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우리는 함께 웃었다
#14화.
“몇 걸음이냐.”
“4천 걸음입니다. 형님.”
“4천보 입니다.”
루돌프와 응곽이 동시에 대답한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두 놈 다 눈이 충혈되어 있다.
“좀 더 써라.”
“그러면 5천 걸음입니다. 형님.”
“훌륭하다. 오십만 크레딧이구나.”
나는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 삼호문(三虎門)
겉멋이 잔뜩 든 문패가 걸려있다.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올 만큼 화려하게 치장해놓은 네온유리관 문패. 저게 대체 문패인지 감성주점 간판인지 분간이 잘 안 간다.
나는 똥 씹은 표정의 여량천에게 물었다.
“저 삼호三虎가 무슨 뜻이냐?”
“전대 문주께서 정크타운의 세 마리의 범이 되라고 저렇게 작명하셨습니다.”
흑도놈이 그러면 그렇지.
“전대 문주는 꿈이 참 작았구나.”
“그래도 좋은 분이셨습니다.”
“지금은 죽었나?”
“예.”
“꿈보다 실력이 더 허접했나보군.”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전대 문주를 비하하자, 아까의 살쾡이가 또 버럭하며 끼어들었다. 욱하는 성질을 보면 명줄이 길지는 않을 것 같다.
“우리는 적어도 당신네 하레니오가 했던 것처럼 멀쩡한 사람을 끌고가서 토막쳐 팔아먹지는 않아요!”
“은소 이 년아! 제발 가만히 좀 있어라!”
“읍읍!”
여량천이 다급하게 나서 호통치고, 옆에 있던 다른 문도 놈들은 녀석의 입에 손을 넣어가며 틀어막는다.
하지만 꽤 신선한 내용이었다.
“됐다. 무슨 얘기인지 들어나 보자. 고등어도 아니고 누가 토막을 쳐?”
막혔던 입이 풀린 녀석이 다시금 쏘아붙이며 울분을 토해낸다.
“멀쩡한 인간 납치해다가 강간하고 질리면 토막이나 내서 바이오 기업에 갖다 팔고, 그것보다 더 입에 담지도 못할 짓도 매일 했던 자식들이 우리가 어쨌네 전대 문주님이 저쨌네 함부로······.”
“이제 잘 알았다. 그만.”
더 들어봐야 식상한 얘기겠지.
녀석의 입을 멈추게 한 후, 따라오던 루돌프에게 타이르듯 물었다.
“돌프야. 너 저게 정말이니?”
“아, 아뇨. 저는 안 했습니다.”
“거짓말하다 걸리면 넌 시체가 된다.”
“워, 원래 있던 놈들끼리 벌이던 일입니다. 저는 진짜 부랄 두쪽 다 걸고 가담 안 했어요. 타운 입구에서 삥뜯고 가오좀 잡는 게 다였습니다. 제발 믿어주십쇼 형님.”
“믿겠다.”
“크흑, 감사합니다!”
“사실 네가 그런 짓을 했어도 별 상관은 없다. 더 고통스럽게 패면 되니까.”
“······.”
하레니오 갱단이 재활용 불가능한 쓰레기였던 건 맞는 듯 하나, 이미 고혼이 되어버린 놈들.
나는 은소라는 녀석에게 충고했다.
“앞으로는 성질을 죽이고 살아라. 여자도 패는 사내에게 잘못걸리면 제 명에 못 사는데, 그 사내가 바로 나다.”
“우, 웃기고 있네. 때려 보든가?”
쐐액-!
끝없이 맹랑한 녀석의 얼굴을 향해 벼락같이 주먹을 내뻗었다.
하지만 주먹이 놈을 강타하기 직전.
텁-!
몸을 돌려 허공을 낚아채자 무언가 손에 잡혔다.
손바닥을 펴 확인해보니, 무엇인지 모를 액체가 발린 세침이었다.
“······그걸 잡아?”
경악하는 살쾡이년을 보며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지나치게 까부는 것이 수상하다 했다.
“음.”
세침이 날아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도열해 있는 수십의 사내와 여인이 보인다. 각자 총화기를 한 정씩 들고있는 꼴이 예사롭지 않았다.
본래 총은 그저 들고 있을 때가 가장 효과적인 법.
곧, 그들 사이로 누군가 걸어나온다.
철선(鐵扇)으로 보이는 부채를 든 중년의 사내.
“마취제를 발라둔 세침이오. 그 아이가 워낙 철이 없어서 잠시 재우려고 그랬소.”
차르륵-
그가 철선을 접으며 가볍게 포권했다.
“삼호문주 등평위요. 하레니오 갱단같은 쓰레기들을 청소해주시다니, 진심으로 고맙소.”
젊었을 적에는 꽤 미형이었을 사내였다.
소맷단이 나풀대는 도복에 화려한 피어싱.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문주의 외형과는 꽤 거리가 있어 보인다.
확실히 근본없는 흑도라서 그런가.
그래도 장강 줄기처럼 쩍쩍 갈라진 저 손바닥을 보면, 적어도 수련을 우습게 아는 놈은 아니다. 나는 그리 생각했다.
“얘기는 들었소. 할 말이 있으시다고.”
내가 별말이 없자, 삼호문주가 철선을 부채처럼 흔들며 물어왔다.
나는 용건만 간단히 말했다.
“이리 쉽게 나올거면 직접 찾아오지 그랬나. 덕분에 너는 오십만 크레딧을 내게 생겼다.”
“오십만 크레딧?”
“우리 하레니오 업장의 업주들을 겁박했다지. 보상금에 출장비까지 해서 오십만이다.”
문주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우리 하레니오? 진심이신가?”
“그럼 내가 농담하러 온 사람으로 보이나?”
“······.”
문주는 잠시 내 옆의 루돌프를 바라보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가치가 없는 놈인걸 단박에 알아챘군.
어렵지 않게 내 진짜 의중을 눈치챈 삼호문주의 얼굴이 와락 구겨진다.
“17번가의 권리를 따지고 들 줄 알았더니, 그냥 삥 뜯으러 오신게로군.”
삼호문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루에서 당신이 폭행한 이가 어떤 인물인 줄은 알고 있소?”
“성격 더럽고 젖꼭지가 못생긴 놈이었지.”
“그 못생긴 자가 시티 관청 공무원이오.”
그 진상 젖꼭지가 시티 공무원이었나?
까딱하면 칼 맞는 동네에서 너무 까분다 싶었는데, 믿는 구석이 있긴 했군.
힘 좀 쓰는 공무원의 한마디면 빈민가의 갱단 하나 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닐 테니.
“공직자가 오늘 일을 문제 삼는다면 뒷감당은 할 수 있겠소? 자칫하면 타운이 통째로 갈려 나갈텐데.”
문주는 짐짓 걱정하는 체하며 말했다.
하지만 큰 문제로 번지지는 않을 것이다.
“비디오 안 찍어뒀나?”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요.”
“친절히 옷도 벗겨 뒀잖아. 오히려 나한테 고마워해야 하는것 아닌가.”
“······.”
그렇게 걱정이 됐으면 온몸 구석구석 영상에 담아뒀을 것이다. 대기업 제품을 카피한 짝퉁 마약이나 흥분제같은 것도 옆에 딱 붙여서.
그것이 진정한 흑도의 방식 아니던가.
설령 진짜 관청 공무원이라도 상관없다. 이런 외곽까지 기어오는 핫바지가 끗발이 그리 강할 리 없으니.
“어찌 되었건 힘든 걸음 하셨군. 17번가에서 우리 문도들이 벌였던 일들은 내가 사과하겠소. 용서하시오.”
우회적인 협박이 통하지 않자, 삼호문주는 마지못해 사과를 입에 담았다.
“그리고 입밖으로 내기 우습지만, 이들은 하레니오같은 쓰레기들과 다르오. 그래서 보여주려고 불렀소.”
문주가 주변을 슥 둘러본다.
잔뜩 날이 선 채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문도들.
그들의 손에는 총이 들려있긴 하나, 대부분은 몸을 벌벌 떠는 걸 보아하니 전투 경험은 많지 않아 보였다
문주의 말대로 살인을 일삼는 부류는 아니군.
“보다시피 평범한 이들이 더 많지요.”
“그래. 사람 구실은 하는 이들이군.”
“그러니 서로 이쯤하고 좋게 넘어가는 것이 어떻겠소. 내 당장 5만 크레딧 드리리다.”
“싫다.”
문주의 타협안, 당연하게도 무시했다.
푼돈을 받으러 여기까지 온 건 아니니까.
그러자 문주가 이번에는 도복 소맷단에서 넷 단말기를 꺼내어 흔들었다.
“우린 외부 기업과도 줄이 닿아있소. 그쪽과 연락하는 대포 단말이오.”
“불러봐.”
“······.”
어림없다.
어디 연줄이 닿아있을지는 몰라도 그게 무서웠다면 기루에 쳐들어가는 일도 없었을 거다.
그리고 내가 반 바이오에서 해온 시종 노릇만 10년이다. 정말 제대로 된 형태의 기업이라면, 이깟 돈도 안되는 슬럼가의 일에 끼어들 이유 따위가 있겠는가.
뭐 그래봐야 조그마한 공장급이나 되겠지.
“안 부르나?”
“이렇게 윽박 질러도 오십만 크레딧은 불가능하오. 이 타운에서 그런 거금을 턱 내놓을 수 있는 건 친씨아, 그 여인 정도밖에 없소.”
스르릉-
이러다간 말이 끝도 없이 길어질 것 같기에, 압축도를 뽑아 들었다.
문주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마법사라 들었는데, 칼도 가지고 다니시오?”
그 시선을 무시한 채 말없이 휘둘렀다.
도가 허공을 정직하게 베고 찔러나간다.
누군가의 눈을 매료시킬 만큼 화려하지도, 빠르지도 않은 초식.
그러나 무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검.
삼재검법(三才劍法)의 기본 초식.
“······삼재검법을 익힌 마법사는 처음보는군.”
헛웃음을 내뱉는 삼호문주.
허나 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삼재검법의 기본 삼 초식을 펼친 뒤, 이제는 공력을 한껏 끌어올려 또 다른 검을 펼쳐나가기 시작한다.
쐐액—
섬전처럼 쏘아진 압축도가 여러개의 검로를 그려가고.
살기 짙은 파공성이 연이어 대기를 가르자, 웅성거리던 장내가 일순간 고요해진다.
퍼걱.
몇 분간 원하는 만큼의 검을 펼쳐낸 나는, 휘적휘적 휘두르던 칼을 경쾌하게 땅에 꽂았다.
- 갑자기 검은 왜 휘둘러?
- 싸우기 전에 하는 의식 같은건가?
영문도 모른채 나를 미친놈 취급하는 이들 사이에서, 삼호문주만이 멍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이윽고.
몹시 당황스러운 얼굴로 변한 문주는, 일 분도 지나지 않아 결단을 내렸다.
“감히 내 구역에서 칼을 휘두르다니···.”
격노한 그의 음성이 삼호문의 앞뜰을 쩌렁쩌렁 울린다.
“더는 눈 뜨고 못 봐주겠군! 따라 들어오시오!”
.
삼호문, 문주 등평위의 거처.
방금까지 뻣뻣한 목으로 격노했던 삼호문주는, 거처에 들어오자마자 돌변해 땅에 닿을 듯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제가 고수를 몰라뵀습니다.”
“무섭게 왜 이래. 하던 대로 하지.”
“방금 전 일은 이해해 주십시오. 꼴에 문주인데 다들 보고있는 통에···체면치레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척 봐도 눈치와 처세가 빠른 놈이다.
그러니 별 볼일 없는 본신의 무력을 가지고도 입지를 다졌겠지. 루돌프가 아니라 이놈을 시종으로 썼어야 했는데.
“괜찮다. 흑도의 수장이라면 응당 그래야지.”
“앉으시죠. 이쪽이 상석(上席)입니다.”
나는 상석 자리에 풀썩 앉았다. 문주의 좌석은 안마와 통풍 기능이 탑재된 의료용 전동의자였는데, 꽤나 마음에 드는 착좌감이었다.
무림시절 대문파의 장문인들도 이런 호사를 누리지는 못했을거다.
“기술이 좋기는 좋아.”
“원하시면 하나 주문해서 내드리겠습니다.”
놈이 철선을 부채처럼 살랑살랑 흔든다.
벌써부터 입 안의 혀처럼 굴어대는 중년의 사내에 질린 나는, 고개를 저으며 방 한쪽에 시선을 두었다.
한쪽 면을 전부 차지한 디스플레이에서는 시티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불과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인데요. ]
30초가량의 짧은 영상.
화염에 휩싸인 반 바이오 컴퍼니 상층, 꼭대기에 커다랗게 박힌 Van Bio Co. 회사 로고가 열기에 녹아 땅으로 떨어진다.
[ 발두르 시티의 반 바이오 컴퍼니, 사천당가와의 나노해독제 특허침해 소송에서 최종심 패소. 연방 대법원의 천문학적 배상금 판결에 불복한 잉그리드 반 회장이 사천당가의 임원들을 겨냥한 무차별 폭발테러 후 자살 추정. 현재까지 정확한 경위와 진상을 놓고 조사중입니다. ]
기업 간 소송이나 시시비비의 끝이 무력충돌 사태나 온갖 방식의 테러, 임원진의 사망 등으로 끝나는 사태는 심심찮게 있는 일이다.
하지만 반 회장은 5레벨. 아무리 자존심이 강해도 당가의 임원급을 상대로 저만한 테러를 벌일 만큼의 힘은 없다. 에센스를 잘못 마시고 마나폭주라도 한 건가.
아무튼 저 박살난 현장에서 시티 경찰이 수습이랍시고 대충 시체랑 잔해나 치우는 동안, 사건은 점점 잊히며 흐지부지될 것이다.
결국 반 바이오 컴퍼니의 주식은 휴지조각이 되고, 보유하고 있던 기업체와 자산은 당가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겠지.
마지막으로 마약에 빠진 구제불능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으로 돌아가 사천당가표 특제 마약을 소비하면 된다.
간악하지만 훌륭한 결말이다.
[ 다음 소식입니다. ]
금세 넘어간 화면은 한 거대한 장벽을 비춘다.
[ 7레벨급의 언데드가 프레이야 시티의 제 1방벽을 뛰어넘어와 근접구역의 주민 45명이 감염, 70명이 그 자리에서 사망했습니다. 운디네 코퍼레이션(UDN-Corp)의 전무 6레벨 마법사 ‘로자리오 폴’ 과 긴급출동한 연방 특수부대에 의해 사살되었습니다. 추정 수명은 40년으로, 짐승형의 개체입니다. ]
[ ······이후 연방은, 세계 1위의 장벽보안 기업인 ‘인터네셔널 앱솔루트 코프’ 의 광역 마나프로텍트에 대한 사후조사에 착수했습니다. ]
[ 운디네 코퍼레이션의 한 관계자는 ‘해수 담수화 플랜트 사업 단지에는 피해가 없다’ 며 담수 공급에 차질은 없을 것이라고 단호히 선을 그었습니다. 감염이 의심되거나 확실한 45명의 주민은 당분간 격리 예정이며 일주일 내로 호전증세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장벽 밖으로 추방될 예정입니다. ]
삑-
뉴스가 끝나자 문주가 디스플레이를 끄며 다시 말문을 열었다.
“요새 시체들이 자주 넘어오는 것 같습니다. 마법사들은 언데드라고 부른다지요.”
“드넓은 장벽을 완벽히 보호하는 건 무리니까.”
“하하, 연방이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습니다. 이러다 정말 세상이 망하는 건 아닌지.”
- 문주님. 들어가겠습니다.
커피 쟁반을 들고 들어온 여량천은, 상석에 앉아있는 나와 문주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내 앞에 먼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급속 배양한 원두콩으로 내린, 인위적이고 어딘가 쿰쿰한 향. 맛도 떫을 것이 분명하기에 손도 대지 않았다.
“나는 콜라가 더 좋다. 다시 내와라.”
“···하하, 그럴까요?”
억지로 활짝 웃어보인 여량천이 마지못해 밖으로 나가자, 삼호문주가 자세를 공손하게 고쳐앉았다.
“큼, 워낙 별별 사정있는 사람들이 흘러 들어오는 하류니까 대협께서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잠시 목을 가다듬는 삼호문주.
나는 보았다. 무감정을 연기하는 놈의 표정에서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엿보이는 것을. 어떤 얘기가 나올지는 듣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예, 돈은 어디서나 중요하지요.”
탁-!
『 300,000 Credit / 연방 은행 』
『 300,000 Credit / 연방 은행 』
은행에서 발행한 고액 크레딧 칩이 두 개.
무려 60만 크레딧을 현물로 떡하니 내놓은 삼호문주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구하셨는지는 모르겠으나 아까 그 검법, 저한테 파시지 않겠습니까?”
팔아달라···
그 말에 나도 덩달아 웃었다.
아무리 절반도 못 보여줬다지만.
“남궁세가의 섬전십삼검뢰(閃電十三劍雷)가 개좆으로 보였나? 내가 그 푼돈에 넘기게.”
“역시 60만 크레딧으로는 부족하겠지요?”
“그래.”
“그렇군요.”
—하하하하.
문주와 내가 함께 웃었다.
삼호문에 웃음꽃이 피어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