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개척도시 롬진 1
#66화.
알 헤임달 전역은 석탄과 천연가스의 생산지다.
말하자면, 이 땅속에는 뭔가 많이 묻혀 있었다는 뜻.
과거부터 자원을 캐기 위해 마구잡이로 파헤치고 온갖 곳에 구멍을 뚫어놓은 탓에 알 하임달의 지면은 흙바닥보다 무르고 단단하지 못했다.
그러니 물러터진 지면에서 뭐가 불쑥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다는 사실을 늘 인지해야한다. 무른 땅속에 묻혀있는 게 석탄이 아니라 살아있는 괴물일 수도 있거든.
“지금 또 나온다.”
파바바박—
서걱!
어두운 주위를 빛으로 물들이는 검, 광선.
땅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내 발목을 물어뜯으려던 좀비의 혀와 턱이 그대로 잘려나간다. 눈은 퇴화되어 없었고 귀가 여러 개로 사내의 손바닥만큼 컸다. 두더지라고도 불리는 부류였다. 가수면 상태로 대기하다가 진동을 감지해 지나가는 인간을 낚아채는.
- 으게게겍!
두더지놈은 잘린 턱을 붙잡고 구슬피 소리 질렀다.
대략 4레벨급으로 추정되는 좀비였는데, 위장은 좋았으나 요사스러운 기운을 숨기는 것이 서툴렀다. 모래폭풍때 왕초삼을 따라왔던 그 대두 놈보다도 조금 약한 수준.
나는 재차 검을 휘둘러 놈을 반토막 내버렸다.
철로를 따라오며 지금까지 너덧 마리 정도의 좀비를 죽였는데, 놈들 중에서는 머리카락을 다리처럼 이용해 달려오던 머리통 여인이 가장 강한 축에 속했다. 그 여인에 비하면 이놈은 잔챙이였다.
놈을 처리한 뒤, 검날에 진득히 묻은 피를 털었다.
후두둑.
진득한 피는 깨끗이 털려 나갔으나 기억은 아니었다.
문 좀 열어달라며 달려오던 그 여인의 역겨운 모습이 아포칼립스때의 빌어먹을 기억과 뒤섞여 머릿속을 쉬이 떠나지 않았다. 수십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도 생생히 떠오르는 기억들. 뭔지 모를 피비린내가 계속 코로 풍겨와 가시질 않았다.
그렇기에 좀비가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검을 더 강하게 휘두르게 되었다.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그 기억들을 뇌리에서 잘라내는 것처럼.
사냥이 끝나자, 청록빛 괴물은 어김없이 사체를 향해 달려들었다.
“······.”
와작와작대는 소리.
에센스 추출이고 뭐고, 청록빛의 괴물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프다는 듯 끝없이 좀비의 사체를 탐했다. 짐승이라는 말이 참으로 잘 어울렸다. 엘프 마법사는 그 이질적인 모습마저 예쁘다는 듯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제 여섯 마리인가? 철로 근처인데도 오늘따라 조금 많네. 롬진에서 이렇게 많이 흘릴 리가 없는······아 이제 총 일곱 마리다.”
불쑥!
그 말과 함께, 그녀의 뒤에서 목이 튀어나왔다.
비수와도 같은 이빨이 얼굴 전체에 끔찍하게 달려있는 형태로, 기다란 목은 지면 밑과 연결되어 있었다. 얼굴은 쫘악 펼쳐지며 엘프 마법사의 목덜미를 노렸다.
이빨이 그녀의 지척까지 이른 순간.
드드드—
잡고있던 광선의 검병이 진동하며 검집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쾌속하게 이어지는 발검. 찰나간 광선에서 오색으로 빛나는 검기가 발출되어 땅과 이어져있는 좀비의 목을 도려내자, 엘프 마법사가 드디어 감탄을 머금었다.
“오오~”
푸욱!
나는 다가가 검신을 땅에 깊숙히 박아 넣었다.
이윽고 그 검을 뽑자, 파인 구멍으로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때 청록빛의 괴물이 다가와 잘려서 쓰러진 목을 쑥 잡아 뽑으니, 땅 밑에서 피를 뿜고 있는 뚱뚱한 몸뚱이가 알감자처럼 딸려 나왔다.
— 끄아아아악!
저것이 바로 놈의 본체였다.
마치 젊은 사내의 비명과도 비슷한 괴성.
청록빛 괴물은 그러거나 말거나 상어같은 입을 한계까지 벌려 놈의 뚱뚱한 몸뚱이를 뱀처럼 덮은 뒤, 천천히 즐기며 씹어먹었다. 오독대는 소리가 철로에 울려퍼졌다.
“다르간트 아저씨가 만든 검 중에서도 심하게 뛰어난 축인 것 같아. 방금 그거, 잘만 쓰면 7레벨의 극이나 8레벨이라고 해도 믿겠어. 무슨 재료를 넣어서 만드신 거지?”
나는 엘프 마법사의 말에 속으로 동의했다.
‘기의 발출이 이리도 수월하다니.’
다르간트의 역작, 광선은 예상보다도 더 훌륭했다.
바깥으로 낭비되는 공력이 거의 없는 덕에 내공을 아껴 안배하기 좋았으며 칼날의 수준 높은 예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방금의 일격으로 확실히 알아낸 것이 있다.
전력으로 내공을 주입하면 검이 공력을 잔뜩 머금고 색색의 광채를 내뿜는데, 이때에는 공력 소모가 극심하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도처에 못 베어내는 것이 없었다. 그 상태에서 기의 발출 역시 가능했는데 궤적에 스치기만 해도 좀비의 목이 날아갔다.
검기를 피워 올리는 것과, 그 기운을 압축해 발출까지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무공의 이치를 정확히 깨닫고 검과 물아일체가 되어야만 정확히 내보일 수 있는 기예. 발할라 마탑의 봉우리에서 루벤카에게 내보였던 허술한 발출과는 달랐다.
물론, 기를 발출시키는 것은 내공과 집중력을 미친듯이 잡아먹는다는 큰 단점이 있다. 내공이 무한정에 가깝지 않은 이상, 애써 주입한 기운을 유형화해 발출한다는 것은 별 실속이 없었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는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수단이다.
특히 기운을 흘리지 않고 검신에 눌러 압축시켜둘 수 있는 광선같은 경우에는 그런 변칙적인 움직임과 궁합이 잘 맞을 것이다.
가히 위검강(僞劍罡)이라고 불러도 좋을듯했다.
다만 잘 사용하려면 적당한 조절이 필요했다. 방금 전에도 무슨 마검마냥 공력을 쭉쭉 빨아먹는 탓에 약간의 탈력감이 일었기 때문이다. 아직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을 마구잡이로 써댔다간 공력이 순식간에 동날 것이다.
청록빛 괴물의 식사가 끝나자, 엘프 마법사와 나는 계속 철로를 따라 걸었다.
유일하게 등이 켜져있는 길이기도 하고, 아까 시티 장벽을 나오며 행선지로 정했던 개척지 ‘롬진’ 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지금 이 철로 근처의 땅은 완충지에 불과했다. 거기는 고절한 흡혈귀들이 임시로 결계를 쳐두었다고 했나.
흡혈귀라······.
그들도 알 헤임달 시티의 이족이긴 하지만, 세상에 그리 자세히 알려져있지 않았다. 아무래도 머릿수가 심히 적은 이족이기에 그런 듯했다. 회복 기능이 있는 수혈팩으로 사업을 한다는 것과 평균적으로 인간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직접 가서 마주하면 알 수 있겠지.
“생각보다 좀 지겹지 않아?”
철로가 계속 이어져 끝날 기미가 없자, 엘프 마법사가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가스등 불빛이 그녀의 웃는 얼굴을 적나라하게 비추었다.
“그래도 개척지 앞마당쯤 가면 언데드들이 몰려들 테니까 걱정하지 마. 거기에 비하면 여긴 아무것도 아니거든.”
“지금도 전혀 지겹진 않은데.”
“롬진에 도착하기 전에 너무 힘을 과하게 쓰지 말라는 뜻이었어.”
그녀와 대화를 하다가 나중에 들은 거지만, 원래 개척지까지는 증기 기관차를 타고 이동하는게 일반적이라고 했다. 굳이 걸어갈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적당한 수준의 좀비들과 어울리며 실전 감각을 끌어올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기에 내게는 좋은 일이었다.
아무튼 이제 걸어온 거리가 꽤 되어 알 헤임달의 장벽 안쪽 도시가 비추는 광원도, 저 먼 하늘에 어렴풋하게만 보였다.
철로와 조금 떨어져 있는 근방의 땅에는 개미지옥이 뚫어놓은 듯한 구멍들이 보였다. 저게 두더지들이 뚫어놓은 구멍인지, 과거 있었다던 벙커로 통하는 구멍인지는 구별이 힘들었다.
장벽과 멀어질수록 점점 사위가 어두워졌다.
인간이 남긴 흔적은 드물었고, 사람도 없었다.
야트막한 구릉과 석탄처럼 검은 흙바닥만이 펼쳐졌다.
그나마 우리를 반겨주는 것은, 주기적으로 굉음을 울리며 철로를 달려오는 기관차 정도.
지금도 저 반대쪽 철로에서 뭔가를 가득 실은 증기 기관차가 또 빼액대며 달려오고 있다. 기관차는 십 분 주기로 철로를 내달려왔다. 꽁꽁싸맨 화물칸에는 석탄이나 광물 같은 것들이 한가득 실려있었다.
— 께에에엑!
증기 뿜어내는 굉음이 들리자 근처의 수준 낮은 좀비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는데, 대부분은 기관차의 전방에 달아둔 충각용 톱날에 산산이 찢겨나갔다. 기관차의 충각용 톱날은 굳은 피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콰아앙—!
육중한 증기 기관차가 압도적인 체급과 속도로 깔아뭉개버리니, 부딪쳐서 살아남는 놈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아주 허접한 놈들만 있는 것은 아니라, 가끔가다 충격을 버티는 좀비들이나 기관차 안으로 기어 들어가려는 좀비들도 보이긴 했다. 그럴 때면 기관사로 보이는 실력자가 손수 바깥으로 나와 처리했다.
당장 저 앞의 상황이 그랬다.
기관차의 세 번째 량에 좀비가 들러붙었다. 다리는 없었으나 손이 두껍고 거대해 악력이 아주 강해 보이는 놈이었는데, 놈이 붙잡은 기관차의 철판이 구겨지고 뜯겨나갈 정도였다.
— 아이 귀찮게 정말요! 너 나와!
그런데 머리를 뒤로 내밀어 놈을 확인하고는, 기관실 밖으로 풀쩍 뛰어내리는 토끼 귀의 기관사. 그는 기관차에 손가락을 박아넣은 좀비를 맨손으로 끄집어 내리더니, 토실한 발바닥으로 툭 걷어찼다.
콰앙!
그러자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며 좀비의 몸체가 풍선처럼 터져나갔다. 놈은 뛰어난 악력을 선보일 새도 없었다.
‘6레벨에서 7레벨 사이쯤인가. 다리 힘은 대단하군.’
수인 특유의 대단한 육체 강성을 이용한 각법(脚法)이었다.
풀쩍 풀쩍!
그렇게 좀비를 일격에 쳐죽인 토끼 귀의 기관사는 달리기로 기관차의 속도를 따라잡은 다음, 창을 열고 기관실로 가볍게 뛰어들었다.
기관사는 무심한 얼굴로 빵모자를 쓰고는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알면 알수록 특이한 도시였다.
“저 토끼, 되게 귀엽다.”
“······.”
엘프 마법사는 그것을 흥미롭게 구경만 할 뿐, 힘쓰는 것을 자제했다. 어차피 그녀가 나서야 할만한 놈들은 이 근방에 돌아다니지 않았다. 개척지라는 곳들이 어떻게 생겨먹었기에 좀비놈들을 이렇게까지 억제하는지 궁금해졌다.
지면에 깔린 어두운 철로는 계속 이어져 있었다.
이게 대체 저승길로 가는 건지, 삼도천으로 가는 건지 모를 정도. 언 선생의 계단 진법 속을 끝없이 헤매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헛수고는 아닌 것이 슬슬 커다란 폭음이 들리는 장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몇분 뒤.
개척지 롬진의 장벽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황량한 땅 위에 정말로 꽤 큰 장벽이 세워져 있었다. 연방 거대도시들의 장벽처럼 웅장하진 못해도 상당히 튼튼해 보였다. 개척지라기에 나무 울타리 정도를 생각했는데, 알 헤임달의 개척가들은 장벽에 꽤 진심인 모양이었다.
“저기가 롬진. 알 헤임달의 개척지이자, 전진 기지라 생각하면 돼.”
콰아아앙—
그런데 엘프 마법사의 그 심심한 말을 화려히 수식하려는 듯, 귓전을 때리는 폭음과 함께 지축을 진동시키는 충격파가 주변부로 밀려왔다. 하늘로 승천하는 불길과 먼지구름이 멀리서도 보였다.
“······.”
높은 하늘 위로 활활 타오르는 불꽃.
나는 그 와중에 어떤 기운을 느끼고는 엘프 마법사를 쳐다봤다. 그녀도 나와 비슷한 것을 느꼈는지, 이제 막 고개를 돌리는 중이었다. 서로의 눈빛이 중간에서 교차했다.
“너도 들었구나? 아니면 느꼈든지.”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7레벨.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생생히 듣는 경지일진대, 방금 그것을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지. 멀리서 터진 폭음을 말함은 아니었다.
철로를 따라가던 우리의 걸음이 멈추었다.
마침, 다음 기관차가 슬슬 다가올 시간이었다.
곧, 철도가 진동하고 기관차의 굉음이 들렸다.
그리고 반대편에서 달려오던 이번 기관차의 기관사는, 전과는 달리 빨래처럼 기관실의 창틀에 널려있었다. 엘프 마법사와 같이 뾰족한 귀를 가진 기관사였다.
“······.”
깨진 유리가 기관사의 복부를 관통했고 얼굴은 형편없이 바스라져 있었다, 뾰족한 귀 부위로 어떤 이족인지만 짐작이 가능했다.
피를 흘리며 질질 끌려다니기라도 한듯, 붉디붉은 선혈이 기관실에 낭자해 있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전투를 벌였다면 응당 있어야할 흔적은 아무것도 없이 깨끗했다. 그러니까 저 기관사는, 저항도 못해보고 단박에 뒈진거다.
“흠, 어쩌지? 오늘 롬진의 상황이 영 아닌가봐.”
적어도 이 상황은, 엘프 마법사가 의도하거나 보여주려던 장면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뾰족한 두 귀의 끝이 바르르 떨리는 점을 보면 말이다.
“가서 물어와 볼래?”
그녀의 명령에 청록빛의 괴물이 단박에 기관차 안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쿠당탕거리며 기관실로 진입한 청록빛의 괴물은 곧 중간 칸쯤에서 의문의 존재와 부딪치며 격렬한 박투를 벌였다. 그에 기관차가 탈선할 것처럼 뒤뚱뒤뚱 흔들렸다.
허나 청록빛 괴물은 곧, 기관차의 옆 창문을 다 깨수부며 포탄처럼 튕겨져 나왔다. 우리가 조금 전에 느꼈던, 정상적이지 않은 존재가 저 기관차 안 어딘가에 숨어 있는게 분명했다.
저대로 달렸다면 필시 장벽 안으로 들어갔겠지. 그 장벽 구멍을 지키던 경비소의 나비넥타이 정도라면 저 놈을 막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때.
철컥, 샷건의 그립이 슬라이드 되는 소리.
옆을 돌아보자 그녀가 샷건을 조준하고 있었다.
펌프액션의 샷건 총열로 막대한 마력이 모여들었고.
곧, 엘프 마법사의 입에서 반가운 음성 영창이 튀어나왔다.
“마나 미사일.”
샷건이 마력의 불꽃을 뿜었다.
쐐애애애액—
거대한 기운은 사방을 잡아먹으며 쏘아졌다.
주변의 소리와 공간마저 잡아먹는 압도적 광역 마법.
증기 기관차의 앞 뚜껑과 충각용 칼날들은 온데간데없이 증발했고, 뒤이어 기관차의 량들이 차례대로 뚫리며 펑펑 터져나갔다. 철도를 달리던 육중한 기관차가 말 그대로 찢겨나갔다.
다음 장면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 으. 아. 악. 씨. 이. 발. 년. 엘. 프. 년. 이!!
기관차 안에 숨어있다가 6위계급 마법에 직격당한 좀비놈이 박살난 기관차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몸체로 굉장한 요기를 뿜는 놈이었다. 못해도 7레벨은 될 법한 좀비가 방금 전의 마법에 하체를 잃은 채로 괴성을 내질렀다.
그 괴성이 끝나기도 전에 엘프 마법사와 내가 동시에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 씨. 이. 발. 씨. 이. 발!!!
좀비놈은 기관차 위에서 욕을 내뱉으며 뒤뚱뒤뚱 발악을 해댔으나, 이미 청록빛 괴물과 박투를 벌인데다가 하반신이 잘려나간 상태라 본래의 힘을 내지 못했다. 놈은 강했으나 엘프 마법사의 샷건과 내 검기에 금세 목이 날아갔다.
그 사체를 청록빛 괴물에게 맡겨둔 채, 고개를 들었다.
달리는 증기 기관차 위에 오르자 저 멀리의 상황이 조금 더 잘 보였다. 저기 롬진이라는 이름의 개척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
개미처럼 작은 형체들이 뒤엉키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얘기.
저 롬진의 장벽 근처에서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싸우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웬 가방같은 물건을 매고 있었는데, 그 가방과 연결된 파이프 밑으로 거친 증기가 뿜어져 나오며 하늘에 몸을 띄웠다. 심장이 비공정의 증기보다도 뜨겁게 끓어오른다는 ‘개척가’ 들로 보였다.
장벽 위에 걸려있는 대형 포탑들은 연신 가스를 뿜어내며 쇠작살을 쏘아냈다. 레벨이 낮은 좀비들의 몸뚱이는 작살에 관통당해 땅에 깊숙히 처박혔으나 요기가 강한 놈들은 오히려 작살을 타고 덤벼들었다.
그리고.
개척가들이 자랑하는 그 개척도시 롬진의 장벽에는 증기 기관차의 파편으로 보이는 쇳덩이들이 처박혀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아까 폭탄을 잔뜩 싣고 지나갔던 기관차가 공격을 받아 폭발한 뒤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실로 아수라장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낯이 익은 광경이기도 했다.
아포칼립스 세계였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바이크가 있으면 바이크를 타고 도망쳤을 것이고, 차가 있다면 차를 타고 도망쳤을 것이다. 다 없으면 뭐 뛰어서라도 도망쳤겠지.
몸을 돌리면 알 헤임달 시티로 돌아갈 수 있었다. 광선을 길들여 손에 익히고 실전감각을 틔우기 위해 나온 것이지, 개척자들이 해내야할 일에 오지랖을 부리러 온 것이 아니었다.
내가 힘자랑을 해봐야 장벽 밖에서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기다. 가공할 무위의 실력자들도 자칫 방심하면 팔다리가 잘리고 죽어 나가는 마경인데, 이미 판단할 것도 없이 저곳에선 큰 사태가 벌어진 듯했다.
그리 생각하던 때.
옆에서 고개를 치켜든 엘프 마법사가 말했다.
“아무리 봐도 문제가 생긴 것 같네! 도와주지 말고 돌아가자. 이거 타고 가면 금방이야.”
이 기관차는 기관사가 죽고 앞의 기관실마저 박살이 났음에도 철로를 따라 빠르게 내달리고 있었다. 이렇게 가만히만 있어도, 아니 뛰어 내려서 돌아간대도 알 헤임달 시티까지는 금방이었다.
허나 나는 엘프 마법사의 말이, 진심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저 말을 한 그녀의 몸은 이미 저만치 앞으로 쏠려있었다. 부서진 기관차의 이어진 량들을 계속 뛰어건너 벌써 끝자락까지 왔다. 당장이라도 기관차에서 뛰어내릴 기세였다.
그렇기에 나는 황당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마탑은 왜 이리 간보는 걸 좋아해? 설마 돌아가자는 말을 듣고 싶은 건가?”
“아니지. 그럼 먼저 갈 테니까, 알아서 따라와.”
내 말에 그녀는 씨익 웃으며 가볍게 윙크하더니, 청록빛 괴물 위에 훌쩍 올라탔다. 기관차 뒤로 높게 도약한 괴물은 그녀를 태운 채 미친듯 내달렸다. 바람에 옷자락을 흩날리며, 펌프액션 샷건을 들고 황야를 내달리는 모습이 일품이었다.
나는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제 네 개가 된 마나 회로로 자연의 마나를 빨아들였다.
이윽고.
육신이 허공으로 부웅, 떠오르며 전투중인 롬진을 향해 빠르게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