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퓨전펑크의 전생자-68화 (68/157)

#68화. 개척도시 롬진 3(수정)

#68화.

쐐애애액—

지면으로부터 솟구쳐 비공정을 덮쳐오는 괴이한 촉수들.

혈액처럼 붉은빛의 기이한 촉수들이 하늘에 펼쳐진다.

검병을 강하게 쥔 레반이 그 하늘을 바라보고 섰다.

‘10개인가.’

바다를 건너다가 크라켄을 만나면 이런 기분일까.

세 번째 비공정마냥 가라앉은 난파선이 되기 싫다면 저 촉수들을 어떻게든 잘라내야 할 듯싶다.

샷건을 들어올린 엘프 마법사는 7레벨의 묘인들에게 말했다.

“내가 최대한 끊어 볼테니까, 너희는 들러붙으면 그때 끊어.”

콰아앙—

묘인들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펌프액션 샷건의 총열이 마나 불꽃을 토해낸다. 아직 비공정에 채 닿지도 못한 촉수 하나가 쾅 하고 폭발하며 힘을 잃고 떨어졌다.

그리고 철컥대며 이어지는 연발 사격.

콰아앙— 콰아앙—콰아앙—

엘프 마법사는 혼자서 무려 네 개의 촉수를 비공정에 이르기도 전에 끊어냈다. 잠시 뒤, 남은 여섯 개의 기다란 촉수가 비공정에 도착하여 강하게 휘감았다.

쿠르르륵.

거대 두족류의 다리같은 촉수들이 돛대와 비공정의 갑판을 단단히 틀어쥐고 끌어 내리려 한다. 이제 묘인들의 차례. 그들은 각자 가까운 촉수를 붙잡고 끊어낼 준비를 했다. 7레벨의 기운이 실린 강력한 발차기에 파공성이 크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곧바로 문제가 생겼다.

“아, 안 잘리네요! 어쩌지!”

그 촉수는 강철보다도 단단한 데다 심히 유연한 탓에, 하필 타격이 먹히지 않았다. 7레벨 경지의 묘인들이 힘을 실어 연신 공격했음에도 촉수는 흔들리고 구부러질지언정 끊어지지 않았다.

청록빛 괴물도 비공정에서 뛰쳐나가 촉수를 붙잡고 와작와작 씹어댔으나, 대체 얼마나 질긴건지 그 날카로운 이빨마저 잘 박히지 않았다. 촉수는 좀비의 강대한 요기로 보호받고 있었다.

- 그어억!

심지어 지면과 이어진 촉수를 타고 지상에 있던 좀비들이 비공정을 향해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치 갈고리를 던지고 백병전을 벌이려는 해적들처럼.

— 놈들이 올라오네요! 작살을 쏴요!

— 달궈진 석탄을 꺼내와서 부어요!

촉수를 자르지 못하는 5레벨 내외의 묘인들은 우르르 갑판 가장자리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촉수에 달라붙어 올라오는 좀비들을 떼어냈다.

“쟤들은 자르기 힘들어 보이네. 너는 어때?”

“······.”

눈을 흘긴 엘프 마법사가 샷건을 장전하며 마나 회로를 재정비하고 있을 때, 광선을 뽑은 레반이 그 촉수 앞에 서서 기수식을 취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크게 고함을 질렀다.

— 하늘돛을 전부 올리고 최대 출력으로요! 비축해둔 고급 압축탄을 연료실에 가득 넣어 주세요! 한시라도 빨리 탈출해야 해!

아까 레반이 구해주었던 6레벨의 묘인이었다.

철도에 이어 하늘길마저 막히면 답이 없다 생각했는지, 묘인들은 필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움직였다. 그들은 개척가들답게 능숙히 비공정을 조작하고 기어 올라오는 좀비를 떨어뜨렸다.

뚜두두둑···.

이내 고급 압축탄이라는 연료가 들어갔는지, 비공정의 증기기관이 굉음을 내며 증기를 더욱 세차게 토해냈다. 접혀있던 모든 하늘 돛들이 일시에 펼쳐지며 이전보다 더한 출력으로 촉수의 손아귀를 벗어나려 한다. 촉수의 장력과 힘대결에 들어간 비공정의 몸체 어딘가에선 짓이겨지는 소음이 크게 들렸다.

그 덕분에 비공정을 휘어감고 있던 촉수가 아주 팽팽해졌다. 말하자면 딱 깔끔하게 자르기 좋도록 세팅이 된 것이다.

때가 오자, 레반은 그간 배분해두었던 공력을 적당히 끌어올려 검에 주입했다. 광선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빛무리가 어두운 주변을 밝혔다.

레반은 비교적 전투의 후위에서 활약했기에, 다른 이들보다 힘을 많이 아낄 수 있었다. 광채가 검을 순식간에 휘감으며, 비공정의 돛대를 잡아 구부러뜨리려는 촉수 두 개를 단박에 잘라냈다.

서거걱-

7레벨 묘인들의 강력한 각법에도 끊어지지 않던 촉수들이 레반의 검날에 잘려나갔고, 그 촉수를 붙잡고 올라오던 좀비들은 먼 지상으로 떨어졌다.

곧, 텅텅 소리가 나며 비공정의 고도가 조금 높아졌다. 잡고 있던 촉수가 두 개가 잘려 약간의 여유가 생긴 것이다.

그걸 본 묘인들이 신을 내며 갑판을 뛰어다녔다.

이제 비공정을 휘감은 놈의 촉수는 네 개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모두 끊어내고 벗어날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레반은 곧장 검을 내리고 뒤로 물러섰다.

그의 인상이 팍 찌푸려진 것은, 다음 일이었다.

엘프 마법사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많이 잘라서 조금 화났나?”

철퍽. 철퍽.

정말 화라도 난 건지 다른 비공정으로도 쏘아지던 촉수들이 궤적을 틀더니, 이쪽 비공정을 향해 스멀스멀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더해서 묘인의 머리를 꿰뚫었던, 대나무 굵기의 하얀 점액질까지 우리 비공정에 철퍽대며 들러붙었다.

붉고 하얀 밧줄들이 비공정에 매달려있는 모양새였다. 재차 샷건의 장전을 끝낸 엘프 마법사가 레반의 옆으로 걸어오며 입을 열었다.

“붉은색 촉수는 놈이 만들어낸 살덩이에 불과하고, 저 굵고 하얀 점액질이 진짜 놈의 육체 일부야.”

매번 머금고 있던 웃음기는 사라져 있었다.

그 말과 함께 엘프 마법사의 펌프액션 샷건이 불을 뿜었지만, 대나무 굵기의 하얀 점액질에는 상처만 날 뿐 촉수처럼 끊어지지 않고 건재했다. 비공정은 허공에 박제라도 된 듯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이건 못 끊겠네. 비공정을 부수는게 아니면.”

대나무 굵기의 점액질은, 위계 높은 광역마법이 아니면 끊을 수 없다는 얘기.

그쯤에서 하늘 돛대에 서있던 레반은 밑을 바라봤다.

촉수가 연결된, 검고 넓은 지면이 꾸물꾸물 움직인다.

원형으로 꾸물대는 범위가 적어도 백 미터는 넘었다.

롬진 개척도시 앞쪽의 지면은 파문이 이는 호수처럼, 혹은 커다란 늪지대처럼 꿀렁이고 있다. 지면에 누워있던 묘인의 사체들이 그 꿀렁대는 흙바닥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들은 석탄처럼 검은 흙의 늪에서 다시 떠오르지 못했다.

그리고 그 꿀렁대는 지면의 중심에, 무언가 새하얀 물체가 지면 위로 머리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그것은 하얀 실타래에 쌓여있는 고치였다.

마치 누에가 실을 토해내 만든 고치처럼.

징그럽고 역한 점액질과 실타래가 그 고치를 하얗게 뒤덮고 있었으며 간간이 얇은 구멍이 나있었는데, 그 사이로 빠져나온 것들이 바로 비공정을 공격하는 촉수와 점액질이었다.

“변태는 하지 못했지만, 준비는 다 마친 상태네.”

“······.”

엘프 마법사가 지금의 사태에서 도출해낸 결론이었다. 레반이 그 하얀 고치를 주시하고 있자니, 그녀가 계속 말을 이었다.

“변태에 필요한 양분을 얻기 위해서 습격한 것 같아. 변태 과정에 들어가면 긴 시간 모습을 감출 테니, 남쪽 개척지와 관계가 틀어져도 상관없다는 거겠지.”

상위 존재로의 변태가 얼마 남지 않은 남쪽의 어머니는 개척자들과의 관계가 끊어짐을 감수하고서라도 개척자들을 잡아먹으러 왔다.

전면전을 벌이러 온 것이 아니라, 변태에 필요한 양분을 채우는게 목표. 때문에 자신의 기운을 모두 내보이지 않고 촉수만을 보내어 사냥을 하는 중이다.

그리고 놈이 원하는 영양분은, 적당히 강한 기운을 가진 인간이나 수인들이겠지.

엘프 마법사의 말에, 레반이 저 멀리 탈출에 성공한 비공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쪽 비공정을 바로 포기한 걸 보면 저긴 입맛을 돋우는 강자들이 없었나 보군.”

스가각.

말을 끝낸 레반이 돌연 광선을 휘둘렀다. 일직선의 광채가 비공정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촉수 두 개를 단번에 베어버린다. 그는 내친김에 대나무 굵기의 점액질에도 검을 휘둘러 보았다.

하지만 역시나였다.

상처 정도는 얼마든 낼 수 있었으나 저것을 베어내기는 무리였다. 레반의 눈에 엘프 마법사도 일찌감치 그것을 잘라낼 마음을 접은듯 보였다. 촉수를 다 베어내더라도 저 점액질을 떼낼 방법이 마땅치 않다.

고도가 서서히 낮아지고 있다.

결국, 이 비공정은 얼마 가지 않아 지상으로 추락할 것이다.

“풋.”

“?”

그때, 엘프 마법사가 갑자기 코웃음을 쳤다.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엘프 마법사의 입에서 놀라운 얘기가 흘러나왔다.

“나는 보내줄 테니까 그냥 가래. 저 웃긴 언데드가.”

“······.”

저 빌어먹을 고치에 쌓여있는 남쪽의 어머니라는 좀비는, 여기서 가장 강한 엘프 마법사 하나만을 콕 집어 협상을 시도해온 것이다.

레반이 관자놀이를 벅벅 긁으며 물었다.

“그런데, 나는 안 보내준다던가.”

“아쉽게도 그런 말은 없던걸.”

“촉수를 더 잘랐어야 했군.”

“아무튼 변태 전에 양분을 보충하러 온 게 확실한 것 같네? 끼어든 내가 조금 성가신 거고.”

레반은 비공정의 갑판을 둘러보았다.

뒷다리로 다급하게 두두두 뛰어다니는 묘인들.

저 엘프 마법사가 빠지면 이들은 반드시 죽는다.

하지만 묘인들에겐 아주 다행히도, 그녀는 단호했다.

“진기를 저장해둔 저 고치라도 깨고 도망칠 생각이야. 지금도 8레벨의 중간급은 되어 보이는데, 고치 속에서 몇 년간 변태와 진화를 거치면 나중에는 진짜 괴물이 되어 돌아올 거야. 영양분을 충분히 흡수한 채로 그 과정에 들면 장벽 밖 남방위의 네임드 정도가 아니라 대륙급 네임드로 성장할 수도 있거든.”

— 오오오!

— 그 말이 맞아요! 두 분 최고예요!

“······.”

각자 일을 하던 묘인들이 갑자기 오오오! 하며 몰려들었다.

그들은 귀가 아주 밝았다. 안 듣는 척하면서 엘프 마법사의 말을 다 듣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묘인들에게 희망은 엘프 마법사와 레반 뿐이었다. 어디서 튀어 나온지는 몰라도 자신들을 살려줄 구원줄임은 넉넉히 알고 있었다. 특단의 수나 방법을 내기 위해 갑판 위로 모든 묘인들이 몰려들었다.

7레벨의 묘인 둘은, 촉수 자르는 것을 포기하고 다가와 뭐라도 도움이 되겠다며 이런저런 정보들을 늘어놓았다.

— 지금 무얄라바에 고강한 흡혈귀가 있어요. 누군가 지원을 불러올 수 있을까? 거기는 10km밖에 안 돼.

— 알 헤임달 남쪽은 모두 묘왕님의 영역이에요. 여기서 20km밖에 왕의 거처가 자리하고 있는데, 거기까지 구원 신호만 보낼 수 있다면 어떨까.

귀를 쫑긋거리며 저들끼리 떠드는 묘인들.

그런데 묘인들이 그런 말을 늘어놓은 순간.

[······.]

“?”

곧바로 레반이 엘프 마법사와 7레벨의 묘인들을 향해, 대수롭잖은 어조로 전음을 보내왔다. 그 전음에 묘인들이 눈을 반짝였다. 한참 레반의 말을 묵묵히 듣던 엘프 마법사는 팔짱을 끼고는 되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자고?”

[······.]

곧, 레반은 다시금 전음으로 엘프 마법사에게 의도를 전달했다. 혹여 지면에 있는 남쪽의 어머니라는 좀비가 말을 엿들을까 전음으로 소통을 선택한 것이다.

“아~”

잠시 뒤.

철컥.

7레벨의 묘인들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고, 레반의 전음을 들은 엘프 마법사는 이전과는 다르게 생긴 탄창을 꺼내어 샷건에 결합했다. 청록빛을 내는 탄창이었는데,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기운을 줄기차게 흘려냈다.

엘프 마법사는 레반을 향해 한쪽 눈을 깜빡였다.

“위험하긴 한데. 좋아, 그렇게 해보자.”

이윽고.

— 우, 우리 끌려내려가요!

묘인들의 비명이 비공정 위를 메아리쳤다.

밑에서 끌어당기는 점액질의 힘에 의해 비공정의 고도가 천천히 낮아지며 지상이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 * *

꾸물대는 지면이 목전으로 다가왔다.

비공정이 지상으로 거의 다 내려왔을 때.

이제는 비공정에 탑승한 모두의 눈에 하얀 고치가 보였다.

레반도, 엘프 마법사도, 비공정 위에 있던 모든 묘인들도 멍하니 그것의 위용을 바라봤다. 하늘에서 본 것보다 더욱 거대한 점액질 고치가 늪처럼 꿀럭이는 지면 중심에 단단히 박혀있었다.

5미터는 될 법한 그 고치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 ······포기했구나······엘프, 그 역겨운 짐승과 같이 떠나라······. 】

고치 속의 존재는 기껍게 말문을 열었다.

비공정 위의 이들은 저항을 포기한 듯, 자신의 촉수를 잘라낼 생각도 의지도 없었다. 떨어진 뒤에는 기껏해야 도망치는 것이 전부일 것이니 그중 자신에게 양분이 될만한 세 놈만 잡아 흡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고치 속의 존재는, 금방 생각을 바꿔 먹어야 했다.

“읏차.”

【 ? 】

비공정의 갑판에서 불시에 허공으로 도약한 레반의 검이 오색광채로 환히 물들더니, 뜬금없이 오 척이 넘는 압축 검기를 줄기줄기 발출해냈다. 검기 하나마다, 7레벨이라곤 믿기 힘든 강대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목표는, 존재를 둘러싸고 있는 하얀 고치였다.

그것들은 알껍질을 꿰뚫어 버릴 듯한 속도로 쏘아졌다. 동시에 엘프 마법사가 청록빛 괴물을 타고 비공정에서 뛰어내리며 샷건을 네 발 연속으로 격발했다. 끔찍할 정도로 시린 마법이 중첩되고 또 중첩되어 대기를 떨어 울린다.

콰과과광—

이윽고, 청록빛의 그 마력이 사방으로 웅대하게 폭발했다.

【 감히······! 】

그 존재는 감히 자신의 고치를 노리는 레반의 위검강과 6위계의 광역 마법을 막기 위해, 어마어마한 본신의 요기를 잠시간 끌어 올렸다.

알 헤임달의 근처에서 요기를 강하게 끌어올리는 것은 껄끄러웠으나, 먹잇감들의 진기를 저장해둔 고치가 공격받아 양분을 잃으면 기다렸던 변태가 미뤄질 수도 있기에.

청록빛의 마력 폭발과 오색의 위검강이 고치 위로 계속 쏟아졌다. 레반은 단전은 물론이고, 전심전력을 쥐어 짜내고 있었다.

생각보다 저항이 거센 데다 엘프 마법사까지 자신의 제안을 끝끝내 무시하고 가세하자 그 존재는, 고치를 지키기 위해 더욱 더 요기를 부풀리며 하얀 점액질과 촉수를 마구 쏘아냈다.

개척도시 장벽 바깥, 검은 지면 밑.

일레힌 마탑주의 서재에서처럼, 점액질과 촉수 줄기들이 지면을 부지불식간 뚫고 나오며 허공에 있는 레반의 몸을 노렸다.

그런데.

“도망쳐!”

존재의 요기가 조금 부푸는 듯 싶자, 비공정에서 뛰쳐나와 길길이 날뛰던 레반은 다시 급작스럽게 몸을 돌리고는 중장비로 막아놓은 개척도시의 장벽 안으로 경공을 펼쳐 신속하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비공정의 묘인들 역시 약속이나 한 듯 비공정 밖으로 뛰쳐나와 롬진의 무너진 장벽 쪽으로 내달렸다.

【 고작······? 시간 끌기······? 한심하구나. 】

그 황당한 광경을 확인한 고치 속의 존재가 웃음을 흘렸다. 그들의 죽기 전 발악은 몇 분도 채 가지 못할 것이다. 단지 뻔하디 뻔한 저런 공격을 위하여 목숨을 걸었다는 말인가.

곧이어 고치 속에서 수십 개의 촉수와 세 개의 점액질이 도망가는 이들을 노리고 총탄처럼 쏘아졌다.

레반과 엘프 마법사, 7레벨의 묘인들이 그것들을 힘겹게 쳐냈으나 장벽까지는 거리가 꽤 있어 몇 분 가지 못할 듯 했다. 그나마 안전한 비공정에서 뛰어내린 이상, 그들은 이미 고치 속 존재의 영역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레반의 발목에 붉은 촉수가 감겼다.

퐁!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레반이 촉수에 발목이 감긴 그 즉시 작은 병을 품속에서 꺼내더니, 촉수 위에 아주 조심스럽게 떨어뜨렸다.

그러자.

붉은 촉수를 지탱하던 힘이 스르륵 풀리더니,

고치속 존재의 감겨있던 눈이 더 치떠질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랗게 치켜떠졌다.

【 !? 】

콰아아아—

그리곤, 갑작스럽게 고치 속에서 빠져나온 진득한 요기가 세상천지를 뒤덮을 듯 줄기줄기 뻗어져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레반의 발을 묶고있던 그 붉은 촉수에 어떤 액체를 한 방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절정의 황홀감이라도 느끼는 듯 5미터 크기의 고치는 요기를 내뿜으며 연신 부르르 진동했다.

레반은 한 마디 말을 남기고는 다시 경공을 펼쳤다.

“나도 아직 못 먹어본 건데. 너한테만 주는 거다.”

방금의 액체는 그간 레반이 극히 아껴온, 아직 자신도 입조차 대지 못한 9레벨 우르드 에센스 단 한방울이었다.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한 방울이었으나 효과는 실로 충분했다. 끔찍하고 강대한 남쪽 어머니의 요기가 개척 도시 전체를 뒤덮을 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변태를 준비중인 8레벨 좀비의 주둥이에 자그마치 9레벨의 에센스를 뿌려 주었으니, 그 뒤에 벌어질 일은 안봐도 빤했다. 쉽게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거다.

【 그, 그거. 】

하얗고 거대한 고치의 일부분이 쩍쩍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수십 개의 촉수가 더 튀어나왔다. 요기를 내뿜는 고치는 현재에도 꿈틀대며 변화하고 있었다.

이윽고.

【 그거 이리 내놔—!!!!!!! 】

촤아악—

남쪽의 어머니가 조종하는 모든 촉수와 하얀 점액질들이 레반의 신형을 무섭게 뒤쫓았다. 쏜살보다 빠른 그것들은 이내 레반의 지척에 당도해 이빨을 마구 들이밀었다.

서걱.

경공을 펼치던 레반이 훌쩍 뒤돌아 검을 내리긋자, 달려들던 촉수 세 개가 연이어 잘려나갔다.

“역시, 좋아 죽는군 아주.”

레반은 검기를 뿌리며 경공을 전력으로 펼쳤다.

분에 넘치는 위검강을 하도 써대서 단전은 거의 비어버렸으나 몇 분간 도망칠 힘 정도는 남겨두었다. 이전보다도 빠른 속도로 쏘아지는 촉수를 경공으로 딛고 피해가며 위험할 때마다 엘프 마법사의 도움을 받았다.

남쪽의 어머니는 주변의 그 무엇도 신경쓰지 않고 오직 레반의 신형만을 집요하게 노렸다. 정확히는 레반이 들고있는 우르드 에센스 병을 노렸다. 요기가 점점 더 진득해지는 것이, 모든 요기를 방출해서라도 잡고 싶은 듯했다.

고치가 조금 찢어지고 요력을 상당히 낭비하더라도 9레벨의 에센스만 있으면 메꾸고도 남을 테지. 레반이 들고있는 것은 초월적인 힘을 가졌던 존재가 세상에 남겨두고 간 진액이었다. 변태까지 준비한 마당에 욕심이 나지 않을 리 없다.

쾅-! 콰아앙-!

날파리처럼 촉수를 자르고 방해하는 엘프 마법사와 짐승 부스러기, 강한 묘인들이 조금 거슬렸으나 남쪽의 어머니는 세상 위로 피어오르던 요기를 더더욱 증폭시켜 살덩이와 점액질에 더욱 강한 힘을 주입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 귀찮은 것들. 】

수십 개로 불어난 촉수들이 일거에 쏘아졌다. 비공정도 땅으로 끌어내려 처박는 촉수들이 길 자체를 없애버리니, 레반도 겨우 근방을 벗어날 뿐 도리가 없었다.

남쪽의 어머니는 흥분으로 눈이 뒤집힌 상태였다.

긴 세월동안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어떠한 고양감이 몸속에서 용솟음 치고 있었다. 마침 더 상위의 존재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를 모두 끝내놓았다. 저 작은 병에 든 진액만 가져올 수 있다면······!

헌데, 그러던 때였다.

정신없이 얼마나 레반의 뒤를 쫓았을까.

고치 속의 존재, 남쪽의 어머니는 문득 공격을 멈추었다.

경공을 펼치는 레반만을 쫓던 촉수와 하얀 점액질들도 제자리에 굳어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 ······. 】

에센스의 기운에 단단히 홀려 레반만을 좇던 존재가 정신을 차리자, 거대한 고치의 주변으로 무엇인지 모를 파란 알갱이들이 은하단처럼 떠있었다. 어두운 장벽 밖의 하늘을 전부 가릴 정도로, 푸르른 입자들이 새로운 하늘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의아한 기색을 띤 남쪽의 어머니가 고치의 얇은 틈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러자 방금 전의 추락으로 망가져 증기를 내뿜는 비공정 앞, 그곳에서 유일하게 도망치지 않고 있는 묘인이 그 시야에 들어왔다.

상처 가득한 토끼 귀. 두 눈이 없는 맹인.

어디선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아무런 기척과 쥐톨만한 힘도 느껴지지 않는 무색무취의 그 묘인은, 산보라도 나온 듯 꾸물럭 거리는 지면 위를 사뿐히 걸어 다녔다. 다른 묘인들처럼 자신에게 등을 내보이며 도망치지도 않았다.

어느덧 고치 앞까지 다가온 그 묘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누가 나의 영역에서 요기를 이토록 부풀리라 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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