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퓨전펑크의 전생자-35화 (35/157)

#35화. 열반을 좇아 방랑하는 안드로이드 1

#35화.

내면을 관조하던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못해도 반 갑자는 얻었군.”

륭이 유품으로 두고간 에센스는 양이 꽤 많은 탓에, 흡수해 기운을 다스리는 과정만 해도 꼼짝없이 많은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그러니 클로에가 떠난 뒤에도 이틀이라는 시간이 더 걸릴수 밖에 없었다.

하나 신기했던 건 내가 에센스를 흡수하고 운공에 매진하는 동안 무려 삼일 연속으로 해가 뜨고 날이 밝았는데, 이는 정말 드물디 드문 일이었다.

나는 그것이 강력했던 모래폭풍과 연관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폭풍이 근방을 통으로 휩쓸고 지나가며 더러운 대기를 깡그리 갈아엎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렇기에 오늘도 날은 밝았다. 네온사인이 내는 불빛에 익숙한 타운 주민들은, 날이 청명한데도 오히려 인상을 찌푸리면서 걸어 다녔다.

가끔 나는 옥상에 올라와 햇볕을 쬐며 운공하기도 했는데, 투레 더 타운의 옥상은 벤치 몇 개와 풀밭이 있는 테라스 구조였다. 풀 한 포기 보기 힘든 세상이라, 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어 여기를 찾곤 했다.

이전 주인인 라네치아는 이 옥상 말고도 빌딩을 층마다 구분해 취향대로 꾸며놓았다.

투레 더 타운의 지상 2~8층은 일반 조직원들의 숙소, 식당, 마약을 하는 방과 섹스를 즐기는 방, 연회장 등으로 크게 나뉘어 있었다. 상층인 9, 10층은 라네치아와 간부들의 공간이었고 지금은 레나가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지하에는 차고와 작은 사격장, 심지어 값비싼 장치를 구비해둔 홀로그램 상영관까지 있었다. 자체적으로 만들어 둔 것들이라 조악하긴 했지만, 시티의 상류층을 따라 해본답시고 자기들 나름대로 머리를 굴린 태가 났다.

마약은 카트리지째로 차곡차곡 보관해두었는데 우습게도 사천당가에서 판매하는 양산형 저가 마약들이 가장 많았다. 놈은 값이 싸지만 중독성이 강한 마약을 부하들에게 배급해가며 세를 유지한 듯싶었다.

[ 회사원, 졸부, 갱스터, 크레딧만 있다면 아이들까지도 편하게 구해 즐길 수 있는, 간편한 인스턴트 마약! 며칠간 뼈 빠지게 일해 모은 크레딧을 여기에 바치세요! 몽롱하고 행복한 삶을 즐기실 수 있답니다! ]

당가 놈들의 인스턴트 마약 광고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 해, 혀를 몇 번 차곤 고개를 털었다.

나는 압축도를 천천히 뽑아들고는 내공을 불어 넣었다.

우우우웅-

이윽고 게걸스레 내공을 먹어치우던 압축도가 잘게 진동하며 푸르스름한 아지랑이를 흘렸다. 륭처럼 검기를 줄기차게 뽑아내는 지경은 아니었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단편적인 도기(刀氣)정도는 얼마든 뽑아낼 수 있을듯 싶었다.

언 선생의 거처에서 나노로봇 시술에 성공한 뒤, 나약했던 근골과 혈맥이 바로 서고 수련의 효과가 나타나며 축기의 효율이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이 주요한 까닭이었다.

환골탈태까지는 못 되더라도 한 반골세수(返骨洗髓)쯤은 될 것이다. 조금만 격하게 움직여도 숨이 차고 농도 높은 마나액을 쑤셔박으면 그 후유증에 몇 날을 고생하고, 내공수발마저 자유롭지 못하던 병신같은 몸은 이제 확연히 바뀌었다.

물론, 륭이 준 에센스도 제 몫을 톡톡히 했다.

그리고 두 개의 마나 회로 역시, 그간의 고행과 폭포처럼 쏟아부은 에센스덕에 한계까지 두드려 단조된 쇳덩이처럼 단단해졌다.

나는 지체없이 세 번째 회로 제작에 착수했고, 어제부터 내 심장을 중심으로 대회전하는 회로는 세 개가 되었다.

이제 세 개의 고리를 엮은 3위계 마법사라는 뜻. 다른 힘은 미뤄두고서 이미 마법사의 경지로만 5레벨을 달성한 것이다.

게다가 이 소도시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차지하고 앉았으니, 시종 출신의 사내로는 아주 제대로 출세한 게 틀림없다.

내가 그렇게 옥상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 급히 올라온 루돌프놈이 나를 찾았다.

“형님, 지금 연결됐는데요? 내려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투레 더 타운의 지하.

라네치아가 만들어둔 홀로그램 상영관.

넓은 테이블 위를 자기 입맛대로 세팅해둔 레나가 루돌프와 함께 홀로그램 장치를 열심히 조작하고 있었다.

확실히 이런 슬럼가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장치였다. 저 테이블 밑의 서랍에는 라네치아의 뚱뚱한 알몸과 헐벗은 사내들이 나오는 영상이 여럿 있었다는데, 자신이 질펀하게 즐긴 섹스를 나중에도 감상하기 위해 절찬리에 구비해둔 물건인듯 싶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입체 홀로그램의 레이저가 유려하게 솟구쳤다. 빛무리처럼 단숨에 쏟아져 나온 레이저는 사람의 형상을 복사하듯 허공에 그려냈다.

곧, 익숙한 목소리가 그 형상에서 흘러나왔다.

[ 이렇게 보니까 좋네. 거의 두 달 만이야. ]

빨려 들어갈 듯 깊은 눈동자를 가진 여인.

같은 도망자 신세인데도 자신감 넘치는 태도와 상대를 내려다보는 듯한 저 오만한 표정. 그리고 입만 닫으면 적당히 아름다울 얼굴.

[ 레나, 레반은 어디있어? 얼굴좀 보자. ]

그 아름다운 여인은 다짜고짜 나를 먼저 찾았다.

하기야 레나로부터 믿기 힘든 얘기만 주야장천 들어댔을 테니, 큰 호기심이 생겼겠지. 애초에 이 홀로그램 대면도 저 여인이 강력히 요청한 덕에 성립된 것이다.

여인은 당가의 추적을 의식했는지 외형이 많이 바뀐 상태였다. 레나와 같이 새까맣던 흑장발은 금발로 바뀌었고, 귀밑과 드러난 목 아래로는 복잡한 문신들이 빈공간 없이 그려져 있었다. 대신 저 문신은 저주가 아니라 원하는 즉시 마법을 발현하기 위해 그려둔 수식이었다.

나는 홀로그램 앞으로 보무당당히 걸어가 그와 얼굴을 마주했다. 옛날 시종 시절 같았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다짜고짜 뺨부터 후려갈겼을 여인이니까.

[ 안녕? ]

“······.”

잉그리드 반 루벤카.

레나와는 자매지간.

세간에 알려진 바로는 18세에 5레벨을 달성, 연방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는 교육기관인 발할라 시립 마법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수료했던 천재.

삼존칠좌(三尊七座)의 반열까지는 아니라도 언젠가 십이제(十二帝)의 지위에 도전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마법사. 26세인 현재 완숙한 6레벨.

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실상은 레벨 7의 벽까지 벌써 돌파해버린 괴물.

가진 마법적 재능은 물론이고 육체조차 마나를 받아들이는 것에 극도로 특화된, 말 그대로 마나의 축복을 받은 육신. 더해서 발할라 시립 아카데미의 학장이자 9레벨의 고위마법사가 관심을 표했다던 젊은 마법사.

그것이 홀로그램 저편에 있는 여인이다.

[ 흐음, 얼굴은 비슷한데······. ]

그리고 루벤카는, 지금 저 조그마한 머리통을 굴려가며 온갖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루벤카는 실제로 어마어마한 다혈질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다혈질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미 레나로부터 믿기 힘든 내 소식들을 전해 들었을 테니, 함부로 굴었다간 내가 레나를 어찌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걸 그대로 내버려 둘 내가 아니었다. 나는 머리를 굴리며 할 말을 찾는 루벤카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 앞에다 불러놓고 무슨 생각을 그리 하나? 이 버릇없는 년아.”

[ ······뭐? ]

순간 루벤카의 입이 붕어처럼 벌어졌다.

저 여인이 내 앞에서 저렇게 황당하고 멍청한 표정을 짓는 건 10년 시종 인생중 오늘이 처음이다. 나는 조금 전의 단 한 마디로, 빌어먹을 시종 신세를 벗어났다는 것을 다시 실감할 수 있었다.

“레, 레반······!”

옆에 있던 레나가 오히려 더 기겁하며 팔을 붙잡았지만, 나를 제대로 말리지는 못했다. 루벤카가 과거에 시종이던 내게 저질렀던 만행들을 레나도 어렴풋이 알고있기 때문이다.

폭행은 예삿일이었고 2세대 나노로봇 시술을 받은 날에는, 효과를 확인시켜 주겠다며 화염 마법으로 피부를 태우기도 했다.

사실 스승의 폭력에 비하면 조족지혈도 안 되는 귀여운 수준이라 버텼지, 평범하게 대가리가 빈 깡통 시종이었다면 업무 외 스트레스로 인한 신경망 손상으로 죽고 말았을 거다.

반 루벤카는 동생인 레나에 대한 애정과 마법에 관한 재능만 출중할 뿐, 성격은 아주 빌어먹을 미친년이었던 것이다.

나는 말문이 턱 막힌 루벤카를 대신해 물었다.

“메리랑은 잘 지내나? 귀찮게 군다고 버리지 말고 잘 챙겨줘라. 주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한 녀석이다.”

[ 걱정 하지마. 메리는 잘 지내고 있······. ]

“너 시집도 제대로 못 가고 파혼당했다며.”

루벤카는 고요한 침묵으로 답했다.

저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을 보아하니, 뇌수까지 치민 울화를 꾸역꾸역 삼키는게 틀림 없어 보인다. 복장이 터져도 레나가 내 옆에 있으니 화가 미칠까 감히 큰 소리를 못내는 거겠지.

저년의 외형과는 정반대인 성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이렇게 골려먹기 쉬울 수가 없었다.

[ 내 동생, 잠시 자리좀 비켜줄래? ]

한동안 말이 없던 루벤카가 드디어 입을 뗐다.

레나는 의문을 표하면서도 착실하게 루벤카의 말에 따랐고, 루벤카는 시야에서 사라진 레나를 확인하곤 조용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곧이어.

수백 권의 책이 꽂혀있는 책장이 한순간 거꾸로 뒤집어지고, 책이 한 권 한 권씩 공중으로 뽑혀 나온다. 촤르륵-소리를 내며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넘어간 책은, 예고도 없이 일어난 새빨간 화염에 게걸스레 집어삼켜진다.

곧이어 붉은 도깨비불 수백 개가 입체 홀로그램 속 화면을 가득 메운다.

결국 책장에 꽂혀있던 모든 책이 뽑혀나와 삽시간에 불타 사라지고, 책대신 검은 잿가루만이 남았다.

그리고 그 광경을 목도한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어쩌자고.”

[ ······. ]

저런 식으로 나오면 여태껏 시종인 나는 ‘불편한 게 있으셨다면 죄송합니다’ 라는 멘트를 입에 달고 살았었다.

설마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던 건가.

내가 홀로그램 너머의 루벤카를 물끄러미 바라보자, 자기도 아차 했는지 황급히 고압적인 자세를 풀고는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 그게···그게 그러니까, 과거에 내가 많이 심했지? 레반 너한테 미안했다는 깊은 뜻을 담아서 책을 태워본 건데······. ]

“할 말 있으면 빨리 하고 꺼져라.”

[ ······. ]

이제 주변에 더 태울 것도 없어 보이는 루벤카는 어떻게든 머리를 식히려는 듯, 눈썹을 파르르 떨며 눈을 감았다.

애초부터 이런 식의 일방적인 대화를 원한 것은 절대 아니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대화를 이어가며 의문스러운 내 실체를 캐보려 했을테지.

결국.

[ 아~모르겠다. ]

약 1분간 눈썹을 파르르 떨던 루벤카는 이제 도저히 못 버티겠다는 듯, 대마초 같은 풀을 귀 뒤에서 꺼내어 꼬나물고는 다리를 한껏 꼬아 앉았다.

[ 하 씨발~안 해보던 걸 하니까 적응이 안 돼서 도저히 못 하겠네. 정체가 뭐야 너? 그냥 시원하게 말해주면 안 되냐? ]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군. 악독한 년.”

[ 뭐, 그걸 쉽게 말해 줄 리가 없지. 여하튼 내가 너를 보자고 한 이유는······. ]

루벤카는 오만한 얼굴로 풀떼기를 씹으며 말했다. 평소처럼 신경질적인 말투는 아니었는데, 나와 더 말을 섞었다간 감당할 수 없이 터져나오는 자신의 화가 레나의 신세를 망치리라 굳게 믿고 있을 것이다.

[ 당가에서 발할라까지 무인들을 보냈어. 벌레같은 것들이 귀찮게 굴길래 어쩔 수 없이 내가 몇 명 잡아 죽였으니까 이제 당가쪽에서도 바짝 독이 올라서 더 공격적으로 나올 거야. 몸조심하라고. ]

사천당가의 무인을 한낱 벌레 취급하는 루벤카의 말투에서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드높은지 느낄 수 있었다.

[ 설령 너희들이 재수없게 붙잡히게 되어도 나는 움직이지 않을 거야. 어차피 내가 간다고 한들 당가에서 너희들을 살려두지 않을 테니까. 내 발목을 잡는 손목이 있으면 그 손목을 썰어야지, 내 발목을 썰어버릴 수는 없는 일이잖아. ]

말버릇은 없어도 하는 말은 정답이다.

역시 인성이 비정상적인 계집이라 그런지, 나와 통하는 구석이 약간은 있다.

[ 그래도 지금 발할라 내의 여론은 나쁘지 않아. 이번 반 바이오 일로 무림계 기업에 대한 반감이 더 심해졌거든. 그러니 길어야 한 달이야. 존나게 대단하고 잘난 내가 어떻게든 너희를 외부로 빼 올 방법을 찾고 있으니까 눈에 띄는 짓 하지 말고 그 슬럼가에 잘 숨어 있으라고. 이상 전달 끝. 간다.]

뚝!

뭐라 답할 새도 없이 급하게 연결이 끊기고, 홀로그램 레이저는 잠시 파도처럼 꿀렁거리다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어쩐지 이미 꺼진 홀로그램 저편에서 분노로 치를 떠는 루벤카의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필시 날 어찌 죽일지 고심하고 있겠지?

‘음, 7레벨 이전에는 절대 만나면 안 되겠군.’

나는 곧장 반 루벤카와의 대화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그리고 그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았을 때, 삼호문주 등평위에게서 웬 연락이 하나 왔다.

[ 대협! 지금 기루가 큰일났습니다. 요상한 안드로이드가 갑자기 나타나서 기루를 다 때려 부수고 있는데 좀 도와주십시오! ]

등평위는 전에 없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고 보니 이 빌딩 바깥으로 나갔던 것이 언제였던가? 날도 좋은데 루벤카를 마주한 탓에 불길해진 마음도 다스릴 겸 오랜만에 삼호문에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했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산보하며 기루로 향했다. 루벤카년을 조금이나마 골려준게 크게 기꺼워 크게 박장대소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기루 외벽의 디스플레이가 보인다.

늘 그렇듯, 흩날리는 꽃이 재생되고 있다.

등평위에게 연락을 받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루에 도착한 나는, 쨍한 소음이 들려오는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안에서 느껴지는 힘의 파동이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 온 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였다.

“?”

산책하듯 가벼운 마음으로 왔건만.

내가 의문을 삼키며 기루에 발을 들이자 안에선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윗층 난간에서 아래를 보며 비명 지르는 안드로이드 기녀들이 보인다.

- 꺄아악!

- 꺄악!

획일화된 기녀들의 비명을 들으며 눈을 돌린다.

등평위가 말한 안드로이드가 저것들은 아닐 테고.

밤 시간대가 아니라 기루를 찾아온 손님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알싸한 주향이 채우고 있어야 할 기루 안은 격렬한 전투의 여파로 인해 먼지구덩이로 변해 있었다.

기이잉-

부서져 흩날리는 목재와 먼지구름 사이.

내 시야에 들어온 이형의 존재는 외형부터가 상당히 독특했다.

얇은 팔다리를 가진 인간형의 신체에 머리 위에는 중들이나 쓸법한 넓은 나무 삿갓을 쓰고 있는 휴머노이드. 혹은 안드로이드.

그 아래로 혈액처럼 붉게 빛나는 기계안광이 보였다.

남체인지 여체인지는 명확지 않았고, 전체적인 신체 파츠의 훼손도가 극심했다. 오랜세월 관리없이 방치되었는지, 오히려 멀쩡해 보이는 부위를 찾는 것이 더 힘든 수준.

놈은 하얀 돌같은 것을 꿴 염주들을 얇은 발목에 주렁주렁 두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굵은 줄에 허연 뭔가를 잔뜩 꿰어놓았는데 꿰어져 있는 것이 인간의 손가락뼈와 매우 흡사했다. 아니, 손가락 뼈가 분명했다.

인간의 손가락 뼈를 장식품 처럼 꿰어놓은 녀석의 행동거지는 평온하고 침착했다. 앞에서 칼이 날아오고 있는데도 말이다.

캉-! 카앙-!

내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등평위의 철선과 여량천의 검이 놈을 두들기고 있건만, 척 봐도 어림 없어 보인다. 칼끝은 놈의 근처조차 가지 못한채 튕겨 나가고 있었다.

한 눈에 보아도 고장나고 오래 되었으며 부서진 곳 투성이의 기계라지만, 말로 다 할 수 없는 이질감이 느껴졌다.

저런 존재가 왜 기루에서 깽판을 치고 있는가 고민하고 있자니, 이름없는 삼호문도 하나가 슬금슬금 다가와 설명 했다.

“갑자기 나타나서 진상 고철인줄 알고 내쫓으려 했는데, 보다시피 보통이 아닙니다.”

그때, 저 앞에서 놈과 어울리며 칼을 휘두르던 여량천이 기세 좋게 엎어졌다. 물에 젖은 생쥐처럼 축 늘어져 있는 꼴이 여간 한심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조금 더 멀뚱히 서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나는 결론을 내렸다.

도시 밖의 황무지를 떠돌다가 이번의 모래폭풍을 타고 장벽 안으로 유입된 군용 안드로이드 혹은 오래전 대전쟁 시절에 버려진 무언가.

오랜 떠돌이 생활로 인해 보유하고 있던 화기는 힘을 잃었을 테고, 사출 블레이드같은 날붙이 무기만이 제대로 남아있을 터인데······.

“!?”

그 순간이었다.

등평위의 철선을 귀찮은 모기쫓듯 쳐내는 기계의 팔뚝에 작고 흐릿하게 새겨진 문구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Angulimara - 16

“······앙굴리마라?”

앙굴리마라.

시티 장벽 밖의 ‘방랑자’ 들중 하나.

과거 대전쟁에서 활약한 대(對) 마법사용 전쟁병기. 그 기억속에서 잊혀져가는 이름을 입 밖으로 낸 것과 동시에 놈과 내 시선이 교차했다.

카앙-!

녀석은 끈질기게 달라붙던 등평위를 강하게 쳐내곤,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곧, 오랜 세월에 깎여 뭉개지고 깨어진 음성이 놈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 나의 의문을 풀어줄 마법사, 드디어 만나게 되었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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