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퓨전펑크의 전생자-67화 (67/157)

#67화. 개척도시 롬진 2

#67화.

롬진에 접근하며 상황을 확인했다.

‘임시 결계가 있다더니, 정상은 아니군.’

수준 높은 흡혈귀가 쳐두었다는 임시 결계는 눈 씻고 봐도 없고, 장벽의 일부분은 무너져내려 있다.

롬진의 개척자들로 추정되는 사체들이 장벽 앞 이곳저곳에 쓰레기처럼 널려있었다. 개중에는 인간이나 엘프들도 있었으나, 토끼 귀를 가진 수인의 비중이 높았다. 아무래도 여긴 묘인(卯人)들이 주도적으로 개척을 벌이는 개척지인 듯 했다.

머리통이 터지고 짓눌린 묘인의 사체들이 여럿이었다. 다들 매끈한 가죽옷 위에 동그란 가방과 장구류를 차고 있었는데, 가방은 증기를 뿜어내는 허공을 부유할 수 있게 해주는 물건이고 장구류는 개척자들이 널리 착용하는 전투장비로 보였다.

— 멀리 나가지 마세요! 장벽을 사수해야!

— 처, 철도가 망가졌대요···제르니가 죽었어!

— 탈출해야 한대요! 비공정에 시동 걸라해! 얼른!

— 10분도 안 남았대요! 연료실에 불 들어갔대!

묘인들 특유의 말투와 비명들이 한데 뒤섞인다.

전투나 방어전이 아닌, 탈출을 생각하고 있는 건가.

보아하니, 이들은 사망한 기관사와 7레벨 좀비를 싣고 알 헤임달로 달리던 기관차에 신경쓸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달려드는 좀비들의 살기가 괴상하리만치 거세서 당장 제 목숨 지키기도 쉽지 않아보인다.

‘이래서 빠져나온 좀비들이 알 헤임달 장벽 근처까지 기어 왔군.’

이런 규모의 전투가 벌어졌으니 근방 통제가 가능할 리가 없다. 전투원으로 보이는 자들은 대부분 뛰쳐나와 무너진 장벽 안으로 들어가려는 좀비들을 막아내고 있었다. 장벽 위의 작살은 연신 내리꽂혔고, 개척자들 중 5레벨 밑의 전투원은 한 명도 없었다.

개척도시 롬진, 와르르 무너져 내린 장벽 근처.

아까 전 기관차에 가득 실려있던 폭탄들이 연쇄 폭발이라도 일으켰는지 검은 화마가 대기를 불사르며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너진 장벽과 검은 화마가 조명탄의 역할을 해준 덕분에 저 먼 어둠 속에서 몰려오는 좀비들이 더욱 잘 보이긴 했다.

기감을 넓게 펼칠 필요도 없었다.

당장 보이는 놈들만 수백 마리는 그냥 넘겠군.

개척자로 보이는 묘인들의 머릿수가 좀비보다 적다.

철도의 기관차 위에서 보았던 것보다 상황은 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콰광—

저 멀리, 피어오르는 화마를 배경삼아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들이 연신 충돌하고 있다. 발차기 한 번으로 파공성을 내는 강력한 7레벨 묘인과 복부에 그 발차기를 맞고도 버티는 좀비의 전투가 눈에 들어왔다.

뱃살이 흘러내릴 듯 뚱뚱한 좀비가 입을 벌리자, 그 뱃살이 펑 터지며 전방 십여 미터를 산산이 찢어발기고 녹여버렸다. 그에 땅이 뒤집어졌으나, 7레벨 묘인은 일찍이 허공을 차며 폭발의 범위 내를 벗어났다.

양쪽의 전력은 대강 비슷했고 대부분이 7레벨의 경지를 밟았거나 적당히 뛰어넘은 존재들. 롬진의 전력이 극히 미세하게 앞서고 있다. 나는 저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저 아수라장의 판도를 뒤집을 엘프가 왔거든.

콰앙—

청록빛의 괴물을 타고 달려간 엘프 마법사는 이미 전투가 벌어지는 지척까지 당도한 상태였다. 한창 전투를 벌이던 개척자들이 엘프 마법사의 강대한 기척을 느끼고 크게 반색하는 가운데, 그녀의 샷건이 뚱뚱한 좀비의 몸뚱이를 통쾌하게 증발시키는 걸 보며 생각을 마쳤다.

엘프 마법사보다 강력한 좀비는 당장 이 전장에 없다. 그러니 저쪽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허공에서 천천히 낙하하며 칼을 뽑았다.

회로가 마나를 한껏 빨아들이고 있기에 가슴께는 뜨거웠다. 하지만 가슴이 뜨거운 사내라고 하여 머리까지 뜨거울 필요는 없다. 목숨이 달아나지 않는 선에서 능력껏 움직일 생각이다.

발밑으로 전투중인 좀비와 묘인이 보였다.

5레벨 정도 되는 묘인의 단련된 발이 채찍처럼 휘둘러졌으나, 좀비는 멀쩡했다. 전신을 두르고 있는 외갑피가 눈에 들어왔다.

그어어!

좀비는 단단한 외갑피로 전신을 두르고 있어 묘인의 강력한 각법에도 충격이 없어 보였다. 그 내구성에 기겁한 묘인이 둥근 가방과 연결된 등쪽의 호스를 연신 잡아당겼는데, 연료가 다 되었는지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했다. 곧 좀비의 두터운 팔이 묘인을 뭉개버릴 듯 떨어졌다.

나는, 이도저도 못하고 울상이 된 묘인의 머리 위에 두 발을 살포시 딛었다. 토끼 귀가 쫑긋거리며 발목을 간지럽혔다.

“으, 응?”

그리곤 검을 휘둘렀다.

서걱.

바람결과 함께 벼락처럼 쏘아진 광선이 외갑피로 덮힌 좀비의 팔을 썰어냈다. 종으로 내려치니 두 조각이 나고, 다시 횡으로 휘두르니 네 조각이 났다.

으어어···!

팔이 네 조각 났음에도 놈의 성량이 쩌렁쩌렁하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검신은 외갑피 좀비의 반대쪽 팔마저 썰어낸다. 갑피의 단단함에 자신이 있었는지 놈은 두 팔이 다 잘리자 크게 당황한 기색이었다. 급히 뒤돌아 도망치려는 좀비의 등을 찔러 관통한 광선을 그대로 그어 올린다.

푸화악!

“흐억······.”

쩌억 벌어진 외갑피 좀비의 몸에서 피분수가 비처럼 쏟아지자 묘인이 질린 얼굴로 털썩 엎어졌다. 녀석은 얼굴에 묻은 피에 기겁하며 가죽 장구류에 달린 줄을 잡아당겼다.

치이익—장구류에서 즉시 수증기가 분사되며 묘인의 얼굴에 묻은 좀비의 혈액을 씻어내린다.

잠시 뒤, 묘인은 날 보며 헛숨을 들이켰다.

“허억! 고마워요. 그, 근데 누구?”

커다란 경계심이 묘인의 표정 위로 드러났다.

안 그래도 경계심이 많기로 유명한 이족이다.

나는 숨돌릴 새도 없이 엎어진 묘인에게 물었다. 대략적으로라도 상황을 들어보기 위함이었다.

“알 헤임달 남쪽. 칼드락 스미스에서 칼 갈아주러 왔는데,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카, 칼드락 스미스?”

그래도 칼드락 스미스라는 말과 함께 홍색의 검집을 당당히 드러내며 묻자 묘인의 경계심이 아주 조금은 누그러졌다.

묘인은 몸을 덜덜 떨면서 답했다.

“갑자기 언데드들의 습격을 받아서요······.”

“대충 봐도 평범한 일이 아닌데. 개척지가 원래 이럽니까?”

“이건 아마도 말이예요. ’남쪽의 어머니’가 직접······.”

남쪽의 어머니라는 말이 귓전을 울렸다.

롬진은 알 헤임달 남쪽의 개척지 세 곳중 하나.

그렇다면, 지역명을 기워 붙인 네임드 시체겠군.

그 묘인은 더듬더듬대면서도 힘겹게 말을 이었다.

“알 헤임달 대개척 준비때문에······사, 사형수 수급이 부족해 남쪽의 어머니가 화났어요······저는 그것만 알아요······그나저나 롬진에서 처음 보는 인간······그분께서 인간은 안좋아 하시는데.”

하지만 도대체 뭐라는 건지 곧장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묘인들은 앞니가 긴 탓인지 발음이 그닥이었다. 이 녀석에게 정상적인 대답을 듣기를 포기한 뒤 다시 땅을 박찼다. 좀비와 생사결을 벌이고 있는 묘인들은 많았다.

나는 그 뒤로 다섯 마리의 좀비를 더 썰어냈고, 또 한 명의 묘인을 돕고 나서야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기회가 생겼다. 개척도시에서 꽤 지위가 되는 자인지 묘인의 설명은 이전보다 세세했다.

“채굴용 폭탄들이 한꺼번에 터지는 바람에 혈귀의 비술이 약화됐어요. 남쪽의 어머니가 부리는 언데드가 벌인 짓이야. 확실해.”

발등에 너클 붕대를 감고있는 묘인은 겁에 질려있지도 않았으며, 이런 사태가 일어났는데도 꽤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강한 편에 속하는 6레벨 정도의 묘인.

나는 곧바로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어머니가 근방을 지배하는 언데드인가?”

“이 남쪽 근방에서 제일 강력한 언데드에게 붙여준 이름이에요. 어머니처럼 많은 언데드를 끌고 다닌다고 해서요. 남쪽의 어머니.”

“놈이 왜 갑자기 쳐들어온 거지?”

“······축복 의식을요. 못 치러서 그래.”

긴 토끼 귀가 축 늘어졌다.

축복 의식이라는 말은 처음 듣는다.

그 묘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이를 강간했거나, 무고한 사람을 죽였거나, 죽어도 싼 일을 저질러 사형이나 종신형을 선고받은 알 헤임달의 주민들 중, 출신이 미천한 이들을 남쪽의 어머니에게 바쳐요. 우리 개척할 거니까 귀찮게 방해하지 말아 달라는 뜻이야.”

간단히 말하자면.

사형수로 인신공양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군.

강력한 네임드 시체가 도시의 개척자들과 공생관계처럼 자리를 잡고 영역을 형성한다. 강력한 좀비의 요기는 수준 낮은 좀비들이 두려워하니, 어지간해서는 강력한 좀비들이 장벽 근처에 기웃거리지 않을 것이다.

여러 좀비를 불러들이느니, 강력한 한 놈만을 의도적으로 불러들인 뒤 먹이를 내어주며 무차별적인 좀비의 습격을 억제하는 방법이다.

단기적으로 따졌을 때 효율적인 방법이 맞다.

남쪽의 어머니인지 뭔지가 막강하다고 해봐야 알 헤임달의 개척지 전체를 싸그리 쓸어버릴 정도로 강하진 않을 테니까.

하지만 종국에는 이렇듯 틀어질 수밖에 없는 관계였으리라.

어릴 적부터 키우던 짐승도 머리가 굵어지고 본성이 도지면 언제 사람을 물지 모른다. 하물며 인간이나 이족 자체를 먹이로 보는 좀비임에야 그 변덕이 오죽하겠는가.

탐욕 따위로 정의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게 아니라 아무리 달아도 언제 뱉어낼지 모르는 놈들이다.

나는 그 묘인을 번쩍 들고 싸움과 동떨어진 장벽 안쪽으로 들어왔다. 밖에서는 연신 폭음과 기파가 부딪쳐 대지를 떨어 울렸다.

조금 안전한 장벽 안쪽으로 이동한 뒤 물었다.

“놈한테 하루에 얼마나 던져줬지?”

“세 하루에 열다섯요. 한 달에 백오십.”

그럼 일 년에만 2천 명 가까이 던져줬다는 얘기.

적당히를 모르고, 정말 많이도 가져다 처먹였군.

저렇게 마구 먹이를 던져주다가 만약, 더 상위의 존재로 변태(變態)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변태(變態).

진화, 강화, 탈태, 개화 등등. 부르는 말들은 제각각이지만 굳이 따지자면 좀비들이 겪는 환골탈태와도 같은 일이다. 일단 한 번이라도 그 과정을 겪은 좀비는 상단전을 뚫은 무인마냥 급속도로 강력해진다.

변태라는 과정을 겪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좀비마다 제각각이나, 대부분은 양분을 배 터지게 처먹은 뒤 변태를 준비한다고 들었다. 이것은 연방 정부에서 발표한 연구 결과다.

어쩌면 그 어머니라는 좀비는, 변태 과정에 필요한 양분을 얻기 위해 제물로 보충하려 들었을 수도 있겠다.

그때, 묘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억울해요! 하필 대개척 때문에 실력자들이 알 헤임달 중앙으로 대거 빠져나간 상태라서요! 원래 개척은 다 그렇게 하는 건데!”

그놈의 대개척은 내가 정크타운에 있을 때부터 준비중이라는 말이 돌더니, 아직까지 첫 삽도 못 떴군.

그래도 묘인의 말을 이해는 한다.

개척이라는 행위가 위험 부담을 크게 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알 헤임달 시티가 평범하게 돌아가려면 지금처럼 지속적인 개척을 통한 자원 수급이 필수다.

천연자원은 다른 연방의 도시들에서도 상당한 양을 사용하고 있기에, 개척은 아무리 위험하더라도 멈출 수 없을 것이다. 도시를 버릴 마음을 먹은게 아닌 이상은.

다만, 자원의 생산량을 안전히 유지하기 위해 강력한 좀비에게 사형수를 공짜로 던져준다는 발상은 실로 끔찍했다. 그건 알 헤임달이 최악으로 가는 지름길일 테니.

몇 년간은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자원을 캘 수 있더라도 장기적으로보면 전혀 좋을 것이 없다. 먹이를 마음껏 처먹고 강해진 좀비의 시선이 나중에는 어디로 향할까.

이 녀석에게 말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겠지만.

어찌 되었건 흡혈귀의 임시 결계는 깨졌고, 대개척이라는 미명 하에 실력자들이 차출되어 롬진의 전력에 공백이 생겼다는 얘기.

나는 엉덩이를 들썩대는 묘인을 붙잡고 물었다.

“그 어머니인지는 원래 얼마나 강했지? 이제 처먹을 만큼 처먹었나?”

“정확히는 모르는데 8레벨이라고 들었어요. 그리고 당신이 걱정하는 걸 알아요. 아직 변태는 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런가.”

“네, 우리가 그 정도도 모르고 마구 제물을 바칠 만큼 무식하지는 않아요. 변태의 징조가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알 헤임달의 지원을 받아 죽이거나 멀리 쫓아냈을 거에요.”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냐?”

“한 일주일 전요···?”

하기야, 원래도 8레벨의 경지를 가지고 있던 놈이 변태까지 했으면 이놈들은 이미 다 뒈졌겠지. 다행히도 그만큼 강대한 좀비가 성공적인 변태를 이루기에 일주일이라는 시간은 너무도 짧다.

그것은 그나마 다행이군.

“잘 들었다.”

“잠깐만요!”

내가 장벽 밖으로 나가려 하자, 묘인이 나를 말리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

“이제 중장비로 장벽 입구를 막고 철수할 거예요. 비상 비공정을 띄우고 있으니까 시간만 벌고 있어요. 우린 곧 무얄라바나 파샤치로 갈 거야.”

“비공정이 몇 기나 되기에, 전부가 탈 수 있겠나?”

그러자 묘인이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다 못 탈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네요. 다수가 살려면 버리고 가야······뒤! 뒤에!!”

서거걱.

검이 찰나간 뽑혀나오자 세 갈래로 토막나는 좀비.

뒤에서 살기등등히 달려들던, 긴 나무토막같이 생긴 좀비가 갈라지며 사방으로 썩은 내장을 마구 쏟아냈다.

나는 몰타의 껍질로 빌어먹을 좀비의 더럽고 질퍽한 잔해를 막아냈다. 오색 빛으로 물든 검신에 화들짝 놀란 묘인의 얼굴이 보였다.

“이, 일격에······.”

곧, 녀석은 고맙다는 말과 곧 도착할 비공정을 놓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곤 깡총대며 저 장벽 안으로 사라졌다. 다리 힘이 얼마나 좋은지 스프링을 단 것 같았다.

시티 장벽 안에 편하게 앉아, 백만방도 포털 메인뉴스나 넷을 뒤지며 수십 명이 죽었다더라. 언데드가 세상에 그리도 강하다더라. 장벽 밖이 그렇게나 무서운 마경이라더라···그딴 말들을 아무리 들어봐야 눈앞에서 좀비의 손에 목이 잘리는 장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

하물며 수인의 귀여운 모가지들이 실시간으로 박살나고 있으니, 아득했던 그것이 갑작스레 와닿았다.

어찌됐건 이 개척도시 롬진의 개척자들은 장벽 안으로 들어오려는 좀비들과 적당히 어울려준 뒤, 비상용 비공정을 타고 다른 개척도시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공교롭게도 강자들이 알 헤임달로 떠난 상태라고 하니, 나중에 돌아와 복구할 생각인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일레힌 마탑의 선배, 엘프 마법사는 지금 무너진 장벽 바로 앞에서······.

콰아아앙—

샷건을 펑펑 쏘면서 학살극을 벌이는 중이고.

보통 기사의 단점은 말이 쓰러지면 끝이라는 것인데, 사람을 태우고도 총탄처럼 움직이는 저 청록빛 괴물이 쓰러질 일은 없어 보인다.

마탑의 2인자나 다름없는 엘프 마법사가 저렇게 발로 뛰는데, 감히 막내가 뒤로 빠져서 끼적대는 걸 들키면 좋은 인상을 남기지는 못하겠지.

나는 광선을 꼬나쥐고 빛살처럼 쏘아졌다.

* * *

좀비 수십 마리가 더 죽어 나갔을 때.

롬진 개척도시 근방의 지축이 크게 진동했다.

방금 전에 구해주었던 묘인의 그 말대로였다.

개척도시의 장벽 안에 있던 중장비들이 가동을 시작했다. 거대한 굴삭기와 불도저같은 채굴 중장비들은 무너진 장벽을 두꺼운 몸집으로 막았다. 곧이어 장벽 위로 우뚝 솟아있던 타워 크레인이 거대한 암반을 옮겨 무너져 내린 장벽을 대충 막았다.

쿠구구궁—

뒤이어 직경 30미터쯤 되는 원형의 블레이드에, 굴삭기 버킷보다 월등히 큰 채굴용 버킷들이 달려있는 중장비가 나타났다. 산도 하루면 옮겨버릴 듯한 포스를 풍기는 채굴 기계였는데 그런 놈이 장벽 앞을 떡하니 막아서니 그 위압감이 보통이 아니었다.

장벽의 막힌 틈새로, 한 명의 사람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법한 구멍이 남았다.

‘중장비들로 큰 틈만 막아두고 탈출할 셈이군.’

그래, 그깟 중장비들보다는 목숨이 먼저다. 좀비들은 먹지도 못하는 석탄 채굴 중장비들에 관심을 둘 것 같지는 않으니.

한데 혼란한 전장에서 10분은 매우 짧은 시간이었다.

왜 혼란하다 하냐면-

— 끄어. 끄륵.

뿌드득.

좀비들에게 당해 나자빠져 있던 수인의 사체들중, 머리가 터지지 않은 사체들이 약속이나 한 듯 몸을 비틀며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저래서 묘인들이 사체의 머리를 죄다 터뜨려 놓았던 거군. 나중에 좀비가 되어 일어날 수도 있으니.

강한 좀비에게 당했거나, 아니면 감염 부위가 넓은 사체들이 가장 먼저 일어났다. 그들의 관절은 반대로 꺾여있고 행색은 괴이했지만, 초점이 돌아온 그들의 눈동자는 쾌감과 희열 비스무리한 감정들이 들어차 있었다.

사후 감염은 이지를 많이 잃는다고는 하지만-

묘인에서 이제 다른 존재로 변화한 이들은 하나같이 이전보다 요사스러운 기운을 풍겼다. 엇비슷하거나 조금 더 앞섰던 롬진 개척자들과의 전투 향방이 뒤집어지는 순간이었다.

“······.”

그렇다면 저들은 2회차 전생자인가.

그리 농담조로 생각하고 있던 때, 장벽 밖에서 싸우던 이들도 그 변화를 확인하고는 모두 장벽 안쪽의 구멍으로 뛰쳐들어왔다. 세 기나 되는 비공정들이 때맞추어 저고도로 비행해 장벽의 안쪽 가까이 다가왔다. 함장들의 주차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 뒤로 후퇴해요! 당장 탈출할 거야!

— 모두 비공정에 오르세요! 갑판은 넓지 않아!

— 구멍으로 들어가세요! 여긴 우리가 막습니다!

장벽 가까이 댄 비공정의 갑판에 묘인들이 펄쩍펄쩍 뛰어올랐다. 비교적 약한 무력의 묘인들이 비공정에 오르는 동안, 경지가 높은 묘인들이 발광하는 좀비들의 진격을 막아냈다.

그들의 앞으로,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좀비들의 관절꺾는 소리가 전장을 울렸다. 좀비가 된 이들까지 합세해 움직이기 시작하면 강한 묘인들도 여유가 없을 것이었다.

파이프에서 증기가 미친듯이 솟구친다.

대항해시대의 범선처럼 그 위용을 풍기는 증기 비공정은 전장에서 싸우던 모두가 타지 않았는데도 가차없이 고도를 높여갔다. 검은 가루와 증기가 눈발처럼 흩날리며 거체를 하늘에 띄웠다.

서서히 멀어지는 지상과의 거리.

마지막까지 지상에 남은 6,7레벨의 묘인들은 끈질기게 중장비를 딛고 갑판에 들러붙는 좀비들을 쳐낸다. 나와 엘프 마법사도 그들의 곁에서 들러붙는 좀비들을 썰어냈다.

시간이 지나고 비공정이 어느 정도 높이까지 올라가자, 남아있던 묘인들이 땅을 박차고 비공정의 갑판에 올랐다. 수십 미터를 제자리 뛰기로 올라오는 그 탄력과 강성에 감탄했다.

탓!

엘프 마법사와 나도 청록빛 괴물의 등에 올라 무너진 장벽을 딛고는 비공정 하나를 잡아 탑승했다.

그런데 도착한 비공정의 갑판 위는 조금 어수선했다.

“?”

어디선가 코를 훌쩍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묘인 셋이 무릎 꿇려져 있었다.

전투는 끝났어도, 아직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갑판의 가장자리에 무릎 꿇려진 그들은 붉어진 얼굴로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장막이 오른 뒤 한 편의 연극을 보는 듯했다. 비공정의 모든 비행 조명이 그 셋을 비추고 있었다.

한 묘인은 오른쪽 어깻죽지 밑으로 팔이 없었는데, 절단면이 깨끗하여 무슨 이유로 인해 그가 직접 잘라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연이어 어깻죽지를 잘라내려다가 힘없이 팔을 떨어뜨렸다.

‘감염.’

둘러보니, 저 셋은 감염된 묘인들이었다.

비공정의 갑판에 있는 개척자들은 묵묵한 얼굴로 그들의 선택을 기다렸다. 엄숙한 분위기에 함부로 입을 열거나 웅성대는 자들이 없었다. 롬진의 묘인들이 감염자를 대하는 방식인 듯했다.

이윽고 셋 중 하나는 아무 말 없이 비공정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 5레벨 정도의 경지를 가진 묘인이었다.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다음은 6레벨 초입의 꽤 강한 묘인이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자신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모두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남긴 뒤 역시나 저고도의 비공정에서 뛰어내려 도망쳤다. 핏자국 위로 젤리 같은 토끼 발자국이 남았다.

마지막 남은 묘인에게 모두의 시선이 꽂혀들었다.

그는 7레벨로, 방금의 셋 중 가장 강한 묘인이기도 했다.

묘인은 씁쓸하게 웃어 보이며 장구류를 해제했다.

그는 그러고는 갑판 바닥에 털썩 앉았다.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의 그는 좌중을 한 번 둘러보고는 곧바로 단검을 빼 들었다. 모든 과정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

저 묘인에게는 나처럼 다음 생이 없었다.

나름 완숙한 경지의 7레벨. 성취가 아까울 것이다.

후에 깨달음의 실타래를 잡거나 기연을 얻는다면 언젠가 큰 벽을 돌파할 수도 있다. 여기서 앞의 두 묘인처럼 도망치면 시체로나마 생을 구가할 수 있음에도, 묘인 사내는 더 망설이지 않았다.

푹.

그는 단검으로 자신의 목을 찔렀다.

“!?”

아니, 분명 찌르려고 했었다.

갑판 밖에서 쏘아진 꾸덕한 핏빛 실타래가 묘인의 목을 꿰뚫어, 비공정의 갑판 밖으로 질질 끌고 내려가기 전까지는 그렇게 보였다.

겸허히 죽음을 받아들이던 수인 개척자는 죽음을 모독당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어떤 묘인이 분을 참지 못하고 고성을 질렀다.

— 아니, 이게 무슨 일이지요!

퍼억.

그렇게 분노한 그 묘인은 비공정의 갑판 밖을 무의식적으로 내다봤는데, 녀석의 머리에도 대나무 굵기의 점액질이 꽂히는 걸 보고서는 더는 아무도 밖으로 고개를 내밀지 못했다.

“······.”

고결한 죽음을 각오했던 묘인 개척자는 그 결심을 이루지 못했고, 분노한 묘인은 그 자리에서 죽었다. 안전한 하늘의 방주인 줄 알았던 비공정 위,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과 공포가 맴돌고 있었다.

잠시 뒤.

고도를 높여 비행을 시작한 비공정의 저 밑바닥에서 가늠할 수 없는 요기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머리가 쭈뼛 서는 것이, 지금껏 손을 섞었던 좀비들의 기운과는 격이 다르다.

나는 비공정에서 가장 높은 바람 돛대로 훌쩍 뛰어올라 주변과 저 지상을 둘러보았다.

저 밑, 검은 석탄 색의 무른 땅이 파도처럼 요동친다. 땅 밑에서 무언가가 꾸물대며 움직이고 있다.

동시에.

우리 비공정 편대의 가장 뒤에서 비행하던 세 번째 비공정을, 석탄 색의 지면 어딘가에서 섬광처럼 솟구친 촉수들이 붙잡고 끌어내려 지면에 처박았다. 차마 위험을 경고할 수도 없을 만큼 순식간이었다.

구구구궁—

굉음이 개척도시 롬진의 천공을 때려울렸다.

추락의 충격으로 연료실이 터졌는지 주황색으로 뜨겁게 타오르고 있던 석탄의 잔해가 비공정 밖으로 꾸역꾸역 토해졌다.

실력자로 보이는 수인들은 다행히 추락 전에 재빨리 탈출한 상태였으나, 촉수에 추락한 비공정은 심해로 수장되는 함선처럼 검은 흙바닥 속으로 삼켜졌다. 비공정 위에서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남아있던 부상자들과 함께.

그리고.

세 번째 비공정을 잡아먹은 촉수들은 다시금 지면을 뚫고 나와, 내가 탄 비공정의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옆에서 긴장 가득한 엘프 마법사의 말투가 들려왔다.

“막내. 아까 그 오색 검강 얼마나 쓸 수 있어?”

철컥.

어느새 나처럼 바람 돛대로 뛰어 올라온 그녀가 샷건을 장전하며 물었다. 그 옆으로 따라 올라온 강력한 묘인 둘도 긴장한 얼굴로 발을 풀고 있었다. 나는 아쉽게도 자랑스레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집중을 해야 해서.

- 남쪽의···어머니다.

그래도 한 묘인은 혼잣말할 여력이 남아 있었나보다.

헌데 그걸 누가 몰라서 이러는줄 아는가.

아무튼 8레벨의 마법사 하나, 7레벨의 나, 그리고 나와 비슷한 경지의 묘인은 원래 셋이었는데, 하나는 방금 전에 끌려내려갔으니 쓸만한 이들은 둘이군. 청록빛의 괴물까지 치면 7레벨 이상의 전력은 다섯뿐인가.

“······부족할 것 같은데.”

우리는 하늘까지 높게 솟구쳤다가 궤도를 꺾어 비공정을 덮쳐오는, 그 붉은 살덩이의 촉수들을 바라보며 각자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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