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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펑크의 전생자-15화 (15/157)

#15화. 참으로 운이 좋다

#15화.

무엇을 위해 사는가?

마음껏 술을 퍼마시기 위해.

다음 날도 마약을 하기 위해.

돈을 모아서 섹스토이를 사기 위해.

그냥 죽을 용기가 없어서.

조금 머저리같긴 해도, 정크타운의 수많은 주민은 나름대로 이런저런 한심한 이유로 살아간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타운 주민중 한 명이자 완숙한 3레벨의 무인인 삼호문주 등평위의 목표는 ‘상승의 무학’을 얻어 고수로 발돋움하는 것이었다.

젊었을 적 운 좋게 익힌 편법(鞭法)으로 이류를 바라보는 경지에 올랐으나, 어디까지나 한계가 명확한 무공이었고 무인으로서의 성취는 거기까지였다.

그는 다른 이들처럼 언젠가 웨스트 정크타운에 흘러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혈혈단신, 처세와 실력을 적절히 배분해가며 타운에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러다가 전대 삼호문주를 만났고, 조금이나마 출세를 원하는 주민들을 규합해 세력을 만들었다. 기루와 비무 도박장 등의 수익 모델을 만들어 밑바닥 크레딧을 긁어모으자 슬럼가에서 알아주는 집단으로 성장했다.

타운의 다른 집단인 하레니오 갱단이나 라네치아 패밀리처럼 평판이 나쁘지도 않았다.

가끔 시가지에서 구역을 지키기 위해 총격전을 벌이긴 했어도 그 악귀들처럼 주민을 학살하는 일은 없었으니까.

오늘, 그런 등평위의 앞에 귀인이 나타났다.

“있으면서 없다고 그리 앙탈을 부렸단 말인가? 애당초 이 슬럼가에서 이만한 돈을 모아둔 것도 신기할 노릇이군.”

자그마치 남궁의 섬전십삼검뢰를 익히고 있는 사내.

제왕검형(帝王劍形) 같은 가문의 절기는 아니라도 위세 높은 남궁가의 가인들만이 익히는 무공임은 틀림없었다.

남궁세가 출신의 고수가 넷에 업로드한 ‘시체 토벌’ 영상에 보란 듯 등장하는 무공이었으니.

초식의 절반만 익혀도 외곽 슬럼가쯤은 휘어잡을 수 있을 것이다.

쾌속하고 살기가 짙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사파의 무공처럼 보이기도 하기에, 저 먼 수르트 시티에 있는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직접 와서 보지 않는 이상에야 발각당할 염려도 없다.

발두르 외곽의 슬럼가에서 남궁의 검법이 펼쳐지고 있으리라 감히 상상조차 못 할테니 말이다.

삼호문주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혹여 남궁세가의 방계이십니까?”

“그럴 리가 있나.”

문주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시체의 범람으로 천천히 망해가는 세상에, 어디 말못할 사연을 가진 자들이 한 둘이던가? 바라던 목표만 취하면 그만인 것을.

- 반박귀진(返朴歸眞). 지극한 경지의 고수는 오히려 범인처럼 보인다지요? 그 말이 정말이로군요. 기운이 미약해 무공을 펼치지 않으셨다면 전혀 모를뻔했습니다.

- 대협이 얼마나 높은 경지을 밟고 계시는지, 말단 무인인 저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삼호문주의 입에서 듣기 좋은 말이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온다.

“······.”

레반이 보기에 등평위는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듯 했다. 실제로 자신의 내력이 일천하기 그지없기에 저리 느껴지는 걸테지만, 그는 굳이 나서 정정하지 않았다.

“이 등평위, 염치는 있는 놈입니다. 사실 섬전십삼검뢰를 팔아치울 생각은 애초에 없으셨겠지요?”

레반은 무언으로 긍정했다.

자신을 잡아 죽이려는 놈들은 당가만으로도 이미 벅차다. 남궁세가까지 끼어 들었다간 이 몸으로 감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림계에서 알아주는 가문인 남궁의 무공일진대, 엄청난 거금도 아니고 고작 60만 크레딧에 팔아넘길 수야 있겠는가.

대신, 돈 받고 던져주기에 적당한 검법은 있지.

‘과거 유천표국(流川鏢局)의 검법 정도면 적당하겠군.’

유천표국의 검법과 보법만을 익혀 절정의 반열에 오른 표사들이 왕왕 있었다. 재능이 뛰어나지 않더라도 기본기가 단단하기에 제대로 익힌다면 어디가서 맞고 다니진 않을 거다.

레반은 그리 생각을 마치곤 낚싯대를 드리웠다.

“정말 아쉽군.”

“무엇이 말입니까?”

“60만의 두 배인 120만 크레딧이라면 진지하게 생각해봤을 텐데 말이야. 60만 크레딧은 적어도 너무 적어.”

“진심이십니까?”

짧은 순간 삼호문주의 눈빛에 이채가 스쳤다. 그 찰나의 반응을 눈으로 확인한 레반이 헛웃음을 지으며 낚싯대를 수거했다.

“당연히 거짓이다. 많이도 모아뒀구나.”

무림에 발을 들이고 고수를 꿈꾸는 이라면, 상승의 무공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필연적으로 크레딧을 모아 두었겠지.

“···하하, 이거 제가 또 당했군요.”

실망한 표정을 숨겨가며 미소를 짓는 삼호문주. 그를 우묵한 눈으로 바라보던 레반은 다시 입을 열었다.

“120만 크레딧을 내라. 그러면 네게 어울리는 검법을 내어주마.”

“예?”

“섬전십삼검뢰에는 못 미치겠으나, 그것 마저도 네겐 훌륭한 무공일 것이다. 대성하면 절정의 경지에 오를 수도 있을테지.”

레반의 그 한마디에 문주의 얼굴이 숨길 수 없는 기쁨으로 물들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평생을 이류로 살아가던 차에 찾아온 천금 같은 기회인데.

“감사합니다.”

“생각보다 쉽게 믿는군.”

등평위가 침착한 어투로 답했다.

“대협께서 저를 죽이고자 마음먹었다면 내 목은 이미 달아났겠지요. 죽이고 크레딧을 빼앗는게 가장 효율적인데 왜 애써 시간을 낭비하겠습니까.”

레반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사람을 왜 죽여? 나는 마음이 여리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적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역시나 데이터칩은 이놈 머리에 박아넣었어야 했다.

그런 레반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음을 침착하게 가라앉힌 등평위는 호감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대협께서는 때가 되면 이 낡은 정크타운을 떠나시겠지요?

“그렇겠지.”

“저는 아닙니다. 이미 너무 오래 살았지요. 제 모든것이 전부 이 타운 안에 있습니다.”

호로록-

등평위가 커피를 홀짝이며 말했다.

“만약 말씀하신 검법을 제게 팔아주신다면, 대협께서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 모든 편의를 봐 드리는 것은 물론, 다른 집단과 대적할 일이 생기면 삼호문이 최대한 돕겠습니다.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지요.”

“구두 약속처럼 깨지기 쉬운 건 없다.”

“그렇다면 계약서를 쓰시지요. 륭 사무소의 ‘륭’ 선생을 이 계약의 공증인으로 세우면 어떻겠습니까.”

사무라이 륭 사무소.

정크타운에 남은 네 집단 중 하나.

총포상의 친씨아에게 전해 듣기로는.

[ 8번가에 있는 륭 사무소. 이쪽은 건드리지 마. 자극하지 않으면 문제될 일 없는 남자거든. ]

8번가 골목에서 해결사 사무소를 운영하는 륭 사무소의 소장, 사무라이 륭.

몇 년 전 은퇴한 시체 사냥꾼.

어떤 힘을 가졌는지는 불분명. 무림계도 마법계도 아닌 자다. 대형 집단 간의 전쟁이 가장 치열한 도시, 로키 시티의 신동경 출신이라고 했던가.

[ 그 남자 6레벨이야. 그것도 7레벨에 가까운 6레벨. 사실 이런 동네에 있을 짬은 절대 아니지. ]

레벨 6.

초일류 무인 혹은 4위계 마법사.

무인으로서의 진정한 꽃을 피우는 절정(絕頂)의 경지 혹은, 마법사로서 제대로 인정받기 시작하는 5위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자들이 6레벨이다.

삼호문주가 철선을 촤락- 펼치며 말했다.

“저도 일전에 륭 선생과 맺어둔 계약이 있습니다. 제가 비명에 간다면 저를 죽인자를 병신으로 만들어 달라는 계약이었지요. 일종의 보험입니다.”

“그랬나? 내 너를 죽여 확인해 볼 수도 없고.”

“···뭐 그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이 공증은 대협을 묶어두기 위함이 아닌, 제 약속을 지키기 위한 장치라 생각해 주십시오.”

문주가 땀을 닦으며 짐짓 두려운 체한다.

대강 협박하고 구슬려서 돈이나 뜯어 가려고 했더니, 두더지처럼 파놓은 굴이 많다. 머리를 굴리는 꼴이 딱 책사 기질이군.

“문주야. 너 올해로 몇 살이냐?”

“제가 이제 오십이 좀 넘었습니다.”

“새파랗게 어린놈이 벌써부터 약아빠졌군.”

젊은 외모를 가지고 있는 레반의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문주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정크타운같은 슬럼가는 본래 강자존이니까.

“하하하, 아무래도 책임져야 할 입이 많으니 처세술만 잔뜩 늘어나지 뭡니까.”

안마의자에 몸을 묻으며 생각한다.

적당한 무공을 골라 던져준다고 해도 과연 ‘무공은 다운로드받는 것’ 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혀있을 놈들이 이해를 할 수 있을까.

덜컥.

생각이 깊어지는 사이, 여량천이 다시금 콜라 쟁반을 들고 들어온다.

레반은 늘어지는 생각을 끊고 물었다.

“여량천, 무공을 배운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펼쳐 봐라.”

무림계 구파일방 오대세가로 대변되는 메가콥급의 기업과 여타 대기업들도 자신들의 무공을 절대 시중에 풀지 않는다.

마법계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그러니 결국 시중에 풀리는 무공이나 마법 데이터 칩은 아무리 비싸고 좋다고 해봐야 거기서 거기다.

정말 극소수의 경우 쫄딱 망한 대기업이 무공의 구결을 데이터화한 후 블랙넷에서 팔아먹는 상황도 있긴 하나, 곧 다른 기업들의 제재에 꼬리를 말고 사라지기 일쑤다.

게다가 어찌어찌 괜찮은 무공을 다운로드받아 익힌다고 해도 단전의 내공이 경지높은 무공을 받쳐줘야 하는 일.

삼류도 못 되는 무공을 익혔을 것이 뻔하지만, 두 눈으로 확인은 해봐야겠다.

등평위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여 봐라.”

곧.

여량천이 비장한 표정으로 검을 뽑는다.

첫 초식은 나름 기본 검로를 따라 정직하게 움직였고, 뒤로 갈수록 화려하고 복잡해지는 검로.

삼재검법(三才劍法)을 뼈대로 해서 살을 덧붙인건가?

마지막에 이르러선 검끝이 눈으로 따라가기 싫어질 만큼 어지러이 움직인다. 슬슬 무슨 의도로 만들어진 검법인지 알 것 같다.

“대협께서 보시기에는 어떻습니까?”

여량천의 무공 시연이 끝나고.

나지막이 기대하는 듯한 문주의 물음에 솔직하게 평했다.

“뭘 어때, 쓰레기지.”

3회차 시절, 여느 뒷골목에 널려있던 삼류 흑도방파도 이 정도는 아니었겠다.

지금껏 화기의 힘을 빌려 싸운 건가.

“역시 그렇습니까.”

“그래도 삼재검법이 뼈대라 기본 검식은 몸에 배었을 거다. 이제 나머지는 잊고 앞의 세 초식만 취해라. 그게 검의 기초인 삼재다.”

레반이 여량천에게 물었다.

“너는 몇 년간 수련했냐.”

“햇수로 이제 10년째입니다.”

“어떻게 삼류 수준도 못 되는군.”

“······.”

“섭섭하니?”

“아닙니다.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미련없이 버려라. 평생 여기 처박혀 살거라면 사실 그따위 검법으로도 충분하긴 하지. 칼 대신 총을 들고 다니면 되니까.”

10년을 내리 수련했는데 저따위라면 여태껏 무공을 수련한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어차피 총보다도 위력이 못할텐데.

보통이라면 일반인의 범주를 한참 뛰어넘었어야 한다.

최소한 이류는 되었어야지.

“이봐, 문주.”

“결정하셨는지요?”

“나머지 크레딧 전부 가져와라. 여량천 너는 당장 나가서 종이랑 붓 가져오고.”

“아, 예!”

영문도 모른채 허둥지둥 밖으로 달려 나가는 여량천.

레반은 그 모습을 보다가 문득, 스승이었다면 이 미욱한 놈들을 어찌했을까 떠올려보았다.

그냥 한심한 놈들이라며 죽도록 때렸겠지.

그런 정신나간 스승 밑에서 자신같은 신사가 나오다니.

“등평위, 너는 참으로 운이 좋다.”

적당한 무공을 내어주는 대가로 120만 크레딧을 얻게 된 레반은, 자애로운 얼굴로 적당히 웃어보였다.

*     *     *

은소.

‘대체 뭐하는 사람이야?’

전대 문주의 딸인 그녀는, 숨을 죽인 채 문주의 거처를 엿보고 있었다.

‘아까 칼좀 휘적휘적한게 그렇게 대단한 무공이야? 하긴 앉은 자리에서 응곽이를 반 애꾸로 만든걸 보면, 보통은 아니긴 한데······.’

문주님과 사형이 저 남자의 말에 때때로 놀라워한다. 그 바보같은 모습을 볼 때마다 은소의 눈매가 한껏 좁아졌다.

‘윽.’

그녀는 이따금 시선을 느낀 레반이 뒤를 돌아볼 때마다 딴청을 피웠다.

그렇게 두 시간쯤 지났을까.

셋은 화기애애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

심지어 문주라는 인간은 친절히 저 남자를 배웅까지 해준다. 아니 어찌 저렇게 자존심이 없을까? 위장 깊은 곳에서부터 들불이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계약서는 애들 시켜서 최대한 빨리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래라.”

“점심이라도 같이 드시고 가시지요.”

“메뉴가 뭔데?”

“배양육을 건조시킨 육포입니다.”

“너나 많이 먹어라.”

문주의 거처에서부터 문패가 있는 입구까지 몰래 따라간 은소가 둘의 뒤통수에 따가운 눈초리를 보낸다.

저 못된 놈이 삼호문를 나설 때까지, 한참이나 째려본 그녀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당장 달려가서 자존심도 없는 사형을 닦달할 생각이었다.

그러던 그때였다.

“뭐가 그리 궁금하더냐.”

“···!?”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몸을 돌리자.

뻐억-

어찌 반응할 틈도 없이 옆통수에 거대한 충격이 가해진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털퍼덕 허물어지는 은소의 육신.

힘겹게 눈을 돌리자, 틀림없이 입구를 나섰던 레반이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무미건조한 음성이 들려온다.

- 문주, 외공 중에 철포삼(鐵布衫)이라고 있다. 이런 돌대가리에게 잘 어울리는 무공이지.

- 그렇습니까 대협? 이거 꼭 가르쳐주셔야겠습니다.

- 타운에 박치기 공룡 하나 나오겠군.

—하하하하.

아득해지는 은소의 정신 사이로, 간신같은 문주와 레반의 웃음소리가 어우러졌다.

삼호문에 웃음꽃이 만개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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