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병장기를 구합시다.
#59화.
나는 결연한 얼굴로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끼익. 끼익.
마탑의 일원이 되어 연방의 영토 수복전에 참여하게 해달라는 말에, 마탑주가 걸터앉은 나무벤치가 꽤 격하게 앞뒤로 흔들렸다. 그럼에도 그의 육신은 약간의 미동조차 없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른 뒤, 뜸을 들이던 마탑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장벽 바깥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나?”
그야 잘 알지요. 어떻게 그걸 모르겠습니까.
저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만, 베풀어주신 만큼은 못해도 일부분이라도 갚고 떠나겠습니다. 그 정도 능력은 됩니다—라는 형식적인 멘트를 다 준비해 뒀건만, 마탑주는 내가 대답할 겨를도 주지 않고 다음 말을 이어 붙였다.
“죽음에서 헤어 나온지 얼마 지나지 않은 몸으로, 마탑의 고강한 마법사들조차 꺼리는 일에 자원하겠다? 그러라고 당가나 연방의 얘기를 꺼낸게 아니니 그만 마탑을 떠나라. 정 원한다면 며칠 정도는 말미를 주마.”
그의 말을 들어보면 단호한 거절처럼 느껴진다.
허나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마탑주의 저 태도는 거절이 아니라 얘기를 더 들어보겠다는 것에 가깝기에.
마탑주의 평소 거절 패턴이라면, 헛소리 말라는 얼굴로 대답조차 하지 않고 눈을 감아버렸어야 했다.
더 이상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거나 무언가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을때, 일레힌 포이체카는 조용히 눈을 감는 버릇이 있었다. 지난 시간동안 심공을 전수하며 눈여겨본 습관이다.
그 가능성을 확인한 나는, 가슴을 콱 부여잡고는 절절한 목소리로 고함 질렀다.
“마탑주님, 가슴 뜨거운 사내가 어찌 그럴 수···!”
“다른 속셈이 있는 게 눈에 훤한데도 끝까지 뻔뻔하게 굴 건가?”
눈치껏 입을 닫았다.
게슴츠레하게 눈을 치켜뜨는 일레힌 포이체카.
아무래도 단전의 내공은 이전보다 충만한데, 연기의 내공까지는 무르익지 않은 터라 마탑주같은 거물을 속여먹기는 무리인 듯 싶다.
이제 잔꾀를 부려 그럴듯한 거짓말을 늘어놓아 봐야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정공법으로 선회했다.
“사정이 있어, 전장으로 가 경험을 쌓고 싶습니다. 적어도 제 앞가림은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라.”
시원한 대답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자세한 이유나 사정의 원인을 묻지도 않는 건가?
내가 솔직히 말을 고하자마자, 일레힌 포이체카는 그 즉시 허락하겠다는 듯 고개를 선선히 위아래로 끄덕이더니 작게 혼잣말을 했다.
이어진 혼잣말을 통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잘 차지도 않는 티오가 하나 줄어서 좋군.
그러나 저게 농담인지 진담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혼잣말을 하던 마탑주는 곧 목청을 가다듬더니, 짐짓 근엄하게 말했다.
“그리도 살고 싶어 하던 놈이 갑작스럽게 죽으러 갈 일은 없으니 체면치레 정도는 하겠지. 하여간 장벽 바깥에서도 지금처럼 신경을 써줄 것이라 넘겨짚은 거라면 필시 후회할 거다. 장벽 바깥은 네놈보다 강한 마법사들도 죽어 나가는 곳임을 명심해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어찌 됐든 가장 중요한 마탑주의 허락을 받았으니, 나도 명쾌히 명심하겠노라 답하며 주머니속의 우르드 에센스를 만지작거렸다. 이 작고 아담한 에센스 병은, 만지기만 해도 몸과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효과가 있었다.
이윽고, 마음을 다 가라앉힌 내가 물었다.
”그런데 연방 정부의 공표가 언제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이것저것 할 일이 있는지라 시간이 조금 필요할 듯합니다.“
“적어도 보름 안으로 윤곽이 잡힐 거다.”
보름이면 한 달의 절반.
다행히 대비할 시간 정도는 넉넉하겠군.
당장 부러진 검도 새로이 장만해야 하니까.
보름이라는 말을 끝내고 돌아선 일레힌 포이체카는, 자신의 키보다 약간 큰 설산목의 표면 껍질에 손을 갖다댔다. 아까 당가와의 협의문을 집어넣은 그 설산목이었다.
“마탑주에 오른 뒤로 한참을 골골대느라 이 꼴이군. 다른 설산목에 비해 너무나 초라해서 힘이나 제대로 쓸런지.”
“?”
그 말대로 그의 설산목은 다른 거대 설산목에 비해 아직 초라했다.
내가 여섯 번째 봉우리 마탑의 비사까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설산목 숲의 거대한 설산목들은 전대 마탑주들이 후대에 남겨 놓고 간 무엇일 것이다. 한데 마탑주가 지금 왜 저런 영문 모를 얘기를 꺼내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콰드득-
갑자기 웬 나무뿌리가 지면을 뚫고 예고없이 솟아올라 내 다리를 묶으려 들었다.
탓!
나는 곧바로 지면을 박차고 솟구쳐 경공을 펼쳤다. 뱀처럼 이리저리 휘어지며 내 신형을 쫓아오는 나무뿌리들은 굉장히 빨랐으나, 전력으로 경공을 펼치는 나를 따라잡지는 못했다. 나는 설산목 숲의 얇은 가지들을 가볍게 딛으며 그 나무뿌리를 피해 다녔다.
약 오 분이 지나자.
“기본은 됐군. 두더지에 당할 일은 없겠어.”
두더지. 땅속의 좀비들을 통칭하는 은어다.
일레힌 포이체카는 설산목 껍질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아마 그 나름대로의 시험을 해본 듯싶었다. 나무뿌리들은 추격을 포기하고 다시 땅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이것은 그 나무뿌리들이 사라진 뒤의 일이었다.
“받아라. 예외의 경우라도 마탑에서 네 개의 팔찌를 받았으니, 다른 이들과도 형평성이 맞아야겠지.”
그리 말한 일레힌 포이체카가 돌연 내 머리에 손을 뻗자, 이번에는 메마른 나무뿌리 대신 진한 청록색의 나무줄기가 땅 밑에서 자라나며 나의 두 팔을 부드럽게 감았다.
곧이어 뇌가 녹아내릴 만큼 정순한 기운이 두 팔에 천천히 주입되는 것이 느껴졌다.
“······.”
나는 거부하지 않고 그 기운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뷔에탕의 저주를 이루는 마력과는 다른, 원한다면 언제든 몸 밖으로 빼낼 수 있는 마력임을 알 수 있었다.
순간, 유크 루베르겐 연방 집행관이 꺼내어 쓰던 청록빛의 마력과 뷔에탕의 살덩이 화신체를 잡아먹은 청록빛 괴물이 머릿속에서 교차되었다.
‘그 청록빛들이, 이런 이유에서였나.’
청록빛의 마력이 두 팔에 자리잡자, 아무런 배움 없이도 이 마력의 사용법을 자연스레 터득할 수 있었다. 나는 양팔에서 묵직하게 전해져오는 마력의 박동을 느끼며 천천히 호흡했다.
잠시 뒤.
화악-
조금 지쳐 보이는 기색의 일레힌 포이체카가 손을 휘젓자, 배경은 다시 뒤집어지며 설산목의 숲에서 서재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는 아직도 책장의 벽에 갇혀 시시덕대고 있는 당절을 한심한 눈으로 흘기며 진중한 목소리로 충고를 늘어놓았다.
“7레벨, 진정한 실력자의 반열로 인정받는 경지다. 적어도 시티 안에서는 그 누구도 쉽게 무시하지 못할 거다. 어지간한 기업에서도 환영받겠지. 하지만 장벽 밖에서도 시티 내에서의 개념이 통용될 것이라 예단하지 마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조언을 끝낸 마탑주는 뭔갈 더 궁금해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마탑주의 청록빛 마력을 부여받은 지금이라면, 첫 번째 생의 부모 성함을 묻더라도 친절히 대답할 자신이 있었다.
“방금 그 움직임은, 경공(輕功)인가?”
“예, 무인들의 경공이 맞습니다.”
“쓸만해 보이는군. 그것도 절세의 경공인가?”
“아, 이것은—”
그렇게 내가 대답을 하려던 차에 마탑주가 찝찝한 얼굴로 흐름을 끊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됐다. 하여간 민폐를 끼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못해도 보름 안으로 채비를 끝내고 마탑으로 돌아오도록. 이제 할 말은 다 끝났으니 나가봐.”
“예, 배려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나는 마음 깊은 인사를 올린 뒤 발걸음을 돌렸다.
와중에 연신 시시덕대는 당가놈의 얼굴이 보였다.
그 위명높은 당가주의 넷째 아들.
이름이 당절이라던가? 저 이상한 녀석 덕분에 당가의 마수에서 수월하게 벗어날 수 있었으니, 나중에 만나면 밥이라도 한 끼 사야겠군.
“당절(當截). 이름이 좋구나.”
기분이 매우 나아진 나는 책장 속에 갇혀 미친듯 실실대는 놈을 향해 슬쩍 엄지를 치켜올리고는, 마탑주의 서재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레반!”
나는 마탑주의 서재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레나와 루돌프, 아힘사가 같이 지내는 마탑 저층의 침실에 들렀다.
오랫동안 미쳐있어 그랬는지는 몰라도 레나를 제외하고는 다들 반응이 뜨뜻미지근했고, 루벤카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레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와 물었다.
“레반, 이제 몸은 괜찮아진 거야?”
“그래.”
“정말 다행이다. 그런데 예전보다 너무 마른 것 같은데······.”
몇 달 만에 제대로 마주한 레나는, 이전과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흑발이었던 머리는 루벤카와 비슷하게 염색이 되어 있었고 전신에는 신체 보호를 위한 위협적인 마나 문신이 가득했는데, 외관을 신경쓰지 않은 걸 보면 당연히 루벤카 그년의 짓이겠지.
또 미약하지만 이전보다 강해진 마력이 느껴졌는데, 지난 몇 달간 마탑에서 머물며 루벤카에게서 마법까지 더 배워 익힌듯했다.
아무튼 나는 간단한 안부를 묻고 답한 뒤, 마탑주와 있었던 일을 적당히 각색하고 조합해 풀어놓았다. 말할 것은 말하고 뺄 내용은 빼고.
“정말이야······?”
당연하게도, 여린 레나는 곧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흐아앙-하는 울음소리가 침실 내에 울려퍼졌다.
반 바이오 컴퍼니는 무너졌고 오너 일가는 살아있지만, 당가의 추격은 오늘로 잦아들 것이다. 레나와 루벤카가 무인들의 고향인 수르트 시티로 가지 않는 이상, 또한 일레힌 포이체카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이상 이전처럼 도망다니며 슬럼가에 숨어지내야 할 일은 없겠지.
그리고 마탑의 일원으로 얼마 뒤 있을 연방의 영토 수복전에 참가한다는 얘기도 꺼내놓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과도 같은 큰 반응이 없었다.
때마침 침실에 들어온 루벤카가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전해 듣고는 스산한 얼굴로 물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9레벨의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가 네게 큰 빚을 져서. 그걸로 몸도 고치고 좋은 영약도 얻고 경지도 올리고 당가의 추격도 뿌리질 수 있었다는 얘기지 지금? 그래서 마나 팔찌도 네 개였던거고? 마탑주는 이제 괜찮고? 당절 그 개새끼도 발할라에서 조용히 추방당할 거라고?”
나는 별다른 말없이 루벤카의 물음에 긍정했다.
“와, 맞구나. 그래 뭐. 무슨 일이 벌어져도 그냥 이해 안 하기로 했으니까······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그렇게 거의 십 분이나 멍한 얼굴로 말이 없던 루벤카는 뜬금없이 메리를 데리고 침실의 구석으로 가 뭔가를 속닥거리더니, 저편에서 당당한 태도로 우쭐댔다. 표정은 뜻모를 자신감으로 가득 차있었고 메리는 뒤에서 우물쭈물대고 있었다.
“레반, 너 우리 메리랑 한번 잘래? 솔직히 예전부터 하고 싶었다며?”
아니나 다를까 헛소리가 튀어나왔다.
둘이서 고작 저딴 내용을 상의하고 있었나.
저러니 내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미친년, 너나 많이 해라.”
“왜? 메리 하나로는 도저히 만족 못 하겠어? 아힘사인가 쟤가 그렇게 잘해?”
진심으로 이해 못 하겠다는 루벤카의 말투.
“······.”
“아~됐어 됐어 그럼. 분명히 네가 거절한거다? 나중에 후회나 하지 마.”
저 루벤카년은 평생 고맙다거나 감사하다거나, 신세 졌다는 말 자체를 배우지 않은게 분명했다. 고심끝에 한다는 게 보상으로 자기 시종과 잠자리를 갖게 해주겠다는 소리인가? 시간만 넉넉했다면 내가 친히 손찌검을 해가며 가르쳐주는 건데. 시기가 아쉽게 되었군.
이윽고, 루벤카는 그 아름다운 외모로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를 상식선에서 이해하기 포기했기에 지을 수 있는 환한 미소인 듯했다.
“레반 네 말이 사실이면, 이제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 근처로 거처를 옮길 수 있겠네. 교수님들께 연락을 드려봐야겠어.”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
“이제 당가 새끼들도 손을 떼겠다, 언제까지 이 마탑에서 눈치 보며 답답하게 살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너처럼 그딴 수복전에 목숨 걸고 참가할 의리도 없고. 나는 당장 레나 데리고 시립 아카데미 근처 도시로 갈거니까, 이제 넌 너 하고 싶은 대로 알아서 살아. 반가웠어. 안녕.”
흥겨워보이는 루벤카의 작은 입에서 말이 속사포처럼 튀어나왔다. 루벤카는 내 대답 따위는 궁금하지 않다는 듯 곧바로 몸을 빙글 돌려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 전의 잠자리 얘기로 우물쭈물대던 메리는 그런 루벤카를 슬며시 도와 널브러져 있던 짐을 챙겼다.
“아휴.”
루벤카의 그 말에 옆에서 조용히 입을 닫고 있던 루돌프놈은 나를 안쓰럽다는 얼굴로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들으라는 듯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형님, 그럼 앞으로 좀 위험하겠네요.”
“그래. 장벽 밖으로 갈 테니까 꽤 위험하겠지.”
“부디 몸조심하시고 언제나 건강하십쇼 형님. 저는 비록 마카데미? 인가 뭔가로 가지만 먼발치에서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캬!”
루돌프놈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놈은 마탑 어디에서 약을 잘못 먹었나?
나는 간지러운 귓구멍을 후비며 말했다.
“돌프야, 너는 나랑 가야지.”
“네?”
“넌 나랑 간다고.”
그에 루돌프놈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자신의 관자놀이에 박혀있는 링크포트를 툭툭 치며 말한다.
“아, 형님이 오래 아프셔가지고 까먹으셨나 보다. 아시다시피 저는 레나님의 수발을 들어야해가지고. 거기 못가요.”
그러자 저편에서 신나게 짐을 싸고있던 루벤카가 콧방귀를 끼며 루돌프의 말을 비웃었다. 신랄한 욕설이 루벤카의 주둥이에서 튀어나왔다.
“저런 못생긴 새끼 더는 필요 없어. 아카데미 근처에서 시종은 또 구하면 그만이고 레나도 쟤를 원하지 않거든. 작별 선물로 가져가.”
“음.”
그래도 저것만큼은 아주 이치에 맞는 얘기가 아닌가.
멍하니 이 정신없는 광경을 지켜보던 레나도 큰 반응은 없었으나, 루돌프가 필요 없다는 말에는 은근히 동의를 표하는 기색이었다.
나는 루벤카의 말을 바로 받아 쐐기를 꽂았다.
“돌프야, 너 이제 필요 없대.”
루돌프놈은 하하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에이, 이건 아니죠. 그래도 그간의 정이 있는데······.”
“그냥 잔말 말고 나랑 가자. 입 아프다.”
“이, 이럴 리가 없다고요!”
그때, 현실을 부정하던 루돌프놈이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싸가지없이 도끼눈을 뜨며 반문했다.
“시발! 애초에 내가 왜 거길 가요. 가면 무조건 죽을거 아닙니까? 제가 외공좀 주워 익혔다고 무적인줄 아세요? 그냥 나 좀 편히 살게 내버려 두라고!”
“그거 생각보다 좋은 외공이다.”
좋은 외공이라는 말에, 루돌프놈은 오히려 게거품을 물며 발광했다.
“익힌 외공이 아무리 수준 높고 좋으면 뭐 합니까! 빌딩 옥상에서 고급 스뽀츠카 타고 제로백 1초 찍으면 좋은겁니까 그게? 예? 떨어지면 어차피 뒈질 텐데!”
꾸욱.
나는 피로한 눈두덩이를 문질렀다.
그래, 원래 태생부터가 이런 놈이었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몇 달간 아주 조용했었다.
하기야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지라 슬슬 예전의 감각이 잊혀져갈 때도 되었다고 생각한 나는, 최근 절정을 맛본 덕에 한층 더 단단해진 손을 들어 올렸다.
몇 달간 외공의 성취가 얼마나 늘었나 볼 겸해서.
“다 필요 없고요! 이럴 거면 차라리 지금 죽.”
콰직!
“역.”
역시 절정의 경지에 올라서 그런가, 아주 신속하다.
내가 민첩하게 손날을 세워 놈의 울대를 강타해버리자, 게거품을 물고 지랄하던 루돌프놈은 굉장히 절도 있는 억, 소리와 함께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대로 놈의 혈도를 몇 개 짚어 간단하게 점혈한 뒤, 그 위에서 무차별적인 권법과 각법 수련을 실시했다. 웬 나무토막 쪼개지는 소리가 마탑의 저층 침실에 낭낭히 울려 퍼졌다.
“······.”
루벤카조차 뒤를 돌아보며 인상을 찌푸릴만한 폭행이었다.
“후.”
아릿한 손목을 휘휘 털었다.
웨스트 정크타운때의 추억도 새록새록 떠오르고 좋군.
그래도 놈의 육신이 꽤 단단한 것이 내가 없던 몇 달간 자신만의 노력과 연구를 한 흔적이 보였다. 심한 육체적 고통을 감내해야만 성취를 얻을 수 있는 부류의 외공이라, 자해를 하지 않는 이상에야 단련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이놈 이거, 확실히 재능이 있지 않은가.
“이제 사, 오 성쯤 되어 보인다. 십이성이 될 때까지 앞으로도 정진, 또 정진해라. 이상.”
나는 어느덧 핏물과 식은땀, 눈물에 잠겨버린 루돌프놈을 대충 발로 밀어 굴렸다. 조금 더 두들길 수 있었으나 마지막쯤에는 갑자기 돌아버리기라도 했는지 맞을 때마다 히죽대면서 웃기에 더 두들기기가 싫어졌다.
“가자.”
나는 기절한 루돌프를 대형 쓰레기봉지마냥 둘러메고 아힘사와 함께 레나의 침실을 빠져나왔다. 허나 곧 뒤를 돌아보았다.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레나가 보였다.
“······.”
“조심히 가 레나.”
눈물이 그렁그렁한 레나의 아련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으나······지금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뭐 평생 못보는 것도 아니고. 루벤카가 성격은 더러워도 레나는 잘 챙기니 괜찮을 것이다. 그리고 루벤카가 말하는 시립 아카데미 근처는 나도 어디인지 대강 알고 있다.
당장 보름 내로 처리해야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기에 반 자매와는 일단 그렇게 이별을 고했다. 레나를 지켜줄 인간이 루벤카 저년밖에 없다는 사실이 통탄스럽기도 하다.
여하튼, 이제 깊게 생각할 것은 보름 뒤 일어날 사태뿐.
마탑주가 연방의 영토 수복 천명까지 보름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고 확언했으니, 그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과연 어떻게 잃어버린 영토를 수복하려고 시도할 지는 모르겠으나, 그 과정에서 전투는 필연적으로 벌어질 것이다. 나같은 소시민은 반드시 철저한 준비가 필요할 테지.
고강한 일레힌 마탑의 마법사들과 같이 움직인다고 해도, 장벽 바깥은 상상하기 힘들 만큼의 위험요소들이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을 터.
나는 보름 뒤, 살기 위해 챙길 것들을 차근차근 떠올렸다.
언 선생의 부적 같은 귀물을 구할 수 있으면 정말 더할 나위가 없을 듯한데, 마탑의 영향력이 닿지않는 발두르 시티까지 다시 돌아가는 것은 무리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도 할뿐더러, 가서 언 선생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다고 해도 상계 부적 같은 귀물을 또 내줄리 없고, 욕이나 잔뜩 퍼먹다가 쫓겨날 것이다. 지금은 시간이 꽤 지났으니 아예 다그의 플라자를 떠났을 수도 있겠지.
그렇다면 우선, 병장기부터 구하는 것이 맞겠다.
저번 루벤카와의 대련에서 박살나버린 검을 대체할 무기가 필요했다. 기왕 검을 구하러 가는 김에 때깔 좋은 총기도 하나 구비해두면 좋을 듯했다.
이전까지는 대강 아무거나 손에 맞는대로 잘 썼다지만, 이 세계의 기준으로 7레벨을 달성한 이제는 힘을 조금 과하게 쓰면 부서져버리는 10만 크레딧짜리 검을 차고다닐 수야 없는 노릇이다. 발두르에서 모아온 잉여 크레딧도 꽤 있으니까.
“발할라 시티에 며칠 내려갔다 와야겠군.”
나는 빠르게 생각을 마치고는 마탑의 가장 초입, 성같은 건축물이 보이는 곳으로 빠져나왔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곧바로 발할라 시티 업무지구 근처의 현물 경매장이나 기업에서 운영하는 프렌차이즈 무기상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힘사를 데리고 성같이 생긴 건축물 앞까지 나오자, 이미 전송진에 앞서 있던 청록빛 상어 괴물의 등판과 그 위에 올라탄 마법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마법사는 여기까지 나온 나를 발견하더니, 친한 척 다가오며 물었다. 웬 마공학 재료로 보이는 날카로운 금속들을 잔뜩 등에 인 채였다.
“오, 어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