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입마로다
#23화.
두 눈을 감자 심상이 나를 덮어 눌렀다.
순식간에 그 속에 가라앉아 피할 도리가 없었다.
매번 나를 늪으로 처넣던 망상병이 지금 도진 것인데, 이따금 나타나선 내 의지와 상관없는 심상에 빠뜨리곤 했다.
고강한 무공과 마법을 가지고, 정 아니라면 지금 당장의 힘을 가지고서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 무너져 내린 세계에서도 꿋꿋이 살아갈 수 있을까.
정신이 멀쩡한 인간으로 남을 수 있었을까.
— 미안허이···미안허구먼···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내 음식을 빼앗으려던 치매 노인은 죽지 않았을테지.
— 저, 저도 데려가 주세요.
— 제발 버리지만 말아 주세요······.
누구에게나 똑같이 친절한 여자였는데.
다리를 다쳐 걷지도 못하는 몸으로, 조금이나마 더 살아보겠다고 애원하는 여자를 어둠 속에 버려두고 도망치지 않아도 되었을까.
— 이것 좀 열어줘! 제발! 그냥 코피라고 씨발! 왜 안 믿어줘! 왜! 끄아아악!
나는 그 현관문을 열어줄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리했겠지. 그저 잠금장치를 풀고 손잡이를 돌리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그런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왜 그들을 도와주려고 했는지, 솔직히 이제는 나도 잘 모르겠다.
거기에 내 잘못은 없었는데 어째서 기분이 이리도 더러워야 하나. 그것도 평생을 말이다.
왜 하필 나한테 와서 징징댄 거야. 이 개같은.
가만, 어차피 얼마 못 가 죽었을 수도 있지 않나?
그래.
도와주었더라도 그 치매 노인은 곧 죽었을 거다.
실은 그냥 편하게 죽고 싶은 마음에 내 식량을 훔치려 들었던 것 아닐까? 지금와 생각해보면 나는 분명히 총을 들고 있었다.
정말로 이기적인 노인네였네.
편히 죽고 싶어서 그랬던 거구나.
좀비 무리에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보단, 총탄 한 방에 저세상으로 가는 것이 더 행복하고 존엄한 죽음일 테니까.
······이거 어쩌면.
나는 그 노인을 구원한게 아니었을까.
— 두 번 말하지 않는다. 꺼져.
— 내가 이렇게 부탁함세. 조금만 나눠주면 안 되겠나? 이 허기만 채우고 곧바로 떠나겠으이.
아닌가? 아닐 수도 있겠다.
그래,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
그 지옥으로 돌아가는 건 아닌 것 같아.
갑자기 파도처럼 밀려오는 어지럼증에 눈을 질끈 감은 나는, 지옥같던 기억에서 빠져나와 또 다른 심상으로 떠밀려가고 있었다.
똑···! 똑···! 똑···!
떠밀려간 곳에서 나는 강호인이 되었다.
불가의 청량한 목탁 소리가 귓전을 울리고.
한 땡중이 맛없는 절밥을 강요하며 말했다.
— 시주께서는 승려가 되지 않는다면 필시 미치광이가 되고 말겁니다.
— 평생 풀만 먹을바에 광인이 낫지요.
— 허허허, 도로 아미타불이로군요.
그러자 목탁 소리가 슬그머니 사그라들더니, 차려져있던 절 밥이 주우욱 늘어나며 저 멀리 사라졌다.
또 다시 심상 속 어딘가로 내던져진 나는, 자욱하고 장엄한 안갯속에서 눈을 떴다.
장강(長江)의 어느 지점이었다.
늙고 마른 사공이 모는 나룻배는 고고하게 장강 물길을 타고 떠내려간다.
노를 젓던 사공은 어느 곳에 이르러 깊고 거센 물길을 만나자 삶과 애환을 노랫말에 담아 풀어냈다. 한 구절이 반복되는 단순한 노랫말이었는데, 그는 절절한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힘겹게 노를 저었다. 수수깡같은 노인의 팔에 앙상한 근육들이 솟아올랐다.
나는 그 늙은 사공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그 사공이 보여주는 광경이 사뭇 대단하여 사공의 노랫말을 이해하고 터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저 뜻모를 노랫말을 풀어내면 급류가 멈추고 광명이 찾아올 것만 같았다.
한참을 사공의 노랫말과 씨름하고 있는데, 갑자기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 에라, 등신같은 놈.
시커먼 강물 속, 비쳐 보이는 스승의 모습.
나는 다짜고짜 욕부터 하는 스승을 원망스레 노려보았다. 내 대가리 속에는 두 명의 젊은 사내가 들어차 있었는데, 나룻배에 걸터앉은 스승을 노려보는 순간만큼은 만두를 먹으러 객점에 들린 거렁뱅이 꼬마였다.
— 삶의 굴곡이 깊다고 하여 그따위 입마(入魔)조차 다스리지 못한다면, 부끄러워서 어디 제자라고 내놓을 수 있겠느냐!
사공의 나룻배 앞에 걸터앉은 스승이 어울리지 않게도 근엄한 척을 했다. 꼭 고지식한 명문대파의 늙은이들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나만큼 정신나간 광인의 일갈을 듣자, 깊고 어두운 장강물 속으로 가라앉던 정신머리가 조금은 맑아진 것 같았다. 이를테면 동질감이라고나 할까.
— 제자야, 장강은 원래 이리저리 꺾여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스승은 나룻배의 머리를 밟고 뛰어 올라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스승의 말을 거듭하여 되풀이했다.
그는 한없이 가볍다가, 언제는 한없이 미쳤다가, 또 어느 때는 한없이 종잡을 수 없는 사내였다.
이윽고 거센 물살을 빠져나온 나룻배는 다시금 강을 유유히 떠내려가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스승의 말을 곱씹다가 한순간 머리를 탁 쳤다.
장강은 본래 이리저리 꺾여있기에, 급류가 이는 곳은 잠시였다.
어차피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던 참이니, 경험많은 뱃사공은 이를 구실삼아 뱃삯을 더 요구하기 위해 혼신의 연극을 펼친 것이었다.
콰르르륵-
그 순간, 강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소용돌이치는 장강물이 나룻배를 게걸스레 집어삼키는 것을 보며, 이것이 사실 심마(心魔)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럴듯한 심상 속에서 어떠한 깨우침을 얻었더라도 그저 도로 아미타불이었을 것이다.
천근을 올려놓은 듯 무거웠던 눈꺼풀이 이내 가벼워졌다.
“······.”
주위는 심마에 빠져들기 전보다 고요했다. 밖은 시간이 많이 흐른듯했다. 폭풍은 거세게 몰아치기 직전이 가장 조용한 법이라던가.
- 거 드럽게 안 일어나네.
“뭐라고?”
어디선가 들려온 루돌프놈의 비아냥이 나를 깨웠다.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저 멀리 서있던 놈이 화들짝 놀라며 쩔쩔맸다.
“아, 일어나셨어요 형님? 하루가 넘도록 계속 눈을 감고 계셔서 놀랐습니다. 하하.”
“드럽게 안 일어난다고?”
“······예?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그러세요.”
“기억나게 해줄까.”
이제 완벽히 상념에서 빠져나온 나는, 헝겊을 꺼내 압축도를 천천히 닦기 시작했다. 지끈거리는 머리가 맑아질 때까지 닦을 참이었다.
안정적인 무게감이 손끝으로 느껴진다.
스르릉-
식은땀을 뚝뚝 흘리는 루돌프놈을 응시하며 압축도의 도신(刀身)에서 광이 날 때까지 닦았다.
“형님, 제가 생각해보니까 그거 방금이 아니라 어제 했던 말 같은데요···죽을 잘못까지는 아니지 않나요?”
“칼날이 아주 잘 닦였다.”
“······네?”
“누구 하나 담궈버리기에 딱 알맞겠군.”
훌륭한 외공을 극성까지 단련하면 칼로는 생채기도 낼 수 없다던데, 아마 저놈은 극성까지 익히기는 힘들것이다. 지금도 내 손이 근질대며 멋대로 칼을 휘두르려 하지 않는가. 이놈은 필시 도검불침의 경지를 밟기 전에 내 칼에 찔려 죽을 팔자였다.
“다들 밑에서 뭐하고 있어?”
한참 칼을 닦고 있는데, 2층의 레나가 층계를 내려와 나를 부른다. 어딘가 불안한 표정과 행동은 어릴 적 응석을 부리던 레나를 떠올리게 했다.
“나도 레반이랑 같이 1층에 있을래.”
발두르 중심가가 아닌 타지역에서 모래 폭풍을 맞이하는 건 레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딘가 위축된 듯한 레나는 쫄래쫄래 내려와선 내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레나의 등장에 가만히 있던 휴머노이드 바텐더가 고저없는 음성으로 묻는다.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하는 ‘오늘은 어떤 술’ 타령이었다.
- 오늘은 어떤 술이 필요하십니까?
술이라······
주독이야 나중에 내공으로 날려버리면 그만인데.
괜찮은 술을 몇 병 마시면 지금보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지 않을까.
- 오늘같이 폭풍이 몰아치는 날씨에는 바다 위의 해적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요? 해적들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 강렬하고 뜨거운 럼주를 추천해 드립니다. 아니면 럼 원액에 콜라를 섞어 달콤한 럼콕을 즐기는 것도 훌륭한 선택이죠.
휴머노이드 바텐더의 긴 멘트가 끝나자.
삐리리링!
먼지 쌓인 아케이드 게임기 하나가 제멋대로 켜지더니 껐다 켜지기를 반복했다. 강한 바람이 어딘가에 튀어 나와있을 전선다발을 자극한 탓이겠지.
레나는 그 갑작스러운 소리에 놀라 흠칫했으나 곧 안정을 되찾았다.
“돌프야. 가서 꺼라.”
“예.”
무언가 어수선한 분위기에 더 이상 1층에 있기 싫어졌다.
“2층으로 가자. 여긴 너무 시끄럽다.”
그렇게 올라온 2층, 매일 증권시장의 업데이트 된 정보를 알려주던 디스플레이에 오늘은 다른 화면이 띄워져 있었다.
[ 자~이미 모두들 알고 있겠지만요. 발두르 시티는 오늘 오후를 기점으로 모래 폭풍의 영향권에 들었답니다! 아~벌써부터 불어오는 모래에 눈이 따가운 것만 같은데요. 대비들은 철저히 해뒀나요? ]
거기에는 우스운 의상에 과장스러운 행동을 곁들여가며 시티의 현재 상황을 설명하는 넷 리포터가 보였다. 그는 시티 방송국 채널의 유명한 진행자였다.
통이 큰 모자에 가죽바지와 부츠를 신었는데, 그 기괴한 부조화가 은근히 사람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 시티 중심가의 양복쟁이 친구들은 환기구를 닫아서 방사능이나 독성물질의 유입을 방지하시기 바랍니다! 마법사들의 대기 정화가 끝나기 전까지는 환기는 참아주세요! 어쩌면 시체들이 열어둔 환기구로 기어들어갈 수도 있지 않겠어요? ]
[ 또 시티 외곽의 주민분들께서는, 오늘 밤부터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꼭꼭 숨어 있어야 할 겁니다. 왜냐구요? 집이 없어서 슬픈 친구들이 사탕대신 감염이라는 선물을 들고 찾아올지도 모르잖아요? 문 열어주면 큰일 납니다! 하하핫! ]
[ 아! 방금 시티 남쪽 외곽의 ‘루차쿤토 타운’ 에서 들어온 소식이 있네요. 의문의 독성물질 중독으로 인한 사망자가 여럿 발생했다고 하는데요? 벌써부터 재수 없는 소리네요. 창문좀 잘 닫으라니까 그러네. ]
폭풍은 엄청난 양의 이물질을 몰고 온다.
모래폭풍의 발원지는 광활한 황무지와 끝도 없이 펼쳐진 발두르 근방의 사막지대.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그곳에서 날아오는 미상의 것들을 전부 막아낼 수는 없다.
문득, 고이 묻어두었던 나노로봇 카트리지가 생각났다. 사람이 걸어서 지나다닐 일이 없는 곳에 깊이 묻었기에 여간해서는 문제가 없겠으나, 세찬 폭풍이 불어 땅을 파헤치기라도 할까 괜스레 근심이 되었다.
하기야, 노상 땅에만 처박아 두는 것도 반 회장의 유작에 대한 예의가 아니겠지. 위협적이던 놈들도 몇 사라졌으니, 이 폭풍만 끝나면 시술 실력이 좋은 의사를 찾아보리라 다짐했다.
쾅!
바람에 날아온 무언가가 창틀에 부딪히는 소리. 모래 폭풍은 점점 더 세를 불려 나가고 있다.
쐐애액-
공기를 찢어발기는 칼바람. 거기에 더해 작은 알갱이가 철판을 긁는, 길거리의 무언가가 날아와 문을 연신 때리는 소음이 그 강도를 높여간다. 모든 문을 철저히 막아뒀는데, 내 귀가 이리도 밝았나 싶었다.
텅텅. 텅!
꽤 두꺼운 판을 덧대 놓았음에도 폭풍이 어찌나 강한지, 바람에 눌린 철판과 창문틀이 연신 부딪힌다.
[ 대협, 그곳은 상황이 어떤지요? ]
별안간 삼호문주로부터 연락이 왔다.
폭풍이 심해지면 넷 통신망도 전부 먹통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아직까지는 괜찮은 것 같군.
[ 아직 별일 없다. ]
[ 이쪽은 벌써 문패가 떨어져 버렸습니다. 못으로 잘 고정해두었는데······바람이 저번보다 강해서 그런듯 합니다. ]
[ 떨어진 김에 바꿔라. 별로였다. ]
[ 대협도 그리 생각하십니까? 문패가 밋밋했는데 마침 잘 되었습니다. 이왕 이리된 거 더 화려하게 바꿔야겠지요. ]
[ 네 마음대로 해라. ]
나는 즉시 통신을 끊어버렸다.
네온사인 따위로 치장해놓은 문패는 진정한 무협이 아니다. 속으로 그 망할 문패가 떨어져 박살 나기를 기도했다.
*
하루가 느리게 지나갔다.
문이란 문은 전부 막아둬서 건물 밖이 어떤 상황인지는 알 수 없다. 이따금 들려오는 소음으로 대강 유추해볼 뿐.
쐐애애액-!
아침부터 어제의 칼바람은 애교였다는 듯, 폭풍이 대기를 찢어발기고 있다.
“하아아······.”
새벽 내내 밤잠을 설친 레나가 죽을상을 한다. 하기야 철판이 쨍쨍대는 소리를 자장가처럼 들어야 하는 지경이었으니. 심지어 불면증까지 있는데 죽을 맛이었겠지.
[ ...... ]
오늘은 넷 통신망마저 먹통이다.
디스플레이 안에서 제멋대로 떠들던 리포터도 한참을 그 자리에 멈춰있다.
어수선하고 어두운 분위기 속.
조명에 의지해 셋이 다닥다닥 붙어 있자니, 커다란 고래 뱃속에 삼켜진 조난자들 느낌이라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러던 그때였다.
- ······!
아주 짧은 찰나간.
어디선가 작게 들려오는 비명.
옆 건물에는 지금 아무도 없을 텐데.
쾅-!
쾅쾅쾅-!
이제는 확실했다.
누군가 밖에서 1층의 출입문을 두들기고 있다. 아주 문이 부서져라 두들겨대는데 그 다급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듯했다.
- ······열어줘!
이 거대한 모래 폭풍 속에서 바깥을 돌아다니며 남의 집 대문을 두들기는 미친놈이 대체 누굴까.
- 나 알지? 섹스토이! 섹스!
나는 섹스라는 단어를 들고는 고심했다.
이 문을 열어야 하나, 열지 말아야 하나.
밖에서 소리지르는 저것이 사람은 맞나.
원래라면 당연히 열어주지 않는게 맞겠지.
고민하던 내가 따라 내려온 루돌프에게 물었다. 레나는 몸이 돌처럼 굳어 있어서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돌프야.”
“예.”
“저거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 아니냐? 나는 들어봤던 것 같다.”
그러자 루돌프가 긴장한 얼굴로 답했다.
“형님.”
“왜.”
“저는 문을 존나게 두들기는 소리밖에 안 들립니다. 무슨···누구 목소리요? 지금 무서우라고 농담하시는 거죠?”
“그래. 너는 못 들었겠구나.”
내 귀가 루돌프놈보다 훨씬 밝다는 사실을 깜빡했다.
“하여튼 문을 열어줘야 할까. 말아야 할까.”
“그야 당연히 열어주면 안 되죠. 형님, 우리 다 같이 손잡고 좆될일 있습니까?”
아주 정상적인 대답이다.
하지만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밖에 있는 놈이 사람이면 죽지 않겠냐.”
“···예? 형님이 그런것까지 신경 쓰시는 분이셨어요? 아니 폭풍이 부는데 밖에 기어나간 새끼가 미친놈이죠.”
“그것도 그렇긴 하지.”
덜컥.
나는 그리 대답하며 창고 문을 열었다.
그리곤 방진 마스크를 꺼내 뒤집어썼다. 다시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출입문에 덧대놓은 철판 앞으로 다가갔다.
쾅쾅쾅쾅-!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한층 거칠어졌다.
- 나 좀 살려줘! 부탁이다! 나 그 골목! 300크레딧! 거지!
콰드득!
대못이 박힌 철판을 강제로 뜯어내곤 압축도를 뽑아 든다.
문 앞에 선 내가 다시 루돌프에게 물었다.
“열까 말까.”
“······.”
“네가 한 번 기탄없이 말해보렴.”
“형님.”
“그래.”
“왜 그러시는지는 모르겠는데, 어차피 형님 꼴리는 대로 하실 거 아닙니까?”
놈은 눈치를 챙기곤 마땅히 할 말을 했다.
나는 권총에 소음기를 끼우는 루돌프놈에게 잘했다며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에도 고민은 없었다.
철컥!
1층 출입문이 시원하게 열린다.
——!
끔찍하리만치 강력한 바람이 화악 불어왔다.
그저 문만 열었을 뿐인데, 바 선반 위의 무거운 술병들이 뒤로 넘어가며 우르르 깨지는 소리가 났다.
작은 모래 알갱이들이 마스크 위를 때리고, 황색 먼지까지 덮쳐와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어둑한 누군가의 형체가 드러났다.
쐐액-!
목덜미를 노리고 단숨에 출수한 압축도.
그러나 혼탁하고 걸걸한,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에 나아가던 칼날이 형체의 코앞에서 정지했다.
“흐억! 나 좀 살려주쇼!”
일전에 개방도로 의심했던 그 거지놈이었다.
놈은 말 그대로 넝마주이였다. 걸레처럼 다 찢어진 옷에 산발한 머리, 온갖 구정물에 모래와 검댕이를 잔뜩 묻힌 꼴.
더해서 당장이라도 쓰러져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안색이었다. 얼굴이 떨어뜨린 만두처럼 일그러지고 새하얗게 질려서는, 마치 달걀귀신을 보는 듯했다.
“쪽박 다 깨지고 여기로 도망왔군.”
“지, 지금 이럴 때가 아니······.”
나는 내뻗은 도를 즉시 회수하고는, 거지놈의 멱살을 잡아채 안쪽으로 집어 던졌다. 문을 다시 잠근뒤 철판을 박아넣고 있는 사이, 놈은 술집 내부를 황급히 둘러봤다.
푸닥거리며 달려간 놈이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무거운 아케이드 게임기를 문 앞까지 끌고와선 바짝 붙여 세워뒀다. 냉장고보다 커다란 게임기가 문 앞을 막고 섰다.
놈이 그렇게 봉인하다시피 출입문을 막아둔 그때.
톡- 톡-
밖에서 또 들려오는 소리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번에는 거지놈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바깥에 서서 문을 소심히 두들기고 있다. 비명이나 살려달라는 말도 없이 오직 손가락을 이용해 툭툭 치는 소리였다.
형용할 수 없는 얼굴의 거지를 향해 물었다.
“뭘 끌고온 거냐?”
“······시체지요.”
“그렇군.”
“진심으로 미안하게 됐습니다. 나중에 크게 매질을 하더라도, 지금은 같이 살 궁리를 해봅시다.”
심마의 늪에서 헤어나와 심신을 새로이 단장한 내게 이런 빌어먹을 불운이 찾아오다니.
다시 입마(入魔)로다.
콰직-
찰나간, 아케이드 게임기의 화면 속에서 거무튀튀하고 길다란 손가락이 솟아났다. 어지간한 사내의 손가락보다 배는 두꺼웠는데, 여러 갈래로 갈라진 손톱이 휘적휘적 천천히 허공을 파냈다.
삐로로롱-
그 충격 때문인지 아케이드 게임기에 불이 들어오며 아기자기한 물고기들이 나타나 빈 화면을 속속 채워나갔다. 빠찡코 종류의 도박 게임기이긴 하지만, 화면 안에서 손가락이 솟아난다는 얘기는 일찍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손가락이 다시 쑤욱 빠져나갔다. 게임기의 화면에는 뻥 뚫려있는 괴상한 구멍만이 남았다.
“······.”
나는 일단 후안무치한 저 거지놈의 처분을 뒤로 미뤄두고 부지런히 움직여야만 했다.
심마에서 빠져나온 후, 첫 번째 굴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