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카산드라와의 첫 만남.
#73화.
카산드라 교수의 저택에서는 음식을 준비하는지 각종 음식이 좋은 향들이 풍겨오고, 클래식한 음악이 잔잔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드륵-
나는 착석하며 카산드라 교수에게 물었다.
“어째서 제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까?”
“그건 말이죠.”
교수는 교양있고 차분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께서 다행히도 건강을 되찾았다고 들었답니다. 누구에게도 손을 벌리지 않고 자력으로 말이죠. 물론······이제 아카데미 교수들 사이에서 자력 회복이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답니다. 레반이라는 인물 덕분에요.”
조금은 놀랄만한 소식이었다.
그 사실이 벌써 이렇게 퍼져나갔나?
나는 적당히 발뺌하며 입을 열었다.
“마탑주께서는 아직 휴양중이십니다. 헛된 소식에 교수님들이 넘어가신 듯합니다만.”
“과연 그럴까요? 몇 년간 풀 죽어있던 일레힌 가문의 수뇌들이 요즘따라 웃음이 많아졌답니다. 최근 일레힌 그룹 내에서도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는지, 대대적인 성과급 잔치를 벌였다네요.”
“뭐, 그룹 내에 큰 경사가 있었나 보군요.”
···그 가문도 참, 푼수떼기들이 따로 없군.
곧 알려질 수밖에 없는 일이라 해도 그렇지.
아무튼 그다지 좋은 소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연방의 여타 명사들처럼 명예나 부귀영화를 바라는 것도 아닌데, 발할라 시티 전체에 영향력을 미치는 아카데미 교수들의 입방아에 올라서 좋을 게 없다.
괜히 일레힌 포이체카의 기적같은 회복과 엮여서 언론이라도 타는 날에는, 원하지도 않던 명성과 함께 귀찮고 더러운 시선들이 들러붙을 게 분명했다.
“그래도 너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그러나 카산드라 교수는 사정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얼굴로 가볍게 후후- 웃었다.
“시립 아카데미의 교수라면 사회적으로도 큰 인정을 받는, 아주 명예로운 자리거든요. 입이 가벼운 집단이라고 소문이라도 난다면 일신상 좋을 게 없겠죠? 생도들 보기가 부끄러울 거에요. 그러니 이 비밀은 교수들 선에서 잘 간직하고 있을게요.”
저 말을 곧이 곧대로 믿지는 않는다.
둘 이상이 아는 비밀은 언젠가 드러나기 마련이라.
그래도 교수직에 걸린 명예와 일신상의 체면을 운운하니, 그래도 이른 시일 내에 퍼져나갈 일은 없겠지. 해봐야 루벤카 근처와 아카데미의 윗선에서 나도는 정도.
그동안 이 거대한 발할라 시티에서는 언제든 더 큰 이슈가 생겨나줄 테니 괜찮을 것이다.
“다들 서있지 말고 앉도록 해요.”
드륵.
아힘사와 레나, 루벤카는 일단 카산드라 교수가 권유한 대로 길다란 식탁에 앉았다.
규모있는 연회홀에서나 볼법한 길고 화려한 식탁은 상석이 비워진 채 양쪽으로 마주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카산드라 교수의 목전에 앉은 나는, 교수의 시선을 견뎌내고 있다. 마치 예술품을 품평하는 듯한 눈빛에 지우지 못한 호기심에 담겨 있었다.
“화제의 인물인 레반을 내가 가장 먼저 볼 수 있게되어 행운이라고 생각한답니다. 이 기회를 만들어준 루벤카에게도 고마워 해야겠네요.”
카산드라 교수가 희미하게 웃었다.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그 말이 끝나자, 집사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카산드라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마침 잘 됐네요. 우리 간단하게 먹으면서 얘기를 나눠볼까요?”
“예, 식기를 추가로 준비하겠습니다.”
이윽고, 입맛이 돋는 음식의 향이 저택을 메웠다.
중년의 집사와 메이드들이 잘 구운 스테이크와 샐러드, 와인등을 가져와 절제된 움직임으로 내려놓고는 고급스러운 식기를 주르륵 깔았다.
나는 그렇게 식기가 세팅되는 와중에, 교수를 훑어보고 있었다.
경험상 완벽주의 혹은 미(美)의 가치에 유난히 집착하는 부호들은 대다수가 종잡기가 힘들고 어디로 튈 지 모른다는 단점이 있었다.
장점은 자신의 가치에 부합하는 것을 보면 사족을 못쓴다는 것 정도.
음식과 식기들이 화려한 식탁에 가득 깔리자, 카산드라 교수는 먼저 아힘사를 항해 뇌쇄적인 눈빛을 던졌다. 그것은 훌륭한 예술품에 매료된 눈이었다.
“······7레벨 마법사의 마나 흐름마저 역류시켜버리는 방해 역장은 흔치 않을 거랍니다. 그것도 저 작은 몸 속에 집어넣으려면 극도로 소형화를 시켜야 하는데······그러러면 자금이 천문학적으로 들기에 부유하고 여유롭던 먼 과거에나 시도해볼 법한 방식이죠.”
역시 알고 있는 지식이 많다. 아카데미 교수라 그런가.
하기야 아힘사가 방해 역장을 그리 대놓고 펼쳤으니, 코앞에서 보고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것도 이상하겠지. 다행히도 적대적인 감정은 전혀 없어 보인다.
슥.
카산드라 교수는 나이프를 집어들고는 말했다.
“앞으로 나이가 많은 마법사 앞에서 방해 역방을 사용하는 것은 자제하는 게 좋겠어요. 분명 정체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거랍니다? 나는 역사적인 골동품이 망가지는 걸 절대 원치 않아요. 무슨 말인지 알아 들었나요?”
번쩍-
샹들리에의 빛을 반사하는 은색 나이프의 면.
어쩐지 아힘사를 나보다 더 위하는 것 같기도 해서, 교수의 기세에 순응하며 적당히 알았노라 답했다.
“예, 노력해보겠습니다.”
“좋아요.”
대답에 흡족해진 얼굴의 카산드라 교수는 나이프로 눈 앞의 스테이크를 조심스레 썰어 입에 넣었다. 그녀는 그러다 다시금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럼 이제 다른 얘기를 해볼까요? 현재 잘나가는 마법사인 ‘레반’ 은 고작 1년 전만 해도 마법계 오너 일가의 하인 출신이었다죠.”
“······.”
어이가 없군.
시작부터 관자놀이가 지끈거려 찢어질 듯했다.
나는 집어든 식기를 탁, 내려놓고 곧장 되물었다.
“죄송하지만, 그건 또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글쎄요. 기억이 잘 안나네요.”
교수는 모르는 척 와인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누군지는 뻔하지.
빨간 식탁보를 잡아 몰래 코피를 쓱쓱 문질러 닦는 저 빌어먹을 루벤카년말고 누가 더 있겠는가.
— 헹.
아쉽게도 루벤카는 목이 아직 붙어 있었는데, 진득한 코를 팽 풀며 나더러 어쩌라고? 라는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에 아힘사가 조금 더 힘을 내서 목을 쳤다면 좋았을 텐데. 살인을 강요할 수는 없으니 별 도리가 없군.
우두둑!
그렇기에 나는 다시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든 다음, 핏기있는 스테이크를 통째로 좍좍 난도질하며 입을 열었다.
“교수님, 혹 화령검절 청풍이라고 아십니까?”
“······!”
‘뭐 어쩌라고 개새끼야’ 에서 ‘저 개새끼 또 뭐하려고 그러는 거지?’ 라는 듯한 표정으로 바뀌는 루벤카의 표정.
자존심 하나는 끝내주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을 거다.
곧, 카산드라 교수는 과거를 추억하며 입을 열었다.
“화령검절은 모르겠지만 ‘청풍’ 이라는 이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죠. 여기 있는 루벤카가 아카데미의 생도이던 때, 모의 대련 상대였답니다. 저는 그때도 교수였던 만큼 직접 참관했거든요.”
와인에 취했는지, 아니면 그때의 추억에 취했는지 카산드라 교수는 잠시 눈을 감고 기억을 음미하다가 말을 덧붙였다.
“하늘의 별처럼, 아름다운 아이.”
청풍의 재능과 자질에 대한 감상이었다.
“무림계, 넓게보면 연방의 미래를 무학관의 어린 아이에게서 보았어요. 지금은 어엿한 성인이 되었겠네요.”
나는 스테이크를 계속 썰며 고기 대신 루벤카를 씹었다.
“이번에 그 청풍과 우연히 만났는데, 듣자 하니 루벤카가 너무 한심하게 약해서 그냥 져줬다고 하더군요. 그 충격적인 얘기가 설마 사실입니까?”
“······.”
그러자 카산드라가 와인잔을 내려놓더니,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짓궃은 구석이 있네요. 꼭 누구처럼.”
하지만 카산드라 옆의 루벤카는 웃지 못했다.
묻어뒀던 추억을 강제로 끄집어내져 박박 긁힌 루벤카가 눈동자에서는 시뻘건 홍염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로써 화령검절 청풍에게는 잘 된 일이다. 치졸한 이간질로 사이가 멀어지면 더 좋고 참한 신붓감을 찾아가겠지.
내가 이 정도로 속정이 깊은 사내다.
그때, 머릿속으로 루벤카의 스산한 음성이 울렸다.
— 야, 진짜 미쳤냐? 왜 여기까지 와서 이상한 얘기는 꺼내고 지랄이야. 그냥 빨리 처먹고 좀 나가라고. 나 여기서도 쫓겨나면 니가 다 책임···.
“루벤카?”
카산드라 교수의 물음에, 루벤카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답했다. 방금 전까지 스산한 전음을 보내던 때와는 딴판인 목소리로.
“아 네, 교수님. 음식이 맛있네요.”
“그렇죠?”
“너무 맛있어요.”
루벤카는 샐러드를 우걱우걱 퍼먹었다.
아카데미 교수한테는 찍 소리도 못하는군.
하기야 본가는 무너지고 약혼자와는 파혼에······발할라 시립 아카데미가 유일하게 비빌 언덕이지. 교수들은 각계각층에서 한 자리씩 해먹는 이름 높은 마법사들이고, 시립 아카데미의 학장이나 명예 학장의 경우에는 거의 마탑주와도 동등한 취급을 받을 정도니까.
루벤카가 입을 꾹 닫은 뒤로, 몇 분간의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조용한 분위기를 깨뜨린 것은, 이번에도 카산드라 교수였다.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최근 연방이 계획하는 일에 시립 아카데미도 손을 거들 예정이랍니다. 물론 가능하다면 말예요.”
“······.”
저거 연방의 영토 수복전을 말하는 듯 한데—
이쯤 되면 뭐, 사실 모르는 세력이 없는 거 아닌가?
하지만 마탑, 화산 그룹,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라는 거대 세력인지라 뭐라할 말이 없었다.
약간의 호기심이 생긴 내가 교수에게 물었다.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의 교수들과 생도들은 대외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후학 양성에만 몰두하는 기관 아닙니까?”
“마법사 양성이 본 목적이지만, 후방에서 도움 정도는 얼마든지 줄 수 있답니다. 그리고 참여의 범위가 넓게 허락된다면, 무림계의 무학관들은 물론이고 발할라 내의 다른 아카데미들마저 대거 참여할 텐데, 시립 아카데미의 체통을 지킨다며 뒷짐만 지고 있다가는······우습게 여길 이들이 꽤나 많답니다. 상징적인 사건일 테니까요.”
발할라 내의 정치적인 얘기로군.
나와 교수는 그 이후로도 약간의 얘기를 더 나눴고.
탁.
이 불편한 자리에 더 있어야 할 이유는 없기에, 나는 그만 식기를 내려놓고 일어날 채비를 했다. 레나도 봤고, 청풍이의 미래도 살렸고, 아힘사의 능력도 어느 정도는 보았으니.
“아무튼 교수님과의 식사 자리, 영광이었습니다. 실례겠지만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이만 마탑으로 돌아가야 해서요.”
내가 마탑을 운운하며 일어나자, 카산드라 교수가 또 후후 웃었다.
“아쉽네요. 저는 레반과의 대화가 한참 재미있었던걸요. 마탑에 급한 일이 있나요?”
“보아하니 쉽게 안 보내주실 것 같아서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죠?”
“아닙니까? 말이 점점 겉도는 게, 아까 전의 시종 얘기를 더 나누고 싶어하시는 듯 한데.”
나의 그 말에.
“······!”
저 옆에서 루벤카의 귀가 쫑긋거리는 게 보였다.
상식선에서 이해를 포기했다고 떠들고 다니면서도, 관심이 지대한 걸 보면 못내 실체가 궁금하긴 한 모양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맞아요.”
카산드라 교수는 세심하게 입을 닦더니 아까부터 꼭꼭 숨겨왔던 본론을 꺼내놓았다.
“간단하게 대답만 해주겠어요?”
“예, 가능하다면 하겠습니다.”
“나는 레반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인격 메모리칩이, 내가 알던 인물이 남긴 물건이 아닌가 해요.”
“······.”
“이전 세대의 칠좌(七座). 현재는 실종 상태인 체슈탈 아스파로프의 인격 메모리칩이 아닐까 해서요. 혹은 아스파로프, 그 자체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답니다.”
대뜸.
교수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발할라 시티의 현자(賢者), 체슈탈 아스파로프.
더해서, 과거의 칠좌중 한 명.
이 세계에서 쓰이는 전뇌 컨트롤 칩 기술을 한층 더 진일보시켜 토대를 닦은 역사적인 인물이자, 마법적인 소양과 지식이 대단하여 마법계에 큰 족적을 남긴 마법사다.
다만 오래 전 장벽 밖에서 실종되었고, 지금은 사실상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카산드라 교수님께서는 그분을 잘 아십니까?”
“조금요.”
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그 대단한 전설의 기억을 이어받았다면, 뭐하러 바닥에서 굴렀겠습니까. 기술과 기억, 심득뿐만 아니라 인격과 성정의 일부분도 같이 물려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방금 교수가 한 말은, 너무도 큰 비약이기에.
애당초 말이 되는가. 십이제도 아니고, 무려 칠좌의 위에 앉아있던 전설이다. 그런 자가 남긴 인격 메모리칩을 한낱 시종이 무슨 수로 얻을 수 있겠는가.
“확실히 아닙니다.”
내가 손까지 저으며 부정하자, 카산드라 교수가 아힘사를 지그시 바라봤다.
“자그마치 백 년은 된 골동품을 더욱 강하게 개조하셨네요. 그것도 1년 전만 해도 시종이었던 분이 말이죠. 우연이 너무 많이 반복되면 필연 아닐까 싶어요.”
“교수님께서는 과한 오해를 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레반이 조금 해명해줄 수 있겠어요? 나는 식사자리에서 무언가를 꼬치꼬치 캐묻는, 격 떨어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답니다.”
“······.”
허나 설명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하필 아힘사까지 곁에 둔 통에, 애초에도 하던 의심이 이 자리에서 더욱 짙어져 확신처럼 변한 듯싶었다. 연방에서 앙굴리마라를 섹스토이로 개조한다음 원 제작자의 업그레이드까지 거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죽어가는 마탑주를 뚝딱 고쳐 놓았으며, 무공도 쓰고 마법도 쓰는 이상한 놈.
그게 지금 내 포지션이다.
내가 입을 닫자, 카산드라 교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스파로프의 열렬한 팬이었답니다. 강하고, 빛났으며, 아름다웠거든요. 그리고 그는 누구보다 치밀하고 연기와 발뺌에도 능통한 인물이었답니다.”
“교수님, 아쉽게도 저는 무공에도 조예가 깊습니다.”
“그래서 더 의심이 깊어지고 있답니다. 체슈탈 아스파로프는 무림계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던 인물이라서요. 그가 실종된 뒤로, 세월이 꽤 많이 지났어요.”
“······.”
아주 가지가지 했군.
하필 시종으로 태어난 덕에 끝까지 속이 썩는다.
시작부터 메가콥의 오너 일가였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인격 메모리칩의 존재를 확신하고 있는 기색이다.
여기서 아니라고 부정해봤자 믿을 기색도 아니고, 나중에 해명하기가 더 복잡해 질테니······인격 메모리칩은 인정하되 다른 건 확실히 뭉개고 넘어가는 게 맞겠군.
“체슈탈 아스파로프는 아닙니다.”
“······.”
심유한 카산드라 교수의 눈빛이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나는 음악으로 마나를 연주해요. 정신적인 수양이 경지에 이르지 못한 생도들은 가끔 당황하곤 하죠.”
“?”
탁탁.
교수가 품위있게 박수를 두 번 치자, 식사를 하던 레나와 얘기를 엿듣던 루벤카의 눈이 찰나간 스르륵 감겼다.
홱!
그러나 루벤카는 즉시 머리를 떨며 퍼뜩 정신을 차렸다.
“!”
루벤카가 다시 감기던 눈을 부릅뜨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눈꺼풀이 감긴 걸 보면 분명 홀리긴 했다.
“···?”
그리고 같은 자리에 앉아있던 레나는 제대로 정신을 차리는 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당황하는 자매의 면면이 보였다.
‘클래식 음악.’
저택의 분위기와 어울려서 다들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음악에 카산드라의 마력이 섞여 들려오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카산드라가 생각하는 나를 더욱 흥미롭게 만들어버린 듯 하다.
“이번에도 또, 레반만 당하지 않았죠. 이 마법은 분명 대중에 공개된 적이 없는데. 마법적인 지식과 정신적인 수양조차 평균치를 한참 상회하네요.”
“······.”
“놀라워라.”
이제 나도 뭐 더 할 말이 없군.
나는 더 이상의 변명이 무의미하다고 느꼈다.
교수의 저 초롱초롱하고 흥미 가득한 눈을 보라.
그냥 솔직함을 뽐내는 게 차라리 더 낫겠군.
“레반, 아까부터 당해줄까 말까 속으로 고민했죠?”
이것도 맞다.
진즉에 눈치채고 어찌 할까 고민했으니.
론 카산드라, 괜히 명망높은 교수가 아니다.
“레반은 지금, 두려워하거나 위축되지 않았어요. 아마 당장 전투가 벌어져도 자신있어 할걸요?”
“일레힌 마탑의 권위를 믿고 있을 뿐입니다.”
“숨겨둔 실력을 믿고 있는 거겠죠.”
뜻과 고집을 굽힐 생각이 없어 보인다.
명예로운 아카데미 교수직이라는 명함에 갇혀,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고위급의 마법사라는 본질을 잠시 망각했는지도 모르겠군.
조로록—
이윽고, 집사가 다가와 와인을 따랐다.
카산드라는 와인잔을 가볍게 흔들며 말했다.
투명한 와인이 잔 안에서 빙빙 흔들려 파도를 만들어낸다.
“나의 의심이 불합리한가요?”
카산드라 교수같은 경우 하필 레나, 루벤카를 곁에 두고 온갖 얘기들을 전해들은 덕에 자신만의 의심을 확신 단계까지 발전시켰으니, 쉽게 거두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교수님의 의심하시는 것처럼 대단한 ‘그분’ 은 아닙니다만, 충분히 합당합니다.”
카산드라 교수는 그제야 싱그러운 웃음을 띠며 말했다.
“고마워요. 그 말이 듣고 싶었어요. 이제부터 레반은 나의 저택에 언제든 방문해도 좋고 다시는 찾아오지 않아도 좋아요. 대신, 가끔 여기서 나랑 같이 식사나 해요.”
그게 그냥 또 오라는 얘기 아닌가.
식탁에서 일어난 교수와 나는 드넓은 저택을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저택의 정원을 바라보던 카산드라 교수가 말문을 열었다.
“아스파로프의 목표가 뭐였는지 알아요?”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언데드를 멸살하고 인류의 강역을 되찾는 거였어요. 이렇게도 각박한 세상에······아름다운 이상을 가진 동화속의 용사처럼요. 훌륭하죠?”
나는 대수롭잖게 대답했고.
“헌데, 아쉽게도 실패했나 봅니다.”
카산드라 교수는 후후 웃었다.
“대신 그의 유지를 잇는 자가 또 다시 나타날 거라고 믿어요. 내가 교수직을 유지하는 이유이기도 하니까요. 또 봐요 우리.”
그것이 카산드라 교수와의 첫 만남이었다.
* * *
얼마 뒤.
나는 마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탑에서 십 여일이 쏜살같이 흘렀다.
마탑주가 말했던 보름의 기한이 눈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