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퓨전펑크의 전생자-40화 (40/157)

#40화. 장고의 끝은 악수(惡手)

#40화.

화악-

일순간 꺼지는 호롱불과 말려 올라가는 계단.

곧이어 어지러운 바둑판에 단단히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언 선생이 시야에 들어왔다. 안쪽에는 그와 바둑을 두고있는 선객이 있었다.

“또 뭣하러 찾아왔어 저거는.”

다행히 금일의 언 선생은 부리또를 먹고 있지 않았다. 왜인지 그것만 먹었다 하면 성격이 급격히 개차반이 되는데, 한번 돌변했다 하면 언제 다시 유순해질지 아무도 몰랐다.

아무튼 나는 공손히 포권하며 입을 열었다.

“제 사정 잘 아시겠지만, 기회를 얻어 며칠 뒤에 발두르 시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은인에게 인사도 드릴 겸 찾아왔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인사, 받았다 치자. 부탁은 뭐냐.”

언 선생은 바둑판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마주 앉은 상대는 내 또래로 보이는 젊은 인물이었는데, 허름한 행색에 비해 기력이 상당히 출중한지 어지간해선 패하는 일이 없던 언 선생이 조금씩 밀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탁!

언 선생이 고심끝에 백돌을 착수하자마자 내가 말했다.

“제게 법부적(法符籍)을 몇 장만 팔아주십시오. 값은 충분히 치르겠습니다.”

보통 수도자들은 자신의 법력을 이용해 신비한 법기(法器)나 부적을 제작하곤 했는데, 몸을 감쪽같이 숨기거나 공격과 방어를 펼치고,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등의 물건이었다.

법기는 법력을 가진 수도자가 아닌 이상 사용이 불가능하지만 법부적은 수도자가 아니라도 공력만 불어넣을 줄 알면 꽤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때에 따라 활용할 수법이 무궁무진해 한 장이라도 얻어가면 내겐 커다란 수확일 것이다.

하지만 언 선생은 호락호락하게 승낙하지 않았다.

“없다. 설령 내 손에 있다 하더라도 안 판다. 그리고 그걸 어디에다 써먹을 줄 알고 덜컥 팔아? 네놈같이 속이 시커먼 놈한테 내주어 무슨 대단한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언 선생 정도 되는 수도자에게 부적을 팔아 얻는 크레딧쯤은 별 가치가 없는 듯 했다. 하기야 크레딧이 없어서 여기 있는 양반은 아닐 테니까.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오락가락하는 괴짜 수도자라도 분별은 있다. 보통 법부적은 연성자 본인의 법력을 불어넣어 만들기에 일단 발동이 되고 나면 그 법력의 흔적이 남을 수도 있다.

다툼이 생겼을 때 적진의 경지 높은 고수들이 수도자 고유의 법력을 알아보기라도 하는 날에는 상당히 껄끄러운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특히나 공격적인 법부적은 아무에게나 막 팔아 치울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애당초 나도 양심은 있는 사내인지라 그런 부적을 원하지는 않았다.

“언 선생, 누가 사람 죽일때 쓸 놈으로 달랍니까? 이를테면 제 한몸 건사해줄 귀식법부적이나 환영법부적, 운신법부적 같은 것 말입니다. 제가 여기서 이래저래 들인 품이 있으니 좀 살펴주십시오.”

“살펴주기 싫다 이놈아. 품을 들이긴 개뿔.”

“아니, 언 선생께서 빚진 개방의 초삼이놈을 제가 몇 번이나 구해주지 않았습니까. 내가 아니었으면 지금 그 거지놈이 살아 있었겠어요?”

“이 놈이 헛소리를!”

언 선생과 내가 법부적을 두고 투닥대던 그때,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다.

내겐 조금도 신경도 쓰지 않고 다음 착수점만을 고민하던 언 선생의 상대가 흑돌을 돌집으로 휙 던지더니, 고개를 돌려 날 노려보는 것이 아닌가.

“네가 누굴 살렸다고?”

젊은 얼굴의 사내치고는 걸걸한 목소리.

나는 별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려 했으나.

“왕초—”

“어허! 빨리 안 놓으면 내 승이다. 십 초 제한이야. 십. 구. 팔. 칠······.”

내 입에서 왕초삼의 이름 석 자가 다 나오기도 전에 서둘러 내 말을 가로챈 언 선생은, 다시 바둑판으로 사내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그런데 괜히 노심초사하는 것이 무언가 켕기는 게 있어 보였다. 바둑을 두던 젊은 사내도 나와 비슷하게 느꼈는지 바둑돌 집을 탕탕 치며 역정을 냈다.

“언 가야. 우리가 속기로 두는 것도 아닌데 그런 법이 어디있어? 기다려봐. 판 엎으면 몽둥이로 찜질 당할줄 알아.”

언 선생을 언 가라고 막 부르는 걸 보자면 아무래도 예사로운 인간은 아니다. 그간 여길 찾아와 바둑과 장기를 겨루는 이들을 몇 번 보았지만, 이토록 언 선생을 편히 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시 말해봐라. 네가 누굴 살려?”

그 젊은 사내의 질문에 영문을 모르는 내가 왕초삼과 정크타운에서 겪었던 일과 이곳에서 보낸 나날들을 구구절절하게 늘어놓자, 무릎을 탁! 하고 내리친 그가 눈을 빛내더니 다시금 물었다.

“그래? 너 그러면 확실히 보았겠구나. 초삼이가 치료를 받을 때 앞에 있는 이 언가놈은 법력이 대단한 법기를 몇 개나 꺼내어 쓰더냐?”

“좋은 단약을 먹이고 시침하는 건 여러 번 보았는데 대단한 법기를 쓰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허!”

젊은 사내가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팽 돌렸다.

갑작스레 딴청을 피우는 언 선생을 향해서였는데, 곧이어 사내의 입에서 쩌렁쩌렁한 노호성이 튀어나왔다.

“과연, 언가 이 파렴치한 능구렁이 놈이 나를 속였구나. 분명 네 고급 법기들은 초삼이놈을 살리려다가 그만 죄다 부서졌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어째 저놈과 말이 다를까.”

“아 그야 살린 것과 진배없으니 그리 말했지. 내장이 터져 흘러내리는 놈을 나 말고 누군들 살릴 수 있었을성 싶어? 나 아니었으면 그놈은 벌써 구천을 떠돌고 있었을 거야. 그리고 저 의뭉스런 놈 말은 쉽게 믿지 말아! 괴상한 저주 술식을 네 제자 놈 가슴팍에 새겨놓은 아주 천하의 잡놈이라니까.”

언 선생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나를 물고 늘어졌지만 젊은 사내의 노기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말하는 것을 들어보자면 언 선생의 거짓말에 깜빡 속아 넘어간 듯 했다.

“흰소리 말고 가져다준 고급 법기들 도로 내놓을 준비나 해. 어디 하나라도 빼먹기만 해봐라.”

탁!

그리 말한 사내는 심호흡을 해가며 노기를 천천히 가라앉히더니 금방 멀쩡해진 얼굴로 바둑돌을 집어 착수했다.

그런데 왕초삼을 제자로 둔 이라면······이 젊은 사내가 놈의 스승이자 개방의 원로인 풍령개(風鈴丐)란 말인가?

이야기의 흐름상 왕초삼을 제자로 거두었다는 개방의 원로, 풍령개가 맞는듯 했다. 나이가 꽤 많을 텐데 언 선생보다도 젊어 보이는 것은 굉장히 높은 경지를 이룩하여 환골(換骨)을 했던지, 특이한 술법이나 시술을 이용해 젊은 외형을 지키고 있는 듯했다.

다만 나에 비할바 아닌 강자인 것만은 확실했다. 풍기는 기도는 길거리에서 보일법한 일개 범인과도 같은데 팔결의 개방 원로라······

내가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와중에 다음 수를 보던 풍령개가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본도는 너같은 잡배를 신경쓸 배분이 아니지만, 이 판에서 이긴다면 특별히 이 언가놈의 법부적을 대신 책임지고 네 손에 쥐여주마. 그러니 초삼이와 무슨 일이 있었든 이제 은원은 없는 걸로 해라.”

“그리 해주신다면야 감사히 받고 다 잊겠습니다.”

지금까지 여기서 들었던 말 중에 가장 달가운 소리였다.

이제 보니 풍령개는 자신의 제자를 아끼고 사랑할 줄 알며 의협심까지 넘치는 참스승이 분명했다. 지금은 풍령개가 거의 승기를 잡아가는 형국이라 바둑판이 엎어지지 않는 이상 부적을 책임지고 내어준다는 말과도 다름이 없었으니까.

사실 생각해보면 풍령개는 언 선생에게 갖다준 법기도 회수할 테니, 결국 나에게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고 옆에서 생색만 내어도 되는 일이었다. 그만한 어부지리가 없었는데, 겉으로는 호탕하지만 영리하게 굴 줄 아는 자였다.

그러자 구시렁대던 언 선생이 고함을 콱 질렀다.

“저놈은 왜 대국 도중에 와서 사단을 내? 구석에 처박혀 있었으면 그깟 부적쯤 어련히 챙겨줬을까. 쓸데없이 입을 열어서!”

웃기고 있군. 어련히 챙겨주긴 무슨.

어찌 되었건 나는 조용히 입을 닫고 둘의 바둑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탁!

언 선생은 한 수 둘 때마다 거듭 신중을 기하여 착수했다. 하지만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는 옛말이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 신중한 고심 끝에 허접한 수를 두어 형세를 더욱 크게 말아먹은 것이다.

몇분 뒤, 바둑은 이변 없이 풍령개의 낙승으로 돌아갔고 표정이 푹 썩어들어간 언 선생은 마지못해 품에서 법부적 몇 장을 꺼내놓았다. 그 법부적은 누리끼리한 색에 흐물흐물한 재질이었는데, 그걸 본 풍령개가 눈가를 좁히며 또 호통을 쳤다.

“이 사람아 생초짜들도 연성하는 하계(下界)를 줘서 얻다 써? 내가 방금 큰소리를 거하게 쳐놓았건만, 내 제자놈 모가지 값을 고작 하계 법부 몇 장으로 갈음하려고 해!”

“······.”

“내 면은 서야 할 것 아니야!”

언 선생은 더 이상 짜증 낼 힘도 없는지, 손을 부들부들 떨며 푸르스름한 색깔의 법부적과 회색빛의 법부적을 꺼내어 죽 늘어놓고는 법력을 주입했다.

그리고 그 법부적들을 본 나는 차마 놀라지 않을 길이 없었다. 푸르스름한 저 법부적 두 장은 중계였고 회색빛의 나머지 한 장은 무려 상계 법부적이었기 때문이다.

적당한 하계 부적이나 몇 장 얻으면 바랄 게 없겠다 하며 걸음을 했다가 저리 귀한걸 얻으리라 생각도 못한 나는, 언 선생이 마음을 바꿔 먹기라도 할까 법력 주입이 끝나는 즉시 부적에 손을 가져갔다. 어디서 돈 주고도 못 구하는 귀한 물건이었다.

“좋은 곳에 요긴하게 쓰겠습니다.”

그러자 내어주기 싫은 티를 팍팍 내며 법부적을 꽈악 쥔 언 선생은, 금세 진중하게 얼굴을 바꾸고는 말했다.

“가져가기 전에 하나 명심해라. 너 살겠답시고 당가 앞에서 사용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혹여 네가 그놈들 앞에서 이 법부적의 도움을 받아 살아나간대도, 이 언가가 반드시 주살할 것이야. 알았냐?”

“걱정 붙들어 매십시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중계와 상계 법부적 총 세 장을 챙긴 내가 풍령개와 언 선생을 사이에 두고 크게 절을 올렸다. 그러나 별다른 의미는 없을 것이, 풍령개는 내쪽을 신경조차 쓰지 않고 바둑돌을 골라내고 있었으며 언 선생은 바둑에서 패한 것이 못내 분한지 쩝쩝 입맛만 다시고 있었다.

그래도 끝까지 절을 마친 내가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사정이 나아지면 언젠가 한 번 다시 들리겠습니다.”

“에라, 내가 이딴 촌구석에 천년만년 있을줄 알아? 귀찮게 들러붙지 말고 나가라 이 돌연변이놈아.”

이윽고, 언 선생은 손을 휘적거리며 나를 진법에서 쫓아내버렸다. 축객령임에도 기분은 전혀 나쁘지 않았다.

원래는 얻더라도 적절한 값을 치르고 가져올 생각이었는데 졸지에 좋은 부적을 세 장이나 얻었다. 부적 몇 장에 흡사 천군만마라도 얻어낸 기분이었다. 빌어먹을 왕초삼놈과의 악연으로 시작된 일이 예까지 흘러온 것이다.

그 뒤로 다그 언 선생의 거처에서 빠져나온 나는, 다시 정크타운으로 돌아와 삼호문을 찾았다.

저녁 늦게 삼호문에 도착했을 때, 문도들은 유천검법을 비롯해 내가 팔아치운 무공들을 익히고 있었다. 등평위와 여량천같은 제자들이 먼저 익힌 뒤에 아래 문도들에게 가르쳐주는 방식이었는데, 문도중에 재능이라곤 한 푼도 없는 종자들이 너무도 많은 탓에 요새들어 큰 난항을 겪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재능이 넘치고 머리가 총명한 인간이 이 동네에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는가. 진작에 다른 곳으로 도망쳤거나 제 살 길을 찾아갔겠지.

삼호문에 도착해 훈련하는 광경을 지그시 바라보던 내가 등평위를 불러 곧 타운을 떠난다고 말하니, 녀석은 입에 달라붙은 아부를 떨어대며 고개를 숙였다.

처세를 타운에서 가장 잘 하는 사내라, 내가 떠난 뒤에도 삼호문이 어찌 처신해야 할지 정확히 숙지하고 있었다.

“아닌 말로 이무기가 개천 똥물에 계속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물려주신 업장에서 나오는 크레딧은 따박따박 빠짐없이 송금하겠습니다.”

“그래라.”

“제가 생애 처음으로 절을 올리려 하는데 받아주시지요.”

“나도 지금 누구한테 절을 하고 온 터라 절 받을 형편은 아니다. 우리는 사내답고 신사적으로 헤어지자.”

“그럼 악수로 하시지요.”

그렇듯 등평위와 간단한 악수를 마치고는 네온 문패를 쓰는 삼호문과도 안녕을 고했다. 언젠가 정크타운에 큰 변고가 생기면 사라져버릴 무근본 흑도 놈들이라지만, 또 운과 시류가 따른다면 타운을 주름잡고 적당한 세를 구가할지도 모르는 일이지.

나는 그 다음날 아침부터 빠르게 신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5일 뒤에 비행편이 출발한다고 했으니, 최대한 신속하게 정리를 끝내야 했다.

일단 조금이라도 크레딧이 될만한 것은 다른 소도시 고물상과 전당포에 보내서라도 헐값으로 팔아넘겨 크레딧을 확보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을 통째로 사용해서 옥상 테라스에 앉은채 신체에 마나 문신을 새겼다. 루벤카의 전신을 덮고있던 그 마나 문신과 흡사한 문양들이 나의 양 팔과 다리에 빽빽하게 들어찼다.

조금 아쉬운 것은, 뷔에탕의 마력이 지배하는 등판과 옆구리 그리고 뒤통수와 목 쪽에는 감히 문신을 새길 용기를 내지 못했다는 것.

그래도 가장 실용적인 마법으로만 최대한 빽빽하게 채워놓었다. 작업 후반에는 마력이 부족한 탓에 고농도 마나액까지 주입해가며 술식의 각인을 마쳤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마력을 흘려 넣기만 해도 마법이 발동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친 것이다.

그리곤 둘째 날 새벽부터 일찍이 중심업무지구에 있을 목표물의 미행에 나섰다.

대가를 받고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아주 내키지는 않지만, 어차피 서로 언론과 미디어에 온갖 장작을 던지고 불까지 지펴가며 벌이는 정치 싸움이 시작된 지 오래였다.

상선이든 어디 시의원이든 놈들은 권력으로 파워 게임을 벌이는거고, 나는 그들 사이에 잠시 끼어서 원하는 걸 얻어가는 놈일 뿐.

언 선생과 풍령개의 바둑판을 채워가던 바둑돌처럼, 그저 바둑돌 하나에 불과하다.

여하튼, 내가 죽여야 하는 자는 발두르시 의원이자 ‘루 막슨 케아드로’ 라는 긴 이름을 가진 남자였다.

친씨아가 일러준 목표이자 재선을 한 시 의원으로, 아직 거물급의 정치인은 아니었다.

해봐야 적당히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정도.

그래도 언젠가 거물 정치인으로 발돋움하고 싶어하는. 꿈이 대단히 큰 의원이었다. 그는 꾸준히 연방군의 무기를 빼돌린 상선의 발목을 붙잡아가며 그 대단한 꿈으로 한 발자국 나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주제넘은 욕심이 결국 정치 꿈나무의 명을 재촉할듯 싶었다.

얼굴이 붉은 것이 특징인 케아드로 의원은 호위 둘의 경호를 받으며 5성급 호텔에 묵었다. 그가 묵는 최고급 호텔은 전문 기업에서 운영하는 체인 호텔로 발두르 내에서도 경호가 삼엄하기로 유명하고 외부인의 진입을 쉬이 허락하지 않아 호텔 내로 진입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대신 그는 매일 아침 호텔 로비에서 나오자마자 차량을 타고 언론사 빌딩들을 뻔질나게 드나들었으며, 대로변을 끼고 몇 번 돌면 있는 작은 찻집의 안쪽자리에 앉아 꽃이 동동 떠있는 차를 자주 즐겼다. 한산한 시간대라 손님은 거의 없었고 케아드로 의원이 찻집에서 머무는 시간은 대략 한 시간쯤이었다.

따라붙는 두 명의 호위는 걸음걸이만 보아도 훈련이 잘 되어있는 전문 경호원들로 그들은 의원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조했다.

하지만 내가 마음을 굳게 먹고 죽이려 든다면 얼마든지 틈은 있을 듯 했다. 그 뒤로도 이틀간을 더 따라다녀 보았지만, 그다지 특이한 점은 없었다. 의원의 일과는 항상 비슷했고 찻집도 늘 같은 시간에 들러 한 시간 정도를 앉아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내가 이제 그를 죽이기로 결심한 전날에, 친씨아는 약속했던 대로 내가 요구한 것들을 시간에 맞추어 구해왔다. 아힘사의 전신 파츠에 탑재해둘 탄약들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부러진 압축도를 대체할 새로운 칼도 구해왔는데 이번에는 외날의 도가 아닌 양날을 가진 검(劍)이었다. 10만 크레딧쯤 하는 병기라는데 압축도보다 가벼우나 균형이 괜찮고 예기는 더욱 날카로웠다. 더는 준비할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음 날.

내가 의원을 미행할 마지막 날이자, 발할라행 화물 캐리어의 출발 시각이 고작 24시간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5성급 호텔에서 빠져나온 케아드로 의원이 차량으로 이동하는 것을 본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조심스레 움직였다. 내 옆자리에는 아힘사가 멀뚱히 앉아있었다.

나는 사흘간의 긴 고민 끝에 케아드로 의원이 즐겨 찾는 작은 찻집에서 일을 치르기로 했다. 의원이 매일 들르는 곳들 중 찻집을 제외하고는 사람을 죽이고 도망치기에 적당한 장소가 없었다.

늘 그랬듯 언론사 빌딩들을 한바퀴 돈 케아드로 의원이 찻집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나는, 언 선생에게서 받은 중계 귀식(龜息)법부적을 사용했다. 몸 밖으로 흘러나가는 기운을 극도로 줄여 평범한 이처럼 보이게 해주는 부적이었다.

부적의 효과가 지속되는 동안은 나도 다른 이의 기운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단점이 있겠으나, 내 기척을 거의 완전하게 지워낼 수 있으니 사람을 죽이기로 마음먹은 악독한 사내에게는 이만한 귀물이 없었다.

“아힘사, 들어가면 필요한 말은 내가 다 할 테니까 넌 입을 닫고 있어라.”

“알겠습니다.”

나는 케아드로 의원이 들어가고 잠시 뒤, 아힘사를 데리고 자연스레 찻집에 들어가 앉았다. 어여쁜 섹스토이를 끼고 다니는 남자는 이 도심에 발에 채일만큼 흔한지라 의심받을 일은 적었다.

찻집의 메뉴는 꽃차와 녹차, 철관음, 은침, 용정차. 다섯 가지 차가 있었는데, 나는 케아드로 의원과 같은 꽃차를 두 잔 시키고 아힘사와 자리를 찾아 앉았다.

의원은 오늘도 가장 안쪽자리에 호위들과 같이 앉아 차를 즐기고 있었다.

안을 슬쩍 둘러보자 역시나 손님이 몇 없었다. 확실히 인기가 많은 찻집은 아니었다.

호록-

내 바로 옆 테이블에는 안경을 쓰고 단정히 옷을 입은, 꽤 늙은 기업인이 홀로 앉아 녹차를 즐기고 있었으며 건너편 자리에는 옷을 야시시하게 차려입은 묘령의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정신세계가 조금 특이한지, 차에 동동 떠있는 꽃을 집어들어 한 잎 한 잎 떼어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말없이 차만 즐기던 케아드로 의원이 돌연 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듣자하니 별 쓰잘데기 없는 말 투성이였는데, 호위 두 명은 그에 맞장구를 쳐주며 찻집이 잠시 그들의 시끌벅적한 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차를 즐겼다. 그저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케아드로 의원이 찻집 밖으로 나갈 때를 노려 칼을 꺼낼 생각이었다.

그래, 분명히 그랬다.

시끄럽게 떠들던 케아드로 의원의 입에서 갑작스레 터져나온 빛줄기가 나의 귓전을 스쳐 지나가기 전까지는.

콰아아앙—!

부지불식간.

내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늙은 기업인이 그 빛기둥에 맞아 순식간에 턱이 으스러졌다. 부러진 턱 밑으로 진득한 선혈과 함께 다트처럼 생긴 세침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왔고, 몇 개는 거뭇한 늙은이의 입술에 박혀있었다.

‘살수.’

평범한 기업인이 주둥이 안에 세침을 저리 많이 숨겨놓았을 리는 없으니, 저 늙은 기업인으로 보였던 놈은 나처럼 케아드로 의원의 암살을 목표로 온 살수인 듯했다. 친씨아가 보낸 또다른 히트맨인지 아닌지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좇기에도 심히 바빴다.

“끄, 끄허억!”

“······.”

돌발적인 상황에 곁눈질로 창 바깥을 쳐다보았는데, 원래는 투명했던 찻집의 통유리창이 어느새 거뭇해져 있었다. 아마 바깥에서는 찻집의 안이 보이지 않으리라. 의원을 미행했던 며칠간 이랬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저자가 이 사태를 의도한 것인가.

“여기는 꽃차 말고 마실만한 차가 없어. 그래서 이 찻집에 오는 손님들은 모두 꽃차만 주문하지. 그것도 모르면서 당당히 녹차를 음미하고 있으면 어떡하나.”

내가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 불쑥 일어난 케아드로 의원은 뚜벅뚜벅 걸어와 턱이 부서진 늙은이의 머리칼을 잡았다. 의원은 정장에 꽂혀있던 만년필을 빼 들더니 뾰족한 필촉으로 주름진 그 목을 천천히 썰어내기 시작했다. 혈액이 마치 분수처럼 뿜어졌다.

스가각.

결국 만년필의 필촉을 톱처럼 사용해 목을 썰어버린 그 손아귀에 늙은이의 잘린 수급이 들렸다. 그는 찻집 내의 또 다른 누군가에게 그 수급을 내던지며 옷깃에 피를 슥슥 닦았다.

“막상 해보니까 정치라는게 말이야. 이 칼처럼 간단하지가 않아. 막 죽이고 그러면 되는 게 아니더라고.”

그리고 그 수급이라는 바톤을 이어 받은 손님.

또르르 굴러간 머리가 여인의 발에 딱 채였다

아까부터 꽃잎을 하나 둘 떼던, 야시시한 옷을 입은 여인이었는데 그 여인은 내내 짓고 있던 도도한 표정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금세 사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그쪽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이어서 케아드로 의원의 지긋한 시선이 꽂혀들자, 그녀는 자신의 품을 다급하게 뒤지더니 흉흉한 단도와 비수들을 하나 둘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 날붙이의 수가 못해도 수십 개는 되었다.

“보, 보내주시면 그냥 갈게요. 약속해요.”

세상에, 저 이상한 년도 살수였군.

그럼 의원과 호위들을 빼고는 나를 포함한 손님들이 전부 살수였던 건가?

살기 팍팍한 세상이라 그런가, 정치라는게 확실히 쉬운 일이 아닌가 보구나.

나는 눈을 뒤룩뒤룩 굴려 가며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는 것은, 내 앞에 있는 아힘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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