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아카데미 교수 저택
#72화.
세상은 예상치 못한 ‘갑자기’의 연속이다.
갑자기 나타난 화산제일의 노괴가 칼질을 해대고.
갑자기 나타난 8위계 마법사가 운석을 떨어뜨리고.
얼굴만 반반한 놈을 죽였더니 갑자기 9레벨 인형사의 저주가 튀어나오고, 갑자기 남쪽의 어머니라는 좀비가 상위 존재로 거듭나겠답시고 개척자들을 습격해 잡아먹고, 갑자기 배가 고프고, 갑자기 나타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그리고, 이런 것도 갑자기에 포함되는 일이다.
“나랑 약혼할래? 결혼 말고 약혼.”
발할라 시티로 향하는 개인 캐리어 안은 어수선했다.
뾰족귀를 가진 누군가가 한을 마구 토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금 저 갑작스러운 약혼 신청은 엘프 마법사, 슬레모킨의 말이었는데 나는 곧장 고개를 가로로 저으며 답했다.
“아, 저는 괜찮습니다.”
그에 슬레모킨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무슨 길거리에서 전단지 돌리는 거 거절하는 것도 아니고, 멘트가 왜 그래? 누가 진짜로 약혼하자고 했어? 그냥 흉내만 내달라는 거잖아 흉내만.”
“전 정말 괜찮아서 그렇습니다.”
“갑자기 말은 왜 높여? 거리감 느껴져.”
“이제부터 갑자기 높여보려고 합니다.”
“전처럼 편하게 해. 괜히 불편하잖아.”
“알았다.”
“되게 편해졌네. 이제 내가 편한가 봐?”
— 크르륵.
머리가 지끈거려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바로 앞으로는 눈을 꼭 감은 아힘사가 보였다.
회중시계만 내내 쳐다보던 아힘사는 캐리어에 오르자 미동도 없는 ‘비행기 모드’에 진입했다. 쓸데없이 소모되는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효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덕분에 이 캐리어 안에서 슬레모킨과 말이 통하는 상대가 나 말고는 없기에, 그녀의 신세 한탄에 맞장구를 쳐주는 상대로 낙점되었다.
그래서 무려 반나절 가까운 시간동안을 이러고 있었더니, 이제는 속이 메스껍다. 석탄에 태운 빵과 과일잼이 그리워진다.
“들어봐. 볼 때마다 혼인을 대체 언제 하냬! 언제까지 홀몸으로 나돌거냐고 잔소리만 엄청 듣고 왔거든? 더 이상 못 참겠어. 거짓으로 약혼이라도 해야 조금 잠잠해질 것 같은데, 네가 좀 도와줘.”
“아니, 그걸 왜—”
“내가 서른 살짜리 애도 아니고!”
싫다는 말을 내뱉기도 전에, 옆자리에 붙어 앉은 슬레모킨은 길길이 날뛰며 말을 이었다. 그녀는 남쪽의 어머니에게 마공학 샷건을 갈길 때보다 지금이 더 흥분한 상태였다.
“응? 도대체 왜 다들 내 인생에 관여하지 못해서 안달이야? 발할라 마탑까지 도망 왔는데도 아직 포기할 마음이 없나봐. 집이랑 평생 연을 끊고 살아야 하나.”
내가 알 헤임달 남부 장벽 근처의 숙소에서 휴식을 취한뒤 화산의 젊은 검수 둘과 두터운 교분을 나누고, 칼드락 대장간에 들러 아힘사까지 데려오는 동안 슬레모킨은 그녀의 부모와 대면을 하고 온 듯했다.
묘왕 우륵바갈이 그녀를 단박에 알아보고 토퀸타이아의 딸인 슬레모킨이라 부른 만큼, 슬레모킨의 부모는 엘 헤임달의 거물 엘프임이 확실하다.
그런데 그 엘프 거물이 꽤나 꼰대인 모양.
그녀에게 약혼이니 혼인이니 하며 압박을 넣는 듯하다.
엘프들은 인간보다 수명이 길고 부족 중심의 사회이니, 늙을수록 뇌가 굳어 보수적으로 변해가기 마련이지.
슬레모킨은 처음 보는 표정으로 열변을 토했다.
“벌써 60년째 이런 잔소리를 듣고 있어. 내 기분이 어떨 것 같아?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가보니까 자기들끼리 정혼자까지 멋대로 정해 놓았더라. 인간이 취향이라고 말해도 씨알도 안먹혀.”
60년이면 솔직히 그쪽도 많이 참기는 했군.
아무튼 나는 슬레모킨의 징징거림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대강 계산을 마쳤다.
이 엘프 마법사는 적어도 백년은 살았을 것이다.
음, 백 년쯤 살았으면 다르간트더러 아저씨라고 불러도 이상한 점이 없지. 일레힌 마탑의 2인자 슬레모킨은 일견 젊어 보이는 외형과 달리 살만치 산 엘프였던 것이다.
그리고 독신의 몸으로 세월의 풍파를 오래도 견딘 그녀는, 지금은 부모로부터 오는 풍파와 압박을 추가로 견뎌내고 있었다.
그간 슬레모킨과 있었던 일을 떠올려보면······.
묘왕이 그녀에게 충고하길, 몸가짐을 바로 하라.
다르간트가 나를 일컬어 여기 두 번째로 데려온 인간.
그녀가 첫 번째로 대장간에 데려온 이는 다르간트의 발언과 슬레모킨의 반응으로 보았을 때 유크 루베르겐 집행관이 확실하다.
헌데 슬레모킨은 어째서인지 루베르겐의 이름만 나와도 경기를 일으킬 만큼 싫어한다. 일레힌 포이체카가 주입한 청록빛의 마력이 작용하여 구성원간에는 자연스레 호감을 느끼게 만드는데도.
알 헤임달의 4대 마공학 대장간 주인, 칼드락과 다르간트는 엘프 마법사 슬레모킨에게 병기를 만들어줄 정도로 막역한 사이고 로키시티 상공 근처에서 뷔에탕의 꼭두각시들을 박살냈던 루베르겐 집행관의 그 무기 역시 보통 병기가 아니다. 필시 수준 높은 재료와 더불어 명인 수준의 마공학 기술이 접목되어 있겠지.
그런 정황들을 간단히 종합해 보았을 때.
‘유크 루베르겐 집행관은 슬레모킨과 적어도 연인 사이였던 거로군.’
그게 위장이었든 진실이었든 말이다.
지금은 무슨 일이 생겨 틀어진 거겠지.
“막내, 여기서 뛰어내리고 싶어?”
내가 그리 생각을 정리하는 도중에, 슬레모킨이 미간을 와락 좁히더니 빤히 노려봤다.
“그런 거 아니야.”
“허허.”
“늙은이처럼 이상하게 웃지 말고, 언제든 뛰어내리고 싶으면 말해.”
잔뜩 성이 났는지 하늘로 치켜 올라간 뾰족귀.
내 생각을 어떻게 읽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초고급 캐리어 밑으로 까마득한 구름이 보인다.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은 없기에 고개를 저었다.
설마하니 루베르겐 집행관의 다음 타겟이 나는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며.
“그런데······묘왕님이 우리 막내를 괜찮게 보셨다더라. 묘인들이 말을 잘 해줬나봐. 시간나면 밥 한 번 먹게 데리고 오래. 다음에 같이 가볼래?”
“······.”
“왜 그래. 싫어?”
“······.”
“싫냐니까.”
* * *
기에에엑!
발할라에 처음 당도했던 그때처럼, 장벽 밑으로 몰린 좀비들을 일순간에 몰살하며 7레벨의 마법사들이 나타났다.
— 통과하시면 됩니다.
변수는 없었다.
우리는 무사히 발할라 스테이션에 도착해 내렸다.
슬레모킨은 발할라 스테이션의 검문을 통과하자마자, 칼드락 스미스에서 제작한 마공학 병사들의 장비를 시험해봐야겠다며 일레힌 마탑으로 먼저 올라갔다.
“나는 가볼게. 발할라 시티 구경이나 하고 와.”
가짜 약혼을 거절한 탓인지 이번에는 나를 태워주지 않아, 졸지에 나는 아힘사와 발할라 산맥 밑둥에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레나라도 보고 올라가야겠군.”
그러던 나는 문득, 레나가 잘살고 있나 궁금해졌다. 얼굴을 보지 못한지 고작 나흘밖에 지나지 않았으나 어쩐지 마음이 그러했다.
또한, 다르간트가 무려 사흘간 심혈을 기울여가며 재창조한 아힘사의 능력을 확인해볼 수 있는 기회다.
본래도 7레벨급의 전쟁병기.
그런데 오랜 세월 숙성된 장인의 미련이 녹아들었다.
미련과 여한을 모두 덜어낼 정도라고하니 보통은 아닐 테지.
아힘사의 칼날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욱 예리하게 벼려졌다. 단일 전투를 상정하여 탄생한 병기는 아니라지만, 그래도 일대일 전투에서 어디까지 보여줄 수 있는지는 알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걸 확인해보겠답시고 얼마 뒤면 전장에서 굴러야 할 마탑의 마법사들을 상대로 시험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레나 옆에 붙어있을, 루벤카가 제격이다.’
마침 할 일도 딱히 없으며 크게 다쳐도 상관없고 더럽게 강하기만한, 완숙한 7레벨의 상위마법사를 상대로 어느 정도의 성능을 낼 수 있을지가 참으로 궁금했다. 화령검절 청풍의 밝은 미래를 위해 실수로 죽여버리면 더 좋고.
나는 아힘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왜 그렇게 물끄러미 쳐다봅니까? 레반.”
“별것 아니다.”
아힘사 자신도 얼마나 바뀌었는지 파악하지 못한다.
제작자인 다르간트가 사흘간의 밤낮없는 작업을 마치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대장간의 주인인 칼드락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 보는데, 그걸 감히 깨워서 꼬치꼬치 캐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무책임하게 입을 열었다.
“뭐, 루벤카한테 가서 한번 확인해보면 알겠지.”
그렇게 명검 한 자루를 순식간에 가루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업그레이드된 아힘사와 나는, 발할라에 도착하자마자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가 있는 소도시 ‘레베라크’ 로 행선지를 정했다.
* * *
해발고도 5천 미터.
발할라 산맥의 중턱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소도시 레베라크는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의 존재 하나만으로 돌아가는 동네다.
쓰레기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돈된 길거리가 보였다.
생도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파는 잡화점, 외출 나온 생도들을 위한 식당들. 교육 분위기에 방해되지 않도록 사창가같은 유흥거리는 허락하지 않기에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아카데미의 교수들이나 아카데미에서 일하는 자들을 위해 조그마한 술집만 몇 개가 있을 뿐.
유명한 마법사들이 후학을 키우는 동네 답다.
마탑은 완성된 마법사들이 오는 곳이라면, 아카데미는 재능있는 유망주들을 깎아내고 다듬어 세상에 배출하는 곳이다. 그렇기에 온갖 재능있는 마법사들이 이곳으로 몰려든다.
게다가 발할라 시티 차원에서 지원하고 밀어주는 교육 사업인지라 대기업의 자제들까지도 많이들 입학한다고 들었다. 혹여 재능이 없더라도 어릴적 인맥을 쌓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던가.
— 확인되지 않은 차량은 진입할 수 없습니다.
레베라크 소도시의 길거리에서는 팔에 완장을 찬 아카데미 경비병들이 돌아다니며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모습이 보인다면 다같이 달려들어 몰매를 놓을 듯했다.
그들은 손에 기다란 창자루를 들고서, 가끔가다 창끝으로 땅바닥을 퉁퉁 때리며 외부인들에게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잠시만요. 어디서 오셨습니까?”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들의 레이더망에 나와 아힘사가 정확히 걸렸다. 불시에 하는 검문인 듯했다.
경비병들은 각자 풍기는 기운이 나름 강했다. 그들은 우리를 본 뒤부터 쭈욱 경계하고 있었던 듯했다.
나는 입가에 옅은 웃음을 띠며 말했다.
“마법사, 반 루벤카를 찾아왔습니다.”
“반 루벤카를 어째서 찾는 겁니까?”
“친합니다.”
“흥, 거짓말이군.”
무슨 말 같잖은 개소리를 하냐는 듯한 경비원의 표정에 내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게 아닌가.
“반 루벤카 생도와 친하다고? 내가 레베라크에서 경비병을 몇 년이나 했는데 그런 사람은 생전 본 적이 없다! 당장 정체를 밝혀라—!!”
아.
그럴 만도 하지. 루벤카 그년이라면 가능하다.
한편으로는 대단했다. 그간 얼마나 개판을 쳐뒀기에, 그저 찾기만 했는데도 경비병이 저리 의심하며 수상한 놈 취급을 하겠는가.
하지만 다행히도 그 길로 쫓겨나거나 유치장에 감금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엇?”
내가 일레힌 포이체카의 청록빛 마력을 슬쩍 꺼내어 보여주자, 창을 높이 든 경비병은 곧장 의심을 거두고 비켜섰다.
“여섯 번째 봉우리,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에서 오셨군요! 실례를 용서하십시오.”
발할라에 도착한 뒤 계속 마탑 안에서만 있어서 몰랐는데, 다른 마탑들에 비해 세력이 약한 여섯 번째 마탑임에도 발할라 마법계에서의 그 지위는 상상 이상이었다. 경비병의 태도를 보고선 새삼스레 실감이 났다.
“하하, 시립 아카데미의 교수진에는 마탑에서도 활동하는 마법사분들이 두루 포진되어 있답니다. 여러 이유때문에 다들 어느 마탑인지는 절대 비밀에 부치시지만요.”
창잡이 경비병은 생각보다 친절했다.
오해가 풀리자, 우리는 호의가 깃든 경비병의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반 루벤카 양을 찾는 자들은 대부분 좋지 못한 이유로 찾는 이들입니다. 암살자거나, 자객이거나, 살수거나, 히트맨, 칼 든 빚쟁이죠. 때문에 저희도 그 이름이 나오면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지라.”
“괜찮습니다. 그 심정, 저도 십분 이해합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래도 이전에는 심각할 정도였는데, 요즘은 이상하게 루벤카 양을 찾는 이가 없었어요. 문제가 잘 해결된 것이겠지요.”
“······.”
거의 이 소도시 전체에 민폐를 끼쳐왔던 거군.
하기야 당가의 감시자들을 몇 명이나 죽였다 했으니.
어째서 아카데미의 교수들과 학장의 비호를 받는 루벤카가, 여기에 숨어 살다가 일레힌 마탑으로 도망치듯 올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재능이 출중하든 대단한 인재든 싫어하는 인간들이 반드시 생길 수밖에.
“안내 고맙습니다.”
반 루벤카는 어떤 아카데미 교수의 저택에서 방을 하나 얻어 머물고 있다고 했다.
저택은 반 바이오 회장의 저택보다도 규모가 컸다.
저 뾰족하고 높게 솟아있는 저택의 주탑은, 이 도시 내에서의 부유함과 권위를 나타낸다. 주탑의 높이가 상당히 높았다. 그리고 안쪽으로는 큰 정원이 딸려있는 걸 보니, 확실히 입지가 대단한 교수의 사택인 듯했다.
—딩!
내가 정문의 초인종을 누르자, 누군가 안쪽에서 절도있는 걸음걸이로 걸어나왔다. 단정한 복장에 하얀 콧수염을 기른 전형적인 집사의 외형이었다.
“이 저택에는 무슨 연유로 방문하셨습니까?”
집사로 보이는 이가 곧바로 방문 이유와 이름을 물었다.
반 루벤카와 레나를 찾아왔노라 말하니, 그는 잠시 기다려달라며 말하고는 다시 저택으로 들어갔다. 몇 분이 지나자 집사가 다시 나와 조심히 문을 열었다.
“이쪽으로 들어오시면 됩니다.”
나는 집사를 따라 저택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택 내부는 전체적으로 상류층의 분위기가 났다. 귀족같다고 할까.
저택 주인의 취향이 백분 반영되었는지, 반들한 유리창이든 천장의 샹들리에든 모두 옛되고 고급스러웠다. 훌륭한 질감의 카펫과 깨끗한 유리 진열장에 전시된 골동품 유물들이 눈에 들어왔고, 가치있는 미술품들이 양쪽 벽면을 멋들어지게 장식하고 있었다.
저택의 주인은 예술과 미술품에 관심이 많은 부호로군.
그나저나 집사가 미리 언질을 주었는지, 레나는 저택의 입구에서 서성이던 중이었다.
“레, 레반! 아힘사도 같이 왔구나!”
곧, 나를 발견한 레나가 반가워하며 달려왔다. 레나는 자연스레 품에 안겨들었는데, 이상하게 레나를 보자마자 형용할 수 없는 안도감이 들며 마음이 편안해졌다.
“······.”
아무래도 캐리어 안에서 슬레모킨과 나눈 대화가 어지간히 버거웠던 모양이다.
“레나. 그런데 그 옷, 바깥에서도 많이 본 것 같은데.”
“이 옷?”
레나가 입고 있는 옷이 특이했는데, 시립 아카데미의 생도들이 입는 의복과 같은 것을 알고는 꽤나 놀랐다. 레나는 며칠 사이 시립 아카데미 소속의 학생이 되어 있었다.
“나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에서 마법 교육을 받게 됐어. 언니가 따로 과외를 해주기도 하고······다행히 사람들이 재능이 있는 편이래. 다들 좋아해주고 있어.”
아마 입학에 관해서는 루벤카와 그녀에게 호의적인 교수들의 입김이 작용했겠지. 과거 시립 아카데미 전체 수석이었으니, 당가라는 위험성이 사라진 이상 아끼는 혈육을 아카데미에 밀어 넣는 것쯤이야 얼마든 가능했을 것이다.
그때, 레나가 자랑할게 있다는 듯 나를 이끌었다.
“아 그리고! 레반한테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잠시 뒤.
레나가 머무는 방에 이르자, 어떤 화면들이 보였다. 이리저리 요동치는 차트들과 그 옆을 장식하고 있는 창들.
“주식?”
“레반, 한 번 얼마인지 확인해볼래?”
당당한 레나의 말에 화면으로 고개를 돌리자.
“······?”
정크타운에서 고작 몇만 크레딧으로 시작했던 예수금이, 어느새 백 만 크레딧을 훌쩍 넘어 미친듯이 불어있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연방증권 트레이딩 툴에 찍혀있는 금액은 분명 그랬다.
···그렇다면 수익률이 대체 몇 퍼센트란 말인가.
일레힌 마탑을 나와서 고작 며칠이나 됐다고?
약간은 부끄러워하며, 생글생글 웃는 레나를 보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든 저 정도라면 앞으로 연방이 망하지 않는 한, 먹고살 걱정은 없겠다고.
그렇게 내가 레나와 그간의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고 있던 도중이었다. 어디엔가 다녀온 루벤카년이 난입해 말을 가로챘다.
“뭐야? 너 왜 왔어 또?”
메리와 같이 도착한 반 루벤카는 아니나 다를까 인상부터 팍 찌푸렸다. 루벤카의 고운 눈가에 주름이 자글하게 생기며 불편한 심경을 대변했다.
내가 친히 도발적인 언사를 할 필요도 없었다.
“영영 보지 말고 각자 알아서 살자니까 여기까지는 왜 찾아왔냐? 붕어도 아니고 그새 까먹었을 리는 없고—”
루벤카는 당연하단 듯 마력을 끌어올리려했으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아힘사의 전신에서 뿜어진 방해 역장이 저택을 단숨에 잠식하며 루벤카의 마력을 흩어버렸다.
누가 말리기도 전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곧, 루벤카의 앞에 선 아힘사가 입을 열었다.
“위험한 마력이 느껴집니다. 조심하십시오.”
“······.”
루벤카조차 말문이 막히고 당황을 금치못할 정도의 방해 역장.
“······뭐야 이 역장은. 당장 안 풀어?”
물론, 루벤카는 아는 교수의 저택이니만큼 전력을 다하지 않았고 아힘사도 주무기인 블레이드를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방금 둘의 움직임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체감할 수 있었다.
방금 아힘사가 마음을 먹었다면, 루벤카의 목은 반드시 떨어졌으리라.
“풀어.”
“싫습니다.”
스아아아.
평소처럼 얼굴에 악귀가 든 루벤카는 저택 안의 마나를 죄다 빨아들이며 마력을 점점더 강하게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아힘사의 방해 역장이 일으키는 파장도 점점 강해졌다.
그렇게, 방해 역장과 루벤카가 일으킨 마력이 엉켜 저택 내부를 가득 메운 시점이었다.
“여긴 휴식하고 쉬는 곳이지, 싸우는 곳이 아니랍니다.”
어디선가 들려온 우아한 말투에 그 살기등등한 기운들이 일시에 사라지며, 계단 위로 하나의 인영이 나타났다.
연회장에서나 입을 법한 긴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인이었는데, 행색으로 보아 이 저택의 주인인 시립 아카데미의 교수가 확실했다.
빨간 코피를 줄줄 흘리는 루벤카가 분노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카산드라 교수님, 민폐 끼쳐서 죄송해요. 제가 금방 내보낼게요.”
루벤카는 아힘사의 방해 역장에 대응하느라 마나 회로를 꽤 혹사한 듯했다. 흐르는 코피를 닦는 그 모습이 퍽 우스웠다.
하지만.
“정말 아름답네요.”
“······.”
어느새 교수는 계단을 날듯이 내려와 아힘사의 앞에 자리했다. 교수는 아힘사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마치 미술품을 감상하듯 연신 흠···을 연발하더니, 우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가 흡족한 표정이었다.
가치 있는 예술품이 아니라, 그저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건가.
루벤카를 여기에 머무르게 해주는 이유도 알겠군.
들어본 적이 있다. 시립 아카데미의 ‘론 카산드라’
아카데미 교수중에서도 꽤 이름있는 축에 속한다.
드르륵-
곧이어, 우리의 중간에 길다란 식탁이 생겨났다.
카산드라 교수는 이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시립 아카데미 교수, 카산드라입니다.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에서 나온 레반이죠?”
“교수님께서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일레힌 가의 마력은 남다르니까요.”
이윽고.
카산드라 교수가 교양있게 손짓하며 자리에 앉았다. 교수는 웃음으로 딱딱한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입을 열었다.
“마침 궁금한 게 있었는데 정말 잘됐네요. 루벤카를 통해서 얘기 많이 들었어요. 요즘 시립 아카데미 교수들 사이에서, 레반이라는 인물의 존재가 단연 화제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