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죽더라도 좋습니다.
#58화.
빙긋 웃으며 돌아선 일레힌 포이체카는 잠시 숨을 고르곤 말했다.
“그때 내어주었던 에센스가 많은 도움이 되었나?”
아마도 절정 경지에 오른 것을 풀어 말하는 듯했다.
9레벨급의 힘을 되찾은 마탑주쯤 되면, 내가 이룬 성취 정도야 어렵잖게 알아볼 수 있으리라. 꽤 흥미로워하는 그의 말에 나는 숨김없이 대답했다.
“예, 덕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우르드, 그 괴물에서 뽑아낸 정수가 그 값을 했군.”
“아닙니다. 그 귀물은 아직 그대로 있습니다.”
내가 주머니 속에서 작은 유리병을 조심히 꺼내 보이자, 마탑주가 놀랍다는 듯한 얼굴로 침음성을 흘렸다.
“허!”
9레벨의 좀비에서 뽑아낸 이 에센스는, 몸이 다 부서진 상황에 들이부었다간 혹시 낭비되는 기운이 있을까 염려해 아껴둔 것이다. 게다가 이런 물건은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중히 사용할 생각이었다. 본신의 경지가 고절해질수록 더욱 효과적으로 흡수할 수 있는 천고의 영약이기에.
“중급의 에센스로 단 며칠만에 7레벨이라는 벽을 넘었다. 그것도 저주에 당해 기력이 잔뜩 쇠한 육신으로···그렇다면 정신적인 깨달음은 진즉에 상위 경지에 이르기 충분했다는 말이겠군.”
“그저 천운이 따랐을 뿐입니다.”
그러자, 곧장 호통과도 같은 그의 일갈이 들려왔다.
“기존의 몇 단계를 가뿐하게 뛰어넘어 7레벨의 경지를 덜컥 밟아놓고서 입으로는 운이 좋았다라? 며칠간 중급의 에센스를 마시고 몸을 회복한다고 다들 7레벨의 경지에 오른다던가? 우습지도 않은 말은 이제 그만하지. 그렇게 따지자면 시티의 재벌과 기업의 갑부들은 죄다 그 이상의 경지를 이루었어야 한다.”
일레힌 포이체카는 코웃음을 치며 그리 일갈했다. 내 말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하기야 사무라이 륭만 해도 가진 내공만큼은 7레벨 이상이었으나 절정에 오르지 못하고 있었을 정도이니.
“쓰잘데기 없는 겸손은 어디서 배웠나?”
그래도 그는 더 이상 성취에 관해 캐묻지는 않았다. 갑자기 나타나서는 어디서도 못구할 절세 심법을 떡하니 전수해준 돌연변이인데, 7레벨에 쉬이 오른게 사실 큰 대수겠는가. 일레힌 포이체카에게 나는 그런 존재였다.
“이거나 봐라.”
그러던 그는 갑자기 몽타주 세 장을 꺼내어 내밀었다.
거기에는 레나와 루벤카, 그리고 내 얼굴이 사진처럼 그려져 있었는데 수준 높은 Ai가 그렸는지 실제보다도 더욱 실제같았다. 조금 소름끼치는 점은, 루벤카가 당가의 눈을 피하려 고의적으로 바꾼 외모와 똑같이 그려져있다는 것이었다.
밝은 백금발에 마나 문신의 모양까지, 발할라 산맥 밑 객점에서 보았던 그대로의 외형.
최소한 이 마탑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당가의 감시가 붙어있었던 모양. 아마도 그 당절이라는 놈이 가지고온 물건으로 보였다.
그런데 이걸 왜 나한테 보여주는 거지?
내가 한창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차에, 일레힌 포이체카가 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받아 들고있던 몽타주 세 장이 물에 갠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일레힌 포이체카가 사라지는 몽타주 종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것은 예상을 하고 있었음에도 내 두 귀를 강하게 의심하게 만드는, 꽤 놀라운 말이었다.
“나의 마탑에 제멋대로 침입한 당가의 오만한 직계를 조용히 수르트 시티로 돌려보내주는 대신, 앞으로 더는 반 바이오의 망령들을 쫓지 않기로 당가의 원로들과 조율을 끝냈다. 네놈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밥 먹다가 당가의 맹독에 녹아내릴 일은 이제 없겠지.”
당절이라는 놈의 실수를 덮어주고 이 마탑에서 몸 성히 풀어주는 대신, 당가도 더이상 반 바이오 오너일가를 쫓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
나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할 말을 잃었다.
“······그렇습니까. 그렇군요.”
아까 보았던 종이의 협의 내용이 전부 사실이었군.
자연히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좀전에 마탑주의 서재에서 본 광경을 조합해보면 어렴풋하게 짐작 정도야 할 수 있었다. 허나 실제로 전해듣는 것과 짐작했던 것의 차이는 컸다. 루벤카의 광역 마법에 직격당해 온 살갗이 타들어갔을 때보다 맥이 빠르게 뛰었다.
이리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매듭이 아니었는데.
잉그리드 반 회장의 폭주로 당가의 직원들이 죽었다고 들었고, 루벤카년은 당가의 감시자들을 몇 명이나 죽였다.
원래대로라면 당장이라도 연방법원 재판장에 수갑을 차고 세워진 채 이상한 혐의들이 덕지덕지 붙어 감옥에 처박혔어야했다. 그런데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는 단 사흘 만에 그 독하고 집요한 당가와 이런 협의를 이끌어 낸 것이다.
당가의 직계, 당절이라는 놈이 상황을 크게 잘못 짚어 알아서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고 해도, 또 발할라 시티의 거물인 마탑주라고 해도 당가의 행사에 제동을 거는 것은 나름의 부담이 있을 터.
뷔에탕의 저주를 가지고 협상할 때와는 결이 달랐다.
그것은 서로의 목숨줄을 붙여주는 거래일 뿐이었다.
나는 무선대지신공을 전수해 마탑주의 목숨을 살리는 대신, 마탑주는 뷔에탕의 저주를 풀어주는 것이 맹약의 내용. 그러나 이번 당가에서 나와 레나 자매에게 뻗친 마수를 벗겨준 것은 오로지 일레힌 포이체카의 배려와도 같았다.
세상이 합리적으로만 돌아가는건 아닐 테지만, 마탑주쯤 되는 거물이 내게 이 정도의 호의를 보일 줄이야. 의외였다. 성정이 불같기로 유명하다더니, 정말로 예측하기 힘든 불길과도 같군.
내가 ‘그렇군요’ 말고는 별다른 말을 더 꺼내지 못하자, 일레힌 포이체카는 그제서야 만족스러운 듯 슬며시 웃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다만, 여섯 번째 봉우리의 주인이 바뀌면 즉시 폐기될 협의지. 너는 앞으로도 마탑주가 바뀌지 않길 빌어야겠군.”
일레힌 포이체카에게 변고가 생겨 마탑주가 교체된다면 사라질 협의라는 뜻. 그러나 그 말속에서조차 호의를 느낄 수 있었다. 발할라의 마탑주가 그리 쉽게 바뀔 리 없기에.
발할라 시티의 다섯 마탑주 중, 일레힌 포이체카를 제외하면 내가 알기로 근 수십 년간 바뀐 마탑주는 아무도 없다. 어지간하면 당가와 일레힌 마탑의 협의가 원점으로 돌아갈 일은 잘 없다는 얘기다.
여운과도 비슷한 감정이 길게 남았다.
작금의 상황을 어찌 납득해야 하는가.
나는 그 짧은 새, 마탑주가 내게 뭔가 더 원하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마탑주의 목숨 값은 감히 측정하기조차 힘들 테니, 이것은 어쩌면 정당한 거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라며······같잖은 자기 합리화와 불신의 경계를 아슬하게 오가던 도중, 일레힌 포이체카가 대놓고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당돌하게 마나의 맹약을 운운할 때부터 느낀 것인데, 어떻게 마탑주의 말조차 믿지 못하고 불신하는군. 목숨을 살려준 마탑주도 믿지 못하는데 세상에 따로 믿을 이가 있나?”
“······.”
생각이 표정에 드러나지는 않았을 터.
혼란으로 가득한 내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건가.
아니, 아마도 9레벨이라는 초월의 영역에 올라선 자의 직관(直觀)이리라.
나는 마탑주의 웃음섞인 말에 생각을 고쳐먹고는 고개를 숙였다. 그래, 얼마나 상선같은 개놈들의 뒤통수질에 뇌가 절여졌으면 마나의 맹약마저 받아들인 마탑주까지 의심하나 싶어서.
“마탑주의 체면이 있는데 크레딧 몇 푼에 저런 놈을 쉽게 풀어줄 수는 없지. 그런데 마침 당가에서 그토록 원하는 이들이 나의 마탑에 있어 그들을 골려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적선 한번 받은셈 쳐.”
“예. 적선이 보통 적선이 아니군요.”
나는 덧붙인 마탑주의 몇 마디를 듣고 적당히 납득하는 모습을 보이기로 했다. 마탑주가 적선한 셈 쳤노라고 자신의 입으로 직접 말했으니, 더 이상 불신하는 모습을 보이며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카스트라 뷔에탕의 강화된 저주 마법과 당가의 추격. 마탑에서만 두 개의 거대한 짐덩이를 털어낸 것이 되었다. 덕분에 일레힌 포이체카의 연녹색 머릿결이 마치 든든하고 푸른 산맥처럼 보이려고 한다.
나는 재차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감사드립니다. 마탑주님.”
마탑주는 나름 흡족한 얼굴로 말을 더 늘어놓았다.
“나도 이번 일로 얻은 게 없지는 않으니 과히 예의차릴 것 없다. 그리고 반 루벤카라는 아이는 시립 아카데미의 학장이 꽤 아끼는 제자라지? 이로써 그 고지식한 학장께서도 이 마탑에 마음의 빚을 지게 되었구나.”
들어보니 명확히 나 하나만을 보고 호의를 베푼건 아닌듯 하지만, 그러한들 어떻고 저러한들 어떠한가. 일레힌 포이체카의 권위에 힘입어 일행의 형편이 크게 나아진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아무튼, 당가의 얘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마탑주는 몇 분간 대화를 멈추고 자신의 설산목을 어루만지다가, 별안간 화제를 돌리며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밝은 청년의 목소리였으나 자못 진중한 어조였다.
“그나저나 저 당가의 오만한 직계도 알고 있더군. 연방이 머지않아 영토 수복을 천명한다는 것을.”
우드득.
마탑주의 발밑으로 두꺼운 나무뿌리가 솟아오르며 흔들그네처럼 생긴 나무 벤치를 만들어냈다. 그는 벤치의 한켠에 걸터앉더니 피곤하다는 듯이 머리를 뒤로 기대며 말했다.
“연방은 몇 년 전에도 그랬듯, 잃어버린 인류의 터전을 되찾자는 진부한 이야기로 서두를 열겠지. 그렇다면 발할라의 다섯 마탑도 참여할 것이고, 마탑주인 나는 말할 것도 없다. 영토 수복과 더불어 언데드 토벌전에 참가하려면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니 당분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터.”
연방은 주기적으로 실력자들의 원정대를 꾸려 인류에 위해가 되는 네임드 시체의 토벌을 반복해왔다. 큰 토벌전 같은 경우 일레힌 포이체카같은 거물도 큰 부상을 입고 돌아와 정양에 들 정도였으니 그런 전투들이 얼마나 치열했을지 짐작이 힘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영토 수복 천명이라는 거창한 말이 붙었으니, 일반적인 토벌전과는 규모의 궤를 달리할 듯했다. 일곱 거대도시 각지에서 좀비들의 곡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여하튼 그래서, 네놈은 마탑에서 하산한 뒤 갈 곳을 생각해 두었나? 딱히 없다면 산맥 밑에서 지내는 마법사들을 소개시켜 주마.”
갈 곳이라. 소개라.
이제 슬슬 대화가 끝나갈 기미를 보였다.
이대로 가면 마탑주님 감사했습니다. 하고 서로 행복한 얼굴로 훈훈하게 헤어지는 장면이 그려졌다. 내가 둘둘 두르고 왔던 악연들은 일레힌 포이체카가 친히 끊어주었고, 당절이란 놈은 마탑주가 알아서 쫓아낼 것이니, 이제 마탑에 찰떡처럼 붙어있을 명분도 더이상 없었다.
그랬기에.
나는 마탑주를 향해 망설임 없이 말했다.
“마탑주님, 저도 참여하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자 일레힌 포이체카의 눈가가 주름을 만들며 꿈틀거렸다. 그는 곧 되물었다.
“···무엇에 참여하겠다는 말인가?”
루벤카와의 전투를 치른 직후였다.
이전, 나의 경지가 절정, 그러니까 7레벨에 오른 것은 확실하나 어딘가 많이 부족하고 찝찝했던 그 기분의 원인을 알아낸 때가.
[ 절정이 맞기는 맞군. ]
그것은 정기신(精氣神)의 균형이 크게 들어맞지 않는 것이 원인이었다. 무리(武理)로는 조화경에 진입한 정신에 비해 이제 고작 절정 초입인 한심한 육체간의 괴리가 너무도 큰 탓에 그렇게 느껴졌던 것인데, 감각이 뜨이고 세상과 가까워지는 절정에 이르니 그 괴리감이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이전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새로운 문제였다.
나도 정신이 조화경에 오른 것은 이번 생이 처음이라.
다만.
이 괴리를 해결하는 법은 나도 알고 있었다.
전생처럼 수많은 실전을 겪으며 정기신(精氣神)의 균형을 맞추고 바로잡는다면 몇 년이 가지 않아 해결될 일이었다. 다만 그것은 마탑에 처박혀 운공하거나 발할라 산맥 밑으로 내려가 양아치들을 때려 잡으며 칼을 휘두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연방이 영토 수복을 천명한다는 말은, 곧 시티 장벽 밖의 좀비들을 대대적으로 쓸어버리겠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연방 정부가 마탑에 참가를 강권하지는 않겠으나, 발할라 시티 전체의 경외와 존경을 받는 마탑인만큼 지금까지 마탑은 토벌과 수복전에 참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시티 장벽 밖 각지에서 네임드 토벌전과 큰 전투가 벌어질 테고, 일레힌 포이체카의 말대로 마탑 또한 그 전투에 참여하느라 당분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터.
그러니 정기신의 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실전이 필요한 내게는 커다란 기회였다. 강력하고 수준높은 마탑의 마법사들과 나름 안전하게 전장에서 구를 수 있는 기회.
그렇기에.
나는 촉촉해진 눈망울로, 입에 침도 바르지 않은채 결연함을 뽐냈다.
“일레힌 마탑주님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것이 이리 많은데, 어찌 이대로 인연을 등지고 마탑을 내려갈 수야 있겠습니까? 비록 일이 잘못되어 죽더라도 저는 좋습니다.”
“······.”
내 말에 형언할 수 없는 마탑주의 표정이 보였다.
당연히 일이 잘못 되어도, 죽을 생각은 단연코 없지만.
어차피 실전 경험을 빠르게 쌓아 정기신의 균형을 바로잡고 토대를 단단히 잡아야 한다면···.
안전하게. 강력한 마탑의 마법사들과.
조금 더 편하고 최대한 효율적으로.
뽀득-
내 주머니 속의 우르드 에센스가 빙글, 돌아갔다.
“그러니 이번 연방의 영토 수복에, 자랑스러운 마탑의 일원으로 참가하게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