붙잡은 채로 내리꽂혀 피대신 산액을 토한 녹량백량과 당명이 어지러이 얽혀들었다. 구렁이처럼 얽힌 그들의 산과 독물이 범벅되어, 주변의 잔해들을 순식간에 녹이고 지워버렸다.

“와라!”

그때였다.

꾸물대는 녹량백량을 제압함과 동시에 당명이 팔을 하늘로 들어올리자, 비어있던 허공에서 남청색의 서광이 비추었다.

레반이 그 위를 바라보자.

우우우웅—

수천, 수만 마리의 기계벌레들이 각각의 무형기를 머금고 하늘에 빗물처럼 떠있었다. 기계 벌레들의 주둥이에는 나비처럼 나풀대는 암기들이 단단히 맞물려있었다.

사천당가의 절기, 만천화우(滿天花雨).

당명이 결자해지를 위해 준비한 수였다.

그러나.

【 ······멍청한 늙은이. 멍청한 늙은이. 】

만천화우의 서광을 앞에 두고도, 돌연 배를 붙잡고 웃기 시작한 녹량백량의 웃음소리가 장내를 천천히 메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12조와 13조가 지니고 있던 방사능 계수기가 귀신들린 것처럼 미친 듯이 끽끽거리다 펑- 소리과 함께 터져나갔다.

【 잡았구나! 흐하하! 】

“······.”

또한, 바닥에 팽개쳐져 실실 웃던 녹량백량과 그를 내려보고 있던 당명의 뒤로, 짙고 어두운 그림자가 나타났고.

쿨럭-

자리에 멈춰선 당명이 입에서 독혈을 한움큼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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