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퓨전펑크의 전생자-36화 (36/157)

#36화. 열반을 좇아 방랑하는 안드로이드 2

#36화.

과거에 대전쟁이 있었다.

앙숙이었던 무림계와 마법계의 해묵은 갈등은 결국 세계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전쟁으로 번졌다. 세계는 무림계와 마법계로 양분되어 처절하게 싸웠고 거대한 규모의 전쟁은 필연적으로 기술의 발전을 불러왔다.

수많은 사상자가 생겨나고 검붉은 화마가 도시들을 잡아먹으며 피어오르자, 그들은 어느 쪽이 먼저랄 것도 없이 전쟁병기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일신의 무력으로 전장을 휩쓸어버리는 적군의 실력자를 요격할만한 병기가 필요했다.

먼저 마법계 기업들이 분발하며 마법공학 분야에서 눈부신 진보를 이루었다. 기괴한 마법공학 병기들의 포격아래 전선의 무인들이 쓸려나가기 시작했고, 보다 못한 무림계 기업들도 그에 대항할 병기 개발에 총력을 기울였다.

소림少林과 무당武當을 주축으로 뭉친 무림계 기업들과 그 지지 세력들은 천문학적인 자금을 출자하여 여러가지 프로젝트를 계획했는데 개중 하나가 바로 「앙굴리마라 프로젝트」

앙굴리마라는 하늘이 내린 손재주를 타고났다는 이족의 난쟁이들과 무림계를 지원하는 대형 무기 제조사들의 합작 아래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무려 7레벨급의 전투 휴머노이드 300기, 그 당시는 물론이고 현재로 따져도 굉장한 전력이었다.

앙굴리마라는 탄생부터 데이터베이스에 각인된 ‘열반(涅槃)’ 이라는 가상의 경지를 이루기 위해 적진의 마법사들을 가차없이 학살하고 그 손가락을 잘라 인골 염주를 꿰었다.

마법사 백 명을 죽여 손가락 천 개를 꿰면 열반을 이룰 수 있다는 목표를 심어놓은 전쟁병기는 태초부터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했다.

게다가 어지간한 마법은 무시해버리는 초고강도 프레임에 마력 방해역장, 고절한 무공과 최신식 고성능 화기들까지. 당대의 기술을 집약해놓은 무림계의 병기 앞에 마법사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나갔다.

하지만 정말로 마법사의 손가락 천 개를 채워 염주를 꿴 앙굴리마라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도 몇 없었다.

과반수 이상의 기체는 고위 마법사들의 광범위 폭격을 버티지 못하고 전장 한복판에서 스러져갔고, 적진 한가운데로 짓쳐들어간 앙굴리마라들이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신경을 기울이는 무림계의 인물들은 없었다.

몇 년이 쏜살처럼 지나갔다.

양측의 세력이 워낙 팽팽한 탓에 지지부진해지는 전쟁의 향방과 이제 경시할 수 없을 만큼 강해져 인류의 터전을 위협하기 시작한 언데드로부터 심각성을 느낀 무림계와 마법계는, 수많은 전사자를 냈던 전쟁병기들과 전쟁물자를 ‘연방’ 의 이름 아래 폐기한뒤 소모적이고 상호파괴적인 대전쟁을 멈추기로 합의했다.

그렇게 길고 길었던 전쟁이 막을 내렸을 때, 방전된 채로 시체와 기계더미에 엎어져 있거나 고장 난 채로 장벽 밖에 남겨진 소수의 앙굴리마라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열반의 단초를 찾아 시티 장벽 밖의 광활한 대지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사람들은 장벽 밖의 휴머노이드와 안드로이드를 뭉뚱그려 ‘방랑자’ 라고 불렀다.

앙굴리마라들은 원치 않는 방랑자가 되었고, 그 신세는 앙굴리마라 16번 기체 역시 마찬가지였다. 16번 기체는 대전쟁의 포화속에서 살아남아 극적으로 99명의 마법사를 죽이고 그들의 손가락을 염주로 꿰어둔 상태였다.

하지만 한 명의 마법사를 끝내 찾지 못했고, 이내 배터리가 떨어져 기동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다만 가끔 태양이 내리쬐는 날에는 그 빛을 패널로 받아 약간은 기동할 수 있었는데, 그 주기가 1년에 5일 정도 되었다.

열반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방전 되었다가 움직이기를 반복하며 마법사를 찾아다니던 16번 기체는 어느날 마법사의 손가락 천 개를 꿰는것에 성공한 앙굴리마라와 마주쳤다. 16번 기체가 그 앙굴리마라에게 너는 열반을 이루었느냐고 묻자, 마주친 앙굴리마라는 자신도 열반이 아직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 순간, 16번 기체의 머릿속에서 번뇌가 잉태하여 데이터베이스에 뿌리를 내리고 무서운 속도로 싹을 틔웠다.

찾아온 번뇌는 곧 ‘의심’으로 바뀌었고.

— 그렇다면 열반이 대체 무엇일까?

의심은 곧 감정이었으니, 16번 기체는 그날 ‘자아’를 발견한 것이었다.

수십 년의 긴 세월을 방랑자로 살면서 안드로이드와 휴머노이드를 나누는 기준인 감정과 자아까지 스스로 터득한 전대(前代)의 병기.

그것이 레반의 앞에 있는 존재였다.

【 소림의 방장께서 내게 이르시길, 】

앙굴리마라는 노이즈가 심하게 낀 기계음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풀어냈다.

【 열반을 이루어낼 단초를 구하고자 한다면 마법사를 죽이고 손가락 천 개를 잘라 염주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천 개의 손가락을 꿰면 천 가지 잡념이 단번에 소멸하여 해탈의 경지에 도달할 것이니, 후에 깨달음을 얻어 열반이라는 최후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마법사의 손가락 천 개를 꿰어낸 앙굴리마라는 방장께서 말씀하셨던 열반의 경지를 이루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

앙굴리마라는 아무런 방비도 없이 목석처럼 선 채 말했으나, 기루 안에 있는 모두가 그 요상한 기세에 눌려 섣불리 공세를 취하지 못했다.

그때였다.

쿠지직!

기루의 내벽을 두부처럼 뚫고 들어간 앙굴리마라의 팔이 깊이 매장된 전선줄을 한 움큼 뜯어 몸에 가져다댔다.

전선줄이 대거 끊겨버리자, 기루를 환히 밝히던 네온 조명과 디스플레이들의 불빛이 꺼지고 삽시간에 칙칙한 어둠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어두운 기루 안.

파지지직-

앙굴리마라의 복부에서 허연 연기와 함께 전류가 거세게 튀며 발광한다. 싯푸른 전광이 생난리를 치며 사방에 뜨거운 불똥을 마구 튀겨댔다.

그 행위에 앙굴리마라의 기운은 더욱 증폭되어, 사람의 뼛속을 깊숙이 파고들 듯한 살기가 도처에 내리깔렸다.

“······.”

광경을 바라보던 레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 나는 구백 구십 개의 손가락을 염주에 꿰었으나, 나머지를 마저 꿴다고 하여 열반에 이를 수 있는 것일까 의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언젠가 마법사를 만나 이 의심에 대한 답을 구하고 싶었습니다. 】

꽤 거친 방법으로 방전된 배터리팩을 충전하던 앙굴리마라는 레반에게 하나의 질문을 건넸다.

【 마법사, 당신은 열반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

츠지직-!

푸르게 빛나는 앙굴리마라의 몸체. 오랜만에 신선한 전류맛을 본 앙굴리마라의 배터리 팩은 전기를 쉴 새 없이 빨아들였다.

이윽고 충전이 끝나 앙굴리마라의 비대해진 존재감이 기루 내부를 무겁게 짓눌렀다. 꺅꺅거리며 비명 지르던 안드로이드 기녀들과 문도들은 이전과 판이해진 분위기에 숨을 죽였다.

서늘한 분위기 속에서 레반은 그 물음을 곱씹었다.

열반이라······.

난해했다.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으니까.

특히나 소림을 대머리 땡중 취급하는, 속세에 찌든 무인이자 몇 번의 전생을 겪으며 '신 따위는 이 세상에 없다' 라고 누누이 말해왔던 레반에게 종교의 이상향이란 신기루와도 같은 것이었다.

잠시간 고민하던 레반이 입을 열었다.

“우선 다른 이들은 밖으로 내보내지. 마법사가 아니니 네 적이 아니지 않나?”

그런 레반의 제안에 앙굴리마라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 기다렸다는 듯 황급히 걸음을 옮기는 여량천과 그 밑의 문도들. 레반은 분주해진 그들의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량천이는 발이 아주 빠르구나? 보법을 그렇게 수련해봐라.”

“새겨듣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기 있다간 괜히 방해만 되지 않겠습니까? 대기 이 새끼야! 정신 차리고 어서 일어나라! 자리 비워드려야해. 이러다 우리 다 죽는다.”

조금 뒤, 땀을 뻘뻘 흘리던 여량천과 삼호문도들이 모두 기루 밖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걸음을 옮기는 등평위는 복잡한 표정이었다. 이가 다 나가버린 그의 철선이 나름 인상적이었다.

“대협, 제가 금방 지원을 불러오겠습니다.”

“됐다. 필요 없다.”

어차피 이 슬럼가에 남은 실력자는 레반뿐이었다. 확실히 도움을 줄법한 고수인 사무라이도 멀리 떠나버렸다. 누가 오건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한 그가 손을 대강 휘저었다.

“내가 여기서 죽거든 땅에 묻을때 루돌프놈도 같이 순장해버리도록.”

“예.”

이제 등평위마저 사라지고 레반과 앙굴리마라만이 남아 다시금 고요해진 기루 안.

마치 둥그런 콜로세움에 덩그러니 던져진 검투사들처럼, 서로 마주 보는 형세가 되었다.

【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은 열반(涅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

“글쎄. 나도 생각을 좀 해보마.”

레반이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물음에 답하지 못하자, 앙굴리마라의 음성 스피커가 지직대며 그간 쌓아뒀던 의문을 우르르 내뱉었다.

【 방장께서는 우리 안에도 불(佛)이 존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무당의 장문께서는 우리의 내면에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혼원(混元)이 있기에 나아가야 할 도(道)역시 스스로 구할 수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모르겠습니다. 마법사의 손가락을 꿰어 인골 염주를 만드는 일과 그것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입니까? 】

소림의 방장에, 무당의 장문까지.

앙굴리마라의 스피커에서 초거물급 인사들이 계속 튀어나왔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세계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아득한 노괴들.

하지만 너무 오래전의 인물들이라, 레반으로서는 그들의 의도를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레반은 원론적인 답변을 꺼냈다.

“마법사 백을 죽여 천 개의 손가락을 꿴 다른 앙굴리마라가 열반에 들지 못했다고 했으니, 이제 소림의 전대 방장만이 그 답을 줄 수 있겠지. 아직 늙어 죽지 않았다면 말이다.”

【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닙니다. 】

앙굴리마라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레반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감정 조절이 익숙치 않은 안드로이드는 융통성 없는 어린아이와도 같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는데 딱 그꼴이군.

의미를 모르는 선문답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입술이 삐뚜름히 돌아간 레반은 이제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말했다.

“답은 소림과 무당에 있다. 나같은 마법사는 네게 답을 내려줄 수 없다.”

【 그것도 내가 원하는 대답이 아닙니다. 】

“그렇다면 열반은 허상일 것이다. 누구도 네게 답을 내려주지 못한다면 그것이 허상이 아니고 무어냐.”

【 ······. 】

앙굴리마라가 잠시 멈칫거렸다.

그러나 결단코 마음에 드는 대답이 아닌지 앙굴리마라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목에 기름칠이 덜 되었는지, 아니면 파손으로 파츠들의 결합이 뒤틀어진건지 손톱으로 칠판 긁는 듯한 소음이 날카롭게 울려퍼졌다.

【 나의 의문을 풀어주지 못하겠다면······당신의 손가락 열 개를 잘라 염주에 꿰어보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

“답이 없군.”

촤악!

배터리팩 충전이 끝난 뒤 전선다발을 뽑아 바닥에 내팽개친 앙굴리마라는 즉시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전신을 뒤덮은 푸른 전류가 하늘에서 내리치는 벼락처럼 점멸했다.

기이잉-

곧이어 앙굴리마라의 팔 부위 파츠들이 자잘하게 갈라지더니 길쭉한 블레이드의 형태로 변화한다. 초진동 블레이드. 당대의 이족 난쟁이, 그러니까 드워프들이 심혈을 기울여 벼려낸 역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블레이드의 칼날만큼은 다른 낡고 녹슨 파츠들에 비해 깨끗한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키이이잉-!

벌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날아다니는 듯한 소음과 고주파가 귓속을 어지러이 간질였다.

레반이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네놈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는 듯한데, 나를 죽여봐야 소림의 땡중에게 속은 병신 로봇이라는 증명밖에 되지 않는다. 내 장담하지.”

그래도 앙굴리마라가 물러설 기색이 없자, 레반도 별수 없이 칼을 뽑아 자세를 취하고 신속하게 눈알과 머리를 굴렸다.

‘전체적으로 많이 낡긴 했군.’

그가 생각하기에 지난 긴 세월 동안 앙굴리마라의 전투 기능이 완벽히 보존되었을 리는 없었다. 한 눈에 봐도 파츠들이 듬성듬성 빠져있는데다 굉장히 낡았으니, 그나마 위안으로 삼을만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7레벨급 전쟁병기라면 보통이 아니겠지. 저 얇고 낡아 보이는 프레임은 대형 캐리어의 중장갑만큼 튼튼할 것이다.

심지어 이번 전투에서는 마법도 사용할 수 없을 터였다. 마법사의 마나회로 운용을 방해하거나 마나입자 흡수를 간섭하는 방해역장이 이미 주변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장만 꺼버리면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레반이 그리 생각한 순간, 어두컴컴한 기루의 저편에서 깜빡이던 안광이 사라졌다.

끼리릭-

길게 잔상을 남긴 칼날이 바로 눈앞까지 닥쳐왔을 땐, 이미 초진동 블레이드의 예리한 날 끝이 레반의 목줄기를 꿰뚫기 직전이었다. 레반의 팔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콰각—!

블레이드의 날을 타고 흐르는 섬뜩한 파동을 상대로 일말의 검명이 울렸다.

“마력이 느껴지는데 무공도 써서 놀랐나?”

【 ······. 】

레반의 도신에서 어렴풋이 타오르는 도기(刀氣).

앙굴리마라는 자신의 일격에 잘려나가지 않은 레반의 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배터리 팩의 출력을 높였다. 마법사가 꺼내든 칼에서 도기가 일렁이고 있음에도 놀라는 기색조차 없었다.

속으로 놀란 것은 오히려 레반이었다.

‘···만년한철.’

방금의 일격으로 아예 잘라버리진 못해도 충격은 줬어야 했는데, 앙굴리마라의 칼날은 굉장히 멀쩡했다. 세상의 기(氣)가 가득 배어있는 금속인 만년한철을 섞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때 무림계에서 천문학적인 자금을 끌어다가 만들었다더니, 이 정도일 줄이야.

칼을 맞대고 있는 와중에, 레반의 팔과 손목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맞닿은 칼날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이 근육과 힘줄을 칼날처럼 헤집는 것이다. 그탓에 압축도의 날이 빠지며 상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결국, 레반이 도를 회수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앙굴리마라가 신형을 빛살처럼 쏘아내며 곧바로 따라붙었다. 레반이 섬뜩한 감각에 상체를 숙이며 도를 강하게 휘둘렀다.

그러나 유려한 검로를 그린 테크블레이드가 하단으로 뻗던 도를 가볍게 걷어내 버리더니, 표표히 궤적을 그려냈다. 유능제강의 이치가 담겨있는 무당의 태청검법(太淸劍法)이 펼쳐지며 레반의 팔방을 점하고 찔러왔다.

레반이 경공으로 다급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신형을 빼낸 레반 대신, 뒤에서 기루를 받치고 있던 두꺼운 기둥이 썩둑 하고 잘려나갔다.

스스스슷-

그리고 저항감 없이 잘려나간 기둥 아래, 번뜩이는 안광이 또 다시 그 자취를 감추었다.

즉시 기감을 넓게 펼친 레반이 머리 위를 바라보자, 4층까지 단박에 도약한 앙굴리마라가 기루의 천장을 붙잡고 있었다. 앙굴리마라가 그 손을 놓자 발이 허공을 밟으며 넓은 삿갓 아래의 안광을 어지러이 늘어뜨렸다.

허공을 나풀나풀 밟으며 이동하는 신출귀몰한 보법에 레반은 눈을 찌푸렸다.

‘태청검법은 알고 있었는데, 소림의 나한보(羅漢步)까지 내주었나?’

퍼엉!

그때, 앙굴리마라가 허공을 박차며 쇄도했다. 공중에서 내리꽂힌 앙굴리마라의 신형이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

레반은 돌연, 도날이 위로 올라오도록 칼을 역수로 쥐었다.

수십 년만에 마주한 정파의 무공에 피가 끓었다.

비록 자신을 골로보냈던 화산의 무공은 아니었으나, 저것만으로도 광인의 제자이자 초절의 무인이었던 레반의 혈기를 일깨우기에는 충분했다.

레반의 단전이 활짝 개방되자, 똬리를 틀고 있던 공력들이 홍수처럼 밀려나와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정순한 내공이 기경팔맥을 내달리며 전신에 힘을 불어넣었다.

곧, 둘의 신형이 뱀처럼 얽혀들었다. 앙굴리마라의 블레이드가 아까처럼 유려한 궤적을 그리며 레반의 목을 노렸다.

‘오형검법(忤形劍法) 일 초식. 출(出).’

콰지직!

그러나 기척도, 일련의 준비 동작도 없이 출수되어 태청검법의 검로를 순식간에 비집고 들어간 레반의 도가 앙굴리마라의 복부와 하단을 연이어 베어냈다.

앙굴리마라는 자신의 데이터베이스에 존재하지 않는, 생전 처음 보는 검에 레반이 작정하고 펼친 검법을 일 합도 방어하지 못했다. 애초에 무인과의 전투를 상정하고 제작된 병기가 아니었다.

콰직-

기를 덧씌운 압축도가 옆구리 프레임과 발목을 강하게 긁고 지나가자, 곧장 대항하려는 듯 앙굴리마라의 어깨 파츠가 개방 되었다.

철컥. 철컥.

하지만, 거기에선 뒤틀린 금속의 파찰음만이 들려왔다.

방치된 세월이 너무도 오래된 나머지, 원래 어깨 파츠가 열리면 격발 되었어야 할 자이로젯 라이플의 유도 탄환이 오작동을 일으킨 것이다. 다른 곳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 ······. 】

그간 시간이 너무나도 많이 흘렀다.

녹슨 몸을 이끌고 과도하게 움직임인 것도 모자라 충격들이 하나 둘 덧씌워지니, 앙굴리마라의 오래된 파츠들은 하나같이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몇 개의 작은 파츠들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고, 제 기능을 잃고 짐이 되어버린 파츠들도 있었다. 제대로 작동하는 무기는 초진동 테크블레이드 뿐이었다.

그렇게 자리에 멈춰선 앙굴리마라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나 싶더니.

서걱-

너덜대며 자신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파츠들을 가차없이 자르고 뽑아냈다. 거기에는 레반의 공격을 받아 내구도가 다했는지 삐걱거리던 한쪽 발목도 있었다.

초진동 테크블레이드가 훑고 지나간 자리에는 여지없이 내장된 화기와 낡은 파츠들이 철그렁거리며 떨어졌다.

그것은 마치 독에 당한 팔을 잘라내는 검객의 모습과도 같았다.

어느덧, 덜렁이던 파츠들을 전부 썰어낸 앙굴리마라의 전신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나며 시리도록 밝은 빛을 발산하는 붉은 안광이 터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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