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직접 찾아가는 사내
#19화.
륭과 에센스에 관한 거래 조율을 끝마친 레반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다시 의자에 궁둥이를 붙였다. 그냥 떠나자니 아쉬워 한번 찔러나 보자는 심정이었다.
“사람도 죽여줍니까?”
“······.”
륭은 눈썹을 한 번 찌푸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무엇이든 해결해준다는 슬로건을 걸어둔 해결사 사무소라지만 나름의 선은 있었다.
그는 거절의 뜻을 내비치며 일어났다.
“에센스는 저녁까지 구해다 드릴테니 이만 가십시오.”
“사람을 토막내 파는 놈들인데, 죽이는 건 내가 할 테니 힘만 조금 보태주면 50만 크레딧을 추가로 지불하겠습니다.”
“······.”
레반은 다시 한번 륭을 설득하며 액수를 크게 불렀다. 자신이 지금 지불할 수 있는 한계 금액이었다.
돈이 많이 들더라도 보기 힘든 6레벨의 강자를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충분히 남는 거래라고 생각했다. 륭도 생각보다 큰 액수에 마음이 동하는 듯 보였다.
‘어머어머.’
거액의 크레딧을 마구 남발하는 레반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던 클로에는 탕비실의 비밀선반을 열었다. 돈 되는 고객에게만 내는 고급 찻잎이 있는 곳이었다.
딸랑-
때마침 친씨아의 총포상으로 심부름을 갔던 밴스가 사무소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레반은 시티 중심가의 자산가라도 된 양 거만하게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런데.
노획품을 팔아 따끈한 크레딧을 잔뜩 들고 왔어야 할 밴스가, 아까 들고간 물건들을 그대로 다시 들고온것이 아닌가.
“뭐야? 돈으로 바꿔오라니까.”
레반이 눈을 부라리자, 안절부절 못하던 밴스가 초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친씨아가 그 공장이랑 관련된 물건은 안 사겠다는데요. 아마 휘말리기 싫은가 봅니다.”
““······.””
약속이나 한 듯 사무소 내에 정적이 흘렀다.
값비싼 찻잎을 빻아 고급스러운 머그잔에 내릴 준비를 하던 클로에는 다시 찻잎을 깊은 구석에 쑤셔넣고 선반을 탁 소리나게 닫았다.
이윽고 클로에는, 적당히 싼 믹스커피 봉지를 뜯어 컵에 쏟았다.
촤아악-
테이크 아웃용 플라스틱 컵이었다.
*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해?”
응곽과 함께 술집안에서 경비를 서던 은소가 힘 빠지는 소리를 낸다.
그 남자는 무공을 수련하던 문도들을 여기까지 불러내 경비로 세워놓곤, 일이 있다며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문주도 아닌 이가 자신들을 아랫사람 부리듯 하니 속이 뒤틀리는건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문파의 가장 윗사람인 삼호문주가 이미 그 레반이라는 남자의 열렬한 신봉자가 되어 버렸기에 은소는 감히 불만을 표시할 수 없었다.
또한 여량천같이 그나마 실력있는 제자들도 그를 사부로 모시지 못해 안달이 나있었다. 자신의 옆에 있는 응곽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사부님 말만 잘 듣자고. 대충 끄적여놓고 간 무공들이 하나같이 대단한 걸 보면 우리랑은 격이 다른 사람이야. 당장 그 종이만 복사해서 팔아도 팔릴걸? 계약 위반이긴 하지만.”
놀랍게도 저 말이 맞다.
타운에서만큼은 유명한 무인인 삼호문주부터가 그 남자 앞에서는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헤실헤실 대는것만 봐도···그는 쉽게 보기힘든 무림계의 고수인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8번가 빨간골목의 사무라이보다 더 강할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이게 정말 말이 되나?
“그런 인간이 왜 여기로 왔을까? 기업에 있어야 하는거 아냐?”
“그럴만한 사연이 있나보지. 알면 뭐 할거야?”
“······어휴.”
응곽과의 대화를 포기한 은소가 술집 내부를 둘러본다.
어수선한 잡기들이 널려있는 1층.
화면이 꺼진 아케이드 오락기들을 아무렇게나 구석에 박아놓았는데, 하레니오 놈들이 이전에 쓰던 것들로 보였다. 제대로 청소를 하지 않아 먼지가 쌓여있고 난잡하다.
여기저기 고개를 돌리다 작은 바를 지키는 휴머노이드 바텐더와 눈이 마주쳤다. 바텐더는 상황에 맞게 입력된 멘트를 치며 술을 권했다.
- 마음이 울적한 날에는 위스키를 추천합니다. 당신의 촉촉하고 아름다운 눈빛에 건배.
바를 둘러보던 은소가 술에 관심을 보이는 듯하자, 뒤에 앉아있던 응곽이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제지했다.
“함부로 술을 마셨다간 또 처맞을걸.”
“안 마셔! 그리고 누가 처맞았다고 그래?”
“저번에 기절해서 대(大)자로 누워있던거 기억 안 나? 그날 움푹 들어간 네 옆통수를 판판하게 편게 문주님이셔.”
“······.”
얼굴이 붉어진 은소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뒤로 무공 구결을 달달 외우며 시간을 보내던 그녀는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1층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때마침 시선에 들어온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자, 어지러이 움직이는 화면들이 보였다. 그다음은 침대 위에 고요히 잠들어있는 레나였다.
자신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간 은소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레나를 내려다봤다.
그 남자의 가족인가? 아니면 애인?
일단 슬럼가의 주민은 아닌게 확실하다.
평생 고생이라곤 한번 안 해본 듯한 희고 고운 피부결에 가지런한 흑발. 근데 정크타운에서 이러고 돌아다니다간 섹스토이나 매춘부로 오해받기 딱 좋겠어.
하긴, 그러니 이 술집 안에만 있었겠지.
- ······다시는 곱버스 안 타······.
레나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잠꼬대를 웅얼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알아들을 리 만무한 은소는 금세 흥미를 잃곤, 여기저기를 기웃대다 벽에 나있는 무수한 총탄 자국을 발견했다.
벽과 바닥 사이에 말라붙어있는 대량의 혈흔과 곰보처럼 박혀있는 총탄들.
최근에 일어났던 총격전의 흔적인가?
이것도 당연히 그 남자가 한 짓이겠지.
“······미친, 여기서 몇 명이나 죽인거야?”
하레니오는 위험한 놈들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해온 짓들을 보면, 오히려 그 인간이 더 위험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운에선 명확한 목적 없이 호의를 베푸는 사람을 경계해야한다. 단신으로 갱단을 쓸어버리는 무림계 고수가 여기까지 흘러 들어올 만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누군가를 암살하고 도피중인 히트맨이라면 또 몰라도.
괜히 찝찝해진 은소는 몸을 돌렸다.
그때.
스윽-
의문의 검은 그림자가 앞을 가로막는다. 은소는 지겹다는 말투로 그림자를 향해 말했다.
“내려가려 했어. 그냥 궁금해서 잠깐······.”
“누가 올라와도 좋다고 했지?”
“알았다고 응곽아. 내가 미안~”
뒤로 들러붙는 그림자가 귀찮았던 은소가 어물쩍 넘어가려 한다. 하지만 뒷덜미를 잡아채는 우악스러운 손길에 더이상 참지 못하고 성질을 부렸다.
“뭐야, 응곽! 너 미쳤어? 안 놔?”
하지만 상대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왜인지 섬찟한 기분이 든 은소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누군가의 피가 쩍쩍 말라붙어 있는 주먹이 눈앞으로 쏟아졌다.
쿠당탕!
“쯧.”
술집으로 돌아온 나는 한 방에 기절해 나가떨어진 돌대가리를 대충 내버려 두고는, 멋진 애꾸눈 응곽이를 불렀다.
“등평위를 여기로 불러라.”
“으, 은소가 위에서 사고라도 쳤습니까?”
“다른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다.”
“아, 예.”
그렇게 약 한 시간쯤 지났을까.
“어쩐 일로 부르셨습니까?”
의아한 얼굴로 술집에 도착한 삼호문주에게 여상스레 운을 뗀다. 내게 어떻게든 도움이 되어주겠다는 계약을 이행할 때가 이리도 빨리 올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문주. 오늘 나랑 일 하나 해야겠다.”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하레니오와 거래하던 공장이 있다. 작은 시비가 붙어 그쪽 직원 셋을 죽였다. 그런데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직접가서 다 죽이고 와야 마음이 놓일것 같다.”
등평위는 급작스런 내 학살 결심에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영문을 모르는 그는 먼저 술집에 와있던 응곽과 눈빛을 교환하며 연신 헛기침을 했다.
“허어······.”
철선을 얼굴에 부쳐가며 내 얘기를 곱씹던 등평위의 얼굴이 시시각각 굳어가다가 종국에는 심히 어두워졌다.
등평위는 철선을 접어 소맷단에 넣고, 파리해진 안색으로 걱정스레 물었다.
“대협, 대책도 없이 그쪽과 엮였다간 큰일 치를겁니다. 여긴 공권력도 닿지 않고 무엇보다 터무니없는 뒷배를 가진 자들이라···뭐 뾰족한 수가 있으신지요?
”놈들이 짝퉁 산공독을 거래 대금으로 썼더군.”
“모두 죽인 후에 신고하실 작정이십니까.”
“이해가 빠르구나.”
공장에서 나온 놈들이 거래대금으로 지불했다고 말했던 ‘산공독과 몽환향’ 은 분명 사천당가의 진짜배기 산공독을 모조해 만든것이다.
당가는 자신들의 울타리를 침범하는 것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족속들이다. 신고가 들어가면 어떻게든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고 싶어하는 관청의 공무원들이 알아서 수를 내겠지.
메가콥과 엮여있는, 딱 봐도 귀찮은 사건을 떠맡기 좋아하는 공무원은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
당가의 손속은 원체 자비가 없다.
반 바이오라는 불쌍한 기업도 그놈들이랑 제품 특허로 붙었다가 사라져 버렸지.
“마침 발두르 관청에 줄도 있군. 저번에 발가벗겨서 포르노 찍어둔 사내에게 연락 넣어둬라. 몸캠 피싱? 뭐 그런 느낌으로.”
“관청의 말단직 밖에 못되는 사내입니다.”
“뭐라도 하겠지. 공무원인데.”
나는 공장의 셋을 처리할 때 썼던 방진마스크와 피 묻은 겉옷을 꺼내 보였다. 물기섞인 핏물이 겉표면을 타고 뚝뚝 떨어진다.
“오늘 새벽에 바로 출발할거다. 괜찮은 리볼버를 세 정 얻었으니, 총 잘 쏘는 놈으로 셋만 추려놔.”
*
그날 저녁.
찰랑-
까만 망토를 뒤집어쓰고 17번가 술집으로 찾아온 륭의 사무보조, 클로에가 투명한 유리병을 가볍게 흔들며 말한다.
“2레벨급 시체의 혈액에서 추출한 최하급 에센스에요. 용량은 1리터. 가격은 100mL당 10만 크레딧이랍니다.”
옅은 푸른 빛이 감도는 액체가 유리병 안에서 천천히 찰랑인다.
“수수료를 더하면 총 110만 크레딧이 되겠네요.”
나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혀를 내둘렀다.
백만 크레딧이면 발두르 시티 도심에 좋은 아파트를 구할 수 있는 돈이다. 아무래도 정식 유통로를 통해 구해온게 아니라 그런지 프리미엄이 더럽게 많이 붙었군.
“결제 감사합니다. 나중에 또 찾아주시면, 그때는 좋은 차를 대접할게요!”
클로에가 떠나간 후.
찰랑-
용기 속에서 찰랑거리는 에센스를 노려본다. 이 액체가 내 모든 생을 통틀어 가장 최악이었던 좀비에서 뽑아낸 진액이란다. 좀비의 진액이라 생각하니 거액의 크레딧을 지불해가며 구한 영약이라 해도 어쩐지 기분이 껄끄러웠다.
아무튼 제 값어치는 했으면 좋겠군.
나는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틀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에센스를 입에 털어넣었다.
에센스가 목구멍을 타고 천천히 넘어가니 역하고 비릿한 혈향이 코를 찔러왔다.
맛이 쓰레기 같아서 최하급품인가?
그래도 뱉을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역한 맛과 향을 참아가며 진액을 꾸역꾸역 삼켜 넘겼다. 비릿한 혈향은 곱절이 되고, 쓰레기 같은 맛은 연신 혀를 괴롭힌다.
나는 마지막 한 모금까지 다 털어넣은 시점에 가부좌를 틀고 운공을 시작했다. 전생부터 극성에 이르렀던 무선대지신공이 본연의 공능을 발휘해줄 차례였다.
불순물 가득한 에센스가 목구멍을 지나 위에 이르자 신공이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호흡이 느려지고 숨결이 돌덩이처럼 무거워진다. 뱃속에 똬리튼 에센스의 기운이 기맥에 흡수되어 천천히 순환한다.
가만히 눈을 감고 기를 전신으로 돌리자 주변의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오감이 확장되고 전신의 감각이 예민해져간다.
불순물을 걸러내느라 엄습하는 발열과 오한에 온몸에 불이 붙은듯 뜨겁게 달아올랐다가 어느순간 북해에 던져진듯 차갑게 식었다. 그러길 여러 번.
깜빡-
“······.”
천근만근 무거웠던 눈꺼풀이 떠진다.
후우웅-!
허공에 권격을 내지르자 주먹이 시원스레 뻗어 나간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힘있게 만들어지는 궤적에 미세한 권풍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그 뒤로도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상태를 확인해보았다. 오랜 시종 생활로 불균형했던 기운의 중심이 잡혔고, 심장을 휘도는 마나 회로는 더 넓고 단단해졌다.
단전에도 전보다 확실히 묵직해진 내력이 똬리를 틀었다. 못해도 십 년은 운공해야 얻을 수 있는 내공을 최하급 에센스 따위에서 이리도 손쉽게 얻다니. 극성까지 성취를 쌓은 심공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했다지만, 차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적게 잡아도 백년설삼급은 되겠군.
좀비의 몸에서 뽑아낸 영약이 이정도라니, 무언가 느낌이 기묘했다. 중원에서 이만한 수준의 영약은 돈이 있다고 해서 구할 수 있는게 아니었는데, 여기선 크레딧만 넉넉하다면 내력을 쉽게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괜히 전체적인 수준이 높은게 아니었군.’
나는 호흡을 고르며 밖으로 나왔다.
정크타운의 어둑한 밤거리.
- 우웩!
비틀거리며 앞서가던 사람이 길 구석에 엎어져 구토를 한다. 시궁쥐, 바퀴벌레와 같은 타운의 미물들이 몰려든다.
잠시 멈춰서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슬럼가의 층층 구름다리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어두컴컴하다. 전 회차들은 공기가 좋아서 그런지 밤만 되면 별이 놀랄 정도로 많았었는데.
바로 옆 동네가 공장단지라 그런가.
대기의 질이 쓰레기 같은 탓이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정크타운을 배회하다 1번가까지 흘러온 나는, 내친김에 친씨아의 총포상을 찾았다.
탁!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불빛이 새어나오던 총포상 안에서, 나 보란 듯이 조명을 소등해버린다.
불이 꺼진 총포상의 카운터 안쪽.
1층 카운터 안쪽에서 어깨만 으쓱이는 친씨아가 보였다. 리볼버도 팔아주지 않은걸 보면 싸움에 조금도 휘말리기 싫다는 뜻일테지. 나는 융통성이 있는 사내였기에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적당히 발걸음을 돌렸다.
어느덧 밤은 깊었고, 이른 새벽이 되었다.
총을 들고 등평위를 뒤따르는 문도 셋, 그리고 내가 어두운 정크타운 길거리 속에서 걸음을 재촉했다.
무리의 선두는, 방탄복을 입은 루돌프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