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퓨전펑크의 전생자-52화 (52/157)

#52화. 발할라 산맥의 마탑 5

#52화.

마탑에서 한 달이 더 흘렀다.

쿨럭-

운공을 끝내자 입에서 옅은 기침이 터져나왔다.

나는 곧, 얼얼해진 가슴을 부여잡고는 날뛰는 기운을 적당히 갈무리했다. 이것은 뷔에탕의 마력 때문인데, 요즘 들어 제멋대로 끓어오르려는 기미를 보이고 있다. 나는 그 기이한 마력이 끓어오르려 할 때마다 이제는 직접 힘을 써가며 가라앉혀야했다.

내가 끓어오르는 뷔에탕의 마력을 가라앉히고 있을 때, 일레힌 포이체카의 흡족한 어투가 들려왔다.

【 이제 팔 성인가? 】

“예.”

【 고생했다. 】

그는 오늘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렇듯 마탑주와 감각이 일체된 채로 무선대지신공의 구결을 통해 운공을 마치고 나면, 그의 정신이 한껏 고양되는 시점이 있었다.

서재 공간에 들어찬 마탑주의 마력과 나의 의식이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어 그 시점은 나도 느낄 수 있었다.

그 시점에 마탑주에게 무언가에 관해 물어보면 웬만해서는 귀찮다며 대답을 흘리는 법이 없었기에, 나는 그때가 되면 궁금한 것을 슬쩍 흘리는 식으로 말문을 열었다.

9레벨의 마탑주라면 세상이 돌아가는 중심축에 나보다 열 배는 가까이 있는 거물. 그런 자와 독대하며 질의응답 시간을 가질 수 있다니. 이런 기회는 앞으로도 쉽사리 오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일레힌 포이체카는 불과 몇 년 전까지도 마법계 재벌그룹에서 근무했던 만큼 세상 돌아가는 데에 아는 것이 워낙 많아 넷에서도 잘 찾아보기 힘든,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들에 대해서도 꽤나 자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많은 정보를 얻었고.

내 출신에 대한 것도, 그가 해준 이야깃거리중 하나였다.

【 현재 바이오 기업들의 배양 인큐베이터에서 ‘배양’ 되는 인간이 연방에 몇 명이나 될 것 같나? 】

【 그들은 태초부터 전뇌 컨트롤 칩이 박힌 채 배양되어 장벽 밖 전장에 투입된다. 만약 자라면서 근골이 약하거나 무언가 하자가 있으면 시종이나 성 노리개 쪽으로 빠져 생산된다고 들었다. 】

그래, 그렇군.

그렇다면 내 육신에 하자가 있었다는 얘긴가?

생각해보면 근골이 쓰레기에 몸뚱이 자체가 연약하긴 했지. 마법계 기업에 시종으로 들어간 게 최악인 줄 알았더니, 더욱 최악들이 있었다. 강제로 연방군에 징병당해서 좀비들 상대로 고기 방패로 쓰이다 마지막에는 처참하게 죽거나 아니면 성 노리개가 되거나.

차라리 시종 쪽으로 빠진 것이 천만다행이군.

뭐, 그것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간 일이니 이 다음 질문이 중요하다.

“마탑주님, 그럼 연방의 일곱 거대도시는 언제까지 버티겠습니까?”

【 음. 】

그는 여태까지 금세 대답하던 모습과는 다르게 나름 진중하게 생각해보는 듯했다. 고심하며 허공을 부유하던 일레힌 포이체카의 미간이 좁혀졌다 펴졌다를 반복했다.

그러던 마탑주는 도리어 내게 질문을 해왔다.

【 삼존(三尊), 칠좌(七座), 십이제(十二帝), 연방 대장군, 내가 아닌 다른 마탑주나 무림계의 거목들, 하다못해 기사들의 정점인 검주(劍主)들의 힘을 한 번이라도 견식해 본 적이 있나? 】

당연히 그래본 적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한낱 기업의 시종 따위가 연방의 최정점에 서 있는 거물들의 힘을 무슨 수로 견식해보겠나? 끽해야 퇴출된 십이제, 카스트라 뷔에탕의 꼭두각시를 건드렸다가 진탕 당하긴 했지.

아, 그래도 연방의 장군은 얼마 전에 봤군.

“연방의 대장군까지는 아니더라도, 장군은 어쩌다 본 적이 있습니다. 별이 하나더군요.”

【 그렇다면 준장이군. 어떻던가? 】

연방의 격리 시설에서 보았던 장군은, 좀비로 변절한 6레벨의 마법사를 가볍게 잡아 목을 부러뜨렸다. 나는 그를 보고 느낀 대로 대답했다.

“실로 강했습니다.”

【 강하겠지. 하지만 삼존, 칠좌, 십이제, 대장군, 마탑주, 검주······그들은 연방군의 준장 열 명이 붙어도 어찌할 수 없는 괴물들이다. 그러니 그들이 변절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이 연방은 백 년도 너끈히 버텨낼 것이다. 】

“그렇다면 백 년, 버티겠습니까?”

그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나 싶더니.

【 30년도 못 버틴다. 】

“······.”

연방이 길어봐야 삼십 년도 못 버틴다는 말을, 일레힌 포이체카라는 거물이 그리 어렵지 않게 꺼낸 것이다.

“그들중 누군가 변절하리라 보시는군요.”

내 물음에 서재를 채운 그의 마력이 동요했다. 잠시 조용하던 일레힌 포이체카는 언뜻 자조적인 음성을 보내왔다.

【 인간의 몸으로 감히 오를 수 없는 경지에 오른 자들이다. 힘만 보고 살아온 이들에게 더 큰 힘을 얻을 기회가 있는데 무엇인들 못 할까? 】

“그렇습니까.”

전생의 나는 초절정 경지의 무인이었으며, 6위계를 코 앞에둔 마법사였다. 그렇기에 일레힌 포이체카의 자조적인 대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평생을 경지에 오르기 위해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칼처럼 갈고 닦아온 초월자. 그들의 앞에 비교적 쉽고 빠르게 경지를 상승시킬 수 있는 변절이라는 또 다른 선택지가 생겨난 이상, 무슨 일이 언제 일어난다고 해도 이상치 않았다.

이미 역사적 선례들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내 머릿속으로, 일레힌 포이체카의 감정이 그대로 전해졌다.

【 그리고, 9레벨의 언데드 ‘우르드’ 토벌전에서 파리 목숨처럼 쓰러져나가는 연방군의 병력을 보고 확신했지. 인류가 장벽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한, 연방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

기억을 떠올리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진다는 듯, 그는 한탄하듯 말했다. 청년의 외형을 가진 이가 늙은이의 말투로 내뱉으니 여간 이상한 게 아니었다.

아무튼 나는 잠시 뒤, 또 하나의 의문을 그의 앞에 풀어놓았다.

“그렇다면, 연방은 이때까지 어떻게 버티고 있었던 겁니까?”

【 ······. 】

헌데 그 물음에 일레힌 포이체카는 이제 귀찮다는 듯, 조용히 입을 닫고 눈을 감았다. 보통 저리되면 무언가를 더 물어봐도 그의 심기만 건드리는 꼴이라, 나는 곧장 고개를 숙여 보이곤 서재 바깥으로 나왔다.

*

마탑에는 별별 이상한 종자들이 많았다.

온종일 마법 연구를 마치고 초췌한 얼굴로 기어 나와서는 진한 에스프레소를 한 컵씩이나 꽉 채워 받아가는 자도 있었고, 연무장 같은 마탑의 공간 내에서 실전 같은 대련을 하는 마법사들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었다. 매일 벤치에 멍하니 앉아 수다만 떠는 마법사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내게 호의적이었다.

자신이 소속된 기업을 은연중에 알리며 접근해오는 마법사들도 간간히 있었는데, 아마도 내 손목에 걸려있는 네 개의 팔찌가 주된 이유인 듯했다. 마탑이라도 사람 사는 곳이라 군상들이 비슷했다.

— 안녕하십니까. 저는······.

들어보면 반 바이오보다 작은 기업이 없었다.

내가 반 바이오 컴퍼니의 시종 출신 도망자인 걸 알면, 마탑 바깥에서는 사람 취급도 해주지 않을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긴장을 불어 넣는 존재도 있었다.

— 크륵.

바로 저번의 그 괴물을 다루던 마법사였다.

어느 날은 그가 다루는 청록빛의 괴물이 앞을 떡하니 막아섰는데, 하도 놀란 탓에 피가 섞인 기침이 연신 나왔다.

쿨럭! 쿨럭!

“흠, 너는 저번에 집행관이 데려온······팔찌가 네 개라?”

그는 어떻게 알았는지 루베르겐 집행관이 데려온 놈이라며 날 대번에 찍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공격적인 기색이 없었다.

저자는 괴물 말고도 마법공학으로 제작한 병사들을 다루기도 했는데, 매일 마탑주의 서재 앞에 앉아 그 마공학 병사끼리 싸움을 붙이고 구경하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그러던 그는, 어느 날부터 뜬금없이 마공학 병사를 시켜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마법을 써봐야 내 낮은 수준만 드러내는 꼴이라 검을 뽑아 검기로 썰어버렸더니, 놈은 매우 놀라며 장난 섞인 감탄을 머금었다.

“이야, 마탑에서 검기를 쓰는 사람은 또 처음보네. 취미로 배운 거야? 보통이 아니긴 한데······갑자기 내 병사들은 왜 죽인대? 거 웃기는 놈이네.”

저것도 보통 미친놈이 아니었다.

저런 흉흉한 것들로 나를 공격하려 해놓고 왜 죽이냐니.

그런데 마탑주의 안배가 있음에도 저리 행동해도 되는 건가. 루베르겐을 상대로도 꽤 개기던 걸 보면 아무리 못해도 7레벨의 끝자락에서 8레벨급은 될 텐데···원래 성격이 저리 안하무인인가.

하기야 그럴 만도 하지. 팔찌 네 개를 받은 자가 저런 병사들에 위협당할 만큼 약하리라 생각조차 하지 못할 테니까.

병사를 베어낸 내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조금 조심합시다. 조심.”

“참 나, 뭐라냐? 정신 나간놈.”

나는 그 싸가지 없는 놈을 지나 마탑주의 서재로 들어갔다. 그는 매일 마탑주의 서재 앞에 앉아 마공학 병사로 나를 공격하며 장난질을 쳤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가차없이 검을 꺼내 썰어버렸다.

거의 일주일 가량을 유치하게 기싸움을 걸어오던 놈은, 언제부터인가 다시는 마탑주의 서재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괴물을 다루는 놈이 사라진 시점과 비슷하게······

【 정신 차리고 구결을 똑바로 읊어라! 】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가 어딘가 조금 이상해졌다.

내 질문에 답을 피하는 일이 부쩍 늘었고 이제 나를 서재로 부르는 일도 점점 적어졌다. 마탑주가 무슨 속셈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알 길이 없었다.

마탑주가 이상해진 사실을 명확히 알게 된 날은, 무선대지신공의 전수가 거의 마무리되었을 즈음이었다. 마탑주가 익힌 심공이 십일 성의 궤도에 완벽히 오르자, 태도가 급변하여 나를 다그치는 일이 잦았다.

【 이제 서둘러야겠구나. 시간이 없다. 】

【 쯧, 마나의 맹약만 하지 않았어도. 】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저것이 마탑주가 숨기고 있던 본성이었다.

저번 연방이 어찌 좀비들로부터 버티고 있냐는 내 질문에 답을 회피할 때부터 이상하더라니.

아무리 성정이 불같고 급하다 들었으나, 심공의 전수가 끝나기 무섭게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이에게 이빨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그 황당한 태도에 나는 마탑주와는 이제 아무런 대화도 나누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내 신공을 다 전수받으면 이렇게 될 일이었다지만, 괘씸한 마음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일레힌 마탑주는 마나 회로 재건에 들어간다는 핑계로 나와의 교류를 아예 끊어버렸다.

그는 먼저 자신의 서재부터 완벽히 폐했다.

거의 한 궤짝 분량의 농도 높은 에센스와 마력을 잔뜩 주입한 빛의 구체 수백 개를 서재 안에 들여놓은 뒤, 자신이 서재를 직접 열 때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엄포를 놓은 것이다.

누군가 해코지를 할까,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그 뒤로, 마탑에서의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갔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났으며.

두 달이 넘어갔다.

“씨발.”

그 동안 내 몸은 하루가 다르게 죽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몸을 단련해도 근육과 살이 빠져 빼빼 말랐으며, 간헐적으로 사지 말단을 절어댔고 기침과 두통을 달고 살았다. 이제 수상함을 넘어서 확신이 들었다.

아무래도, 마탑주의 마력과 일체되어 무선대지신공을 다 전수하고 난 이후부터인 듯 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간 멀쩡했던 몸이 갑자기 이럴 리가 있겠는가.

‘씨발. 마탑주를 믿는게 아니었는데.’

나는 등신같이 또 속아 넘어갔구나.

이럴 거면, 그때 로키 시티로 갔어야했군.

곰곰이 생각해보면, 카스트라 뷔에탕은 나를 죽이려고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로키 시티로 자신을 찾아오라고만 말했지.

젠장할. 선택을 잘못했다.

나는 그 뒤에도 하루가 다르게 말라갔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강건했던 육체가 마탑주의 수작으로 먼저 무너지니 뒤이어 정신도 시름시름 앓을 기미를 보였다.

쿨럭! 쿨럭!

이렇게 된 이상, 에센스를 마셔야 했다.

하지만 에센스를 함부로 마셨다가 뷔에탕의 마력이 더욱 세를 불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크게 들어 복용하기가 심히 꺼려졌다. 그렇기에 에센스를 침실 구석에 모두 처박아 봉해두고 다시는 찾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급격히 무너지는 몸 상태로 인해 불면증에 시달리고 괴상한 환청이 때때로 들렸으며 자주 헛것을 보았다. 청각과 시각을 시작으로 오감이 교란되기 시작했고, 어느날은 격렬하게 마탑을 뛰쳐나가 로키 시티로 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나는 그때부터 아무와도 일절 말을 섞지않고 마탑의 침실에서만 지냈다. 나 역시 마탑주처럼 폐관에 들어버린 것이다. 심지어 루돌프놈이나 아힘사조차 만나지 않았다.

누군가 문 안으로 들여놓은 음식이나 음료는 혹여 독을 타두었을까 어지간하면 입조차 대지 않았으며, 레나가 이틀에 한 번쯤 안전한 음식과 콜라를 들고 왔을 때만 허겁지겁 뱃속에 밀어 넣었다.

레나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레나도 어디선가 협박이라도 당하는지 점점 내 침실에 방문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아마도 루벤카 그 악독한년이겠지. 이미 마탑과 한통속일 가능성도 있다.

“후우.”

그래도 나는 온종일 명상과 운공을 번갈아하며 이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렇게 세 달쯤 되었을 때.

반복되는 일상속에서 어느 날, 마탑주가 나를 호출했다. 몸 상태가 많이 호전되어, 드디어 뷔에탕의 저주를 건드려볼 수 있게 되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필시 변명일 터.

오늘이 돼지를 잡는 날이구나. 빌어먹을 새끼.

덜컥!

— 따라오라니까! 안 들려? 귀가 먹었나.

일레힌 포이체카는 마탑에 온 첫날 보았던 괴물을 다루는 마법사를 시켜 나를 불러냈다. 팔찌의 운무 효과로 인해 괴물을 다루는 놈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으나, 실실 웃어대는 게 분명 무슨 꿍꿍이가 있어보였다. 어쩐지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쿨럭!

이쯤 되니 나도 미룰 수 없이 선택을 해야했다.

‘어떻게든 도망쳐야겠군.’

하지만 이 마탑 밖으로 도망친다 해도 해발고도 일만 미터의 봉우리가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성질 포악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마탑주를 어떤 방법으로 설득해야 하는가.

나는 일단, 초주검이 된 몸을 이끌고 어쩔 수 없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괴물을 다루는 놈의 뒤를 따라갔다. 내가 칼을 뽑아 조각상의 주둥이에 넣고 돌리자, 서재의 문이 열렸다.

마탑주의 서재는, 내가 짐작한 그대로였다.

— 레반!

루벤카와 레나가 포박당한 채 무릎 꿇려져 있었고, 지팡이 같은 것을 들고 있는 마탑주의 옆에 녹의를 입은 당문의 유명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여있었다.

웃고 떠들던 그들은 서재로 들어온 나를 바라보며 뭐라뭐라 했는데, 와중에 나를 잡아 오라는 말만큼은 똑똑히 들었다. 내 귀가 얼마나 좋은데.

내가 무릎꿇고 있는 레나를 허탈히 바라보자, 전신을 속박해오는 강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 빌어먹을 놈들, 내 이럴 줄 알았지.”

스르릉—

나는 그 즉시 검을 뽑아 들고 도망칠 준비를 했다. 그와 동시에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본능적으로 다리가 움직이며 마탑주의 서재 밖으로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푸욱!

“!?”

그런데 검을 쥐고있던 내 손이 돌연, 검로를 홱 꺾더니 잘 뛰던 다리를 찔렀다. 나의 무의식속 어딘가에 있는 힘이 갑자기 작용한 것인데, 손이 저절로 검날을 마구 비틀며 허벅지의 근육과 뼈를 파고들었다. 새빨간 선혈이 튀고 끔찍한 격통이 찾아오자 나는 뜀박질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주르륵-

금세 온 하체가 피로 물들었다.

이 상황에 분노하며 고개를 들자, 비열하게 웃음 짓고있는 일레힌 포이체카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뾰족한 지팡이를 들고와 내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서늘한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쿨럭-

나는 다리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입에서는 절규와도 비슷한 비명이 튀어나왔다.

“아니,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게나 말이다.”

일레힌 포이체카의 신형 뒤로 흉흉한 독기를 내뿜는 당문의 인사들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성정이 급한 일레힌 포이체카는 그들이 당도하기도 전에 그 서늘한 지팡이를 강하게 휘둘렀다. 지팡이의 뾰족한 부분은 반전없이 내 목을 찔렀다.

푸욱-

그 지팡이 끝이 내 목을 깊숙이 파고 들자.

화아아악—!

순간, 거대한 마력이 치달리며 다 죽어가던 내 몸속을 마구 헤집었다. 그 마력에 정신이 번쩍 드나 싶더니, 지팡이를 들고 있던 일레힌 포이체카의 비열한 미소가 서서히 화사하게 웃는 얼굴로 바뀌어갔다.

그는 익숙치 않은듯, 잠시 입술을 오물대다가 제대로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마나 회로의 재건이 오래 걸리더구나.”

평소처럼 머릿속으로 보내는 음성이 아닌, 완전한 청년의 목소리를 되찾은 일레힌 포이체카의 진짜 음성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사아아—

나를 잡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오던 당문의 인사들과 묶여있던 레나의 모습이 사막 속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부스스 부서져나가는 그 신기루 속에서.

촤악!

나는 내 허벅지 한짝을 걸레로 만들어버린 검을 뽑아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들자, 푸석푸석하고 하얗게 셌던 일레힌 포이체카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설산목의 풀처럼 윤기나는 연녹색을 하고 있었다.

일레힌 포이체카는 활짝 웃어보이며 말했다.

“한때는 무려 십이제였던 괴물의 저주 마법이다. 세 달간 어찌, 버틸만 하더냐?”

버틸만 하긴 무슨.

나는 몰려오는 격통을 참아내며 마주 웃었다.

“아뇨. 뒈지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래도 조금 더 버텨내야 할 것이다.”

곧, 서재의 허공에 둥둥 떠있던 빛의 구체 수십 개에서 마력이 별무리처럼 흘러나오며 나의 육신을 감쌌다.

일레힌 포이체카의 정순하디 정순한 마력은 나의 기맥으로 거칠게 파고들며 정신을 잠식하려던 뷔에탕의 기이한 마력을 단숨에 찾아내더니, 곧장 맞불을 놓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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