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퓨전펑크의 전생자-54화 (54/157)

#54화. 발할라 산맥의 마탑 7

#54화.

천지사방으로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친다.

발할라 산맥의 드높은 골짜기를 타고 세차게 솟구친 눈보라는 사내의 몸을 에워싸며 맛난 살점이 다 얼어붙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통크게 중급 에센스 20병을 내리 죄다 처먹고서는 용솟음치는 기운을 다스리러 발걸음을 돌렸던 그 절벽까지 다시 기어나온 나의, 비쩍 말랐지만 곧 맛있어질 살점을.

그러나 눈보라와 함께 불어온 풍만한 마나의 기운들은 나의 전신에 동화되어 불어오는 찬바람을 든든히 막아주었다.

뱃속은 무엇보다 뜨겁고, 살갗은 시리다.

스승이 준 극음초를 멋모르고 먹었을 때와 흡사한, 끔찍하고 시린 한기가 용암과도 같은 열기가 흐르는 육신을 감싸며 오묘한 조화를 이루어냈다.

극한의 추위 속에서 하루. 진즉 눈서리로 얼어붙어 죽어도 이상치 않을 시간이 지났으나,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끊임없이 토해지는 극양의 열기에 콧잔등 위로 더운 땀이 맺힐 정도였다.

기운들은 내가 공들여 움직이지 않더라도, 일레힌 포이체카와 카스트라 뷔에탕의 마력이 술래잡기를 해대며 파헤쳐놓은 기맥들로 파고들었다. 있었던 줄도 몰랐던 전신세맥으로 퍼져나간 기운이 잠들어 있던 감각을 일깨운다.

그러나 그 외에, 큰 움직임은 없었다.

보통 막대한 기운이 통제도 없이 한꺼번에 몰려들면 막혀있는 맥이라도 뚫어보려 지랄발광을 하기 마련인데, 원래 막혀 있어야할 나의 임독양맥은 십수 년 전부터 타통되어 이미 활짝 열려있는 상태였다. 흥미를 잃은 기운들은 결국, 반나절에 걸친 내 인도하에 하단전에 속속 모여들었다.

그렇게, 일단의 갈무리가 끝났다.

“음.”

나는 가부좌를 풀고 일어나 몸을 툭툭 털고는, 새하얀 눈밭위를 시원하게 내달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다리 병신이었던 놈은 이제 탄력적으로 튀어 올라 눈밭 위를 딛었다. 처음 몇 발은 마치 학처럼 고고했으나 아쉽게도 몇 발을 더 옮긴 뒤에는 눈밭위에 자그마한 흔적이 남았다.

답설무흔(踏雪無痕)의 경지까지는 한참 멀었군.

다만, 세찬 눈보라가 어렴풋한 족적을 금세 메워 눈밭 위를 강하게 달려도 마치 답설무흔 경지의 경공고수가 된 듯했다. 나는 그 기분을 적당히 만끽하다가 장엄한 봉우리의 절벽 앞에서 멈추어섰다.

그리고 곧, 의문이 들었다.

‘뭐지?’

불현듯, 천천히 몰려오는 허무함.

이게 전부고, 이게 끝이란 말인가?

영약을 잔뜩 처먹고 전생의 경지를 조금 되찾았음에도 어딘가 모르게 공허했다. 그 느낌이 너무도 괴상한 탓에 절벽 앞에 멈추어 선 것이다.

‘내가 정말 절정의 경지에 오른 것이 맞는가?’

절정(絶頂).

진정한 고수의 경지를 가르는 하나의 거대한 기준선이자 지금껏 보아오지 못한 세상이 열리며 많은 것이 재정립 되는 경지.

중원 무림에서는 비좁은 깨달음의 구멍과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꾸물꾸물 뚫어내며 이룩했던 대단한 경지다.

그것은 왕국의 마법사였던 전생에도 마찬가지였다. 피가 튀는 전쟁터에서 기어코 절정을 달성한 뒤에 막대한 성취감과 뿌듯함으로 며칠 밤을 등신마냥 뒹굴었던가. 하지만 벌써 세 번이나 이룩한 절정이라 그런가, 이제는 별 감흥조차 없는 모양이다.

이 기분도 별것 아니겠지.

나는 걱정을 털어내려 고개를 털었다.

아무튼 이제 한심하게 죽을 일은 없어졌군.

— 하하하!

나는 기분이 그닥 좋지 않았으나, 억지로라도 웃으며 머리를 치켜들었다. 이전보다 상태가 매우 나아진 지금은 아쉽게도 어제 하지 못했던 박장대소마저 가능했다.

쾅쾅쾅!

손뼉을 마주칠 때마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파장이 절벽 위에서 메아리치다 흩어졌다. 나는 아이처럼 신을 내며 박장공(拍掌功)을 극성으로 익힌 고수에 빙의해 부서져라 손뼉을 마주쳤다.

파동이 닿은 절벽의 가장자리에는 거대한 고드름들이 잘 익은 사과처럼 떨어질 준비를 마친 채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누군가 저것이 바로 빙하다! 라고 하여도 절로 고개를 끄덕일 만한 수준의 허옇고 거대한 고드름 줄기였다.

박수를 치던 나는 돌연 검을 틀어쥐었다. 그러자 검의 형을 능히 뛰어넘어 일 척쯤 되는 검기(劍氣)가 주욱 뽑혀나왔다. 허무한 기분을 덜어보려 조금 과하게 신을 낸 덕이다. 나는 만년설이 덮인 눈밭을 강하게 딛고 쇄도하며 전심전력으로 검을 내리그었다.

구우웅.

곧, 세찬 눈폭풍 사이로 집채보다도 큰 고드름 줄기가 육중하게 떨어져 내렸다. 내가 경쾌하게 허공을 주먹으로 때리니, 밑으로 낙하하던 고드름이 산산이 부서지며 뾰족한 얼음조각들이 되어 흩어졌다.

그 산맥 위의 난리통은, 모락모락 열기를 뿜어내는 나의 전신이 한랭한 눈보라에 적당히 식을 때까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에센스덕에 기운이 넘치는 단전은 손쉬운 공력의 수발을 불러왔고, 공력을 최대한 끌어올린 나는 제풀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검기가 일렁이는 검을 휘둘러댔다.

스아악!

유형화된 검기가 낭창대며 발출된다. 하지만 겨우 코앞에 있는 얼음더미만 파냈을뿐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다.

역시.

무언가 이상하게도, 시원시원한 맛이 없다.

‘절정에 발가락 하나만 겨우 걸쳐서 그런가?’

두 번의 전생들과는 조금 다르다지만······.

뭐, 육체가 예전과 같지 않은 탓일 수도 있겠지.

어찌 되었건 중급의 에센스들은 제 할 일을 했다.

절정에 올랐으니, 뷔에탕의 저주에 당해 미쳤을 때와 같이 소중한 발가락이 잘려나가지 않게 조심히 다듬어야 할 것이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다.’

어딘가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닫혀있던 무언가는 확연히 열린 듯했다. 그저 세찬 눈보라에 불과하던 눈송이 결정 하나하나가 각각의 객체로 느껴지며 피부로 와닿는 기분이었다.

더해서 벌써 네 번째 고리를 엮어도 될 정도로, 저번에 쌓아 올린 세 번째 마나 회로의 기틀이 단단히 잡혔으며 마력이 충만했다. 조만간 마나 회로쪽도 손봐야 할 것이다.

카가각.

얼음에 덮인 눈을 걷고 투명한 얼음을 잘라내자 나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비쳐 보였다. 충분한 성취를 이루었음에도 아직도 육체는 바짝 마른 멸치같았다.

넘치는 기운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게 되면, 바로 마탑으로 들어가서 오동통한 겨울 붕어마냥 살이 오를 때까지 밥이나 실컷 퍼먹어야겠군.

“아이고. 고되다.”

공력을 죄다 쏟아낸 나는, 고드름 줄기를 두고 눈밭 위에 하루 작업을 끝마친 막일꾼마냥 대자로 누웠다. 눈밭 위는 시원했다. 하지만 곧 뜨거운 열기가 후욱 뿜어져 나오자, 나의 사지육신에 닿은 만년설(萬年雪)은 그 이름값을 하지 못하고 녹아내렸다.

퍼석.

주변의 만년설을 한주먹 쥐어 목마른 입에 퍼넣었다. 불청객만 없었다면 영원했을 눈덩이는 고작 목을 축이는 정도의 일을 마친 뒤 부질없이 사라졌다. 허나 나는 그럼에도 목이 말라 만년설을 연신 집어 입에 퍼넣기를 반복했다.

발할라의 산맥 위로 세찬 눈보라가 불었다.

*

“흐음······.”

마탑 입구를 문지기처럼 지키던 말단의 마법사들이 분주해보였다. 그들은 안그래도 쓸데없이 깨끗한 실내를 더욱 더 열심히 쓸고 닦았다. 반 루벤카는 대수롭지 않게 그들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요즘따라 마탑의 분위기가 싱숭생숭하다.

마탑주 일레힌 포이체카는 자신의 서재를 아예 폐한뒤로 아직까지 두문불출하고 있고, 마탑주의 서재를 매일같이 들락날락 거리던 팔찌 네 개의 레반은 어느날부터인가 단단히 미쳐버려 역시 폐관 비슷한 것에 든지 몇 달째였다.

마탑 내에서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레반을 제자로 삼았다는 소리도 있었는데, 루벤카가 생각하기에 그것만은 절대로 아닐 듯했다. 일레힌 포이체카는 자기 몸 챙기기에 바쁘지, 한가롭게 제자같은 걸 들일 상황이 아니니까.

그래도 마탑주의 서재를 그렇게 많이 들락날락 거린 사람은 마탑 전체를 통틀어서 레반이 두 번째라던가?

‘그런데 그럼 뭘 하겠어. 머리가 돌아버렸는데.’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레반은 누가 봐도, 확실히 미쳐가고 있었다.

아니, 미쳐가는게 아니라 이미 단단히 미쳤다.

‘뭔가 이상해···왜 이렇게 불안하지?’

사실 루벤카는 레반이 미쳐가든말든 신경을 기울이지 않고 싶었으나, 마음 한 켠에서는 이상한 불안감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가 그 레반에게 팔찌를 네 개나 준 것도 모자라 자주, 그것도 하루에 몇 시간이나 독대할 일이 뭐가 있을까?

물론, 그건 이제 석 달도 더 지난 얘기지만.

이틀마다 음식과 음료를 들고 레반놈의 침실에 방문해주었던 레나마저도 나중에는 자신 때문에 위험해질 지도 모른다며 침실 내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던가.

이제 마탑 안에서 레반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딱 한 명만 빼놓고는.

— 안 돼. 못 들어가.

거대한 청록빛 괴물을 다루는 강력한 마법사는 마탑주의 서재와 더불어 레반의 침실을 아예 봉인하다시피 막아버렸다. 그때문에 루벤카의 의문은 해소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루벤카가 마탑주의 서재에서 흘러나오는 이상하고 기이한 기운을 느낀것이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루벤카는 이 단단한 마탑 전체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거대한 마력이 맞부딪친 것 같은.

루벤카는 그 일이 터지고 얼마 뒤, 레나의 시종을 자처하는 이상하고 못생긴 새 시종놈을 찾아갔다.

레반이 전뇌 칩을 뺀 뒤로, 레나보다도 레반와 더 오래 붙어있었다던 밴스였다. 놈은 레나를 수행할때를 제외하면 항상 괴상한 수련을 하고 있었다. 머리를 벽에 박거나 주먹으로 자기 얼굴을 전력으로 때리는등, 레반뿐만 아니라 이 새끼도 도통 제정신이 아니었다.

“형님이요?”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한 루벤카가 레반의 능력에 관해 꼬치꼬치 캐묻자, 밴스라는 양아치놈은 세상 누구보다도 태평한 태도로 대답했다.

“나도 몰라요. 근데 이전부터 왜 그리 걱정을 하십니까? 루벤카님 입장에서는 죽어도 그만 살아도 그만인 인간 아닙니까. 형님 좋아해요?”

그 헛소리에 루벤카는 결국, 답답한 얼굴로 신경질을 냈다.

“야, 이 멍청한 새끼야. 마탑주와 독대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누구도 말해주지 않고 알지도 못하잖아. 팔찌 네 개를 받은 이유도, 독대하는 이유도. 미쳐가는 이유도. 이러다가 이 마탑에서 쫓겨나기라도 하면—”

“뭐 사내 둘이 끈끈한 우정이라도 쌓나 보죠.”

“······.”

아니, 뭐 이런 황당한 새끼가 다 있지?

레반을 가장 싫어하는 건 자신이 맞다지만, 태평해도 너무 태평한것 아닌가? 철썩같이 믿는 것도 정도껏이지. 이런 상황이 특이하지 않다는 듯, 자기 할 일들만 하지 않나.

루벤카는 도저히 자신의 답답함을 풀 길이 없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런데 때마침.

“어? 형님!”

밴스의 외마디 비명에 눈을 돌리자, 레반이 뚜벅뚜벅 걸어오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머리는 여인처럼 치렁치렁 길었고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 어디 동굴에서 사는 사람 같았는데, 머리와 수염에는 새하얀 눈과 얼음까지 덮여있었다.

루벤카는 눈을 부비며 레반을 바라봤다.

그는 지난 몇 달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석 달넘게 흐리멍텅히 하고 있던 정신나간 눈매는 어디 가고 오늘만큼은 안광이 형형했다. 거의 살기를 내뿜을 정도로 짙었다. 그리고 그렇게 다가온 레반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루벤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찝찝하고 요상해서, 도무지 못 참겠다.”

대체 뭐지.

저게 세 달만에 나타나 한다는 소리인가?

루벤카가 의문스런 표정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자.

오랜만에 나타난 레반은 자신보다도 더 답답해 죽겠다는 얼굴로, 신경질까지 내며 입을 열었다.

“누구 하나 뒈지기 직전까지 한번 붙어봐야겠다. 너 커피 두 잔 사서 따라와.”

“······?”

루벤카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 자기 할 말만 마치고 비척비척 걸어가는 레반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지금까지 했던 걱정이 눈녹듯 사라지며 홀가분한 마음이 된 그녀는, 기꺼운 마음으로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 두 잔을 받아 챙긴 뒤, 레반의 뒤를 무서운 속도로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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