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처음이군
#78화.
화령검절 청풍은 조금 안도한 얼굴이었다.
이제 막 약관이 되었을 놈이, 칠십 먹은 노인네처럼 허허 웃으며 인자한 미소를 짓는다.
청풍은 두둑해진 지갑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내 형장 덕에 두둑히 땄소.”
명품 반지갑은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빵빵하게 부풀어있다.
현물 지폐만 저 정도고 다른 판돈까지 합치면 더 많을 거다. 아까 당령이라는 여인과 붙었을 때, 담보도 잡아주냐는 말을 똑똑히 들었기에.
참고로 연무장에 올라가기 직전, 청풍에게 맡겨둔 내 여분의 크레딧도 무려 원금의 5배 가까이 불어나 있었다.
때문에 나는 청풍을 따듯한 눈길로 바라봤다.
“이렇게까지 노력해주어 참으로 감동이구나.”
“마지막에 상황을 정리하느라 애를 좀 먹었으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아니겠소.”
청풍은 덮어놓고 마탑의 승리에 걸었다가 내 갑작스러운 기권으로 판돈을 다 잃을 뻔했으나, 순발력있게 방금의 내기는 무효! 라며 매화검을 뽑았다.
화산 그룹 최고의 기재이자 무림계에서 기대를 거는 후기지수가 칼까지 뽑아 무효라고 위협을 해대니, 반대쪽에 걸었던 이들도 모두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하하!”
화령검절 청풍은 내가 인정한 사내이고 진정한 무인이었으나, 아주 정상적인 놈은 아니었다.
기분좋은 얼굴의 청풍이 물 흐르듯 물었다.
“형장, 이제부터 우리 형이라고 불러도 되겠소?”
“안 된다.”
쩝-
단호한 대답에 아쉬워하던 청풍은 지갑을 품속에 슥 넣으며 다시 물었다.
“헌데 마지막에 어째서 기권한 거요?”
“초절정의 경지를 밟은 것과 다름없는 무인이었다.”
“······허, 그랬소? 나는 나와 저 선배를 비슷한 수준으로 보았는데, 형장은 척 보면 척 하고 아는 것이 마치 대문파의 장로라도 되는 것 같소. 상단전이 뚫려 기운의 흐름이라도 보이는 거요?”
“멀리서 보는 것과 대면하는 것은 다르다. 가까울수록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법이지.”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당연하단 듯 답했으나, 그래도 의문을 해소하지 못한 청풍이 연무장 위를 바라보았다.
청풍의 승패 예측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아마, 그 뒤에도 필시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청풍이 맑은 눈을 빛내며 말했다.
“우습게도 나는 형장이 저 선배에게 지는 것이 상상이 가질 않소. 정말로 패할 것 같아 그리 기권한 거요?”
“이미 지나간 일이다.”
나는 형형히 눈을 빛내며 묻는 청풍놈의 말을 대충 뭉갰다.
사실.
상대는 초절정에 가까운 당가의 무인, 비무가 아니라 생사결이라면······승패를 장담할 수 없을 거다. 이길 수도 있겠지. 나라면 분명 그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리도 보는 눈이 많고 힘이 제한되어 있는 비무에서 내 밑천을 다 끄집어내 보이며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냥 기권하고 내려온 것이다.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야 상관없지만 당가의 원로와 화산, 루 막슨의 회장까지 나와서 비무판을 구경하고 있다.
이것저것 나도 모르게 익숙한 기술들을 꺼냈다가 재수 없이 된통 걸리면 저 새끼 대체 뭐지? 라거나 저 새끼 혹시 그 새끼 아니야? 라는 소리가 나올 것이 아무래도 분명한지라.
“나는 이제 좀 쉬련다. 이번엔 누구한테 돈을 걸 거냐?”
내가 손을 털며 그리 묻자.
청풍은 날뛰기 시작한 슬레모킨을 가리키며 답했다.
“형장은 당연한 걸 왜 물으시오? 이미 저 총쏘는 이족한테 다 걸었소.”
* * *
콰앙—!
거대한 총성이 편제의 주둔지를 울린다.
‘이리 당황스러울 데가 있나. 일이 왜 이리 흘러간단 말이냐.’
비무를 구경하던 당명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화산 그룹의 장로, 선운자는 재미있다는 듯 구경 중이고 마탑주도 자리에서 발을 뗄 생각조차 없어 보인다.
‘비무에서 샷건을 쓰다니!’
연무장 위로 올라온 저 뾰족한 귀의 이족은, 감히 당가보다도 한술 더 뜨고 있었다. 문의 무인들이 먼저 독을 쓴 것은 맞을 것이다. 당명 자신이 직접 그리하라 허했으니. 원래 마탑의 콧대를 적당히 꺾어 놓을 생각이었다.
다만, 일이 꼬였을 뿐.
저 마탑의 이족은 마공학 샷건을. 그것도 이 좁아터진 연무장에서 쏴대고 있다.
쾅! 쾅! 쾅!
“······이게 비무가 맞소?”
돌아오는 답은 없었고, 당가주 직속의 백각주는 속절없이 밀린다.
아니, 죽기 직전이다. 저건 비무가 아니라 사냥꾼으로부터 도망치는 짐승의 움직임에 가깝지 않은가.
허나 여기서 손속을 조금이라도 썼다간 자신의 체면을 구기는 것은 물론이고, 이 자리에 있는 당가의 무인 전체를 욕보이는 짓.
그렇다고 하여 가문의 직계가 복날 개맞듯이 두들겨 맞고 도망치는 꼴을 계속 방관하는 것도 썩 좋은 선택이 아니다.
생각을 마친 당명이 조용히 전음을 보냈다.
[ 마탑주, 피차 불편하니 여기까지 합시다. ]
[ ······한참 재미있는데 어째서 그러시는지? ]
[ 땅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저 한심한 놈들을 보시오. 이만하면 상호 충분하오. ]
[ 그렇군요. 그럼 이 대련까지만 보고 그만합시다. 저들의 승패는 알아야지. ]
[ 연습 비무는 마탑의 승리요. ]
[ 알겠습니다. ]
이윽고, 일레힌 포이체카가 허락하겠다는 듯 끄덕였고.
얼굴을 굳힌 당명은 적당히 기운을 피워올리며 말했다.
저 수치스러운 비무를 끝내기 위해.
“그쯤하고 내려오너라! 나를 어디까지 수치스럽게 만들 셈이냐?”
곧장 액체처럼 흘러내리며 깔리는 무형의 독기(毒氣).
비무를 잘 구경하던 이들은 갑자기 숨이 막히고 시야가 흐려지자 본능적으로 호흡을 멈추었다. 그들은 독으로 이루어진 늪에 잠시 빠졌다가 건져진 듯한 환각을 느껴야 했다.
당명은 일단의 소요가 진정되자 근엄한 음성으로 연무장 위의 중년인, 백각주 당모를 타일렀다.
“부끄러운 줄 알아라. 이깟 비무 따위에서 흥분하여 그것을 꺼내려 생각한 순간 이미 패한 것이다. 상대를 죽이기라도 할 셈이었더냐.”
그러자 합이라도 짜 맞춘 듯, 백각주가 뒤돌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원로님. 못난 꼴을 보였습니다.”
“?”
한참 샷건을 쏘며 도망치는 상대를 추격하던 슬레모킨은 당문의 생쇼를 보며 무슨 개소리야? 하는 뾰루퉁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연무장 밑에서 그걸 구경하고 있던 레반은, 알아서 북치고 장구치는 당가의 늙은이들과 어처구니없어 하는 슬레모킨을 보며 속으로 낄낄댔다.
‘늙은 너구리. 저 정도면 독인(毒人)급이겠군.’
당가의 중년인이 격앙되어 아주 위험한 살초를 쓰려고 했고, 그것을 미리 느낀 당가의 원로가 급히 끼어들어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해버렸다—대충 그러한 그림을 그린 듯싶다.
언뜻 당가도 체면을 구긴듯 보이나, 어차피 계속 싸웠다간 두들겨 맞던 당가의 중년인이 변수 없이 패할 테니까. 먼저 시비 걸었다가 두들겨 맞으면 더 창피하잖아.
그렇지만, 저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
하지만 중년인에게 호통치며 기운과 위력을 식간에 내보인 저 당가의 원로는 자신의 위세를 장내에 있는 이들의 머릿속에 똑똑히 각인시켰다.
저 경이로운 독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자라면, 당명을 끔찍한 괴물이자 절대고수로 기억하고 경외할 것이고, 당가의 무인 셋을 때려잡은 마탑의 막내 레반과 샷건 난사녀 슬레모킨은 비교적 기억에 잘 남지 않을 것이다.
원래 원로든 장로든 다 경지에 이른 눈치와 정치력이 있어야 오르는 자리라, 아주 치졸한 수를 당당하게 쓰는 게 이상할 일은 아니다.
‘가문의 원로까지 쩨쩨한 건 무림과 매한가지군.’
아무튼 그렇게 당가를 이끌고 온 수장이 직접 나서 무아지경의 연기를 선보이자, 당가와 마탑의 비무는 정리되었다.
— 이러면 당가가 밀린 건가?
— 설마, 그 대단한 당가가 질 줄이야.
허나 당명의 기운에 놀랐다고 해도, 누가 금번의 기싸움에서 승리했는지는 모르는 이가 없었으며.
— 나도 아까 그 마탑의 막내라는 자와 한 번 붙어보고 싶군.
— 아서라.
적어도 이 거대한 네 세력이 아웅다웅하는 편제에서, 레반이라는 이름의 사내는 꽤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마탑의 '막내' 레반.
그런데 그 덕분일까.
“탑주, 저자를 잠시 내어주시오.”
“······.”
다가온 화산의 장로가 나를 콕 짚어 빌려달란다.
마법사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주 불편하게.
과거 천봉매화의 가지를 꺾다가 화산의 노괴에게 걸렸던 기억이 떠올라 내심 움찔한 나는, 무의식적으로 사실을 부정했다.
“내가 안 꺾었어요.”
* * *
좋은 향이 퍼져나간다.
메가콥, 화산 그룹의 장로 선운자.
그는 화경의 무인으로 대단한 기백을 지녔다.
평범한 육신에서 폭포수처럼 흘러나오는 선기.
확실히 도사는 도사다 싶었다. 조금 날카롭긴 하지만.
아무튼 선운자는 대뜸 나를 화산의 건물로 끌고 와서는 우묵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마치 호랑이가 앞에 한 마리 앉아있는 듯했다.
“······.”
안광이 보통이 아닌 것이—
자네는 검법을 어디서 익혔는가.
사문이 어디인가.
스승이 누구인가.
어디서 인격칩이라도 주워 얻었나? 같은 질문에 철저히 대비하기 위해 끌려오며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도 넉넉히 돌려두었다.
이래저래, 오다가다 익혔습니다.
죄송하지만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제 스승께서는 그만, 크흡. 등등.
그러나.
“그 검이로군, 화산에서 대장간에 내어준 적운철이 녹아있는 검이.”
장로의 말에 잠시 잊고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칼드락 스미스에서···그걸 잠시 잊고 있었군.
나는 즉시 광선의 검집을 옷자락으로 덮어 가렸다.
사천당가의 원로고 화산의 장로고—
치졸한 늙은이들 같으니, 결국 이 검이 목표였나?
내가 생각을 키워가던 그때였다.
“괜찮다. 그깟 운철 따위, 다시 가져오리라 기대도 하지 않았다.”
화산의 장로 선운자는 그런 나의 예측을 일거에 다 깨부수고는, 차 향을 즐기며 뜻밖의 말을 더 꺼냈다.
“청풍이가 형장이라 부르며 따르던데. 이긴 건가?”
본론이었다.
“필시 검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아보았으니, 그 멋대로인 놈이 그리도 따르겠지. 비슷한 연배에 적절한 상대가 없어 그간 건방이 천지를 찔렀는데 아주 잘 되었구나.”
선운자는 저 혼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흡족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철딱서니 없는 놈이다만······앞으로 잘 부탁하마.”
“···예.”
굉장히 인자해 보이는 선운자의 얼굴.
선기가 줄줄 흐르는 얼굴에, 나는 적당히 포권했다.
그래도 이상하군. 그저 친하게 지내라 하기 위해, 이리도 분위기를 잡아 끌고왔을리는 없는데.
바로 그때였다.
“이만 돌아가보아라.”
“!”
메가콥 화산 그룹의 학부형, 장로 선운자는 이만 나가보라며 내 손에 꽤 고급진 주머니를 쥐여줬다. 무게가 너무도 묵직하여 받잡은 손이 훅 내려갔다.
주머니에서는 굉장히 청량한 냄새가 났다.
역시나···장로쯤 되는 거물이 여기까지 부른 이유가 있었구나!
참 좋은 기연이로다.
그렇게, 밖으로 나온 나는 주머니를 급히 펴 속을 확인했고.
“···.”
미간이 구겨졌다.
거기에는 날붙이에 베인 상처에나 쓰는 화산의 금창약(金瘡藥)이 한가득 들려있었다. 그 양이 워낙 많아 칼에 수백번 찔리더라도 다 쓰지 못할듯싶었다.
그러니까.
뭐, 이거 받고 그 청풍이놈과 더욱 열심히 싸워달라는 얘기인가?
후우.
잠깐 한숨을 내쉰 나는, 두둑한 금창약 주머니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주머니에 퍽 구멍이 나며 허연 금창약 가루가 눈처럼 날렸다.
“노괴놈, 분위기 잡길래 자소단이라도 주는 줄 알았네.”
화산은 화산이다.
전생에도 현생에도 별 도움은 안 되는군.
* * *
“연방은 전술핵을 사용할 거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마탑주의 발언.
슬레모킨은 꽤 놀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연방군은 대전쟁과 핵테러로 도시 몇개가 날아갔을 때, 분명 핵무기를 전량 폐기했다고 공표하지 않았나요?”
팔찌 네 개의 구성원이 다시 모였다. 일레힌 포이체카가 연방군 3사단장의 말을 전했는데 그 내용이 꽤 충격적이었다.
“그랬지. 이상하게 연방의 장군마저도 정확히 아는 기색은 아니더군.”
라그나로크 장벽 근처에 전술핵을 투발해 근처의 좀비를 다 지우고, 장벽까지 녹여버린뒤 단숨에 진군하겠다는 연방 초유의 작전. 그걸 듣자 나도 어느 정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수복전에 핵무기를 쓴다고?’
핵은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다.
마탑주가 생각이 많아보이는 게 이해가 된다.
핵무기.
편제의 각 수장들은 인간이라는 범주를 아득히 초월한 힘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나 9레벨급 이상은 지근거리에서 당하지 않는 이상, 핵이 터져도 생존할 확률이 매우 높을 거다.
허나 도시 자체가 폭발해 사라지면?
그때부터는 레벨이고 뭐고, 그냥 시체들 사이에 내던져진 채로 처절한 아포칼립스물을 찍는 거다. 지금처럼 먹을 것도, 마실 물도, 화장실도, 몸을 누일 곳도, 얘기를 나눌 사람도, 한 점의 빛조차도 없는 무한한 어둠 속에서.
대단한 초인이라고 해도 얼마 못 버틸 테지.
초월적인 강자도 인간의 몸인 이상, 인류의 터전을 벗어나서는 멀쩡히 제구실하며 살아갈 수 없다.
그렇기에 조금이나마 남은 땅에 거대한 장벽을 둘러쳐 피똥싸가며 꾸역꾸역 도시를 수성하는 거다.
그러니 잘못되었다간 장벽 안의 모든 것들을 파괴할 핵무기를 극히 경계하는 것도 당연하다.
현재, 연방의 일곱 도시는 유기적으로 물자를 주고받는다.
헌데 바닷물을 담수화시켜 연방에 공급하는 프레이야 시티나 석탄과 철광석을 포함한, 각종 소모재를 연방 도시들에 공급하는 알 헤임달 시티에 핵폭탄이 터진다?
생각만 해도 답이 없다.
만약 그리되면 그날로 인류 멸망의 시한을 받아놓은 것이다. 다시 완벽하게 수복하지 못하는 한, 멸망 확정이다.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이들의 눈에는 핵이 그저 강력한 자멸 수단으로 보일 수밖에.
아무튼 일레힌 포이체카가 말을 덧붙였다.
“투발 시일은 4일 후 정오, 남서쪽 장벽 2km 지점이라더군.”
아닐 수도 있다.
거대 세력의 수장들마저 이렇게 경계하는데, 연방군이 그걸 곧이곧대로 알려줬을 리는 없다고 생각한 내가 슬며시 입을 열었다.
“실제 연방에서 전술핵을 투발할 생각이라면 시각과 투발 지점, 모두 원안과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 탈취라도 당하면 수복전이고 뭐고 다 엎어야 할 테니까요.”
무려 전술핵, 미사일로 쏘든 가지고와서 떨구든 해야한다.
그런데 여기에 모인 9레벨급들이라면, 중간에 핵을 탈취하는 것도 가능하다.
덕분에 연방군은 전술핵의 위치와 존재를 끝까지 숨기고 싶을 것이고, 나흘 뒤 남쪽에 투발한다 해놓고서는 반대인 동쪽에 투발할 수도 있다. 그게 나의 생각이었다.
“동의한다.”
다행히 마탑주도 비슷한 생각이었던 듯, 입을 열었다.
“투발이 당장 오늘일 수도 있으니, 마탑은 언제든지 전장에 투입될 수 있게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대기한다. 그리고—”
나를 기특히 바라보던 마탑주가 웃으며 말했다.
“고생했다. 당가의 원로가 쩔쩔매는 꼴이 보기 좋더구나.”
* * *
“자칫하면 죽을 뻔했소.”
화령검절 청풍은 화산의 장로, 선운자의 손에 개처럼 두들겨 맞았다며 앓는 소리를 했다.
아까 전, 비무에서의 내기 도박을 말함이었다.
꼴깍꼴깍-
술이 목구멍으로 시원하게 넘어가는 소리.
레반은 청풍이 소맷단에 숨겨온 맥주를 간단히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하늘에 무엇도 보이지 않는 야심한 밤이었다.
“형장, 오늘은 때가 아니라 이런 술같지도 않은 술밖에 못하지만 수복전이 끝나면 더 멋들어지게 사겠소.”
“······.”
청풍의 말이 끝나자, 잠시간 정적이 흘렀고.
툭. 툭.
레반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그거, 뒈지기 전에 하기 딱 좋은 말이로군.”
청풍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레반을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느끼고는 마찬가지로 따라 일어나며 소맷단으로 입을 닦았다.
그의 호쾌한 음성이 야밤의 정적을 깨고 이어졌다.
“하하하! 형장, 예서 누가 죽는단 말이오? 내 뒤에는 화산의 검수들이 있지 않겠소. 형장의 뒤에는 마탑이 있고 말이오.”
곧, 청풍은 호탕하게 웃으며 떠날 채비를 했다. 그의 옆에 있던 청궁이 부스스 일어나며, 다 비운 맥주병들을 호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이윽고.
치이이익······.
레반과 청풍은 미리 짜기나 한듯이 검지 끝에 주독(酒毒)을 모아 바깥으로 몰아냈다. 약간의 취기도 남지 않게 주독을 모두 몰아낸 레반은, 조금 전보다 멀쩡한 얼굴로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연방은 작전을 원래 이따위로 시작하나?”
그 말에 청풍이 묘하게 웃으며 답했다.
“나도 이런 임무는 처음이라 잘 모르겠으나, 뭐 자신이 있는 것 아니겠소. 연방의 강자들이 여기에 모여있는데 두려울 게 없겠지요.”
“?”
청풍과 레반의 만담을 이해하지 못한 청궁이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물었다. 풀벌레 소리 하나 없이 고요한데, 갑자기 뭐가 시작이란 말인가?
“지금 두 분, 무슨 소리를 하시는겁니까?”
레반은 청궁의 그 말을 무시하고 주머니를 뒤졌다.
곧 그의 품 속에서 두둑하고 고급진 주머니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흰 가루가 잔뜩 묻어있는 금창약 주머니였다. 구멍이 살짝 뚫린.
“너희 장로가 불러서 주더라. 다시 가져가라.”
청풍은 허허 웃으며 한사코 거절했다.
“나는 괜찮으니 넣어 두시오 형장. 긴히 필요할 때가 오지 않겠소?”
“그런가.”
레반이 다시 금창약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꽈과과과광—!!!
저 지평선의 끝, 어디선가 일어난 거대한 파장과 어두웠던 하늘을 환히 밝히는 섬광이 로키 시티의 베이스캠프까지 닿았고 그와 동시에.
———!!!
귀청이 터져나갈 듯한 연방군의 사이렌 소리가 주둔지를 울렸다.
허공으로 신형을 띄워 눈으로 그 섬광을 따라간 레반이 눈가를 좁혔다.
“그간 오래도 살았지만, 핵 터지는 광경을 보는건 또 처음이군.”
라그나로크 시티 수복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