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퓨전펑크의 전생자-77화 (77/157)

#77화. 제가 졌어요

#77화.

연무장 위로 올라온 당가의 도발.

빌어먹을 놈들이니···겁만 더럽게 많은 지팡이쟁이들이니···하는 꼴이, 꽤 아기자기 했다.

그러나 나는 저런 허접한 도발에 넘어가 칼부터 꺼내들 사내가 아니다. 가끔 때에 따라 뽑을 때도 있긴 하나, 뭐 옛날 루돌프놈처럼 내 얼굴에다 칼질을 한 것도 아닌 이상에야.

남들이 저리 다 보는 앞에서 비무를 벌이는 것도 취향에 맞지 않는다. 연방군이 그것을 적극 장려하며 싸움판을 깔아놓긴 했으나, 굳이 나가서 설칠 이유가 없다.

이 자리에 있는 그 어떤 마법사보다 당가를 꺼려하는 사내가 바로 나다.

게다가 큰 전투까지 앞두고 있지 않나.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실전에 가까운 것을 선호한다. 적어도 팔이나 손가락 몇 개쯤은 썩둑썩둑 잘라내야 성에 차는 탓이다.

헌데 저 당가 놈들의 팔을 썩둑 잘라버렸다간, 전장에서 내 뒤통수에 독묻은 비수가 꽂혀들지도 모를 일 아니겠는가!

그래서 강 건너 불구경하듯 가만히 있었다.

루돌프놈더러 네가 일레힌 마탑을 대표해 한번 나가보라고 등도 떠밀면서.

툭툭.

“형님, 암만 그래도 제가 저 새끼랑 어떻게 싸워요······아 계속 밀지 마시라고요.”

“좋은 경험이 될지도 모르는 거 아니겠니.”

“···쟤들은 맹독 쓰는 새끼들이잖아요.”

“돌프야, 너는 좋은 외공을 익혔잖아.”

그 말에 루돌프놈이 버럭 역정을 냈다.

“아니 그래서 뭐 대체 얼마나 좋은 겁니까? 형님이 매번 좋다고만 하고 넘기시니까 헷갈리잖아요. 구체적으로 뭘 말해주셔야 저도 알죠. 이거 당가 독도 막아요?”

저 외공이, 당가의 독을 막을 수 있나?

솔직히 그것까진 나도 잘 모르겠군.

나는 정말 모르겠기에, 모르겠다고 말했다.

“모르겠는데.”

“그것 보십쇼! 잘 알지도 못하시면서. 또 아까는 마탑이랑 관련없는 척하라고 했잖습니까. 같이 다니기 쪽팔리다고. 왜 이제와서 절 찾으세요?”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큰 소리야.”

“······.”

“그리고 솔직히 같이 다니기에 창피한 건 맞잖아. 내 말이 틀려?”

“······.”

“쯧, 왜 이리도 쪼잔해? 사내놈이.”

꼰대처럼 기어오르는 루돌프 놈을 갈구다보니 몇 분의 시간이 금방 지났다.

마탑쪽에서 연무장에 오르려는 마법사는 아직도 없었다.

“끝까지 아무도 안 나오나? 발할라 시티의 마법사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마탑이라해 내 아주 기대했는데 한심한······.”

반응이 시원찮자, 당가의 무인은 끝내 마탑까지 입에 올리며 발할라 전체를 욕보였다. 도발 수위가 용인되는 정도를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 자리에 화산 그룹과 마탑처럼 마법계인 루 막슨 컴퍼니도 있는데, 희한하게 마탑만을 목표로 찍어내는 걸 보아하니······.

‘당절인가 하는 놈이랑 연관되어 있겠군. 마탑한테 개쪽 한 번 당했으니 화풀이라도 하겠다 이건가?’

나는 눈대중으로만 봐도 저자가 어느 수준인지 대강은 찍어낼 수 있다. 지금 막 연무장 위로 올라온 당가의 무인은 7레벨 초입쯤의 무인이다.

대강 적당한 놈을 선봉으로 내보내 마탑을 판떼기로 끌어들이고 모두 앞에서 두들기는, 아주 허술하고 뻔한 계획인 듯한데······.

그게 또, 마법사들한테는 꽤 잘 먹힌다.

“안되겠습니다. 입을 닥치게 해야겠어요.”

선 넘은 도발이 이어지자 자기 잘난 맛에 사는 데다, 대단한 마탑의 구성원이라는 자긍심으로 똘똘뭉친 마법사들이 더이상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다녀오겠습니다.”

다른 마탑 마법사들의 긍정과도 같은 묵인 아래, 마탑의 한 마법사가 마침내 연무장에 올랐다.

일단 우리쪽에서 올라간 일레힌 마탑의 마법사는 완숙한 7레벨급. 정련된 마력이 느껴진다. 저 당가의 무인이 비무 수준에서 금지된 독이라도 쓰지 않는 한, 마법사의 승리다.

쾅!

승부는 역시나 마법사의 승리로 돌아갔다.

여기까지는 예상한 결과.

애초에 당가의 무인들은 일대일 비무에서 강한 힘을 낼 수 있는 놈들은 아니다. 극독과 집요한 암기술, 대량 살상쪽으로 워낙에 특화된 무공은 살상의 제약이 풀릴수록 큰 힘을 내기에.

허나 그 비무가 끝나기 무섭게, 당가쪽에서 약속이나 해둔 듯 이전의 무인보다 배분이 높아 보이는 무인이 걸어나왔다.

그는 시작부터 의복의 앞섬에 두 손을 넣어둔 자였는데, 나 비수 던진다! 라고 아주 미간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다.

눈빛이 형형한 것이, 자신감이 넘치는 그 무인은 연무장에 올라오며 앞으로의 비무 방침을 선포했다.

“당가에는 훌륭한 의원들이 동행했습니다. 혹시나 중독되어도 해독제가 있어 곧장 해독이 가능합니다. 전혀 걱정하지 마십시오.”

의원이 살려줄 거라 독까지 그냥 쓰겠단다.

비무 단계에서 의원까지 필요한 맹독을.

하여간 정신 나간 새끼들.

“···그러든지 말든지.”

하지만 마법사도 물러서지 않았다.

저기서 모양 빠지게 꽁무니를 빼며 ‘아 그래도 독은 좀······’ 하는 건 김도 샐뿐더러, 이토록 많은 이들 앞에서 마탑의 위신을 상하게 하는 행동.

결국 까불던 놈만 패고 돌아올 예정이던 마탑의 마법사는, 물 흐르듯 올라온 당가의 무인을 또 상대해야 했다.

‘한두번으로 안 끝나겠군.’

마법계를 대표하는 마탑과, 무림계 메가콥인 당가의 비무는 점점 자존심 싸움으로 번져갈 징조를 보인다.

그렇게—

둘이 연무장에서 강하게 맞붙은 순간이었다.

“아니!?”

“?”

누군가 반가운 소리를 지르기에 고개를 돌렸더니, 아릿한 매화향과 함께 기골이 장대한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알 헤임달 시티에서 대충 묶고다니던 산발 머리는 어디가고 단정하게 매화건을 둘러 정리한, 진정으로 헌앙하고 잘생긴 화산의 검수가 내 눈앞에 서있었다.

장차 화산 그룹과 무림계를 이끌어갈 후기지수.

화령검절, 청풍의 재등장이었다.

“아니 형장께서 어찌 여기에 계시는 거요!”

* * *

당가와 마탑에는 8레벨의 강자도 몇 명씩 있었으나, 보통 8레벨쯤 되면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지라 혈기를 온전히 다스릴 줄 안다.

게다가 8레벨급이 여기서 싸워댔다간, 공병대에서 힘들여 조립해둔 주변의 가건물들이 남아나지 않을 거다.

그러한 이유로 싸움은 7레벨 내외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상황에서, 장차 화산 그룹과 무림계를 이끌어갈 천재 후기지수 청풍은—

“빨리들 거시오! 이러다 시작하겠소.”

“······.”

“청궁 인마! 꾸물대지 말고 빨리 돈부터 걷어라.”

비무의 승패에 돈을 걸고 내기 도박을 하고있다.

처음에는 소액으로 시작한 놈들의 승자 맞추기 판돈이 매판 커져 벌써 몇만 크레딧을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이번엔 마탑에 5천 크레딧!”

“아니지 아니지. 난 이번에도 당가에 3천 걸지!”

“마법사의 기세가 보통이 아닌데? 1만!”

“난 당가에 1만. 저자는 독자령이라는 절정의 무인인데, 무학관 출신이라 기본기가 아주 좋고 탄탄해.”

저 내기도박의 참여자들은 흥미롭게 마탑과 당가의 싸움을 불구경중인 루 막슨과 화산 그룹이었는데, 그 중심에는 화령검절 청풍이 자리하고 있었다.

“내 보기에도 당가의 무인이 더 뛰어난 듯싶소. 2만 크레딧 밀어넣겠소.”

심지어 청풍은 한 번도 틀리는 법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 그만. 내려가겠다.

마탑이 연속으로 패했다.

전투 중이던 마법사가 신음을 흘리며 내며 팔을 들었다.

무슨 독에 중독되어 팔이 슬슬 썩어들어가고 있었는데, 저 정도면 당가 기준에서는 평범한 독이라 달리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이미 ‘독 써도 오케이’ 를 해버렸기도 하고.

“하하하! 어떻소!”

“대단하구나! 역시 화산의 미래다!”

청풍은 또 묘한 매력이 있어 화산 그룹을 벌써 휘어잡았는지, 청풍보다 배분이 높은 화산의 검수들도 그를 말리지 못했다.

아무리 세속에 찌들었다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화산은 도를 닦는 도가인데 당당하게 내기 도박이라니.

“근데 도박을 왜 내 옆에서 하지?”

내 말에 청풍이 못 들은척 말했다.

“형장, 이리 다시 보니까 정말로 좋소! 여섯 번째 봉우리의 마탑 소속이셨소? 발할라에 마탑만 다섯이라던데, 그중 형장이 있는 마탑과 화산이 같은 편제라니. 어찌 이런 인연이 있소!”

그러던 화령검절 청풍은 곧 화제를 바꾸어 속닥였다.

“그런데 형장이 나서면 저놈들 정도는 한주먹거리 아니오? 어찌 뒤에서 가만히 보고만 있소?”

— 다음은 누구냐!

때마침, 마법사를 중독시켜 내보낸 당가의 무인이 누가 자신의 상대냐며 실실 웃었다. 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저 멍청한 비무에 나설 마음이 없었으나.

— 거기, 제일 뒤쪽에 빠져있는 마법사 놈.

방금 승리한 덕에 고무된 당가의 무인은, 굉장히 한심해하는 표정으로 가장 뒤쪽에 빠져 숨을 죽이고있던 나를 정확히 지목했다.

“···저요?”

— 마법사가 검은 왜 차고 있지? 쥐새끼마냥 숨어있지 말고 앞으로 나와라. 나와서 싸우지 못할 거라면, 너같은 등신은 전장에 필요 없으니 마탑으로 돌아가든지.

“여기가 무슨 호스트바도 아니고, 비무에 지명제도 있습니까?”

내가 슬쩍 말을 돌리며 거절하려 하자.

아직 위장약혼 거절로 인해 앙금이 남은 듯한 얼굴의 슬레모킨이 나를 지그시 노려봤고, 비무 내기로 판을 점점 키워가던 청풍도 눈을 번쩍 빛내며 말했다.

“형장, 나는 이제부터 무조건 마탑쪽에 걸겠소.”

“······.”

그래.

나름 마탑의 막내인데, 계속 엉덩이 깔고 앉아있는 것도 좀 그렇군. 안 그래도 마탑이 밀리는 형국에 지명까지 당했다. 여기서 마탑 위신 떨어지게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

“청풍.”

“부르셨소 형장?”

“이 크레딧, 마탑에 좀 걸어줘라.”

“하하하! 내 반드시 그리하겠소!”

나는 청풍에게 여분의 크레딧을 죄다 쥐어주며 엉덩이를 일으켰다.

—그리된 일이다.

비무는 굉장히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삼 분 정도 걸렸나.

[ 끅. ]

나를 처음 지명했던 놈은 암기를 단검마냥 들고 설치다가 광선과 부딪쳐 손목이 아작났고, 그 다음으로 나온 당가의 무인은 설욕을 위해 신중히 잠행술까지 써가며 꽤 분전했으나, 내 귀신같은 금나수(擒拿手)에 발목이 붙잡혀 그대로 으스러졌다.

“손맛이 좋군.”

독도 쓰는데 손발목 분지르는 것 정도야.

— ······.

그러자 당연하게도 기세등등하던 당가쪽은 합죽이가 되었고, 루 막슨 컴퍼니와 화산 그룹의 구경꾼들이 치열하게 토론하며 내 정체를 유추하기 시작했다.

— 저 새끼 저거, 마법사 맞아? 무공을 쓰는 것 같은데······.

—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아무래도 마법사가 아닌 것 같다. 일레힌 마탑에서 치사한 수를 쓰는군.

— 금나수를 저리 극성으로 쓰는데, 척 봐도 무인이잖아.

— 내공의 분배가 훌륭하고 하체가 단단하다. 근접전의 기본기도 잘 잡혀있고 눈이 좋다. 발할라의 기사 가문 출신이겠어.

— 기사였을 수도 있겠군!

그리고 지금 앞으로 나오는 저 여인이 세 번째 상대 되시겠다.

“령이라고 해요.”

령이라는 이름의 당가 여인은 완숙한 7레벨 이상으로 상당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다.

손속이 얼마나 거칠고도 은밀한지 전투중에 내 팔뚝에 하독(下毒)까지 성공해냈다.

여태껏 싸워본 당가의 무인 중 가장 강했다.

치이이익······.

나는 나노로봇의 재생 속도보다 더 빨리 썩어들어가는 팔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긁힌 환부에서 고약한 냄새와 함께 독이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포기하세요. 약하지만 내공을 금제하는 독도 조금 섞어놓았어요. 이제 팔과 내공을 전부 쓸 수 없을 겁니다.”

당가의 령이라는 여인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포기를 권유했고.

“순수한 몰타의 빛이여!!!”

“······?”

나는 대답 대신, 약식 성호를 그으며 영창했다.

거세게 일어난 공력과 마력이 중독된 팔로 몰리더니, 기혈로 퍼지려는 독기를 막고 꾸역꾸역 밀어낸다.

쿨럭-

상처를 좀먹어가던 독은 다시 꿀럭거리며 혈액과 함께 환부 밖으로 빠져나왔다. 영창은 사실 필요없는 요식행위인데, 속으라고 지랄 한번 해봤다.

그리곤 나는 곧바로 공력을 끌어올려 오형검의 일 초식을 취했다.

‘출(出).’

쾅!

극히 찰나간 뻗어진 빛살의 궤적이 여인을 후려쳤다.

미처 정비하지 못하고 직격당해 공처럼 데굴데굴 굴러간 여인은, 가건물의 유리창을 다 깨부수고서는 어떤 계단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여인이 날아간 궤적에 펄펄 끓는 독혈이 흩뿌려졌다.

와장창!

벌써 세 명째.

— ······.

연무장을 두르고 있던 이들이 조용해졌다.

몇 합 나누지도 않고, 당가의 무인을 연달아 셋이나 날려버렸다. 한 두어 번째 놈을 날릴 때까지만 해도, 저런 모습들은 아니었는데.

— 마, 마법도 잘 쓰는데?

— 허면 하이브리드인가보군.

— 위계가 높은 정화 계열의 마법이라도, 그 짧은 순간에 당가의 독을 어찌 해독한단 말인가?

— 해독한 게 아니라 혈액과 함께 밀어낸 거다.

— 그게 말처럼 쉽게 가능한 일인가? 세맥이 다 뚫려있어도 힘들텐데?

— 임독양맥이라도 뚫었나보지.

— 방금 그 검법, 제대로 견식한 사람 있나?

7레벨의 구경꾼들은 저들끼리 시끄럽게 떠들고, 8레벨급 강자들의 눈초리가 점점 경악과 의아함으로 바뀌어 갈 때 즈음.

적당히 악에 받친 당가의 한 무인이 연무장으로 급히 뛰어 들어왔다. 이전과는 다른, 무려 8레벨을 목전에 두었을 무인이었다.

그와 동시에 방금 여인이 날아간 곳에서, 거대한 기운을 지닌 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네 세력의 수장이 구경꾼 무리에 추가된 것이다.

— 나랑 청궁이는 또 형장한테 다 걸었소! 하하하!

와중에 청풍은 눈치 없이 내게 또 돈을 걸었다며 크게 고함쳤다. 뻐근한 어깨를 돌리던 나는 절레 고개를 저었다. 분명 천재이긴 한데 아직 어려서 그런지 눈치가 좀···.

여튼, 튀어나온 당가의 중년인은 굉장한 기도를 지니고 있었다.

“이 당모가 오늘 한 수 배워도 되겠소?”

청풍보다도 경지가 높을 듯한 무인이었다. 거의 8레벨이라 봐도 무방한, 초절정의 경지를 목전에 두고 있는 고수. 아마 뛰어난 당가의 직계임이 분명했다.

세력의 수장들까지 보고 있는 판에, 더 이상 처참하게 패배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는 생각으로 급히 뛰어 올라온 것이다.

“그럼, 시작하겠소.”

당가의 중년인이 정중히 포권을 풀었고.

나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내가 기세부터 졌습니다. 나의 패배요.”

“!?”

나는 미련없이 패배를 시인하며 기권했다.

몸을 돌린 내가 휘파람을 불며 내려가려했다.

뿌득. 뿌득.

그에 당가의 중년인이 다급히 쇄도해 나의 검집을 덥썩 잡았다. 힘을 주며 부들대는 것이 나의 손을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당가의 중년 무인은 꽤 노한 얼굴로 말했다.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건가? 포기한다고?”

“예. 제가 졌어요.”

“······.”

저 무인이 미처 생각지 못한게 있었다.

나는 다른 마법사들처럼 모양이 빠진다며 질 때까지 미련히 서있을 사내가 아니다. 달면 삼키고 조금이라도 쓰면 뱉는, 그런 사내. 마탑주가 나와서 보든 누가 보든 나는 별 상관이 없었다.

“놓아주시죠. 검집이라도 부수려고 하십니까.”

세 명을 연달아 깨부순 내가 너스레를 떨며 연무장 밖으로 내려가려 하자, 당황한 당가의 고수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가 목소리를 낮추어 수군거렸다.

- 부끄럽지도 않은가! 이리 많은 이들이 보고 있는데도!

듣자 하니, 이미 놓아버린 체면을 본인이 주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 자기 체면을 좀 살려달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나는 가차없이 손을 내저었다.

“싫습니다. 그냥 밖에서 지켜볼게요.”

“······밖에서 지켜본다니, 그게 무슨.”

“당가 얘들은 대체로 개념이란 게 없네. 저번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

7레벨을 상대로 8레벨급이 기어 나왔다.

그렇다면 마탑쪽에서도 명분이 생겼다는 뜻.

내가 간단히 포기하자, 마탑쪽에서는 뾰족한 귀를 가진 누군가가 정신이 나갔냐는 듯한 표정을 하고는 연무장 위로 올라왔다.

철컥.

8레벨의 엘프 마법사 슬레모킨.

어디선가 커다란 펌프액션 샷건을 꺼내 들고 연무장으로 올라온 슬레모킨은, 스산히 샷건을 장전하며 입을 열었다.

“그 체면, 내가 살려줄게요. 우리 '막내' 는 내려가.”

“예.”

나는 휘파람을 불며 연무장을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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