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발할라 산맥의 마탑
#48화.
잉그리드 반 루벤카.
죽은 반 회장의 장녀이자,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인재.
세간에 알려져 있기로는 6레벨 마법사이나, 실상은 벌써 7레벨의 벽을 돌파할 정도로 재능이 출중한 마법사. 그리고 자신의 유일하게 남은 혈육이자 동생인 레나를 집착하다시피 아끼고 사랑하지만, 나를 상대로는 유난히 성격이 악독하고 더러워지는 여인.
그런 루벤카는 지금, 매우 오랜만에 만난 나를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루벤카를 데려온 유크 루베르겐 집행관은 또 어디론가 금세 사라져버렸기에, 나는 1층에 홀로 남아 루벤카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견뎌내야만 했다.
나는 조용히 맥주를 퍼마셨다. 그녀는 분명히 궁금한 게 많을 텐데도 당장은 별다른 물음이 없었고, 그저 옆에서 싱글생글 웃고만 있었다.
— 뜨거운 맥주를 시키는 사람은 또 난생처음이네.
그사이 루벤카가 주문한 맥주가 나왔는데, 김이 펄펄 나는 괴상한 맥주였다. 객점의 주인은 질린 얼굴로 맥주잔만 내려놓고 주방 안으로 사라졌다.
꿀꺽. 꿀꺽.
김 나는 맥주 한 병을 단숨에 들이켠 루벤카는 캬, 소리를 내며 입가를 닦더니, 이번에는 가느다란 검지 손가락으로 내 볼을 꾹 누르며 재차 입을 열었다.
꾸욱-
“야, 반갑다니까?”
“······.”
루벤카의 미소는 쓸데없이 아름다웠다. 악독하기 그지없는 성정을 가진 저 여인에게는 실로 과분한 외모라고 생각하며, 나는 대답 없이 눈 앞의 맥주만 연신 들이켰다.
“만나니까 부끄러워? 영상으로는 말만 잘 하더니.”
그러자 재미있는 장난감이라도 본 듯한 표정의 루벤카가 내 볼을 연신 꾹꾹 찔러댔다. 그녀의 팔을 덮고 있던 로브가 잠시 흘러내리자, 복잡한 마나 문신을 가득 채워둔 팔이 보였다.
도깨비의 얼굴처럼 생긴 문신과 잉어 문신이 인상적이었다.
“야, 야. 레반.”
“······.”
“야, 얘야. 맥주 아직 덜 마셨니? 안 들려?”
꾹-꾹-
루벤카는 내가 입을 열 때까지 찔러댈 기세였다.
그러다 보니, 지난 10년간 루반카에게 자행당한 일들이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저 여자가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나서는 얼마나 행복했던 나날을 보냈는지 모른다.
“대답해.”
그렇기에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꾸욱- 꾸욱-
“대답. 대답.”
“······.”
이 태생부터 못된 년을 어찌해야 하나.
별거 아닌 듯 해도 내겐 꽤 중대한 문제였다.
딱 봐도 시비를 걸지 못해 안달이 나있는데, 설렁설렁 넘겨보려 했다간 앞으로 더 귀찮게 굴 것이 눈에 훤했다.
“많이 컸네. 대답도 안하고.”
아직 저 루벤카에게 레반이라는 놈은, 10년이나 레나의 수발을 들던 한낱 시종일 뿐인 듯했다. 감히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레나와 딱 붙어 지내는 덕에 괴롭히며 가지고 놀기 적당한 시종.
그때, 찰나간 머릿속에 들어온 마구니가 분탕질을 쳤다.
『 씨발, 칼로 담가버려. 솔직히 못 할 것도 없잖아. 』
『 실패하더라도 취해서 손이 미끄러졌다고 하면 봐줄지도 모르잖아. 여태까지 네가 저년한테 받았던 수치를 떠올려봐. 사내로서 그냥 눈감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인가 그게? 』
그래, 확실히 썅년이긴 하지.
나는 순간, 볼을 찔러대며 웃는 루벤카를 상선의 친씨아처럼 ‘용서’ 해버릴까도 싶었다. 하지만 반 루벤카는 7레벨의 마법사. 주둥이가 험하고 행동이 싸가지가 없는데다 가벼워 보여서 그렇지, 내가 쉽게 때려눕힐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칼을 뽑는다면 우리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하는데, 아마 죽어 나가는 쪽은 십중팔구 내가 될 것이다.
나는 조용히 맥주를 들이키며 돌아가는 상황을 관망했다. 이 객점은 음식 맛은 더럽게 별로였지만 맥주맛은 나쁘지 않았다.
“오~멋있는 권총도 가지고 다니네~”
루벤카는 아무래도 내 반응이 시원치 않은듯 하자, 내 허리춤의 테크리볼버를 멋대로 뽑아 구경했다. 곧 차가운 총구가 내 관자놀이에 닿는 감각이 느껴졌다.
“이걸 당기면······팡! 하고 나가는 거야? 궁금하다.”
생글거리며 말하는 루벤카의 검지가 리볼버의 방아쇠에 들어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당겨버릴 듯 팽팽히 조여지는 손가락.
나는 루벤카 앞에서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궁금하면 한번 당겨 보든지.”
“뭐야, 목소리 깔면서 분위기도 잡을 줄 알고. 옛날보다 확실히 멋있어졌네. 근데 옛날이 더 나았던 것 같은데?”
그 순간.
철컥.
옅은 진동이 리볼버의 총구를 통해 전해져왔다.
루벤카는 쏴보라는 내 말에 진짜로 리볼버의 방아쇠를 당겨버린 것이다. 만약 내가 약실을 비워놓지 않았다면 필시 격발되었겠지.
“에이, 안 나가는데? 나는 이런걸 써 본적이 없어서 잘 몰라.”
“······.”
실망한 얼굴의 루벤카는 테크리볼버를 테이블에 대충 던져놓고 뜨거운 맥주를 다시 주문했다. 술기운이 오르면 이 지랄이 더욱 심해질 것을 알기에 나는 결국, 루벤카를 마주볼 수밖에 없었다.
“할 말이 있으면 그냥 해라. 지랄염병 그만 떨고.”
“엇, 레반 너 화났어? 무섭게 왜 그래.”
지금 루벤카는 일부러 능청스럽게 굴면서도 몰래 마력을 일으켜 내 몸 구석구석을 파악하고 있었다. 흡사 지렁이 수십 마리가 피부를 기어다니는 기분이었다.
곧, 루벤카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레반, 내가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대답해줄래?”
“?”
“당가 새끼들 표적은 나랑 레나인데, 넌 대체 뭘 하겠답시고 아직도 여기 붙어 있는 거야? 발할라까지 잘 도망왔으면 이제 꺼져도 되지 않냐는 말이야. 혹시 집행관님이나 나한테 기대하는 거라도 있어?”
뜬금없이 허를 찌르는 루벤카의 질문.
나는 별 내색을 하지 않고 그 질문을 무시한 채 돌연 몸을 빙글 돌려 앉았다. 거기에는 루벤카만큼 익숙한 얼굴의 여인이 꼿꼿한 자세로 서있었다.
“반갑다 메리. 그간 나 없이도 잘 지냈나?”
“······.”
메리는 무시당한 루벤카의 눈치를 보면서도 나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봤다. 가끔 쓸데없이 외설적인 농담을 던져대서 그렇지, 실상 모든 면에서 루벤카보다 월등히 나은 녀석이었다.
메리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레반,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고맙다.”
내가 눈을 옆으로 슬쩍 돌리자.
개무시당한 루벤카의 표정이 굳어가는 것이 보였다.
‘슬슬 못 참고 지랄할 때가 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덜컥!
루반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객점의 천장에서 환기를 위해 작동하던 실링팬이 털털대며 멈추었다. 동시에 본색을 드러낸 무형의 마력이 내 목덜미를 겨누었다.
그러고는 한다는 말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레반, 술 다 마셨으면 같이 나가서 밤 산책좀 하고 올까?”
밤 산책.
서로 관심이 있는 남녀의 대화라면 간질간질하고 설레지 아니할 수 없는 말이지만, 루벤카의 발언은 그것과 결이 달랐다. 이제 도살당하러 갈까? 정도로 들렸다.
당장 나를 어찌하지 못해 근질근질 거리는 얼굴이군.
그 의도가 빤히 보였다.
얼마간 대화를 나누며 탐색을 마친게 분명했다. 손 봐줄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겠지. 실제로 내가 아직 루벤카의 경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니까.
그리고 내가 레나를 돌봐주긴 했지만, 아무래도 믿기 힘든 놈이라고 여길 테니 겁을 줘서 쫓아내면 좋고 정 수틀리면 죽여버릴 생각까지 하고 있을 것이다. 레나처럼 넉넉하지 않고, 매사에 의심이 많은 여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루벤카와 내가 단 둘이 산책을 나가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어?”
왜냐하면 마침 2층에서 나를 찾아 내려오던 레나가 루벤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레나는 곧바로 우당탕거리며 뛰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레나···!”
레나를 본 루벤카가 황급히 내 목에 겨눈 마력의 칼날을 거두고, 눈시울이 붉어져 달려오는 레나를 끌어 안았다. 뒤이어 눈물겨운 자매들의 상봉이 벌어졌는데, 나는 그 틈을 타 무사히 악독한 년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
하루가 지났다.
다음날.
다시 홀연히 나타난 루베르겐 집행관이 어디선가 빌려온 공무용 차량에 나눠탄 우리는, 산맥의 도로를 타고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집행관은 우리에게 어딜 간다든가 하는 별다른 언질도 주지 않고 조용히 침묵을 유지했다.
“······.”
차량 안에서 나와 눈이 마주친 루벤카는 눈을 무섭게 치켜떴는데, 굉장히 불편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이미 나를 반 죽여놓은 다음 캐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겠지. 다만 레나와 집행관이 옆에 붙어있는 바람에 어제 못다한 얘기를 할 새는 없었다.
공무용 차량은 끝도 없는 산맥의 도로를 올라가고 있었다.
몇 시간이나 꽤 빠른 속도로 이동했음에도 아직도 산맥의 중턱 부근을 달리는 중이었다. 도로의 바로 옆길은 낭떠러지였는데, 삐끗하면 바로 떨어져 죽기 좋았다.
그렇게 장장 반나절 이상을 달린 공무용 차량은, 어느새 구름이 아득히 펼쳐져 있는 산맥의 중턱을 넘어 산맥의 드높은 봉우리가 어렴풋이 보이는 곳까지 올라왔다. 차창에 성에가 끼며 밖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달칵-
내가 창을 내리자,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눈과 나무뿐이었다.
저 나무의 명칭은 설산목(雪産木)이었는데, 설산목은 햇빛을 받지 않아도 산맥에 뿌리내릴 곳만 있다면 알아서 쑥쑥 자라고 비가 많이 오는 날은 하루에 1미터 이상도 자라는 발할라 산맥의 고유한 종이었다.
성장이 빠른 이유는, 산맥 꼭대기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빙하들이 마나의 기운을 운반해와 산맥 전체에 퍼뜨리기 때문이라던가.
하여간 설산목은 발할라 산맥 상층부의 대부분을 덮고 있는 나무 종이었는데, 지금 우리의 전방에는 유달리 거대한 설산목들이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 차량으로는 도저히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우거진 밀림을 형성하고 있었다.
발할라 시티가 익숙할 루벤카도 이런 곳은 처음인지, 도통 영문을 모르는 표정이었다.
집행관은 아무렇지 않게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지금부터는 내려서 걷지.”
그렇게 집행관의 말대로 차량에서 내려 10분쯤을 걷자, 설산목들의 뒤로 깎아지른 절벽이 나타났다. 사방은 어느새 새하얀 만년설로 덮여있었으며, 눈보라와 추위로 인해 호흡이 심히 힘들어졌다. 바닥은 단단히 결빙되어 한 걸음조차 제대로 내딛기가 힘들었다.
콰앙-!
심지어 저 절벽 위, 산맥 봉우리 꼭대기에서부터 커다란 낙석과 두꺼운 얼음이 쾅쾅 떨어지며 땅을 울렸다. 곧 절벽 근처에서 동굴이 튀어나오고 그 안에 대단한 영약이나 절세비급이 있으면 딱 적당할, 그런 극한의 환경이었다.
그런데.
루베르겐 집행관이 어느 절벽의 근처에 이르러 마력을 흘리자, 웬 청록빛의 유리궁전처럼 생긴 건물이 허공에 신기루처럼 드러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리고 그것을 본 루벤카가 우뚝 멈춰섰다.
“!!!”
이제서야 우리가 가는 곳을 눈치챈 듯한 루벤카는, 표정관리가 힘든지 놀란 기색을 그대로 내비쳤다. 그녀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루베르겐 집행관을 바라봤다.
“지금 설마······마탑으로 온 건가요?”
발할라의 다섯 마탑.
발할라 산맥에는 해발고도 만 미터가 넘는 산봉우리들이 여섯 개가 존재했다. 가장 높은 봉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봉우리에 자신들만의 땅을 얻어 각각 다스리는 특이 세력이 존재했는데, 그것이 바로 마탑이라 불리우는 세력이었다.
각 마탑의 주인이자 관리자는 최소 9레벨 이상의 경지를 달성한 마법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각 마탑의 이름은 곧 마탑 주인의 이름이므로, 마탑주가 바뀌면 마탑의 이름도 같이 바뀌는 특이한 형식이었다.
발할라의 다섯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들은 그 지위와 명성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폐쇄적이기로 유명한 마탑들은 구성원을 잘 늘리려 하지 않았다. 시티에서 위명을 떨치는 대단한 마법사라도 마탑에 소속되어있지 않는 한 그 위치조차 알 수가 없었다.
바로 이전 생인 라아기스 대륙에도 왕국 마탑들이 있었지만, 발할라의 마탑이 가지는 개념은 그것과 조금 달랐다.
라아기스 왕국들이 세운 마탑들은 왕실 소속의 마법사를 양성하는 학교의 느낌이 강했다면, 이 발할라의 마탑들은 연방 정부의 입김도, 발할라 관청이나 정치권의 입김도 어지간해서는 닿지 않는 곳이다.
마탑의 구성원은 마법계 기업의 회장일 수도 있고, 장벽 밖에서 시체를 때려잡는 마법사일 수도 있다. 또는 마법을 배워 익힌 이족일 수도 있고, 연방 소속의 군인이나 흉악한 범죄자일 수도 있다. 누구를 마탑의 구성원으로 받든, 그것은 오로지 마탑 주인의 마음에 달려있다.
여기서 마탑주는 신이나 다름없다.
전통적으로 다섯 마탑의 주인만이 권한을 가지고 다스리는 땅.
유크 루베르겐 집행관은 그런 곳에 우리를 데려온 것이었다.
알고 있다는 마법계 인사가 마탑과 관련된 인물이었나.
사아아—
루베르겐 집행관이 청록빛의 유리궁전에 자신의 마력을 계속 흘려넣자,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새하얀 만년설과 설산목들이 일거에 사라지며 세상이 새로 열렸다.
이윽고.
눈보라가 몰아치고, 산소가 희박해 호흡조차 힘들었던 발할라 산맥의 산봉우리는 어디가고 봄처럼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커다란 대지가 눈 앞에 펼쳐졌다.
잔디처럼 푸른 풀들이 가지런히 깔려있었고, 그 위로는 중세 시대의 성처럼 생긴 고풍스러운 건축물이 하나 보였다.
그리고 그림처럼 그려진 하늘에는 주먹만 한 태양이 떠 있었는데, 평범하게 생긴 마법사 둘이 허공을 부유하며 그 태양에 자신의 마력을 주입하고 있었다. 그 둘은 모두 루벤카보다 강한 마력을 지닌 마법사들이었다.
“따라와라.”
루베르겐 집행관은 이런 광경이 익숙한 듯, 대지를 가로질러 성처럼 생긴 건축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