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퓨전펑크의 전생자-37화 (37/157)

#37화. 열반을 좇아 방랑하는 안드로이드 3

#37화.

‘어디서 본 장면이군.’

파츠를 다 잘라낸 앙굴리마라를 보며 륭과의 일전을 떠올린 레반은, 어쩐지 오른팔이 잘려나갈 것만 같은 기분에 몸을 빳빳하게 당겼다.

쾅!

창졸간, 앙굴리마라가 한 발로 바닥을 박찼다.

이전보다 가볍고 신속해진 신형이 단숨에 쏘아져 레반의 지척에 나타났다. 점과 점을 이어 그은 듯한 안광의 잔상만이 남았다.

곧, 도광이 번뜩이고 무수한 섬광이 교차한다. 막대한 기의 파동이 기루의 바닥과 집기들을 뒤집어엎었다.

콰앙! 콰르릉······!

큰 싸움이 벌어진 기루가 으레 그렇듯, 내부는 원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아수라장으로 변해갔다. 자욱히 피어오르는 먼지 속에서 도광만이 연신 번쩍였다.

커다란 기파가 쉬지않고 메아리치자, 이전에 잘렸던 두꺼운 기둥이 마침내 둔중한 굉음을 내며 사선으로 흘러내렸다. 모래 폭풍의 피해에서 갓 보수공사를 끝낸덕에 깔끔했던 기루가, 당장 무너져내려도 이상치 않을 폐허로 변해간다.

‘강하지만, 분명 오래는 못 간다.’

앙굴리마라의 광폭한 검격을 힘겹게 흘려내던 레반이 미간을 좁혔다. 저 로봇은 온갖 파츠를 잘라내 이미 균형이 무너진 참이다. 당장은 완급 조절따위 없는 강공에 속절없이 밀려나고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무너져 내릴 것이었다.

그렇게 레반이 얼마 남지 않은 내공을 분배해가며 신중히 대응하고 있을 때였다.

쾅!

예고도 없이 일순간 도약한 앙굴리마라가 나한보의 수법으로 레반의 뒤를 점하고는, 테크블레이드를 횡으로 휘둘렀다. 유함을 강조하는 무당의 검법을 사용함에도, 패도적으로 보일만큼 강맹한 검격.

레반이 이전처럼 도를 휘둘러 그 검격을 막아냈다.

바로 그때, 앙굴리마라의 반대쪽 팔이 북과 흡사한 모습으로 변환되더니, 거대하게 증폭시킨 기파가 울려퍼졌다.

—!!!

음공(音功)과도 같은 공격에 초진동 테크블레이드를 막아내던 레반의 귀가 멀고 몸에 힘이 빠져 후들거렸다. 자세가 흐트러지자, 앙굴리마라가 더욱 광폭하게 테크블레이드를 내리쳤다. 도기는 흩어지고 압축도의 날은 모두 뭉개져 원래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결국.

챙강-

중간부터 부러져나간 압축도의 도날.

가로막고 있던 도가 사라지니, 흉측한 초진동 칼날이 레반의 머리를 쪼갤듯 떨어졌다.

즉시 도병을 던져버린 레반은 팔을 내어주고 몸을 뺄 각오를 다졌다. 레반의 모든 공력이 왼팔에 모이며 호신기를 연성했다. 이래도 잘려 나갈테지만, 급소를 지켜 목숨이나마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그런데 그때.

“?”

꽈드드득-

갑자기 쇠붙이가 뜯어지는 소음이 들려왔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레반이 위를 바라보자, 앙굴리마라의 초진동 테크블레이드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추어 있었다. 아주 조금만 더 내려왔어도 왼팔이 썩둑 잘려 나갔을 것이다.

【 ······. 】

앙굴리마라는 전신 프레임에서 검고 매캐한 연기를 내뿜고 있었는데, 이내 테크블레이드가 팔 안쪽으로 접혀 들어가며 날을 감추었다.

레반의 예상대로, 파츠를 다 뜯어낸 앙굴리마라쪽이 과부하를 버티지 못하고 먼저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힘이 다해 두 팔을 아래로 축 늘어뜨린 앙굴리마라의 안광이 서서히 제 빛을 잃어간다.

이윽고, 폐허가 된 기루에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  *  *

퍼엉—!

배터리팩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폭음이 들린다. 임계점 이상으로 끌어올린 전압을 견디지 못한 팩과 회로들이 펑펑 터지며 흑색 연기가 솟아올랐다.

구우우웅···.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아까부터 위태롭던 기루 기둥이 옆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기둥이 기루 내의 수도관이라도 건드렸는지 어디선가 물줄기가 터져나와 앙굴리마라의 둥근 삿갓 위로 떨어졌다.

전류에 달궈진 삿갓에 닿은 물줄기는 처음에는 하얀 수증기가 되어 흩어지다가 나중에는 물의 장막을 만들어냈다.

치이익-

그런 한낱 물줄기에도, 한 다리로나마 꼿꼿이 서있던 앙굴리마라의 몸체가 휘청였다. 한 다리로 선 채 물줄기를 버티는 모습이 마치 폭포 속에서 수련하는 수도승같아 보이기도 했다. 실로 기묘한 광경이었다.

깜빡-

간헐적으로 흐릿하게 점멸하는 두 개의 안광.

앙굴리마라는 전류를 충전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아니, 그때보다 더욱 심하게 망가졌으니 돌아갔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으리라.

“······.”

나는 7레벨급의 전쟁병기를 때려잡았으나 그다지 기쁘지는 않았다. 뭐 에센스같은 것을 머금고 있는 녀석도 아니고, 대전쟁이 끝난뒤 오랜 기간 방랑을 거치며 녹슬고 낡아버린 병기였다. 이미 다 녹슬고 망가진 기계를 상대로 이리도 고전한 것이다.

“정신나간 세상 같으니.”

거의 일백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장벽 바깥에 방치되어 있었는데도 저리 움직일 수 있는 괴물을 만들어낸 무림계 무기 제조사들과 드워프들의 집념에 약간의 경외심이 들었다.

털썩.

밀려오는 탈력감을 버티지 못하고 놈의 앞에 주저앉은 나는 문득, 전투 전에 녀석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라 질문을 던졌다.

“네 열반은 허상이 아니던가?”

흐릿한 안광이 잠시 나를 내려다봤다.

곧, 앙굴리마라의 기계음성이 작게 들려왔다. 그 음성은 모깃소리보다 작고 중간에 띄엄띄엄 끊기기도 했으나 아주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 열반은···허상이기도···합니다.

“그렇지. 네놈 빼고 세상 사람들은 다 안다. 그 열반은 가짜거든.”

- 지···금의 나는 전···투에서 패하여 마지막 마···법사 한 명분의 손···가락을 꿰지 못하게 되었으니, 열반이 실···재한다 하여도 당···신의 말···대로 허···상인것이고, 허···상이라 하여도 허···상인 것입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로구나.”

그 말을 헛소리로 치부해버린 나는, 만신창이가 되어 저항하지 못하는 앙굴리마라를 죽이기위해 마나를 잔뜩 빨아들였다. 만년한철이 섞인 고철덩어리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할지를 생각하며, 세 개의 회로를 힘차게 돌렸다.

하지만 앙굴리마라의 기계 음성이 나지막이 내뱉은 다음 말을 듣고는, 잠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 또한···열반은···번···뇌 그 자체입니다.

“······.”

- 나는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마지막 손···가락을 꿰어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않을까봐······그간···좇아온 열···반이···저···정말···허상일···까봐···그러니 열반은···번뇌 그 자체입니다.

“그런가.”

- 어느날 불···현듯이 찾아온 번뇌에···열반이라는 목표를···끝없이···의심했으나···그 이상의 깨···달음을 얻을 수 없고···무언가를 깨···우칠 수도 없었습니다. 나는 인간이···아니니까···그래서 긴 세월 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오랜 나날을 거쳐 내린 결···론···열반(涅槃)은···그···자체로···이미 번뇌였던···것입니다. 백···명의 마법사를 죽···이는 것으로···염주를···꿰는···것으로 열반에···이를 수 없는···이유입니다···우리는···열반이라는···목표를···의심하지···못한···것입니다.

쉴 새 없이 한탄하듯 긴 말들을 내뱉는 앙굴리마라.

앙굴리마라의 독백은 고장나기 직전의 스피커를 통해 계속 이어졌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기계음성의 소리가 점점 더 줄어들고 늘어져간다.

- 따라서 나는 열···반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속···박하던 번뇌를 벗어던져야···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태···초부터 열반만을 좇아온 내가 어떻게 그것을 버린다는 말···입니까? 너···무나도 괴롭습니다. 내 발···목에···족쇄처럼 묶여있는 이 인골 염주를 벗···어 던진다면 살인 기계인 나···는···어디로 간···다는 말입니까? 그것들을 다 벗···어던지면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입니까?

“······.”

- 마···법사, 당신이 내 오랜 의···문을 풀어주지 않···겠습니까? 내가 열···반이라는 번뇌를 벗어 던지면···나는 앞으로 무···엇을 목···표로 살아···가야합니까?

앙굴리마라의 꺼져가는 음성은 어딘가 간절해보였다.

그 안면부를 이루는 파츠와 금속 프레임은 진작부터 크게 손상되어 얼굴 표정을 알 순 없었으나, 적어도 내게는 길을 잃고 울먹이는 아이가 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 나의 의문을 풀어줄 마법사, 드디어 만나게 되었군요. 】

설마 처음에 말했던 의문이 이 의문이었던가?

앙굴리마라가 말하는 번뇌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녀석은 이미 열반이 허상이자 거짓인 것을 깨닫고 있는듯했다.

그렇기에 앙굴리마라가 좇아온 것은 허상의 열반이 아니라, 자아를 찾은 자신이 앞으로 열반 대신 목표로 삼아야 할 그 무언가였다.

조금 전까지 손가락을 자르겠다며 덤벼들던 전쟁병기가 이제 내게 자신의 도를 구하다니. 어찌보면 처량하기까지한 말에 상념이 몰아쳤다.

그 상념의 이유는 멀리 있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태어나자마자 전뇌 컨트롤 칩이 박혀 시종으로 팔려나갈 준비를 하는 인공 태아들이 있을 테지.

나는 전생의 기억을 이용해 컨트롤 칩을 제거하고 자유를 얻었지만, 그 녀석들은 칩의 노예로서, 누군가의 시종, 일꾼, 성노리개로서 평생을 살아갈 것이다.

의문하나 갖지 못한 채 자신의 삶을 당연하단 듯이 받아들이며. 대전쟁 때에 탄생해 활약했던 저 앙굴리마라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조그마한 컨트롤 칩에 생을 구속당한 채 자의없이 살아가는 인간과, 스스로 감정을 깨우치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 둘 중 어느 쪽이 인간과 더 가깝다고 봐야 할까.

애초에 인간과 기계를 구분짓는 잣대는 무엇인가. 어느 누구도 쉽게 답하기 힘든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거기에까지 생각이 이르자, 물에 먹을 푼듯 기분이 더러워져감을 느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손가락을 잘라 염주에 꿰겠다고 지랄하던 놈이라지만, 전쟁 기계에 불과하던 휴머노이드가 자의(自意)를 깨우쳤다는 것은 결코 흔한 일이 아니었다.

이제 앙굴리마라와 나는 서로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앙굴리마라는 그저 내 답을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이렇다 할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내가 이십 분이 넘도록 가만히 서있던 그때였다.

덜컥-

“대협! 괜찮으신 겁니까?”

“기루 다 부서진 거 보이지? 전혀 안 괜찮다. 가지고 오라고 했던 거 가져왔나?”

“예.”

와중에 등평위가 작은 헝겊 주머니를 들고왔다. 열어보니 부패한 인간의 손가락 열 개가 들어있었는데, 내가 시킨대로 이전에 죽인 하레니오 뱀눈 마법사의 사체에서 잘라온 손가락들이었다.

나는 그 주머니를 앙굴리마라 앞에 던졌다.

툭-

“마법사의 손가락 열 개다. 솔직히 말해서 궁금하잖아. 지금 꿰서 확인해봐.”

- ······.

푸스스스스-

하지만 거북이보다 느리게 움직인 앙굴리마라는 그 손가락들을 발로 밟아 짓눌러버렸다. 그리곤 자신의 발목에 걸려있던 인골염주 역시 뜯어 움켜쥐었다. 힘을 조금 주자, 인골염주들이 가루가 되어 푸스스 흩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가루들은 흐르는 물에 섞여 금세 사라졌다.

앙굴리마라의 들릴듯 말듯한 기계음이 귀에 울렸다.

- 방···금 나를 옥···죄던 번···뇌를 완전히 떠···나보낸 참입니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 염···주처럼 사라져야 하는 존···재입니까? 열···반도···번···뇌도 벗어던진 나는 앞···으로 어떻게···

나는 놈을 보며 설명못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태초부터 사람을 학살할 용도로 만들어진 기계에 동정이 간다니. 이게 당최 뭐하는 짓거리인가 싶어 침음을 삼키던 와중이었다.

치지지직-

- 인공 신···경망을 제외···한 동체 파···손률 78%. 동···체 손실률 15%. 과···전압에 의한 중앙 배, 배터리 팩의 영구적 소, 손상으···로 가동을 중지합···다.

까맣게 그을린 앙굴리마라는 결국 가동을 멈추었다.

이제 아무런 빛도 내지 못하는 안광. 주위 바닥에는 녀석의 프레임에서 떨어져나온 수많은 파츠들이 은하수처럼 널려 있었고.

쏴아아아-

앙굴리마라의 삿갓 위로는 물줄기가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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