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발할라 산맥의 마탑 3
#50화.
순식간이었다.
마치 비디오를 되감기 하듯.
내 입을 막기 위해 달려들던 루벤카의 형체가 멀어진다.
청록빛의 마나 덩어리로 변한 팔찌가 번쩍이며, 루벤카를 마탑주의 서재 밖으로 끌고 나갔다. 루베르겐 집행관을 포함한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나를 제외한 모두가 마탑주의 서재 바깥으로 밀려났다.
쿵.
뒤이어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나니, 서재 공간에는 나와 일레힌 포이체카만이 남아 있었다. 사라진 이들의 자리에 적막함이 대신 들어차며 장내를 새로이 메웠다.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방금 전 자신의 절대적인 권위를 내보인 그는, 지금도 허공을 부유하며 존재감을 사방팔방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전신을 옥죄어오는 압박감과 이 막연한 두려움.
발할라의 거물중 하나인 9레벨을, 그것도 이리도 가까운 거리에서 독대한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마나 회로가 훼손되었다고 해도 확실히 9레벨은 어딘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공에 가만히 선 일레힌 포이체카가 움직였다.
이제 두 눈을 뜬 그가 돌연 옆으로 팔을 뻗자, 큼지막한 유리병이 날아와 손에 잡혔다. 유리병 안에는 곤색의 액체가 수은처럼 찰랑거리고 있었는데, 꽤 농도가 짙은 에센스로 보였다
일레힌 포이체카는 마치 지겹다는 듯, 찡그린 얼굴로 에센스를 단숨에 마셔넘겼다. 그는 저리 값비싼 에센스를 물처럼 마시면서도 별다른 기색을 내보이지 않았다.
그가 호흡을 고르는 동안 가만히 서서 기다리자, 이내 머릿속으로 하나의 음성이 울렸다. 이제 막 청년기에 접어든 듯한 사내의 음성이었다.
【 말해봐라. 】
동시에 비수처럼 꽂혀드는 지긋한 시선.
전신을 옥죄는 압박감이 한층 더 맹렬하게 다가왔다.
“······.”
나는 일레힌 포이체카의 말에 잠깐 망설이는 모습을 내비치다가, 송구스럽다는 얼굴로 입을 열 준비를 했다. 아직 저 일레힌의 진의를 다 파악할 수 없으니, 뭔가를 말하란다고 하여 술술 불어버릴 생각은 없었다.
또, 당장은 내 말에 관심을 크게 기울이는 것이 확실하다. 구태여 저자세로 빌빌 기어 다닐 필요까지는 없으리라.
“마탑주께서는 저주 마법에 대해 잘 알고 계십니까?”
촤라락—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서재 어딘가에서 낡은 서책들이 드르륵 뽑혀 나오더니, 허공에 떡하니 자리했다.
유심히 보니 저주 마법에 관한 마법서였는데 내가 원하는 내용은 아니었다. 나는 뷔에탕의 저주 마법을 해결해줄 수 있냐는 의도를 담아 물은 것이다. 그도 분명 눈치채고 있을 테지.
헌데 그때, 굳게 닫혀있던 그의 입이 열렸다.
“특이하군.”
머릿속으로 직접 전달하는 것이 아닌 실제 일레힌 포이체카의 목소리. 가뭄이 든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지고 듣기 힘든 쇳소리가 나는, 다 죽어가는 자의 음성이었다.
“첫 회로가 만들어진지 반 년도 채 지나지 않아 보이는데 세 개. 심지어 첫 회로 두 개는 하룻밤 사이에 만들어졌군. 몸에 기이한 마력이 파고든 건, 그다음의 일이니.”
그 말은 나를 충분히 황당하게 만들었다.
저거 지금 내 회로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아무리 9레벨 경지의 마법사라지만, 더해서 이 서재 전체가 일레힌 포이체카의 권역이라고는 해도 잠시 몸을 훑어본 것으로 그런 것까지 세세히 알 수 있단 말인가?
고유의 마법인지는 몰라도 꽤 놀라운 일이었다.
쿨럭-
말을 다 마친 일레힌 포이체카는 몇 번이나 쿨럭거리더니, 다시 머릿속 음성으로 말을 전해왔다.
【 각설하고, 용이 된다는 것은 단전을 말함인가? 】
결국, 네가 먼저 털어놓으란 거다.
아무래도 뷔에탕의 저주에 관해 얘기를 나누는 것은 일레힌의 궁금증을 풀어준 다음이 되겠군.
그나저나 단전을 집어 얘기 하는 것을 보면-
그도 살아오면서 겪은 경험과 굴곡이 보통이 아닌지라, 내가 아까 에둘러 말한 것을 곧바로 알아챈 듯했다. 나는 일레힌 포이체카의 말대로 단전을 만들 것을 권유할 생각이었다.
일단 하단전을 만들어 줄줄 흘러 나가는 마력을 옮겨 담은 뒤, 후에 마나 회로를 고쳐 후일을 도모하는 법. 내가 전생에서 제국의 대마법사에게 죽었을 때도, 회로와 단전이 같이 망가지지 않고 멀쩡했다면 충분히 살아남을 수도 있었다.
“예. 마나를 담을 그릇이 깨져 줄줄 새어나가니, 새로 만들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세상에 통용되는 법칙을 한 꺼풀 벗어던진 존재가 9레벨이라지만, 그마저도 완벽히 부술 수는 없는 법.
편법으로 저렇게 수명을 늘리곤 있지만 오래는 못 간다.
마탑주는 지금,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가며 현상 유지만을 지속하는 중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독의 구멍이 넓어져 물을 부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된다. 일이 생긴 토벌전이 4년 전이었으니 그때부터 이렇게 버텨온 것 같았는데, 아직 살아있는 것 자체도 감탄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일레힌 포이체카는 몸을 빙글 돌리며 말했다.
【 역시나······예상했던 대로 시시한 얘기로군. 】
내 대답에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
서재를 채운 마력이 파도처럼 격하게 일렁였다.
그러면서 일레힌 포이체카의 면면이 조금 더 정확히 보였는데, 머리가 하얗게 센 청년의 모습이었다. 그 청년이 신경질적으로 일갈하자 서재가 우르릉 흔들렸다.
【 이 내가, 그깟 방법조차 알아내지 못해 이러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
“······.”
마지막에 가서는 자제했지만, 그의 음성에 담긴 마력의 파동만으로도 가진 성정이 여간내기가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9레벨 마법사의 분노가 서재 안에 해무처럼 짙게 깔렸다. 여기서 말 한마디라도 잘못 했다간 산맥 봉우리에서 만 미터 절벽 아래로 내던져질 듯했다.
이윽고.
【 봐라. 】
삼면을 드높이 채운 책장들에서 거칠게 뽑혀 나온 심법서들이 내 눈앞으로 촤르륵- 펼쳐졌다. 그 수가 장장 오십 권을 넘어갔는데, 마탑주가 칩거에 들어간 시점이 4년이니 고작 4년 동안 이만한 양을 모았다는 뜻이 된다. 서책이 아닌 데이터 칩으로까지 모아두었다면 보이는 이것들보다 더욱 많을 것이다.
나는 짐짓 놀란 얼굴로 그 심법서들에 시선을 가져갔다.
“많군요. 이걸 다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그러면서도 속내는 달랐다.
‘쓰레기군.’
내 눈으로 보기에 쓸만한 심법서는 없었다.
개중에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것은 청공진결(淸空進訣)이라는 심법이었는데, 저것마저도 일류 심법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다.
척 봐도 가진바 한계가 명확한 심법들이다. 잘 쳐주면 무림계 중견 기업들의 비전(祕傳)심법 정도는 될지 몰라도, 절세라 일컫기에는 한참 부족했다.
【 무인(武人)들처럼 단전을 만들어 그릇을 새로 짜고 그 속에 흐르는 마나를 옮겨 담으라는 조언을 하려는 거라면, 한 번은 넘어가줄 터이니 다시는 내 마탑에 얼씬거리지 마라. 】
그런가.
마탑주는 진즉 자신의 활로를 알고 있었다.
이 세상에는 마나 회로와 단전을 같이 만드는 자들이 없다시피하기에 도움이 되리라 여기고 말을 꺼낸 것인데 방법을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졌군.
그런데 마탑주의 일갈을 듣고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까 그 괴물을 다루는 자가 읽고 있던 심법서와 저 수많은 심법서들.
내 생각일 뿐이지만, 팔찌가 네 개였던 그자도 일레힌 포이체카의 몸 상태를 호전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지 않나 싶었다.
무인들처럼 단전을 만들어낸 뒤 아주 정순한 마력을 담을 그릇을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조금 늦더라도 재기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리하려면 문제가 하나 있는데, 어지간한 심공으로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는 것이다. 자그마치 9레벨 마법사의 기운을 담아낼 그릇을 허접한 심공으로 때워 제작할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나.
그러니까.
‘방법은 이미 알되, 맞는 심공을 찾지 못했군.’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무림계 메가콥이나 대기업들이 일레힌 마탑주에게 자신들의 심법을 내어줄 리가 없으니까. 당장 같은 무림계에도 풀지 않는 심법을 마법계의 인사, 그것도 마법계를 대표하다시피 하는 마탑주에게 덜컥 내어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렇다 해서 성정이 불같은 이 마법계의 거물이, 수백 년 앙숙인 무림계 명숙들의 앞에 고개를 숙인채 심법을 구걸할 리는 더더욱 없는 일이다. 정당한 거래라면 또 몰라도.
그렇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마탑주님. 이런 말씀 드리기는 좀 죄송한데, 어째 심법서의 수준이 죄다 쓰레기같군요.”
【 ······. 】
일레힌 포이체카의 적당히 벙찐 얼굴을 보아하니, 그도 내가 말한 사실을 알고 있는듯 보였다. 하기야 이류나 겨우 될 법한 심법서들인데 그 사실을 왜 모르겠는가.
나는 더 뜸 들일 것 없이, 곧장 본론을 꺼냈다.
“방법을 알고 계신다 하니 대화가 더 편하겠습니다. 제가 마탑주님께 맞는 훌륭한 심법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 지금 그걸 나더러- 】
“저따위 하류들이 아닌, 구파일방급의 무림계 기업들도 탐낼만한 심법이라면 어떻습니까.”
나는 첫 마디를 마치기가 무섭게 재차 말을 이었다. 중간마다 성질 급한 일레힌의 차가운 음성이 내 말을 가로막으려 했으나,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걱정하시는 것처럼 기운의 길이 들어맞지 않아 마나 회로와 충돌해 공멸하지도 않을 것이고, 정순치 못한 탁기가 쌓이지도 않을 것이며, 감히 무당의 양의무극신공(兩儀無極神功)이나 소림의 대승반야선공(大乘般若禪功)과 비견해도 뒤처지지 않을 것입니다.”
【 ······. 】
마탑주가 걱정하고 있는 바를 나도 알고 있었다.
애써 익힌 심법이 회로와 충돌할지도 모른다는 것.
아무거나 주워 익혔다가 탈이 더 크게 나면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될 테니까.
물론 내가 익힌 무선대지신공은 마나 회로와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생의 기억과 지금 생의 경험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을 모르는 마탑주로써는 어떤 심공을 익혀야 하는지 알 방도가 없어 답답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최대한 수준이 높은 심공을 찾고 있었을 테지.
무림계에 고개를 숙여 구걸한다는 선택지에 비하면, 나라는 선택지는 꽤 먹음직스러운 편이다. 정체는 그렇지 않으나 명목상으로는 망해서 도망친 마법계 회사의 시종이지 않은가. 일레힌 포이체카 마탑주도 머리를 굴릴 만큼 굴리고 알아볼 만큼 알아보겠지만, 나중에 가서는 필시 나 이외의 선택지는 없으리라.
그리고 그런 내 말에······
【 허. 】
허공을 천천히 날아다니며 생각을 정리하는 듯한 일레힌 포이체카가 보였다.
잠시 뒤.
생각을 다 정리한 듯한 그가 아까보다는 부드러운 태도로 물어왔다.
【 그래, 만에 하나 네게 그리 대단한 심법이 있다고 해도······나의 회로와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찌 증명하지? 】
“제가 익히고 있습니다. 원한다면 확인해 보십시오.”
사아악—
그 말이 끝나자마자 서재를 가득 채우고 있던 마력이 내 전신을 파헤칠 것처럼 일점으로 몰려들더니, 내 숨구멍으로 들어와 기맥에 섞여 흘렀다. 실로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그렇게 약 오 분가량의 시간이 흐른 뒤.
서서히 물러가는 마력의 기운을 느끼며 내가 말했다. 경악과 복잡한 감정이 뒤섞이며 표정 관리에 실패한 일레힌 포이체카를 향해서였다. 위아래로 슬쩍 벌어진 입은 금세 닫힐 기미가 없었다.
그를 납득시킬 생각이 없는 나는, 도리어 당당하게 말했다.
“장벽 바깥에는 돌연변이 200억 마리가 돌아다니고 있는데, 거기에 저 하나 더 보탠다고 대수겠습니까?”
그제야 일레힌 포이체카가 고개를 몇 번 털며 정신을 차리더니, 흡족한 듯 흔쾌히 웃었다.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머릿속을 웅웅 울렸다.
【 하하하! 그래! 그래! 세상은 돌연변이에 변수 덩어리지. 과거의 삼존(三尊)중 한 명이 변절한 것도, 모리 무라타라는 전설적인 연방 집행관이 시티에 숨어든 무명의 언데드 따위에 참살당한 것도. 그렇게 따지면 네 말이 맞구나. 】
후우우우—
그리 말한 일레힌 포이체카가 가볍게 손짓하자, 서재의 바닥이 투명해지며 그 밑의 까마득한 경관이 드러났다. 산봉우리 밑 일만 미터. 도시의 빛을 내는 광원들이 아득히도 밑에 있다.
만약 여기서 떨어진다면 그대로 즉사겠군.
그가 또다시 손짓하자 이번에는 어두웠던 천장이 천천히 투명해지며 밤하늘이 드러났다. 나는 그 하늘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이 세상에도 저리 수많은 별이 있는 줄은 몰랐기에.
천공을 그득히 채운 별들을 구경하고 있자니, 조금도 기다리기 힘들다는 듯한 일레힌 포이체카의 재촉이 들려왔다.
【 그 기이한 저주는 반드시 풀어주마. 내가 기운을 되찾는다면 그깟 저주 따위가 대수겠느냐? 다만 지금의 내 육신은 세상의 탁한 기운을 걸러내지 못하는 순간, 돌이킬 수 없어진다. 그만큼 정순한 마나를 담을 완벽한 그릇이 필요해. 정말 장담할 수 있겠나? 】
나는 잠시 대답을 미루었다.
일단 내게 당장 필요한 것을 생각해보자면.
첫째는 뷔에탕의 저주를 풀어 마력을 몸 속에서 끄집어내는 것이고 둘째는······그래, 에센스인가.
돈 많은 재벌집 출신의 마탑주님이라 구할 수 있는 에센스는 차고 넘치는 데다 9레벨의 경지를 밟은 만큼 배움의 속도 역시 남다를 것이었다. 내 예상대로 흘러간다면 얼마 가지 않아 저주를 풀 정도의 기운 정도는 되찾을 것이다.
하나 문제가 되는 것이 있다면 무선대지신공이라는 나의 독문심법이 다른 이에게 넘어간다는 건데, 어차피 마탑주가 마나 회로 재건에 성공하면 무림계의 심법 따위 쳐다도 보지 않을 것이었다. 일가를 이룬 9레벨 마법사의 자존심이 있지, 무림계의 심법에 의지할 리는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렇더라도 안전장치를 하나 더 걸어두고 싶었다.
“예. 다만 제가 신뢰할 수 있게 마나의 맹약을 해주십시오.”
일레힌 포이체카가 즉시 되물었다.
【 맹약이라? 】
“예.”
솔직히 나는, 그가 거절하리라 생각했다.
9레벨의 마탑주.
인정한다. 지금의 내가 올려다보기조차 송구스러운 존재니까. 더해서 마법사 특유의 자존심과 대그룹 출신의 거만함이 만나면 그만큼 까탈스럽고 불편한 것이 없다. 일레한 포이체카의 마탑에 평생 눌러앉아 편히 살지는 못해도,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며 얻어먹을 건 얻어먹어볼 생각이었다.
그래도 무선대지신공을 익히는 동안은 대기업 회장보다 더 극진히 대접받을 테니까.
그런데.
【 받아들이마. 】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맹약이라는 조건을 간단히 받아들였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저리도 급한 것을 보면, 일레힌 포이체카는 그렇지 않은척 했어도 속으로는 독이 바짝 올라있었던 것이다.
그간 얼마나 많은 방법을 찾아 다녔겠나. 초월적인 경지를 밟았어도 죽음 앞에 초연한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처럼 죽어 나자빠져도 다음 생이 기다리는 게 아닌 이상에야.
내가 그런 생각들을 하는 사이, 전신의 감각이 누군가의 마력을 통해 새로이 깨어났다.
【 운공해 보아라. 내 지금 당장 확인해 볼 터. 】
그것은 내가 전생에 일정한 경지를 뛰어넘을 때 얻었던 감각이었으며, 지금은 누군가의 외력이 작용해 강제로 일체되는 감각이었다.
내가 조용히 가부좌를 틀자, 허공에 떠 있던 그도 가부좌를 틀었다.
이윽고 서재의 허공에 떠 있던 빛의 구체들에서, 정순한 마나들이 그야말로 별무리처럼 쏟아져 내리며 일레힌 포이체카의 육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 * *
딱. 딱.
애꿎은 손톱을 물어뜯는 소리.
걸레짝이 되어버린 손톱을 끊임없이 물어뜯고 있는 여인은 반 루벤카였다. 감추고 싶어도 도저히 감춰지지 않는 불안감의 표출 방식이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튕겨져 나온 마탑주의 서재 쪽을 몇 시간째 주시하고 있었다. 아까는 쩍 벌려져 있던 조각상의 주둥이는 굳게 닫혀버린지 오래였다.
유크 루베르겐 집행관 역시 사라진지 오래였는데, 그는 마탑주의 서재에서 밀려나자마자 짐작이 간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떠나갔다.
— 마탑주도 방법을 모르는게 아닌 것을.
떠나가면서 나지막이 뱉은 루베르겐 집행관의 그 말이, 기다리던 루벤카의 불안감을 한계까지 부추겼다.
그런데 그 순간.
—!
청록색의 마나가 혜성처럼 빛나며 서재의 문이 열렸다.
이윽고, 마탑주 서재의 열린 틈새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레반이 보였다.
그런데.
걸어 나오는 레반의 손목에, 영롱한 빛을 뿜는 네 개의 마나 팔찌가 감겨져 있다. 유크 루베르겐 집행관과 똑같은 갯수, 똑같은 생김새의 팔찌였다.
“······?”
뭐지?
곧, 루벤카의 얼굴이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