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발할라 산맥의 마탑 4
#51화.
이제 굳게 닫힌 마탑주 서재의 앞에서.
사아아—
내가 의지를 담아 마력을 풀어내자, 하나뿐이었던 아힘사의 마나 팔찌가 두 개가 되었다. 똑같이 한 개를 두르고 있던 메리, 루돌프놈도 마찬가지로 두 개가 되었다.
원래 팔찌 네 개의 구성원도 감히 마탑주의 허락 없이 타인의 팔찌 갯수를 늘려줄 수 없었으나, 나는 조금 전에 마탑주로부터 직접 허락을 받고 나온 참이니 상관이 없었다.
지금 자신의 서재 안에서 기운을 갈무리하고 있는 일레힌 포이체카는, 무선대지신공의 공능을 똑똑히 체험하곤 그전보다 성정이 몇 배는 유해져 내 어지간한 부탁은 전부 들어주겠노라 단언했다.
그래도 적절한 기준을 세워 처신해야겠지만, 적어도 무선대지신공을 전부 배워 익힐 때까지는 일레힌 마탑주의 넉넉한 호의가 지속될 듯했다.
루돌프놈의 호들갑이 정적을 깨고 들려왔다.
“캬, 저는 형님만 믿고 있었습니다. 근데 이제 바깥으로 안 쫓겨나는 거 맞나요? 팔찌 한 개로는 여기에 며칠 못 있는다던데요.”
“돌프야, 너는 아직도 안 기어나가고 붙어있었니.”
“······네.”
“나가고 싶다면 언제든지 나가도 좋다. 마침 발할라 산맥에는 녹림(綠林)의 산채도 없다더구나. 산적들도 추워서 여기서는 못 산대.”
“아닙니다. 곧 죽어도 형님과 꼭 함께하고 싶습니다. 제겐 형님도 모르시는 큰 꿈이 있어요.”
“그러니.”
“예!”
“그래라 그럼.”
“감사합니다.”
몸이 단단해 총알받이로 쓰이기 좋은 것을 제외하면 별 쓸모가 없는 루돌프놈도 일단은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의 중요한 손님이 되었다. 저놈이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는 몰라도, 한 개의 팔찌로는 마탑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는 말 역시 사실이었다.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의 규율 중 하나라던가.
만약 루베르겐 집행관을 통해 마탑주와 엮이지 못했더라면, 레나의 간절한 부탁이 있었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마탑 바깥으로 쫓겨났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니, 갑자기 루베르겐 집행관을 불러다놓고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상선의 캐리어를 타고 발할라 시티로 올 때, 루베르겐 집행관과 줄이 닿은 마법사가 저주마법에 고절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자이길 간절히 바랐었다. 그런데 그냥 레벨 높은 마법사도 아니고 무려 마탑주를 해먹는 거물과 인연이 있었다니.
역시 시티 주민들의 민생을 위해 불철주야 애쓰는 연방의 공무원 답군.
“······.”
이윽고 짧게 상념을 끝낸 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루벤카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메리의 팔목에 걸려있던 팔찌가 실시간으로 두 개로 바뀐 것을 확인하곤 믿을 수 없다는 듯 실소만 연신 흘리는 중이었다.
“하하······뭐야 진짜? 갑자기 팔찌 네 개를 차고 나온다고? 마탑주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거잖아. 대체······.”
갈피를 못 잡고 심히 혼란스러워하는 표정.
나를 향한 루벤카의 불신과 경계심은 이제 그 끝을 모르고 높아질 듯했다.
하지만 마탑주나 루베르겐의 경우와는 달리, 나는 이제 루벤카를 납득시킬 필요조차 없어졌다.
이곳은 마탑이고, 나는 마탑주에게 누구보다 필요한 사내이기에.
보무당당히 루벤카의 앞에 선 사내의 입이 열렸다.
“그걸 안다고 해서 네가 무얼 할 수 있지? 네가 뭘 어쩔 건데.”
“······뭐라고?”
“이 악독하고 성깔 더러운 년아. 애초에 레나를 누가 살려서 여기까지 데려왔는데 여즉 주접을 떨고 있어. 손찌검을 한 번 해야겠나 내가?”
그 가벼운 폭언에.
화르르륵—
루벤카의 전신에서 마력이 들불처럼 일어날 기미를 보이자, 나는 그녀의 눈앞에서 슬쩍 손목을 들어 올려 보였다. 내 손목에는, 네 개의 마나 팔찌가 보석처럼 영롱한 빛을 내고 있었다.
“······.”
그러자 제정신을 부여잡고 금세 마력을 죽인 루벤카는 고개를 떨구며 조용히 분을 삭였다. 콧김이 얼마나 강한지 여기서도 보일 정도였다.
“마탑에서 속옷바람으로 쫓겨나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라. 한 시간이면 얼어 뒈질 텐데.”
“······.”
“앞으로는 잘하자. 내가 천성이 유약한 편이라 협박하고 뭐 그런 거 안 좋아해.”
루벤카의 말문이 턱하고 막히는 게 보였다.
하기야 여기서 무슨 대답을 해도 등신이 될 텐데.
사실 루벤카도 마탑주가 직접 대면하고 두 개의 팔찌를 채워준지라, 당연히 내 독단으로 쫓아낼 수야 없다. 그런데 저년이 일레힌 포이체카의 서재에 들어가서 직접 물어볼 수 있는게 아니니 뭐.
나는 그런 루벤카를 흘겨보며 말했다.
“가서 커피나 한잔 뽑아와봐. 메리 시키지 말고.”
푹.
그 말과 동시에 신속히 움직인 내 손가락이 루벤카의 뺨을 찰흙 찌르듯 눌렀다. 청수도룡뇽을 팔던 발할라 밑바닥 객점에서의 상황과는 정확히 반대였다.
원래대로라면 이쯤에서 슬슬 불타는 숯덩이가 되어 세상을 하직했겠으나, 이곳은 루벤카도 감히 힘을 쓸 수 없는 마탑주의 절대 권역. 마탑이었다.
“······.”
수치심에 구겨진 얼굴을 붉은빛으로 물들이며 몸을 부들부들 떨어대는 루벤카. 조금 더 열이 오르면 거의 졸도하기 직전으로 보였는데, 다 뜯어진 손톱을 꽉 쥐고는 분노를 씹어 삼키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루벤카는 이내, 카페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속도가 너무 느려터져서 저렇게 가면 언제 커피를 뽑아오나 싶었다. 어차피 뽑아와도 다 식었을 테니, 마시지는 말아야겠군.
역시···
남의 권세를 방패 삼아 떵떵거리는 것만큼 세상에 즐거운 일이 없다. 이래서 간신배들이 나중에 목이 뎅강 잘려나갈지언정, 권력자의 옆에 딱 붙어 유세 떠는 짓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구나 싶었다.
이 짓거리······자의로는 쉽게 멈출 수 없겠군.
“루, 루벤카님······.”
곧, 안절부절못하는 메리가 내 눈에 들어왔다.
“메리.”
“?”
나는 발을 동동 구르는 메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반 바이오 컴퍼니에서 일이 생기기 전, 시종의 숙소에서 농락당했던 메리와의 대화들이 문득 생각이 났기에.
“지금 저 루벤카라면 너랑 몸을 섞는다 해도 허락해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지?”
“······.”
그때는 능청맞았던 메리도, 오늘은 내 질문에 답을 하지 못했다.
*
이튿날.
마탑 상층의 침실에서 깨어난 나는, 꽤 오랜만에 청수처럼 맑아진 정신을 만끽했다.
두 발 쭉 뻗고 기절하듯 잠들어본게 대체 얼마만이던가. 상선의 캐리어 위에서도 이 정도로 편히 자지는 못했는데, 마탑이라는 공간이 주는 안정감이 있는듯 하다.
살짝 아쉬운 점이 있다면 넷 연결이 심히 불안하고 자주 끊긴다는 것 정도. 해발고도가 너무나 높은 탓에 그런 건지, 혹은 양파처럼 쌓여있는 마탑의 특이한 환경 때문인 건지는 모르겠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마탑주의 서재에 들렀다.
조각상 주둥이에 칼을 꽂고 돌리자 종소리가 청아하게 울리며 삼면으로 가로막힌 거대한 책장들이 나를 맞이했다.
오늘도 허공을 부유하고 있는 마탑주는, 어제보다 한결 편안한 표정이었다.
“몸 상태는 좀 어떠십니까?”
이것은 그저 빈말이다.
어제는 일레힌 포이체카의 마력과 일체되어 무선대지신공의 공능만 잠시 펼쳐 보여 주었을 뿐, 하루 사이에 그다지 큰 변화는 없었을 테니까.
【 괜히 처세 한답시고 뜸 들일 것 없다. 바로 시작하지. 】
“예, 그러시죠.”
일레힌 포이체카는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지체없이 가부좌를 틀고 음성을 보내왔다.
이윽고 그의 머리 위로, 어제와도 같은 마력의 별무리가 쏟아졌다.
나는 그 뒤로 매일같이 마탑주의 서재로 찾아가 무선대지신공의 구결을 전수했다.
일레힌 포이체카는 마나 회로를 과도하게 운용한 탓에 회로가 터져나갔지만, 대마법사와 전투를 벌였던 내 전생의 상태보다는 상황이 조금 나았다.
그러니 단전을 만들고 정순한 기운만을 무선대지신공으로 걸러 운용할 수만 있다면 목숨을 건지는 것은 물론이고 손상된 회로까지 충분히 재건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 게다가 9레벨의 육신을 가지고 있어 평범한 이들보다도 회복력이 월등히 빠를 것이었다.
자신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 그런지, 일레힌 포이체카는 순간마다 맹렬히 집중하여 빠르게 심법의 구결을 습득하고 있었다. 급하고 불같은 성정이 배움에 있어서도 적용되는 듯했다.
그렇게 며칠.
마탑주가 단시간에 이룩한 성취는 눈부셨다.
‘벌써 삼 성인가.’
무선대지신공에서 신공은 괜히 신공이라 불리는 게 아닌지라 고작 며칠 만에 뚝딱 배워 익힐 수 있는게 아닌데도, 이대로만 간다면 시간마저 괴물 같은 마탑주의 습득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듯했다.
나는 일레힌 포이체카의 전신에서 청량하게 뿜어져 나오는 마나 줄기를 보며 생각했다.
‘아무리 마력으로 길을 이끌어 준다고 해도 그렇지, 이대로 익히면 극성까지 전부 익힌다 쳐도 얼마 안 걸리겠군.’
보통 몇 년은 내리 산속에 처박혀 익히는 것을, 실로 미친놈이 따로 없었다. 무공의 무자도 모르던 이가 익히는 속도 치고는 빨라도 너무 빠르니 대견한 마음보다는 하루하루가 경탄의 나날이었다. 재능있는 제자를 보는 스승의 마음이 이런 건가 싶었다.
뭐, 저만한 경지를 밟기 위해서는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이 자질과 재능일 테니까. 더해서 마탑 구성원들이 주입해둔 정순한 마력과 농도 높은 에센스까지 아낌없이 몸에 퍼붓고 있으니 이리도 놀랄 일은 아닌가.
그간 마탑주의 입으로 들어가는 에센스들을 보자면, 정크타운에서 벌어들였던 크레딧이 장난감처럼 느껴졌다. 수백만 크레딧은 족히 호가할 에센스들을 물처럼 마셔대는 수준이라 보고 있던 나까지 금전 감각이 마비되어버릴 지경이다.
일레힌 포이체카는 마탑주의 위를 이어받으며 일레힌 그룹과 공식적으로는 연을 끊었다지만, 곁에서 지내보니 일레힌 그룹에서 뒷구멍으로 지원해주는 자금이 보통이 아닌 듯했다. 저 에센스들도 그렇고.
하기야 가문에서 9레벨의 전력을 배출한 것도 이미 눈부실 정도로 명예로운데, 발할라의 마탑주까지 해 먹으면 대체 얼마나 자랑스럽겠나. 그룹도 알게 모르게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라는 훌륭한 배경을 잘 써먹고 다니겠지.
아무튼 그렇게,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고.
스아아아—
이제 일레힌 포이체카의 전신으로 하릴없이 새던 기운들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못해도 절반쯤 줄어든 것 같았다. 깨진 독의 구멍을 벌써 절반 쯤은 막았다는 소리다.
그는 이제 몇 주일만 더 흐른다면, 나의 도움 없이도 무선대지신공의 공능을 전부 끌어낼 수 있을 듯했다.
내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꽤 순조로운 듯합니다.”
【 ······그래, 이건 놀랍구나. 】
마탑주의 단전은 이미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고 무선대지신공으로 여과시킨 에센스의 기운들과 깨진 회로에서 줄줄 흘러나오던 마력이 줄기를 틀어 그 안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충만한 마력의 기운을 단전으로 받아들이며 입을 열었다. 쩍쩍 갈라지던 목소리도 이전보다는 훨씬 들어줄만 했다.
“고생했다. 가지고 나가라.”
곧이어 허공을 부유하며 다가오는 하나의 주머니.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것은, 중급 정도의 에센스일 것이다.
나는 그간 마탑주와의 맹약에 따라 넉넉한 에센스를 배급받았다.
마탑주가 부어대는 양에 비하면 콩고물 수준이지만, 그 콩고물이 너무 거대해 가슴이 벅찰 지경이었다.
하지만 내 몫으로 받은 에센스는 조금만 섭취하고 대부분 아껴둘 수밖에 없었는데, 에센스를 먹자마자 뷔에탕의 마력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에센스의 기운을 처먹고 몸집을 불려버리는 기적을 발휘했기 때문이었다.
‘괴물 같은 년.’
실로 개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어 혀를 내둘렀다.
만약 일레힌 포이체카와 이리 잘 풀리지 못했다면 진짜 카스트라 뷔에탕 그년과 독대하러 갈 뻔했잖은가.
내가 살아온 다섯 번의 생을 다 합친 만큼 이 세계에서 살아왔을 거대 범죄조직 보스와의 동침이라니, 나는 절대 사절이다.
뷔에탕이 아무리 대단한 힘을 가졌대도 연방의 공적이기에 마탑까지 처들어올 일이 없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나는 마탑주의 서재에서 나와 걸음을 옮겼다.
한바탕 마탑주와의 일체 운공과 무선대지신공의 전수가 끝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시간을 얼마든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팔찌 네 개는 생각보다도 더 유용했다.
일단 마탑의 어느 공간이든 나는 드나들 수 있었다. 팔찌 세 개만 해도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꽤 되어 만족하는 이들이 많다고 했는데, 나는 마탑주의 서재를 포함해 거의 모든 공간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마탑 곳곳에 있는 전송진을 이용해 마탑주의 마력이 지배하는 마탑 내부 어디든 갈 수 있었는데, 성 건축물은 물론이고 마탑의 각층, 그리고 발할라 산맥의 장대하고 아득한 정경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외부까지도 이동할 수 있었다.
그 외부는 절벽 위에 세워진 암자 같은 곳이었는데, 숨이 차고 날씨가 더럽게 추워서 그렇지 기(氣)가 무지막지하게 충만한 곳이었다.
그냥 장소 자체에 에센스를 녹여 풀어놓은 듯한 기운이 존재했다. 극한의 추위와 폭풍보다 더한 눈보라만 버텨낼 수 있다면 수련할 맛이 나는 곳이었다.
정크타운, 그 쓰레기만도 못한 대기질에서 꾸역꾸역 기를 뽑아 내공을 토납하던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과장 조금 보태, 들이쉰 호흡이 곧 나의 내공이 되어 단전에 쌓일 정도.
나는 살을 에는 산맥 정상의 눈보라를 맞으며, 안주머니에 조심스레 손을 넣었다. 곧 작은 병 하나가 빠져나왔다.
찰랑—
비추어 보는 각도에 따라 빛깔이 달리 보이는 신비한 액체. 작은 향수병보다도 더 작은 유리병에 아주 소량만이 들어차 있었으나, 그럼에도 그 존재감을 사방으로 발산하는 액체가 보였다.
마나의 맹약을 맺은 날,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가 호탕히 웃으며 말하길.
【 9레벨 언데드 ‘우르드’ 에서 뽑아낸 에센스다. 토벌전에서 내 몫으로 받아온 것의 일부지. 양은 적긴 해도 나의 목숨값 정도는 충분히 하지 않겠느냐? 】
예.
충분하고 말고요.
당장은 뷔에탕의 빌어먹을 저주가 신경 쓰여 감히 마실 수 없겠으나···조만간 막대한 기를 꽉꽉 눌러 담고있는 이 에센스는, 나와 한 몸이 될 것이다.
다만 아직 이곳에서 에센스를 마신 뒤 운공하는 것은 무리였다. 때가 오면 다시 오겠노라 굳게 마음먹은 뒤, 발걸음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