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무아로구나
#33화.
- 안녕히 가십쇼~
가는 손님을 본체만체 인사하는 주인장.
나는 육포를 뜯으며 길가에 대둔 지프차에 올랐다.
이곳은 륭 사무소와 지척에 있는 한 모텔이었는데, 정크타운에 처음 왔을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 하룻밤이었다. 누군가 사용한 콘돔이 침대 밑에 있어서야 되겠는가.
과연, 집 떠나면 고생이라더니.
“돌프야.”
“예, 형님.”
“빨리 출발해라. 이사 가야지.”
연락을 주겠다던 륭은 단 하루만에 연락을 해왔다.
나는 워낙 마음이 여린 사내이기에 살인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라네치아는 죽을만한 짓을 한 놈이니 크게 괘념치 않기로 했다.
“아악!”
쾅!
폭풍이 지나간 탓에 좋지 못한 노면.
길바닥에 있는 콘크리트 덩이를 밟자, 루돌프의 박치기에 차 천장이 움푹 들어간다. 역시나 오프로드용 지프라 그런가, 저 정도 충격에도 에어백은 터지지 않았다. 아니면 원래 에어백이 없는건가.
어찌 되었건 루돌프의 맷집을 잔뜩 길러준 지프는 라네치아 패밀리가 지배하는 40번가로 접어들었다.
중심가나 유흥가와는 사뭇 다른 풍경.
달동네 판자촌 집에 철골 뼈대만 덧붙인 것 같은, 허접한 주택들과 포장마차 같은 노점 상가들이 길 양쪽으로 늘어서있다. 대부분의 포장마차들은 무너져 내렸거나 반파되어 있었다. 검은색으로 딱지진 혈액이 얼룩덜룩하다.
공포 영화에서나 볼법한 외관이라 썩 보기 좋은 꼴은 아니다.
곧, 내 시야에 높은 빌딩 하나가 들어왔다.
“형님, 저깁니다.”
타운 40번가에 위치한 ‘투레 더 타운’
3층 총포상이나 4층의 삼호루가 높은 편인 이 동네에서 홀로 10층을 자랑하는 건물.
원래는 더 높은 층수를 목표로 준공을 시작했으나, 중간에 짓던 이들이 도망가는 바람에 완공되지 못한 채 덩그러니 남겨졌다던가.
투레 더 타운의 외벽은 두꺼운 방수 천막과 비닐 등으로 조잡하게 인테리어 된 흉물이었지만, 그것보다 더 못나고 허름한 주택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고고함을 뽐내며 솟아있었다.
그 미완공의 빌딩을 장악하고 본거지로 삼은 것이 라네치아 패밀리.
유흥가를 포함한 구역에서는 삼호문과 하레니오가 대립했고, 륭과 친씨아는 본질적으로 슬럼가의 사람이 아니기에 타운 내 알력 다툼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니 여기는 오롯이 놈들만의 세상이다. 그간 월세나 꼬박꼬박 받아먹으며 편하게 지냈겠지.
허나 그것도 현 시간부로 끝이다.
[ 이제부터 한 시간입니다. ]
마침 륭으로부터 콜 사인이 떨어졌다.
권총 한 정과 압축도를 챙겨 차에서 내린다.
“돌프야, 쏴라.”
“예.”
두두두두-
다짜고짜 갈긴 총탄이 외벽에 틀어박힌다.
갑작스러운 총성에 놀란 주변 주민들이 몸을 숨기고, 투레 더 타운 내부에 있던 라네치아 패밀리의 일원들이 집을 공격받은 벌들처럼 우르르 뛰쳐나왔다.
루돌프가 나를 보며 물었다.
“많이도 튀어나오네요. 이제 어쩔까요 형님?”
“너 알아서 잘 버티고 있어라.”
“······네? 형님! 아니 형님!”
나는 절규하는 놈을 대충 내버려 둔 채 한산한 빌딩의 뒷문으로 들어갔다.
투레 더 타운 빌딩의 1층 로비.
“뭐···뭐야! 너 뭔데 거기서 나, 나와.”
바깥의 큰 소란에도 데스크만 지키고 있던 한 놈이 뒷문에서 튀어나온 나를 수상쩍은 표정으로 노려본다.
놈의 두 다리는 불안한 듯 떨리고 있고 눈동자의 초점은 흐릿했다. 호흡은 일정하지 않고 신경질적 말투와 공격성을 보면 심각한 마약 중독일 것이다.
“누···누구냐니까? 이···.”
별 대꾸 없이 건물 안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10층이나 되는 빌딩답게 임시 승강기가 존재했다. 10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갈 필요는 없겠군.
“신경 쓰지 마시고 나가서 일 보세요.”
꾹.
나는 승강기 버튼을 찾아 누르며 말했다.
그러자 안내원 놈은 웬 식칼을 꺼내어 위협적으로 들이댔다. 목덜미에 서늘한 칼날이 닿는다.
“내···내 말 안 들려? 귓구녕을 확 파줘? 너···너 누구냐고!”
나는 칼집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이어서, 부드럽게 이어지는 발도술.
승강기 옆으로 드러난 철골조와 콘크리트가 두부 잘리듯 잘려나간다.
“······.”
돌가루가 비산하며 떨어지는 와중에 놈이 뭔가를 툭- 떨어뜨렸다. 자세히 보니 칼을 쥔 놈의 손목이 바닥에 떨어져 구르고 있었다.
“내 손목? 손목이···!”
“너희 보스는 몇 층을 쓰니?”
“시···십, 십 층인데요.”
“고맙다. 이제 일 봐.”
“네···.”
자신의 손목이 잘렸는데도 큰 반응이 없는 마약 중독자 놈을 대충 치우고 승강기에 올라타 최상층인 10층을 눌렀다.
거북이보다 느릿한 속도로 최상층에 도착한 임시 승강기의 문이 양쪽으로 열리자.
철컥.
수많은 총구가 나를 환히 반겨주었다.
다들 1층 데스크의 그놈처럼 마약에 절어있는 얼굴들이었다.
“자, 여기서 이름이 라네치아인 사람?”
- ······.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이라,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푹 넣은 채, 투레 더 타운 최상층의 전경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소파와 각종 가구들.
벽에는 적당히 큰 금고가 하나 붙어있으며, 부동산을 볼 때 가장 중요한 옵션 중 하나인 전망은 타운의 유일한 10층인만큼 상당히 좋았다. 개미굴 같은 슬럼가에 가득 들어찬 네온사인들과 어두운 판자촌 뷰가 확실하게 내려다보인다.
같잖은 우월감을 느끼기엔 이만한 곳이 없겠군.
문득, 훌륭한 전망을 구경하다 입을 열었다.
“오늘부로 너희는 해산이다. 라네치아랑 윗대가리만 남고 싹 나가라.”
“개소리. 감히 누구 앞에서 네 좆대로 말하는 거냐?”
아까부터 가죽 의자에 거만하게 기대 앉아있던 사내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놈은 안주머니에서 시가를 꺼내 기요틴에 끼우더니, 대가리를 싹둑 자르며 말했다.
“너 무스코를 죽인 그놈이지? 삼호문과도 친하다며. 그럼 사창가랑 기루 똥이나 받아먹으면서 살지 왜 여기까지 와서 설쳐? 아! 폭풍에 다 박살나서 도망갔겠군.”
“네가 라네치아니?”
“그렇다면 어쩔거냐.”
라네치아는 뱃살이 푸짐한 남자였다.
금색으로 겉을 도금한 사이버웨어 팔과 입안에 박아 넣은 금니가 눈부시게 번쩍댄다. 정크타운의 최대 부동산 소유주답게 부유한 티는 나는군.
놈은 상황 파악이 힘든지, 계속 실실 웃으며 여유를 부렸다.
“날 죽이러 온거면 크게 실수한거다. 내가 륭과 계약을 맺어둔 건 알고 이러는 거냐? 큭, 이미 그 괴물이 여기로 달려오고 있을걸.”
“그거 정말 무섭군.”
“자! 눈이 있으면 밑을 봐라. 여기서 보이는 길거리가 전부 내 거야. 무슨 소리 알아? 모르겠지. 저게 다 6레벨의 괴물을 수족처럼 부리게 해주는 크레딧 뭉치들이라고!”
라네치아는 한심한 자기 자랑을 늘어놓으며 껄껄 웃었다. 저 뚱뚱한 녀석은 정크타운의 건물값을 다 합쳐봐야 시티 업무지구 메인에 자리한 빌딩 한 채의 자릿세만도 못하다는 걸 알고나 있을까.
“핫핫핫! 세상은 다 땅과 건물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는 입이 찢어져라 웃는 놈을 바라보다가···
주머니 속에서 쥐고 있던 테크리볼버의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라네치아의 이마에 빨간색 구멍이 생겨났다.
즉사였다.
“내가 부동산 강의 들으러 온 것 같니?”
쿵!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가는 뚱뚱한 시신.
돈 깨나 만지던 건물주로서는 참 허망한 죽음. 팔은 진작 사이버웨어로 교체했어도 눈치는 사이버웨어로 교체하지 못한 탓이다.
“패밀리니까 방금 죽은 놈이 아비인가? 이제부터 죽은 아비의 복수를 할 놈들만 남고 다 나가라. 늦으면 지각비는 목숨으로 내는거야.”
- ······.
장내의 분위기가 얼음장처럼 싸늘해졌다.
그러나 밖으로 나가는 놈은 한 명도 없었다.
이미 죽어버린 보스의 눈치를 보는 건 아닐 테고, 이리로 달려오고 있을 륭을 기다리는 건가? 아니면 매일 배급 받는다는 마약 때문인 건가.
아무튼 건물주는 뭐가 달라도 다르군.
유산을 받아 가려는 아들들이 죽은 이후에도 목숨을 걸고 곁을 지켜주니 말이다.
하기야 말로 한다고 해서 깍듯이 들어주면 밑바닥 인생들이 아니지.
나는 개중에 간부로 보이는 놈들을 타깃으로 삼아 신형을 쏘아냈다.
뻐억!
사람들 사이에 숨어 몰래 방아쇠를 당기려던 놈의 머리가 뭉개졌다. 놈은 코에서 피를 쏟아내며 그대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후에 몇 명을 더 비명에 보내고 나서야, 투레 더 타운을 깔끔히 비울 수 있었다.
“쯧.”
실랑이도 수준이 맞아야 하는 것이다.
정크타운에 갓 들어왔을 때라면 몰라도, 이제는 이런 식상한 양아치 놈들과 말만 섞어도 심신이 피곤해졌다. 새로운 자극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둔감해지기 마련이다.
그렇게, 타운의 집단 하나가 허무하게 사라졌다.
나는 빌딩 안에 전셋집을 차려둔 라네치아 놈들을 몰아낸 뒤에는 1층으로 내려와 루돌프 놈과 즐거운 만담을 나누었다. 녀석은 이번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았는데, 목숨줄 질기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돌프야, 너도 참 대단하구나.”
“감사합니다.”
“이쯤 되면 죽을 때도 되었다.”
“외공을 익히고 있어서 그런가. 요즘 잘 안 죽네요.”
그때.
먼 저편에서 거세게 일어나는 먼지구름.
안력을 돋우니 먼지구름 속을 질주해오는 륭이 보였다. 이제 일의 마무리를 할 시간인듯했다.
“다녀오마.”
“형님, 어차피 짜고 치는 거라지만 저는 형님만 응원하겠습니다.”
“그래라.”
스르릉—
저편에서 달려오던 6레벨의 거한이 좌중을 압도하는 살기를 흩뿌리며 적색의 도검을 뽑아들었다. 17번가 술집 앞에서 눈알 좀비를 두 쪽으로 갈라버렸던 그 병기였다.
투우소를 연상케하는 돌진에 나도 압축도를 뽑아 들고 기수식을 취했다.
점처럼 작게 보이던 륭의 형체가 어느새 스무 걸음 앞까지 가까워졌을 때.
스읍.
한 호흡에 솟구친 내공은 잔잔한 진동을 일으키며 도에 힘을 보탰다. 뒤이어 가볍게 내딛는 일 보(步). 머리를 두 쪽 낼 듯 정직하게 떨어지는 륭의 도검을 향해 내 압축도가 들불처럼 치고 일어났다.
기검토룡(起劍土龍).
콰과과곽!
도의 궤적을 뒤늦게 쫓아가며 쩌억 갈라지는 땅바닥. 지면을 통째로 들어낸 나의 칼날이 몸뚱이를 틀어 위로 솟구쳤다.
곧이어, 허공에서 륭의 도검과 내 도가 맞부딪친다. 이미 평범한 인간의 완력을 벗어난 륭의 힘에 순간 손목이 끊어질 듯 아려왔다.
이윽고 내가 딛고 있는 지면이 움푹 패여 들어갔다. 칼이 부딪히며 일어난 반탄력마저 무시한 채 압도적인 힘으로 눌러오는 륭.
그 기백이 대단해 급히 공력을 거두곤 뒤로 훌쩍 물러났다. 찢어진 내 손아귀에서 도병을 타고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륭은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쇄도해왔다. 날카로운 파공성이 귀를 먼저 때리고, 횡으로 내리긋는 검격이 허공을 양분했다.
나는 잘 갈아놓은 그의 검날이 코앞까지 들이쳤을 때를 노려 마력을 끌어올렸다. 허공에 떠있던 륭의 다리가 덜컥 멈추었다.
“······.”
간단한 속박 마법.
허나 그를 묶어 두는 건 불가능하다.
그저 공격의 흐름을 잠시 끊어내는 용도일 뿐.
내 예상대로 찰나간 자세가 흐트러진 륭의 검에 빈틈이 생겨났다. 공력을 잔뜩 빨아먹은 압축도가 륭의 목줄기를 노리고 쏘아졌다.
그러나 륭이 방어를 도외시한 채 살을 주고 뼈를 취할 것처럼 똑같이 검을 휘둘러오자, 다시 한번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뒤로 물러난 나는, 그에게서 언뜻 묘한 느낌을 받았다.
‘일부러 힘을 빼느라 그런 건가?’
앞선 연방 격리 시설에서 괴물들의 전투를 보았기 때문인지, 내 눈에는 지금까지 륭이 펼쳐낸 초식과 동작들이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그 뒤로 몇 합을 더 겨루며 유심히 지켜보니, 그런 느낌을 받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륭이 보유한 내공의 양은 레벨에 비해서도 비정상적으로 많았으나, 그것들을 세상 밖으로 꺼낼 무공은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
내게 모아둔 에센스를 넘겨 주겠다며 에센스에는 별 미련을 가지지 않는듯한 륭의 행동과 지금의 상황이 맞아 떨어졌다.
그러니까, 륭은 내공이 무지막지하게 많은 사내이나 절정의 벽에서 배움이 막혀있는 무인이었다. 내가 처음에 륭을 보았을 때 느꼈던 기이함은 바로 거기에서 기인한듯 싶었다.
투박한 무공에 비해 내공만 너무 많다. 나처럼 성취를 내공이 못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성취가 내공을 따라가지 못하는 특이한 형태였다.
카앙!
일단, 이렇게 열 합.
이제 딱 절반이 남은 것인데···.
나는 한 가지 결심을 마치고는, 그 뒤의 열 합동안 그의 도검을 의도적으로 흘려가며 륭의 검로를 교정해주기 시작했다. 륭은 한 끗 차이로 극성의 조화를 이루지 못했는데, 그 부분을 친히 어루어만져가며 도자기처럼 다듬었다.
내가 열심히 싸우기는 커녕 검만 툭툭 쳐내자, 처음에는 영문을 모르고 눈살을 찌푸리던 륭은 세 합을 남기고서야 내 의도를 알아챘다. 그는 곧바로 의문을 지운채 무섭게 몰두하며 검로를 눈으로 좇아 움직였다. 6레벨은 딱지치기로 딴 것이 아닌지, 척하면 척이었다.
그렇게 열합 하고도 다섯 합 더.
총 스물다섯 합.
우리가 처음 상정했던 것보다 다섯 합을 초과했을 시점.
“······.”
쾅! 쾅! 콰아앙!
그는 숫제 미친 듯 검을 내리치고 있었다.
검끝에는 힘이 붙었고 속도는 전보다 배로 빨라졌다. 바람을 가르던 도검이 이제는 바람을 때려 터뜨리고 있었다.
언제는 스무 합만 적당히 받아 달라더니···
나를 뼈째로 발라서 세꼬시로 만들 심산인가?
‘아니, 이 새끼 이거 지금 뭐 하는 거야.’
본디 스무합 내에 내 쪽의 패배로 적당히 끝났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륭의 눈빛에는 기이한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어두워 생기가 없었던 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죽어가던 노인이 잠시 정기를 되찾은 것처럼 륭은 나와의 비무에 모든 정력을 죄다 쏟아붓고 있었다.
심지어.
화아악-
그의 도검에서 짙게 일렁이는 검기(劍氣).
대체 잉여 내공이 얼마나 많으면 절정에 이르지도 못했는데 저만한 검기를 쑥쑥 뽑아낸단 말인가?
내가 놀라 급히 눈짓했으나, 륭은 검기를 거두지 않으며 조용히 뇌까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이런.
이미 혼이 반쯤 나간 저 얼굴을 보면.
그리고 저자가 뜬금없이 미치지 않은 이상에야.
‘무아(無我)로구나.’
전투를 벌이던 륭은 급작스레 무아지경에 빠져버렸다.
가짜 비무가 한순간에 생사결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역시 빌어먹을 정크타운답다.
이 동네에서 그나마 상식이 통하는 인간인 줄 알았더니, 절대 멀쩡한 정신 상태는 아니었군.
아니. 이번에는 내 잘못도 약간은 있겠지.
오랜만에 진짜배기 무인과 칼을 섞어서 그런가, 나도 모르게 기분을 낸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륭이 저렇듯 번뜩이는 깨달음을 잡으려 무아에 빠질 때까지 한 수 가르쳐 보이겠다며 주접을 떨었겠는가.
만약 저 무아지경을 잘 헤쳐 나온다면 그를 가로막고 있던 벽을 깨부수는데 큰 도움이 될 테지만, 전투중에 무아로 빠져들었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니었다.
깨달음이라는 무형의 실타래를 잡기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힘을 가졌는지조차 망각하고 진심 전력으로 검을 휘둘러 올 것이다.
온 정신이 극도로 한 점에만 몰려있을 터인 륭의 기도는, 그리 생각하는 순간에도 점점 더 사나워지고 있었다.
‘이러다 진짜 한바탕 하게 생겼군.’
나는 륭이 만들어낸 검기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완숙한 6레벨의 무인이 전력으로 휘둘러오는 검.
이대로 죽으면 언 선생의 예언이 며칠 만에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청개구리의 마음으로 도를 손 쥔에 힘을 주었다.
이윽고.
륭의 거대한 신형이 번갯불처럼 사라짐과 동시에, 도를 쥔 내 오른팔이 서걱 잘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