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퓨전펑크의 전생자-7화 (7/157)

#7화. 누가보면 고수인줄 알겠어

#7화.

잉그리드 반 레나.

누가 인생에서 가장 당황스러웠던 때를 꼽아보라 한다면, 그녀는 지체없이 지금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본사 사무실에서 끊겨버린 기억.

정신을 차려보니 전혀 모르는 장소인 데다, 개인 넷으로는 아버지인 반 회장이 전송한 영상이 도착해 있었다.

3분 가량의 일인칭 시점 영상.

짧은 고해성사와 사랑한다는 말.

그리고.

회장 집무실의 벽을 부수고 들어온 사천당가의 간부들, 아버지가 들고 있던 소량의 붉은 액체를 들이켜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영상은 끝이 났다.

기업 간 소송의 결말을 모를 리 없는 그녀이기에, 어떤 상황인지는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자신들은 당가와의 소송에서 패했고.

회사는 감당이 불가능할 만큼의 배상금을 물어내야 할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천문학적인 배상금은 무슨 수를 써도 갚을 수 없다.

결국 오너 일가는 몰락하고 반 바이오의 모든 사업체는 합법적으로 당가에 흡수될 것이다.

뻔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기에 아버지, 당신께선 법원의 판결에 불복했고 목숨을 태워 가면서까지 대항했다.

5레벨의 마법사가 블러디 에센스까지 과량 투여하며 발악했으니 시종일 뿐인 레반이 자신을 업고 도망칠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거다.

절망적인 현실이었다.

언제 그들에게 발각되어 쥐도 새도 모르게 죽거나 연방 재판장에 서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다.

다만, 어릴 적부터 함께했던 시종인 레반만은 옆에 남아있다. 믿고 의지할 곳이 전부 사라지진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희망찬 생각도 잠시.

- 루돌프 새끼. 넌 뒤졌다.

으지직-

“······!??”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중얼중얼 늘어놓던 레반이 돌연 머릿속의 컨트롤 칩을 강제로 뽑아내는 것이 아닌가!

단숨에 뽑혀 나온 컨트롤 칩은 바닥을 뒹굴고 있고, 관자놀이에선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데도 미동조차 없이 눈을 감고 앉아있는 레반의 모습.

“······.”

기괴한 광경에 압도되어 말을 잃었지만, 레반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놀라지도 말고 건드리지도 말라고 했다.

그래 믿자. 레반을 믿고 기다리자.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건, 가만히 앉아 이 이해 못할 사태가 끝나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한 시간.

두 시간.

그리고 다섯 시간쯤이 지났을까.

레반은 마침내 감고있던 눈을 떴고.

“레나, 시원한 콜라 좀 사다줄래.”

“······??”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자신에게 명령을 내렸다.

“목이 마르다. 가서 콜라 없으면 다른 거라도 사와 얼른.”

레나는 다시금 할 말을 잃어버렸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이지? 지금 이게 정상적인 건가?

아니야. 이건 꿈이 틀림없다. 요즘 잠을 통 못 이뤄서 불면증이 심해진 덕에 이런 악몽이 찾아온 거다.

벌떡!

돌연 호기롭게 일어난 레나가 자신의 양 뺨을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찰싹! 찰싹!

아니나 다를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양 뺨이 얼얼하고 쓰라리며 통통하게 부어올라 열감만이 느껴질 뿐.

아프진 않았다. 정말로 그랬다.

“그러면 그렇지···.”

정말 다행이다. 그냥 평범한 악몽이라서.

휘유-

레나는 그제야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멀뚱히 앉아있는 레반을 바라보았다. 그에 화답하듯, 레반도 평소와 같은 미소를 하곤 입을 열었다.

“콜라 없으면 시원한 물이라도. 빨리.”

*

자그마치 20년인가.

‘상단전을 여는 소득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길었군.’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슥슥-

약간의 여운을 즐긴 후, 더러워진 전뇌 컨트롤 칩을 옷으로 닦곤 주머니에 챙겨넣었다. 나중에 써야 할 곳도 있으니 잘 챙겨 둬야지.

쩌적.

시간이 지나 얼굴에 잔뜩 눌어붙은 피를 대충 떼어낸다. 와중에 묘한 표정으로 날 경계하는 레나가 신경 쓰여 몇 마디를 던졌다.

“레나, 바뀐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

“······바뀐게 없다고?”

곧이 곧대로 믿기는 힘들겠지.

하지만, 이해할 수 있는 일이든 없는 일이든 이미 벌어진 일이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건 레나의 몫. 나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말했다.

“알아서 받아들이고 적응해라.”

“······최대한 노력은 해 볼게. 그런데 정말 어떻게 된 거야?”

“너를 업고 나오다가 계단에서 구르는 바람에 머리를 크게 다쳤다.”

“거짓말에 성의가 하나도 없네.”

자포자기한 레나가 침대에 털썩 눕는다.

이해는 한다.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못 믿을걸.

“아까 집행관 일도 그렇고, 혹시 당가에서 고용한 첩자? 아니면 넷 러너한테 당해서······.”

“그만.”

“···응.”

하기야, 레나 입장에선 저게 그나마 납득 가능한 스토리다.

컨트롤 칩이 장악되어 제멋대로 폭주하는 시종. 뭔가 있을 법한 일이지 않은가.

“아무튼 눈 좀 붙이고 있어라. 난 잠깐 다녀올 곳이 있다.”

“가, 갑자기 어디를?”

다급하게 일어나 내 손을 덥썩 붙잡는 레나.

조막만 한 손으로 얼마나 강하게 붙잡았는지, 손이 저려왔다.

레나는 해명하듯 횡설수설 말했다.

“혼자 남은 내가 도망이라도 치면 어쩌려고?”

“네가 뭐 하러?”

“그야···어···이런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운 상황에는 왜인지 도망쳐야 할 것만 같아서?”

“그래서 어디로 도망칠 건데. 애초에 돈은 있나?”

“크레딧이야 당연히 계좌에······.”

거기까지 말한 레나가 아차한 표정을 짓더니, 잡고 있던 손을 마지못해 놓아주었다. 이미 반 바이오의 오너 일가가 사용하던 크레딧 계좌는 압류되고도 남았을 시간.

그녀는 이제 완벽한 빈털털이다.

“···그럼 너무 늦지는 말아줘.”

“머리좀 식히고 있어라. 금방 돌아오마.”

밖으로 나와 여관 주인장을 찾았다.

우당탕!

내가 카운터 안으로 얼굴을 쑥 내밀자마자, 다급히 선반에서 권총을 꺼내 닦는 시늉을 하는 주인장.

왜인지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이, 이미 돈 냈으면 방은 못바꿔 줘. 솔직히 우리 여관 컨디션 정도면 괜찮은 편이지. 아암! 다른 데는 뭐 다른 줄 아쇼? 사람이 바가지도 써보고 해야 성장하는 거야.”

“난 뭣 좀 물어보려고 온 건데.”

“뭐요?”

주인장은 뻘쭘하게 권총을 내려놓았다.

“진작 말하지. 뭐가 궁금한데? 물어보쇼.”

“그 총, 어디 가면 구할 수 있지?”

*  *  *

개미굴처럼 골목 사이로 엮여있는 슬럼가.

독한 담배 냄새와 기름 냄새, 먼지 냄새가 한데 섞여 코를 간지럽힌다.

여관 주인장이 말해준 대로 좁은 골목길을 따라 정크타운의 가장 깊숙한 구역으로 걸음을 옮겼다.

과거 이 슬럼가가 시작된 곳.

정크타운 1번가.

다른 허접한 상가들에 비해 유난히 크고 넓어 보이는 3층짜리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총과 탄환 모양의 네온사인 간판이 빛을 내고 있다.

《 거너 하우스 》

딸랑-

입구로 들어가니, 가슴을 다 드러낸 시원한 옷차림의 여인이 카운터에 앉아있었다.

여인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날 훑어봤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턱을 괸 한쪽 팔 전체가 사이버웨어.

차가운 강철파츠가 무심하게 빛난다.

평범한 카운터 점원의 인상은 아니라 생각하며 매장 내부를 둘러봤다.

“총을 좀 사려고 하는데.”

“꽤 어려 보이는데 말끝이 짧네.”

“내가 부모 없이 자라서. 미안합니다.”

“풋! 그냥 장난 한번 친 거야.”

“장난이었나? 수틀리면 쏠 것 같던데.”

“어머, 쏘긴 뭘 쏴? 큰일 날 소리 한다. 우린 고객한테 그런짓 안 해.”

“그럼 저 총구들은 신뢰의 일종인가?”

턱짓으로 카운터 뒤쪽 벽을 가리켰다.

먹빛처럼 어두운 벽지와 진열된 물품들 사이사이, 소름 끼치도록 새까만 총구가 내 머리를 겨냥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총구만 하나. 둘. 세 개.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여인이 입을 빼쭉 내밀며 장난스레 웃었다.

“눈썰미 좋네. 티 많이 나?”

“많이는 아니고 조금.”

“그래도 치워줄 순 없어. 손님이 갑자기 날 껴안기라도 하면 큰일이잖아.”

“······.”

“괜찮으니까 걱정말고 마음껏 둘러봐~허튼짓만 하지 말고.”

특이한 여인이군.

더 이상의 잡담없이 매장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1층에서 판매하는 품목은 대부분 단검류나 둔기, 중고 재래식 총화기들인가? 건물이 꽤 크다 했더니 화기 사격장까지 매장 안쪽에 구비해 놓았다.

2, 3층은 더 값비싼 놈들일텐데.

밑바닥 슬럼가 중심에 이만한 규모의 총기상이라···.

“유탄 종류도 판매하나?”

“품절이야. 전부 다 나가고 없어.”

“원래는 그것도 판매한다는 소리군. 대구경 라이플이나 산탄총은?”

“없어. 그런 화기들은 시체 사냥꾼들이 웃돈주고 전부 쓸어가거든. 자기도 혹시 그쪽에서 온 사람이야?”

“아니다.”

“흐음, 그래?”

“지금 2층도 구경할 수 있나?”

“2층은 보증금 1만 크레딧부터 시작이야. 크레딧부터 확인시켜주면 올려보내줄게.”

내 수중에 남은 돈은 4,000 크레딧.

어쩔 수 없이 1층에서 골라야겠군.

어차피 평생 쓸 무기는 아닐 테니까.

“당신 정말 돈은 있는거 맞지~?”

철컥- 철컥-

실실 웃으며 묻는 여인을 무시한 채 총기 몇 개를 집어보다 7.62mm탄을 사용하는 자동소총 한 정과 30발입 탄창 세 개. 두 뼘 길이의 단검 하나를 골랐다.

내가 2회차에서 즐겨 사용했던 무장과 비슷한 구성이다.

“그렇게 대충 골라도 되겠어? 전부 중고품이라서 잘 골라야 할 텐데.”

“평생 같이 살 애인 보는 것도 아니고.”

“시원하네? 합쳐서 9,000 크레딧이야.”

“지금 4천 크레딧밖에 없는데.”

내 말에 여인이 눈살을 팍 찌푸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장난스럽게 꾸며낸 표정이었다.

“손님, 그러면 내려놓으셔야죠?”

“나머지는 외상으로 달아두고 저녁까지 갚지. 내가 어디서 받을 돈이 좀 있거든.”

“농담이야?”

“진담이다.”

“정말?”

“그래.”

“좋아 뭐, 그럼 그렇게 하든지.”

이건 의외로군.

해줄 리 없다고 생각하며 던져본 말인데.

방금까지만 해도 눈살을 찌푸렸던 여인은, 자기가 언제 그랬냐는듯 흔쾌히 외상을 허락했다. 나처럼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여인인가? 이유야 어찌 되었건 잘 됐군.

“대신 약속한 대로 못 갚으면 자기, 죽어도 할 말 없는 거 알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그 정도 거래라면 받아들여야지.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는 주인장이군.”

“그런 얘기 자주 들어. 그쪽 얼굴이 너무 당당해서 한 번 믿어보려고.”

“당당하기만 하면 총을 내주는 곳이었나?”

“이 정크타운에 당신같은 사람은 몇 없거든. 수천 크레딧씩 들고 오는 고객도 몇 없지. 죄다 빚투성이에 술, 마약에 쩌든 인생들이니까.”

“여관 주인장은 권총을 가지고 있던데.”

“여관? 숙박비가 보통 15크레딧이야. 그거 한푼 두푼 모아선 어림없지. 모형 권총이나 딸랑 사뒀으려나?”

“······.”

“얼굴 보니까 바가지 썼구나? 처음 오면 바가지 써주면서 알아가는 거지 뭐.”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마지막에 한 말 빼고는 전부.

여튼, 너무 쉽게 내주는 것 같길래 개나 소나 들고 총을 다니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라 이거지.

“한번 쏴 보고 싶은데. 가능한가?”

“얼마든지. 이 동네 총이란 총은 우리 쪽에서 다 팔아 치운건데, 쓰레기를 팔았단 소리는 나도 듣기 싫어.”

여인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탄환 2개가 꽂혀있는 탄창을 던졌다.

그대로 받아 끼우고 사격장의 표적을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타앙-! 타앙-!

명중.

오랜만에 맡아보는 화약냄새와 강한 반동.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근데 어디다 쓰려고? 외상값 못갚고 죽으면 곤란한데~?”

툭.

카운터에서 내어준 얄상한 총가방에 자동소총과 탄창을 쑤셔 넣으며 대답했다.

“호신용.”

“그 이유라면 권총을 샀겠지. 솔직히 말해봐. 어디랑 시비가 붙은 거야? 여기 갱들 잘못 건드렸다간 평범하게 죽는 걸로 안 끝나.”

말하는 어투로 봤을 때 뭔가 짚이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한번 확인이나 해볼까하는 마음에 여인을 향해 물었다.

“혹시 루돌프처럼 생긴 놈 아나?”

“루돌프?”

“콧잔등에 빨간 장미 문신이 있는 말라깽이.”

“당연히 알지. 얼굴 상처, 걔들 작품이구나?”

“걔들?”

“정크타운에 유명한 사람은 몇 없어. 유명해지기 전에 다들 죽거든. 이름을 날리는 건 대부분 집단이지.”

“놈들 정보좀 알 수 있나? 1천 크레딧. 필요하면 더 가져다주지.”

“아냐. 나도 마침 걔들 싫어하거든.”

도르륵-

재미있겠단 표정을 한 여인이 별안간 커다란 지도를 꺼내어 카운터 유리장에 펼쳐놓았다. 삐뚤빼뚤한 점과 선이 그득한 아날로그식 지도.

추측하기로 이 정크타운의 구조인 듯 싶었다.

“타운에는 크게 5개의 무력집단이 있어. 삼호문(三虎門), 하레니오 갱단, 거너 하우스, 륭 사무소, 라네치아 패밀리. 그 중에 네가 말한 빨간 장미는 하레니오의 일원임을 상징하는 문신. 놈들 아지트는 17번가에 있는 클럽이랑 술집.”

사이버웨어 손가락이 이곳 저곳을 찍는다.

“인원은?”

“단원 스물에 구식 사이버웨어를 덕지덕지 바른 두목이 하나. 그리고 마법사 한 명인데 4레벨급이라는 소문이 있더라?”

“4레벨급 마법사?”

“그래, 당황스럽지? 이런 동네에 4레벨 마법사라니.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객기 부리지 말고 타운을 떠나는게—”

“혹시 중고 화기도 매입해주나?”

내가 말을 중간에 끊고 묻자, 여인은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뭐, 그렇긴 한데. 그건 왜 물어?”

*

딸랑-

레반이 구매한 무기를 챙겨 나간 후.

거너 하우스의 총책임자, 친씨아 블랑키.

한가하고 지루하다는 이유로 직원 대신 카운터를 보고 있던 그녀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냥 평범한 또라이겠지? 아주 지 할 말만 하고 바람처럼 사라지셨네. 누가 보면 엄청난 고수인 줄 알겠어.”

그러자.

누군가 매장 벽을 밀고 나와 묻는다.

“쫓아가서 죽이고 회수해 올까요?”

“아니, 내버려 두고 미행만 붙여.”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따가 몇 명 추려서 하레니오 애들 있는 곳으로 가봐. 17번가에 있는 휴머노이드 바.”

“하레니오 갱단 근거지 말입니까?”

“응.”

카운터에 붙어있는 작은 메모지.

그 남자가 휘날려 쓴 글이 남아있다.

왜 별 쓸데도 없는 내용을 외상까지 걸어가며 꼬치꼬치 캐묻나 했더니···

『 두 시간 뒤, 하레니오의 아지트로 짐 옮길 직원들 보내줄 것. 상태좋은 중고 총기 다수 판매 예정. 』

“얼마나 미친놈인지 확인은 해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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