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열반을 좇아 방랑하는 안드로이드 4
#38화.
깊은 생각에 잠긴 나를 깨우는 소리.
“많이 무너졌습니다. 고치기 쉽지 않겠지요.”
폭삭 무너진 기루를 물끄러미 둘러보던 등평위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이 기루는 당분간 운영하지 못할 테지만, 나는 다 뒈져가는 놈들을 발벗고 도와준 멋진 사내일 뿐이라 딱히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쪼르르르-
앙굴리마라의 삿갓 위로 떨어지던 물줄기가 힘을 잃어가고 있다.
생각에서 깨어난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게 소림이 말하는 해탈(解脫)이군.”
만약 앙굴리마라가 저 뱀눈의 손가락을 꿰었다면, 그대로 마력을 끌어올려 박살내버릴 작정이었다.
주둥이로는 열반과 번뇌 어쩌고 그럴싸한 말을 늘어놓다가 막상 기회가 오면 입력값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손가락 열 개를 눈앞에 던져준 것인데, 손가락은 물론이고 잘 차고 있던 인골 염주까지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지금까지 늘어놓은 녀석의 얘기들이 적어도 거짓은 아니었다.
하기야 방랑 생활 도중에 자아를 얻었으니, 전투와 열반에 관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유아기의 인간과도 같은 백지 상태일 테지. 그간 새로운 학습이 없었으니 누군가를 속여넘길 정도로 영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죽일 기세로 덤벼든 것은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나? 아니면 내가 방장에게 속아 넘어간 병신 로봇이라고 한 탓인가? 둘 다 아니라면 앙굴리마라의 두려움에서 비롯된 감정일 수도 있겠지.
가동을 멈춘 녀석을 다시 바라보자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뒤섞였다.
나는 언 선생만큼은 아니라도 변덕이 꽤 심한 사내라, 이리 고심할 시간에 그냥 놈을 죽이고 깨끗이 잊어버릴까도 했다. 그러나 찝찝함이 크게 남을 것 같았다. 그렇기에 나는 곧 그 마음을 접고는 등평위에게 물었다.
“등평위, 내가 저놈을 조금 고쳐서 써보려 하는데 타운에 쓸만한 수리공이 있나?”
“고쳐준다니요? 저런 괴물을 말입니까?”
내가 이쪽 분야에서 아는 의사라고는 언 선생밖에 없다. 하지만 다짜고짜 언 선생을 찾아가 저걸 고쳐 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진법 속에서 뺨이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정크타운은 온갖 중고 섹스토이와 쓰다버린 고철 휴머노이드가 몰려드는 동네이기에 근방에 자리 잡은 수리공은 수두룩할 터. 대부분 무면허겠지만 쓸만한 놈 하나는 있을듯했다.
“대협을 죽이려던 기계를 친히 고쳐주신다니. 요상한 부분에서 통이 크십니다.”
“제멋대로 산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구나.”
“휴머노이드 수리공이라······.”
등평위는 조금 머리굴리는 척을 하나 싶더니, 곧 자신 있는 태도로 답했다.
“마침 대협에게 도움이 될만한 자를 데리고 있습니다. 친했던 벗이 부탁하는 바람에 삼호문에서 맡게 된 사내인데, 이전에는 중앙 환락가에서 수리공으로 이름을 날렸다고 했었지요.”
* * *
구사렴(勾嗣濂)은 경력이 40년이나 되어 꽤 이름난 수리공이었다.
그는 발두르에서 가장 거대한 유흥구역인 시티 중앙 환락가에서 공방을 차려놓고 영업했는데 가진 솜씨가 좋아 인기가 꽤 많았다.
유흥업에 종사하는 안드로이드와 휴머노이드가 사람만큼이나 많이 돌아다니는 곳이다보니, 높은 수준의 수리공들이 대거 몰려있었음에도 그의 공방에는 손님이 끊이질 않을 정도로 실력이 괜찮았다.
그런 구사렴이 정크타운으로 오게 된 것은 도박 때문이었다.
시티 중앙 환락가는 발두르를 대표하는 유흥구역답게 놀거리들이 정말로 많았는데, 그중 으뜸은 대로변에 웅장하게 늘어선 대형 카지노들이었다.
카지노의 외형과 조명들이 지극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탓에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지라, 한번 보면 매혹되어 당장이라도 들어가 보고 싶은 마음을 떨쳐내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카지노에 덥썩 발을 들였다가, 그간 번 돈을 다 잃고 신세를 망치는 수리공이 하루에도 몇 명씩 있었다.
그것은 구사렴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가볍게 슬롯머신으로 시작했다가 도박의 재미에 퐁당 빠져 말 그대로 모든 재산을 탕진해버렸고, 돈을 꿔줄 때는 천사와도 같았던 카지노 에이전트들에게 꽁짓돈까지 빌려 썼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에이전트들은 굉장한 시발놈들이었는데, 충분히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해 20만 크레딧만을 빌렸건만 순식간에 이자가 불어나 갚아야할 돈이 100만 크레딧을 넘어섰다. 결국 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을 갚지 못하고 공방에서 야반도주하여 이런 외곽까지 도망쳐온 것이다.
그래도 구사렴에게 운이 따랐는지, 유독 친하게 지냈던 수리공에게 삼호문주를 소개받아 삼호문의 그늘 아래 정착할 수 있었다.
그는 타운에서 지내며 삼호문의 소일거리를 맡아서 했다. 보통 안드로이드 기녀의 상태를 정기적으로 점검해주고 고장난 휴머노이드를 고치는 등의 쉬운 일들이었다.
요즘도 구사렴은 개버릇 남 못 주고 삼호문에서 운영하는 비무 도박판에 크레딧을 걸어 따고 잃기를 반복하는 중이었지만, 그래도 등 문주가 특별히 그의 사정을 봐주고 대우를 해주어 크게 잃을 일은 없었다.
- 아니 저런 씨벌놈! 낭심에 니킥은 반칙이지! 심판 안말리고 뭐해! 감점 줘 감점!
- 야, 저건 무슨 똥검법이냐? 배운 거 맞어?
- 이번에는 어디에 걸까! 한번 짚어봐라.
- 오번 검객이 3연승 중이야! 저자한테 계속 걸면 잃을 일은 없다니까!
삼호문의 기루가 박살이 나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 구사렴이 오늘도 비무 도박에 돈을 걸고 구경하던 차에, 어떤 젊은 사내가 삼호문주와 함께 그를 찾아왔다. 젊은 사내는 레반이었는데, 공방 아니면 도박장에만 처박혀있는 구사렴은 그 얼굴을 알 리가 없었다.
쿵.
사내가 수리를 맡기고 싶다며 등에 메고 있던 커다란 보따리를 풀자, 형편없이 박살난 휴머노이드의 잔해들이 눈에 들어왔다. 죄다 녹이 슬고 여기저기 잘려나간 것이 며칠을 공들여 작업하지 않는 한 어림도 없을듯했다.
그는 그만 눈살을 팍 찌푸렸다.
‘저걸 고쳐달라고? 대체 양심이 어디 있는 게야.’
그딴 건 그냥 고철장 유압프레스로 꽉꽉 눌러서 고철덩이로 만들어버리라고! 하는 고함이 턱 끝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쏙 들어갔다. 하필 저 사내의 옆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이가 삼호문주 등평위였기 때문이다.
“구 노야께서는 또 도박장에 계셨군요. 오늘은 조금 따셨습니까?”
“······흠흠.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끗발이 조금.”
평소 같았으면 개무시하고 돌려보냈을 구사렴이었으나, 자신을 거둬준 등 문주의 체면을 봐서라도 차마 그리 말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자신의 사정까지 다 꿰고 있는 문주가 입이라도 여는 순간 카지노로 질질 끌려갈 것이었다. 구사렴은 죽기 전까지 두들겨 맞고 노예처럼 수리만 하며 남은 여생을 보낼 생각은 없었다.
아무튼 구사렴은 사내를 말리려 입을 열었다.
“대강 보니까 경비용 휴머노이드 같아 보이는데. 그쪽이랑 정이 많이 든 놈인가? 그런데 너무 많이 부서져 아무래도 수리는 힘들겠네.”
“구 노야, 그래도 자세히 들여다 봐주시는게 어떨런지요?”
“크흠!”
하지만 등평위가 전에 없이 진중한 얼굴로 압박하니, 구사렴도 더는 뺄 방법이 없었다. 그는 무거운 엉덩이를 떼고 부서진 파츠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귀찮은 태도로 입을 우물대던 구사렴은 그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아, 앙굴리마라···? 이게 왜 여기 있어?’
형편없이 부서진 휴머노이드가 알고 보니, 대전쟁 당시 비싼 재료는 다 갖다 처발라 놓았기로 유명한 전쟁 병기가 아니던가. 수리공으로 40년을 산 그조차도 처음 보았다.
하지만 이것은 위험한 병기에다 장벽 바깥을 떠돌던 방랑자인지라, 당장 연방군이나 관청에 신고 해야할 대상이었다. 거기다 이런 전쟁병기를 마구잡이로 받아 수리했다가 재수 없는 일에 휘말려 피를 본 수리공의 일담들이 많았다.
그는 가늘고 길게 살고 싶었기에 딱 잘라 말했다.
“등 문주, 이번 폭풍 때 날아온 걸 주운듯한데 이거 보통이 아닌 물건입니다. 이런걸 막 갖다가 고쳤다간 목숨이 위험할 수가 있어요. 다들 이게 뭔 줄 알고······에이, 난 못해요! 안 해!”
그리 말하며 고개를 멀찍이 돌리는 구사렴.
레반이 그 시선을 따라가자 막 맞붙어서 싸우고 있는 두 명의 검객이 보였다. 지금 구사렴에게는 사실 목숨보다 비무 도박의 승패가 더 중요해 보였다.
‘이, 이런 미친 자가. 그래도 인연이 있어 대우를 해 줬더니 눈칫밥을 덜 처먹었군.’
구사렴의 행동에 속으로 기겁한 등평위는 레반의 눈치를 살살 살피다가 한 마디 말만 남기고 급하게 등을 돌려 떠나버렸다.
“구 노야, 하여튼 좀 해주십시오. 전 일이 바빠 이만.”
“?”
구사렴은 등 문주가 왜 갑자기 저리 부리나케 뛰어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무렴 어떻냐는 생각으로 금세 신경을 끄고는 비무를 구경했다.
곧, 무표정의 레반이 재차 입을 열었다.
“제 성능은 다 못내도 좋으니까 수리해 봐. 그리고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게 외형도 좀 갈아 끼워주고.”
“쯧! 말은 알아듣겠는데 아무래도 힘들다니까! 이 시간에 가서 다른 수리공을 알아보는 게 더 낫겠네.”
이제는 신경질까지 내는 구사렴에 레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쉽지만 평소처럼 손찌검을 해서는 안 되는 자다. 성심전력을 다해 앙굴리마라를 고쳐야할 수리공을 때려 눕혀서 질질 끌고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수리공들의 실력은 천차만별이다.
문제는 돌팔이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
중앙 환락가에서 솜씨가 좋기로 이름났던 수준이라면 이 슬럼가에 클론처럼 널려있는 쓰레기 돌팔이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만큼의 실력자일 것이다.
결국 보다 못한 레반이 구사렴에게 물었다.
“어디에 걸었나?”
“무승—.”
딱!
무승부라는 대답을 듣자마자 레반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작은 비무장에서 격렬히 칼질을 하던 두 사내의 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더니 동시에 픽 하고 쓰러졌는데, 이는 구사렴이 원하던 무승부가 확실했다.
“이제 만족하니?”
“······.”
그 어처구니 없는 광경을 본 구사렴이 아까의 등평위처럼 레반의 얼굴을 슬쩍 곁눈질하고는 신속히 태도를 바꾸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등 문주가 황급히 도망간 이유를 이제서야 알아챈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큰 걸음으로 앞서갔다.
“버, 벌만치 벌었으니까 일어나야겠습니다. 그거 들고 얼른 따라오십시오. 마침 심심했는데 잘 찾아오셨어요.”
그렇게 구사렴의 공방에 이르자, 그는 스캐닝 장비를 꺼내와 앙굴리마라의 부서진 파츠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그 손놀림이 굉장히 신속했다.
인간보다 약간 큰 앙굴리마라의 기체에는 무슨 기능이 그리도 많이 달려있는지, 허공에 띄워진 인터페이스는 끝도 없는 설명을 토해내고 있었다. 스캐닝이 끝나자 구사렴은 헛웃음을 지었다.
“자이로젯 추진 로켓에 유탄 발사기, 플레어, 초진동 테크 블레이드, 방해 역장······인공 신경망은 워낙 단단한 재료로 만들었는지 큰 문제 없고, 프레임도 이족 난쟁이들이 짠 거니까 말할 것도 없지. 태양 전지판까지 달고 있네. 이건 옛날에나 쓰던 기술인데. 그 시절에 때려 박을 수 있는 옵션은 전부 때려 박아뒀구만.”
구사렴의 혼잣말을 듣던 레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폭풍 뒤에 해가 사흘이나 비추었던 것이 떠올랐기에.
앙굴리마라는 폭풍에 휩쓸려 날아온 뒤, 태양 전지판을 통해 얻은 에너지로 삼호루까지 기어들어가 깽판을 치고 있었던 듯했다.
철컥- 철컥-
구사렴은 쉬지않고 각각 파츠들을 힘겹게 분해하더니 여기저기를 들춰보았다. 터지고 그을려 무언가가 줄줄 흐르는 배터리 팩. 잘리고 부서져 떨어져 나간 것들 투성이고 당연하게도 성한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여기 들어가는 부품은 민간에 유통하지 않으니까 쉽게 구할 수 없겠고, 구하려고 해도 이미 단종된 것들이 대부분일겁니다.”
무려 전쟁병기를 구성하던 부품이다. 아무리 시간이 오래 지났다고 해도 저가형 섹스토이에 들어가는 파츠들만큼 흔할 리가 없겠지.
그때,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레반이 물었다.
“성능은 어느 정도까지 되살릴 수 있나?”
그러자 구사렴이 힘들겠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손 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배터리팩 상태도 정상이 아닌지라. 안에서 터진 배터리 몇 개도 제거해야 합니다. 연식도 너무 오래됐고······그래도 애시당초 7레벨 급으로 분류되던 기체라, 잘 손보면 최소 5레벨의 성능은 넉넉히 뽑아낼 수 있을 겁니다.”
“돈은 얼마나 필요하냐.”
“그것이, 쓸만한 파츠로 대강 구해서 짜맞춰도 30만 크레딧은 우습게—”
레반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30만 크레딧을 즉시 내주었다. 정 일이 틀어져도 만년한철의 값어치가 예전보다 오르면 올랐지 떨어지진 않았으니, 어디엔가 팔아넘기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구사렴은 레반의 시원한 선입금에 눈빛이 바뀌었다. 그는 구석 숨겨두었던 커다란 박스 하나를 가져와 열어젖혔다.
“어떻습니까.”
박스 안은 마치 보물상자처럼 휘황찬란했다.
길거리에 널려있는 섹스토이들과는 다른 때깔.
당장 기업에 납품되어도 이상 없을 정도의 고급품 리얼스킨과 안면 보조 골격, 근육 파츠들로, 안드로이드의 얼굴과 몸을 꾸미는 용도로 사용되는 물건들이었다.
구사렴이 자랑스럽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품목 중에 가장 고급품입니다. 도망칠때 우리 돈많은 고객님들 것을 슬쩍 뽀려온 거지요.”
“그런데 여성체 말고 남성체나 중성은 없나?”
“지금은 여체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스피커도 새로 갈아야 할 것 같은데, 목소리는 어찌해드립니까? 음성 톤까지 마음대로 조절 가능한데 섹시나 청순 뭐 그런······.”
“그런 것들은 네가 알아서 해라.”
레반의 허락이 떨어지자 도박에 빠져있던 구사렴의 눈빛이 장인의 그것으로 바뀌었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해체 장비들을 소독하더니 어느순간 팔을 걷어 붙였다.
기이이잉-
곧이어 섬뜩한 장비들이 쇳소리를 내며 움직인다.
*
그렇게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족히 지났다.
“자, 어···어떻습니까?”
무려 서른 시간에 걸친 수리와 개조 커스텀의 끝. 구사렴은 진이 쭉 빠져 거의 임종 직전의 노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베테랑 수리공 구사렴의 손길 아래 재탄생한 앙굴리마라가 곤히 누워있었다.
“괜찮군.”
원래의 외형과는 상당히 달라진 모습.
뼈대 역할인 프레임에 얇은 팔다리 파츠, 다 부서진 안면부에 삿갓만 달려있던 단촐한 외형이 완벽한 안드로이드처럼 바뀌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섹스토이의 매력적인 외형이다.
배터리 팩에 전류가 흘러들어가자 앙굴리마라의 눈꺼풀이 자연스레 올라가더니, 연한 자줏빛이 도는 동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
눈을 몇 번 깜빡이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앙굴리마라.
새하얀 여인의 나신이 가감없이 드러난다.
다짜고짜 난동을 부리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도 앙굴리마라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하는 중인듯 했다.
그러던 녀석은 문득, 거울을 발견하곤 자신의 전신을 비추어 보았다.
매끄러운 리얼스킨에 또렷한 이목구비.
뼈대만 겨우 가지고 있었던 이전과는 다르게 누가 봐도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인간과 똑 닮은 생김새.
그때.
기잉-
돌연 앙굴리마라의 팔이 여러갈래로 분리되더니 테크블레이드로 변환되었다.
앙굴리마라가 꺼낸 칼날을 본 내가 설마하며 눈을 좁히던 차에 테크블레이드가 말려 들어가고 멀쩡한 팔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파츠 위에 붙어있을 리얼스킨이 그 움직임을 따라 자연스레 말려 올라왔는데, 파츠 한 갈래마다 한땀 한땀 스킨을 붙여놓은 듯했다. 구사렴은 정말 실력이 좋은 수리공이었다.
이윽고 녀석은 말없이 자신의 손등을 훑었다.
섹스토이용 리얼스킨으로 덮어둔 피부. 그 부드러운 촉감이 생소한지 연신 쓸어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굳게 닫혀있던 앙굴리마라의 입이 마침내 열렸다.
“대체 왜 나를 수리해 주었습니까?”
인조 얼굴근육이 앙굴리마라가 느끼고 있을 감정을 그대로 나타낸다. 그것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리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내 옆에서 지내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라고.”
“어떤 것을 천천히 생각하면 되겠습니까?”
“앞으로 네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
앙굴리마라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 아무런 반응이 없었으나, 그 반응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이것이 나의 의문에 대한 당신의 대답입니까? 살인 기계였던 나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것?”
“그래.”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당신의 대답을 따르겠습니다.”
녀석은 생각보다도 더 선선히 대답했는데 그것은 확신에 찬 표정같기도 했고 결연한 표정같기도 했다. 저 다채로운 표정들이 앙굴리마라가 원해서 지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내가 확률이 낮은 도박에서 꽤 좋은 패를 뽑았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우선 이름부터 바꿔라.”
“이름 말입니까?”
자기 먹고살기 바쁜 정크타운 놈들이야 코앞에서 봐도 모르지만, 저 수리공만 해도 앙굴리마라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 비록 잠시지만 역사에 이름을 남겼던 병기다.
“생각해둔 게 없다면 ‘아힘사’ 로 해라.”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불살생(不殺生). 해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전에 어떤 이상한 중한테 주워들었는데, 이름으로 쓰기에 나름 괜찮아 보이는군.”
“······아힘사.”
앙굴리마라는 이름을 한 번 되뇌더니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겉옷을 벗어 나신인 녀석에게 건넸다.
녀석은 옷을 천천히 받아들고는 멀뚱멀뚱 서있었는데, 사회성도 없고 모르는게 많아 앞으로 신경써야 할 일이 많아질 듯했다.
그 과정이야 어찌 되었건 7레벨급 전쟁병기의 흉폭했던 안광은 연한 자줏빛으로 바뀌었으며, 눈에 띄던 삿갓은 부드러운 머리칼이 되었다.
차가운 쇠붙이로 이루어졌던 얼굴은 이제 사람처럼 생기가 가득했다. 이전의 흉측한 꼴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름마저 이전의 모습과 함께 지워냈다.
이제 아힘사가 된 녀석이 조용히 읊조렸다.
— 당신의 옆이······진실된 열반으로 가는 길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