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진정한 사내
#45화.
반 바이오 컴퍼니가 당가의 습격을 받기 전.
— 커흑.
유크 루베르겐 집행관이 떠나던 발걸음을 돌려 반 회장의 집무실로 다시 돌아왔을 때, 반 회장은 이미 죽을 각오를 마친 뒤였다. 분수에 맞지 않는 고등급 에센스를 무작정 들이킨 덕에 마나 회로가 폭주할 조짐을 보였다.
반 회장은 되돌아온 루베르겐 집행관을 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 하하, 제가 들었던 소문이 아주 틀리진 않았나 봅니다.
“······.”
반 회장의 말대로였다.
연방 집행관 유크 루베르겐은, 어떠한 이유로 거액의 크레딧이 필요했다. 연방 은행에서도 이미 크레딧을 빌릴 만큼 빌려 3억 크레딧이 넘는 천문학적인 빚이 유크 루베르겐의 앞으로 잡혀있었다. 허나 그럼에도 루베르겐이 필요로 하는 크레딧에는 크게 못미쳤다.
— 다행이군요. 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나마 지킬 수 있어서.
눈에 실핏줄이 다 터진 반 회장은, 체내에서 날뛰는 마력을 힘겹게 누르며 유크 루베르겐의 발치에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하나는 ‘블러디 에센스’ 였고 또 다른 하나는 암호화된 은행 계좌 칩이었다. 보통 흔히 쓰이는 연방 은행이 아닌 발할라 소재 마법계 은행의 계좌 칩.
알게 모르게 마법계 기업 인사들의 비자금 창구로 쓰이는 은행이었는데, 그 계좌에는 당가와 소송을 벌이던 반 회장이 예기치 않은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빼돌려둔 거액의 크레딧이 고이 잠들어있었다.
— 1억 크레딧······조금 넘겠죠. 계좌를 여는 암호는 제 딸들이 알고 있고, 레나는 지금 이 본사의 집무실에 있을 겁니다. 오늘 반 바이오의 횡령범인 반 회장은 여기서 죽습니다. 그러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반 회장의 마지막 유언과 더불어 에센스와 계좌 칩을 챙겨넣은 루베르겐이 반 회장의 차녀가 있다는 집무실로 향하자, 잠이 부족한 듯 퀭한 눈을 가지고 있는 앳된 여인과 그 여인의 시종이 눈에 들어왔다.
여인 쪽이 반 회장의 여식이었다.
헌데, 여인의 옆에 있는 시종에게서 무엇인가 미세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는 금세 여인의 시종이 내공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비록 그 내공의 양은 보잘것 없었으나, 마법계 기업의 시종이 단전에 내공을 쌓는다는 것은 실로 수상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루베르겐이 넌지시 물었다.
“저 아가씨 시종인가? 언제부터?”
— 올해로 10년째입니다.
“그렇군.”
—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십니까.
여인의 시종은 루베르겐이 기세를 흘리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평범하게 수발을 드는 시종 따위가 아님이 자명했다. 아마도 어떤 목적이 있는 자들이 오래 전부터 곁에 심어둔 간자인 듯했다.
그리고 ‘목적이 있는 자들’ 의 실체는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그 윤곽이 명확했다.
사천당가 코퍼레이션. 지금 반 바이오 컴퍼니를 무너뜨리기 위해 이쪽으로 오는 자들이 마침 무림계의 메가콥이니, 지금의 상황이 넉넉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이놈이 당가의 끄나풀이라면, 바로는 못 데려가겠군.’
그 시종을 당가에서 심어둔 끄나풀로 치부한 루베르겐이 지체없이 몸을 돌렸다.
그래도 반 회장이 부탁한 여식의 얼굴은 확인했으니, 이제부터 벌어질 사태가 끝나고 나면 혼란을 틈타 저 레나라는 여인을 빼 올 생각으로.
“당가도 참 지독하군. 도착하면 적당히들 하라고 전해주시게.”
그리하여 루베르겐이 떠나고 한 시간 뒤.
반 바이오의 본사 사옥으로 어두운 그림자들이 길게 드리워졌다. 이내 미혼산이 살포되고 강맹한 기운을 지닌 당가의 무인들이 속속 반 바이오 본사로 진입해 들어갔다.
그때 루베르겐 집행관은 반 바이오 본사 근처의 카페에 앉아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그는 당가의 행사가 적당히 멎을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주위가 조용해졌다.
예민하게 날이 선 루베르겐의 기감이 카페 앞 거리에 세워진 차량으로 향했다. 그러자 뒷자리의 차창이 느긋하게 내려가더니, 왼쪽 눈을 의안으로 대체한 이가 그 얼굴을 훤히 드러냈다.
의안을 한 그는 사천당가 코퍼레이션의 당녹운(唐綠雲)이라는 사람으로, 이 발두르에 있는 사천당가 지부를 총괄하는 당문의 노고수이자 무림계의 명숙이었다. 드넓고 시끄럽던 거리는 음소거라도 한 듯 조용했고, 당녹운은 정중하게 동행을 권했다.
— 당가의 일로 연방의 영웅을 먼 길 오시게 했습니다. 제가 모시지요.
당녹운의 권유는 단지 오딘에서 발두르까지 반 바이오의 끝을 통보하러 찾아온 연방 집행관에 대한 예의였으나, 하필 때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 루베르겐은 굉음이 들려오는 반 바이오 컴퍼니의 본사를 한 번 보고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리 거절할 명분이 떠오르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반 회장의 유언을 지킬 수 없게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과 며칠 뒤.
오너 일가인 한 여인과 그 시종이 당가의 행사중에 탈출했다는 소식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당가의 미혼산이 가득한 그곳에서 무슨 재간으로 빠져나갔는지 루베르겐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그날을 기점으로 반 회장의 여식을 찾기위해 발두르에 머물렀으나, 발두르 시티의 1억 가까운 사람 중 도망친 그 여인만을 골라 찾아낼 재주까지는 없었다. 암호를 알아낼 방도가 사라졌으니, 거액이 들어있는 발할라 은행의 계좌도 그의 주머니 속에서만 잠들어 있었다.
이후 하릴없이 시간은 흘러, 석 달이 훌쩍 지난 어느 날이었다.
발두르 중심업무지구와 가까운 구역에서 꽤 강한 마법사가 난동을 피우는 사태가 벌어졌다.
소란을 잠재우기 위해 루베르겐 집행관이 현장에 당도했을 때, 사태는 이미 끝이 나 있었다. 그곳에는 혼이 나간 7레벨의 마법사 하나와 기이하고 강대한 마력, 심후한 법력의 기운들이 제멋대로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루베르겐은, 그 마법사로부터 뜻하지 않은 소득을 얻었다.
— ······제가 모시는 케아드로 시 의원께서 이 괴한들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추적 중에 힘을 과하게 썼고, 이건 그 흉수들의 인상착의입니다.
그자가 흉수들의 인상착의라며 건넨 것은, 놀랍게도 그간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여식의 그 시종이 분명했다.
집행관은 즉각 마력의 잔향을 따라 움직였다.
비정상적으로 기이하고 강대한 그 마력은 시티의 서쪽 외곽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내 루베르겐은 마력의 잔향을 쫓아간 장소에서 반 회장의 여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느 작달막한 총포상의 앞에서 검은 밴에 오른 반가 여식의 무리는, 발두르 시티 스테이션을 지나 화물 선적항에 이르러서야 멈추어 섰다.
반 회장의 여식, 레나가 상선이 소유한 빌딩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루베르겐 집행관은 곧장 뒤를 따라 들어가 마침내 그 여인과 마주할 수 있었다.
— 누, 누구세요? 어허, 함부로 다가오지 마십쇼. 그러다 크게 다쳐 이 양반아.
여인의 곁을 지키는 시종은 집행관이 아는 시종이 아닌, 다른 이로 바뀌어있었다. 이전의 그 시종보다 눈빛이 흐릿하고 멍청해 보이는, 콧잔등에 빨갛고 이상한 문신을 해놓은 사내였다.
【 죽은 반 회장이 보냈으니 따르면 된다. 발할라에 너희 자매의 처지를 돌봐줄 자를 내가 알고 있다. 그곳으로 보내주마. 】
어찌 되었건 전음으로 짧게 상황을 설명한 루베르겐이 귀찮게 들러붙는 시종을 걷어낸 뒤 반 회장의 여식을 끌고 빌딩을 빠져나가려는데, 갑자기 그 여식이 고함을 고래고래 지르며 발버둥을 치는 것이 아닌가.
빼애애액-
— 안 돼요-! 무슨 얘기인지는 알겠는데 저 혼자는 못 가요!! 위에 레반이 남아 있다구요!!!
“······.”
— 내려줘요! 안 가도 되니까 그냥 내려주세요!! 어차피 여기서 발할라로 보내주기로 했단 말예요!!! 아니면 레반도 같이—!!!
그러면서 그 이전의 시종을 꼭 데려가야 한다고 우겨대는데, 천하의 루베르겐도 그 난리통에 도저히 고집을 꺾을 도리가 없었다.
결국.
루베르겐 집행관은 레나와 함께 최상층으로 가는 승강기에 올랐다. 그가 지끈대는 머리를 저으며 두꺼운 궐련을 빼어 물었다.
* * *
【 시종 주제에, 좋은 주인을 두었군. 】
그리고, 그 결과가 당금의 상황이었다.
집행관이 생각했던 것과 최상층의 상황은 많이 달랐다. 반 회장 여식의 전 시종, 그러니까 레반이라는 이름의 사내가 칼을 들고 길길이 날뛰며 흉흉한 살기를 내비치고 있었는데, 조금 늦게 도착했다면 사달이 났을 것이었다.
‘이상하군. 저자가 그때 그 시종이 맞는가?’
그런데 레반이라는 사내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어딘가 괴상한 면이 있었다. 이전에 반 바이오 본사에서 보았을 때와는 얼굴만 비슷하지, 아예 다른 인간이 서 있었다.
어떻게 고작 석 달만에 저런 힘을 얻었는지 호기심이 들었으나, 일단은 뒤로 미룬 루베르겐 집행관이 레반에게서 등을 돌려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칼스와 마주보았다.
“집행관님이 어쩐 일이신지······.”
칼스의 무력은 레반이 쉽게 파악할 수 없는 반열이었으나, 그런 그도 집행관의 앞에서는 목소리가 바닥으로 기어들어갔다.
레반의 앞에서 당당했던 그 상선의 임원은 이제 여기에 없었다.
왜냐하면, 연방 집행관은 그 연방의 장군들과도 견줄 수 있는 힘을 보유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장벽 밖의 시체를 상대하느냐, 아니면 장벽 안의 인간을 상대하느냐에 따라 갈렸는데 연방의 집행관은 인간, 그중에서도 기업인에게 철퇴를 내리는 자들이었다.
그러니 인간과의 전투에 특화된 이들이었고, 이 발두르 시티 전체로 따져도 집행관과 일대일로 맞설 수 있는 인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더해서 연방 집행관은 연방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사법권을 부여받는데, 기업인에게 잘못이 있다면 설사 죽인다고 해도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제아무리 상선의 임원이라도 집행관의 앞에 서면 순한 양이 되기 마련이었다.
‘대체 저 인간이 여길 왜 찾아왔지···?’
칼스는 집행관의 행동이 평소와 달리 어딘가 심상치 않은듯 하자, 이미 근육이 뻣뻣이 굳어 있었다. 연방 집행관은 기업인에게 저승사자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때, 궐련을 피우던 집행관의 입이 열렸다.
“헌데 이 영약들은 왜 이리 꺼내 놓았나?”
“아 집행관님. 그건······.”
우적-
루베르겐 집행관은 순식간에 목함들의 앞으로 가더니, 열려있는 목함에서 영약 하나를 집어 입 안에 던져넣었다. 당황한 칼스가 채 말릴 새도 없었다.
그런데 그 영약을 몇 번 우물우물 씹어대던 집행관이 돌연, 입 안에서 자그마하고 불그스름한 애벌레 한 마리를 뱉어냈다.
쌀알보다도 작은 크기의 애벌레.
그것은 고독(蠱毒)이라 불리는 벌레의 유충이었는데, 한 번 몸속에 들어가면 어지간해서는 죽지 않고 내장을 야금야금 갉아 먹다가 결국에는 숙주의 장을 다 파먹어 죽게 만드는 당문의 독충이었다.
집행관이 사색이 된 칼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꽤 재미있는 장난을 치고 있었군.”
“······.”
그리고 그 황당한 광경을 뒤에서 목도한 레반의 표정은, 트럭에 밟힌 메주떡마냥 형편없이 찌그러지고 구겨지는 중이었다.
상선은 영약 속에 숨겨넣은 저 고독을 통해 자신을 휘하에 두고 부리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저런 처죽일 놈들, 지겹다 이제.’
레반도 당가의 고독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고독이 한 번 몸에 들어가면 당가의 해독을 받든지, 아니면 재주껏 알아서 잘 살아남아 보던지 둘 중 하나.
하지만 고독에 당한 후 당가의 해독없이 알아서 잘 살아남는 이가 몇이나 되겠나? 천 명중 한 명이 나올까 말까였다. 그러니 그 수법이 실로 음험하고 악랄하다 하여 중원에서는 거의 마공과도 비슷한 취급을 받는 게 바로 당문의 고독.
만약 저 영약들을 좋다고 덥썩 받아 처먹었으면 뱃속에 들어찰 고독이 자그마치 여덟 마리였다는 뜻 아닌가?
그때 문득 케아드로 의원의 분신에게 죽었던 두 명의 암살자가 레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마 그들의 뱃속을 파헤쳐보면 꾸물대는 저 고독이 숨어있을 것이다.
전뇌 컨트롤 칩을 박아 넣어 사람을 조종하는 세상이기에 고독 정도는 있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 없다지만, 설마 그걸 영약에 넣어 숨겨두었을 줄이야. 레반은 상선의 치가 떨리는 꼼수에 질려 이제 더 놀라기를 그만두었다.
“저, 그런데 집행관님.”
칼스는 이제 누구보다 공손한 자세가 되었다.
그의 직감으로 보아 루베르겐 집행관은 당가로부터 도망치는 저 레반이라는 놈과 무슨 연관이 있어보였다. 그렇기에 감히 레반을 상선의 사냥개로 써먹겠다는 마음은 싹 사라지고 약간의 의문만이 남은 상태였다.
곧, 그의 입이 조심스레 열렸다.
“실례가 아니라면 저들과 어떤 관계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 순간이었다.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집행관의 전신에서 서릿발같은 기세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막대한 냉기가 장내에 휘몰아치며 집행관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러자 혼비백산한 칼스가 고양이 앞의 시궁쥐처럼 바짝 몸을 움츠렸다.
“시, 실언이었나 봅니다.”
곧, 들고있는 고독의 유충을 두 손가락으로 눌러 터뜨린 집행관이 칼스에게 넌지시 물었다.
“요즘도 당가와 가까이 지내나?”
“······예.”
“너무 가까이 두고 지내지는 말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상선의 화물 운송선을 통해 이들을 발할라로 보내주기로 했다고 들었는데, 그 말이 맞나?”
집행관의 질문에 칼스가 의아한 얼굴을 하려다가 금방 의문을 접고 대답을 내놓았다.
“맞습니다.”
“나도 타야겠군. 마침 발할라에 일이 있으니.”
“······루베르겐 집행관님께서 저희 화물 운송선에 말입니까?”
“왜, 싫은가?”
“······.”
그것으로 대화는 끝이었다.
칼스의 의문은 끝까지 풀리지 않았으나, 감히 집행관의 말에 더 토를 달지는 못했다.
* * *
연방 집행관이 모습을 드러낸 이후, 반나절이 쏜살처럼 지나갔다.
레나로부터 그 사정을 전해 들은 나는 천운이 따랐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한술 더 떠서 그 대단한 연방 집행관이 발할라 시티로 가는 길까지 동행을 하겠단다.
이제 내가 상선의 눈치를 보는게 아니라, 상선이 이쪽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구구궁—
뒤를 돌아보자, 화물용 컨테이너들을 옮기던 중장비들이 작업을 끝마치고 어디론가 떠나가고 있었다. 그것은 이 거대한 화물 운송용 캐리어가 이제 이륙할 준비를 마쳤다는 뜻. 연신 벼락치는 굉음이 하늘을 때리며 발두르의 땅을 벗어날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광활한 발두르의 화물 선적장 위에서.
“너같은 년은 또 보기 힘들거다.”
“······.”
나는 눈앞에 나무토막처럼 서 있는 친씨아와 눈을 마주 보고 있었다. 내가 칼로 내리눌렀던 그 목에는 이제 어렴풋한 흉터만이 남아있었다. 그 흉터를 슬쩍 어루어만지자 친씨아가 신경질적으로 내 손을 치며 뒤로 물러섰다.
어이가 없었다. 뒤통수 친 년이 도리어 성낸다더니.
그래도 연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는 실로 무지막지한 년이지만, 진정한 사내는 원수를 용서하는 법을 알고 있다.”
“······.”
“잘 살아라.”
친씨아는 표정을 돌처럼 굳힌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언가 마음에 단단히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친씨아의 앞에서 보란듯이 박장대소를 터뜨린 뒤, 상선의 화물용 캐리어에 올랐다. 이미 레나와 루돌프, 아힘사와 집행관까지 탑승해 있었고 내가 이 캐리어에 오르는 마지막 손님이었다.
우르르릉—
이윽고, 후끈한 열기와 함께 화물 운송선의 육중한 거체가 지면에서 들고 일어났다. 폭풍과도 같은 바람과 함께 천지가 우르릉 흔들리며 주변의 건물들이 서서히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선의 빌딩 꼭대기가 눈 앞에 보일 때쯤인가.
무언가 손가락에 ‘툭툭’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꽈드득!
나는 그 순간, 와이어에 마력을 불어넣어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러자 저 아래의 땅에서 이륙하는 화물선을 노려보던 어떤 여인의 목이 피분수를 뿜으며 떨어졌다.
고개를 슬쩍 내리자.
내 손가락 사이에는 가느다란 한 줄의 와이어가 화물선의 이륙 조명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찻집에서 묘령의 여인이 암살에 쓰던 그것이었다.
나는 그 실보다도 얇은 단분자 와이어를 허공으로 던져버리며,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정한 사내가 되는 길은 멀고도 험하군.
조용히 앉아 명상을 하고 있자니 어느덧 드높고 고고하게 솟아있던 마천루들이 발밑에 구름처럼 내리깔렸다. 발두르 시티를 밝히는 불빛이 점점 작아지며 바늘과도 같은 크기로 변해갔다.
이 화물 운송선의 목적지는 마법사와 기사들의 땅.
발할라 시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