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드워프 다르간트 (유료입니다)
#62화.
대장간을 쩌렁쩌렁 울린 그의 사자후가 잦아들자, 이내 단단하고도 정련된 기세의 눈길이 내 면전으로 꽂혀 들었다.
나는 쓰디쓴 입맛을 다셨다.
고작 몇 번 어루만진 것만으로도 앙굴리마라였음을 정확히 짚어냈는데, 여기서 무어라고 구구절절 변명하겠는가.
비무도박에 빠진 발두르 중심유흥가 출신의 은둔 수리공, 구사렴이라는 놈이 섹스토이 부품들로 납땜좀 하고 덧만졌습니다. 하필 기루의 기생들을 고쳐주던 놈팽이 놈이 가지고 있던 게 그딴 것들뿐이라 여체로 만든 건 어쩔 수 없었지요. 그래도 발두르 시티에서 제일가는 섹스토이 부품이랍니다?
···그렇게 구구절절 지루한 소리를 늘어놓을 여건은 되지 못했다. 그랬다간 솥단지만한 주먹이 날아올 듯했으니까.
보통, 심장과 피가 뜨거운 사내들은 그러한 변명 따위를 반기지 않는 법.
나는 있는 사실을 덤덤하게 털어놓았다.
“같이 잘 살아보려다 그만, 그리되었습니다. 만나는 마법사마다 처죽이고 다니는 것보다야 이런 모습이 낫지 않겠습니까.”
한데, 이어진 드워프의 호통이 뜻밖이었다.
“누가 네놈에게 그런 것을 물었더냐!”
“······.”
갑자기 성난 얼굴로 고함을 지르는 드워프.
아무튼, 나를 그다지 신경 쓰는 기색은 아니었다.
혼자 참지 못하고 급격히 열이 뻗친 상태라고 할까.
아무래도 앙굴리마라의 외형을 섹스토이로 개조한 것보다는,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연유로 인해 머리끝까지 열이 뻗친 듯했다.
내가 입을 닫은 새, 어느새 작달막한 드워프의 신형은 다시 화롯가 옆으로 귀신같이 이동해 있었다.
촤아악—
그는 전신을 꾸물꾸물 뚫고 나오는 열기를 식히려는 듯, 팔팔 끓는 주전자를 집어 다시 입에 부었다. 이열치열(以熱治熱)의 수를 적절히 이용해 노기를 다스리는 그만의 방법인 듯싶었다.
이윽고 언짢은 기색이 가시지 않은 드워프가 코를 팽-하고 풀자, 건조한 열풍이 거칠게 불었는데, 그 열풍을 받아 대장간의 대형 화로들이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이 대장간은 화로에 따로 풀무질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저 드워프가 코를 풀면 될 테니.
‘더워 죽겠군.’
나는 그제야 폭포수처럼 흐르는 땀을 적당히 훔쳤다. 저 드워프 근처에만 있어도 루벤카의 타오르는 홍염을 곁에 둔 것만 같았다. 대체 어떻게 되어먹은 육체이기에···대장간의 화로나 용광로보다 저 드워프의 몸뚱이가 더 뜨거울 성싶다.
저 멀리서 열을 식히는 드워프를 보며 생각했다.
괴물을 다루는 이 엘프 마법사도 충분히 고강한 경지인데, 저 다르간트 아저씨라고 불리는 드워프에 비하면 어린이나 다름 없을 듯했다. 나이가 자그마치 백 육십. 사실이라면 알 헤임달의 드워프 중에서도 거의 최고 배분급일 것이다.
그런데 다르간트. 다르간트가 누구더라.
백만방도 포털의 뉴스를 매일같이 읽은 기억과, 인공지능 지니에게 주입받은 지식을 총동원해도 다르간트라는 이름을 잘 모르겠다. 칼드락 스미스의 주인은 명인 드워프 ‘칼드락’ 으로 다르간트라 불리는 이가 아닌데.
하지만 너무도 기백이 남다르다. 손에 칼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조금 전의 망치질만 봐도 규격외 존재임이 명확했다. 게다가 멀고 먼 과거에 앙굴리마라 제작에 손을 보탠 드워프라면 틀림없이 역사적인 인물일 터인데······.
“···앙굴리마라.”
노기를 식히던 드워프는 그제야 열이 조금 식었는지 드디어 제대로 된 말문을 열었다.
“시체로 변절한 이들을 성불시키겠다며 우리 대장간에 도움을 구하기에 흔쾌히 도와주었더니, 전쟁의 전선에서 마법사들을 썰어 죽이고 있더구나.”
“······.”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면의 이야기였다.
빙글 웃던 엘프 마법사도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연신 귀를 쫑긋거렸다. 걸걸한 드워프의 욕설과 한탄이 수염 덥수룩한 그의 입가를 타고 쏟아지듯 흘러나왔다.
“빌어먹을 무림계놈들. 그 일 이후로 아주 학을 떼었다. 앞에서는 비위를 맞추어 저것들을 받아가더니, 기어이 말똥 같은 철학을 욱여넣어 괴물로 만들어 버린 게지. 열반 같은 소리—! 그 생각만 하면 열이 뻗쳐서 편히 잠에 들 수가 없다. 죽일 놈들 같으니라고.”
내가 모든 맥락을 다 파악할 수는 없겠으나.
초인의 경지에 오른 저 드워프와 무림계간에 해묵은 갈등이 있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 앙굴리마라는 하늘이 내린 손재주를 타고났다는 이족의 난쟁이들과 무림계를 지원하는 대형 무기 제조사들의 합작 아래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병기. ]
이것이 내가 아는 앙굴리마라의 탄생사.
저 늙은 드워프가 말하는 내용과는 많이 달랐다.
반응을 보면 이족 난쟁이들과 무림계의 무기제조사들이 합심해 제작한 것이 아니라, 자신도 무림계의 감언이설에 깜빡 속아 넘어갔다는 식이었다.
그는 안타깝다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무림계 놈들이 가져다준 만년한철로 뼈대를 잡아주었다. 부품만 멀쩡하다면 백 년은 더 가도 한 치 틀어지지 않을 게야. 그만큼 정성을 쏟았을진대 무림계에서 저 불쌍한 것들을 어찌 사용했는지 생각하면 복장이 터지는구나.”
헌데.
한탄을 늘어놓던 드워프는 별안간, 기껍다는 듯 장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래도 마법사를 죽이겠다며 날뛰지 않고 착 붙어있는 걸 보아하니, 네 녀석도 그 빌어먹을 열반을 벗은 게로구나. 실로 장하다.”
그는 아힘사를 장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주름 깊은 얼굴에는 도무지 숨길 수 없는 자랑스러움이 드러나 있었다. 저 작달막한 드워프는 누구보다도 장대한 세월을 살아온 역사적인 거인임에도 메가콥의 회장들처럼 무게를 잡거나, 고루한 격식을 따지는 부류가 아닌듯 했다.
그런데 네 녀석도 열반을 벗었다라······.
내 귀에는 열반의 굴레에서 빠져나온 앙굴리마라들이 더 있다는 얘기로 들렸다. 하지만 그 드워프가 어느새 또 코앞까지 다가와 나를 단단한 눈으로 바라보는 통에, 상념에서 빠져나올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입을 여는 대신, 옆에 있던 엘프 마법사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야 본론이었다.
“아저씨, 최근에 연방 정부에서 대규모의 영토 수복을 계획하고 있어요.”
어딘가 못마땅한 드워프의 대답이 들려왔다.
“영토 수복? 이번엔 또 얼마나 죽어 나갈꼬.”
“그래서 부질없이 죽어 나가지 않게 칼 한 자루만 부탁드려요 아저씨. 마탑에 새로 들어온 막내인데, 돈도 별로 없는 데다 칼까지 없고 아무것도 없어서 불쌍해요.”
음. 맞는 말이군.
마탑 막내에 돈 없고 칼도 없고 불쌍한.
나는 백번 천번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탑에서 칼 쓸 일이 뭐가 있는가?”
“특이하게 마법사인데 무인이기도 하거든요.”
“줘봐.”
드워프는 다짜고짜 손바닥을 뻗어 내밀었다.
내가 서둘러 크레딧을 송금하려 하니, 그는 또 쩌렁한 목소리로 호통쳤다. 소리가 어찌나 우렁우렁한지 귀청이 찢어질 것 같았다.
“누가 그깟 크레딧을 달라고 했느냐!”
걸걸하게 고함친 드워프는 내 손목을 덥썩 붙잡았다.
나무토막같이 두껍고 단단한 손가락에서는 압도적인 악력이 느껴졌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대로 내 손모가지를 우그러뜨릴 수도 있으리라. 호신기나 마력 껍질을 두른대도 떡마냥 주무르겠지.
다행히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강맹한 드워프의 기운은 산등성이를 타고 서서히 흐르는 용암처럼 천천히 세맥까지 흘러 들어왔다.
기이한 열기가 전신에 감돌아 땀이 뻘뻘 흘렀으나, 고통은 일체 없었다. 그는 잠시 뒤 손을 떼고는, 옆에 세워져 있던 나뭇대를 들더니 탁탁 내려쳐 타오르는 화로의 불을 줄인 뒤 큰 문제는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균형이 합일하지 못하다. 그래도 시간이 해결해 줄 게다.”
정기신의 균형을 말함인가.
드워프는 그 한 마디말만 마치고는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자연히 시선이 그의 작달막한 뒷모습을 좇았다. 대장간에 들어온 뒤 백 육십 먹은 대장장이의 신위에 정신이 홀려 주변을 신경쓸 겨를이 채 없었는데, 나는 이제야 주위를 크게 둘러보았다.
장관이었다.
제 스스로의 힘으로 신묘함을 뽐내는 명도와 명검들이 그의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척 봐도 합금압축도나 이전까지 쓰다 부서진 10만 크레딧짜리 검과는 가치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보물과도 같은 병장기들. 한 종파를 이끄는 고수의 애병 자리쯤은 능히 꿰찰 수 있는 물건들이었다.
그는 벽면에 걸려있는 검을 하나 뽑더니, 검면을 찬찬히 쓸며 말했다. 투명하고 깨끗한 검면이 용광로의 빛을 반사해 번쩍이며 무인의 욕심을 자극했다. 쉬이볼 수 없는 명검이었다. 드워프의 걸걸한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허면, 손에 맞는 명검을 내어주랴?”
“예, 감히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받아라.”
스르릉—
드워프는 뽑은 검을 납검해 내 쪽으로 건넸다.
그 검집에 아로새겨진 문양마저도 예사롭지 않은 것이, 내게 대운이 따르는 듯 했다. 기대도 하지 않았던 명검이 목전에 있었다. 손만 뻗으면 이 귀중한 것을 잡아 휘두를 수 있다.
하지만 드워프의 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곧, 그의 곧은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이 검을 받아가면 저 앙굴리마라는 나의 손에 들어와야 할 것이다. 과거에 이 다르간트가 만들어낸 것이니, 도로 받아 가야겠구나. 만년한철값은 내 톡톡히 쳐주마.”
나는 드워프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즉답했다.
“그러면 그냥 안 받겠습니다.”
“뭐라?”
검집을 받잡을 준비를 마쳤던 손에도 힘이 풀렸다.
드워프는 불끈거리는 팔로 검을 부술듯이 잡더니 주름진 얼굴로 물어왔다.
“어찌하여 거절하는 게지?”
“앙굴리마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
그의 물음에 대신 튀어나와 대답하는, 어떤 농염한 목소리.
그것은 내 옆에서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리던 아힘사의 음성이었다. 녀석의 옷에 꿰어둔 시곗줄은 흔들리며 차게 철그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힘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앙굴리마라가 아닌, 아힘사이기 때문입니다.”
“흥.”
그러자 코웃음을 친 드워프는 곧장 몸을 돌려 신중한 기세로 검 몇 개를 더 집어들고 검신을 내보였다. 드워프의 두꺼운 손바닥을 타고 검병으로 흘러들어간 기운은 검날을 더욱 예리하게 만들었다. 이 공간에 걸려있는 병기들은 그 하나하나가 모두 훌륭하여 너무도 탐나는 병장기들이었다.
공간마저 잘라버릴 듯 기세를 피워올리는 검신. 내가 가진 백만 크레딧으로는 어림도 없었고, 못해도 천만 크레딧은 들고 와야 흥정이나마 될 듯했다. 기업이나 가문의 인사들이 독차지하는 통에, 시중에는 풀리지도 않을 훌륭한 명검들이었다.
그런 귀물들을 한아름 들어올린 드워프는, 정말 필요 없겠냐는 듯 나를 빤히 바라봤다.
욕심이 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사내로 태어나 어찌 한 입으로 두말하랴. 창피한 짓이지. 나는 아쉽지만 두 주먹을 말아쥐고 들어 올려보였다.
감히 저 드워프를 때려주겠다는 마음은 아니었고, 차라리 주먹으로 싸우겠다는 뜻이었다. 실제로 나는 권법과 각법에도 상당히 뛰어난데다 루돌프놈을 두들겨 패며 몸을 단련해왔기에 권각술에는 꽤 자신이 있었다.
역시 사내는 주먹 아니겠는가.
“좋다.”
헌데 드워프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한아름 들어올린 명검들을 그대로 용광로 속에 던져 처넣었다.
풍덩!
“?”
훌륭한 명검들이 용광로의 불길로 빨려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나는 그것이 못내 황당했으나 저만한 자가 이유없이 화풀이로 저러진 않으리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시선을 그쪽으로 던졌다.
명검들이 내던져진 용광로는 저 바깥 대장간 안에 있던 초거대 용광로가 아니라 금빛의 쇳물이 끓고 있는 작은 용광로였는데, 대체 무슨 금속을 녹여 쇳물을 만들었는지 그 빛깔이 영험하기까지했다.
그다음 일이었다.
드워프는 아힘사의 안광보다도 밝게 타오르는 용광로 쇳물에 우락부락한 팔을 쑤욱 집어넣더니, 뜨거운 기운을 뽑아내어 끝도없이 밀어 넣기 시작했다. 거기서 터져나온 거대한 와류가 출렁이며 대장간 안에 휘몰아쳤다.
잠시 뒤, 본래에도 거품을 내며 팔팔 끓어오르던 용광로의 쇳물이 이제는 아예 흘러 넘칠듯이 박동하며 열기를 발산했다.
무섭도록 집중하여 그 작업에 빠져드는 드워프를 보며, 다시금 몸에 전율이 일었다. 드워프 대장장이는 작달막했으나, 기백이 실로 대단한 거인이었다. 집중하여 피워올리는 기세가 활화산과도 같아 열기들이 대장간의 돌바닥을 녹여버릴 정도였다.
그때였다.
“무슨 일이야! 누가 멋대로 이 칼드락의 굉천용로(宏千鎔爐)를 쓰는 것이냐!”
대장간 안으로 누군가 다급히 뛰어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뒤뚱거리며 허겁지겁 뛰어온 그 드워프는 태산같은 기운을 줄줄 풍겼으며, 무시무시하게 다부진 몸을 가지고 있었는데, 엘프 마법사도 그를 바라보며 칼드락이라고 부르는 것을 똑똑히 들었다.
그러니까 저 드워프가 이 대장간의 진짜 주인인 칼드락인 듯 했다.
그러면 저 다르간트란 이름의 늙은 드워프는 누구인가?
내가 그리 생각하던 하던 때에 칼드락 스미스의 진짜 주인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확인하고서는 흠칫 놀라며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문을 열었다. 엘프 마법사의 옆에 딱 붙어서였다.
“다르간트 노야께 무슨 변고라도 생기셨는가? 오랜만에 본점에 들렀더니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아무래도 저 용광로는 대장간의 주인인 칼드락이 소중히 아끼는 것으로 보였는데, 그 성질 까다롭다는 칼드락도 감히 큰 소리를 내지 못했다.
“네, 검을 만들어 주시려나보네요.”
“······음? 노야께서 갑자기 검을?”
“오늘따라 기분 좋은 일이 있으셨나봐요.”
그 둘이 잡소리를 나누는 와중에도, 다르간트는 극도로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또다른 눈으로 보아야 했다. 알 헤임달의 4대 대장간 주인마저 노야라는 호칭을 붙여가며 조심스럽게 대해야할 존재라······.
— 팔을 넣어라.
순간, 진중해진 드워프의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용광로에 팔을 집어넣고 기운을 흘려넣던 드워프는 어느덧 명검을 잡아먹은 용광로와 하나가 된 듯 전신으로 오색의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런데···저 미친 용광로에 팔을 집어넣으라고?
정신이 반쯤 나간 사내인 나조차도 쉬이 시도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조금 망설이고 있자니, 다르간트의 목소리가 다시금 쩌렁쩌렁 들려왔다.
그것은 호통이되, 호통이 아닌 말이었다.
— 뭘 꾸물대는 게냐? 팔을 집어넣고 기를 흘려라. 네 검을 만들어 줄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